- 국산악기라곤 피아노·바이올린·기타밖에 없던 시절 해외로 눈을 돌려 국내 음악인들 손에 1만2000여 종의 새 악기를 건네준 사람.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를 위해서라면 해외수선도 마다않는 열정이 오늘의 악기유통 1위 회사를 만들었다.
회사에 도착하면 10층 집무실로 가기 전, 우선 1·2층과 5·6·7층에 자리잡은 쇼룸부터 들러 각종 악기를 만지고 살펴본다. 수억원대의 파이프오르간부터 몇 만원짜리 하모니카까지, 어느 것 하나 정이 가지 않는 물건이 없다.
유명악기 1만2000여 종 공급
민사장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악기를 갖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가장 많은 악기를 파는 사람이기도 하다. 세계 유명악기 1만2000여 종을 공급해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그 이름 석 자와 회사명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조용히 사업만 키웠지 외부에 알려지는 걸 아주 꺼려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여야 하는 경제풍토에서, 우리 회사는 비록 악기지만 외제를, 그것도 대부분 고가품들을 수입해 팔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하지만 그가 외제 악기 수입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980년대 초부터 초등학교에서 1인1기(一人一技)를 장려하는 정책이 시행되자 미취학 자녀를 둔 부모들 사이에 음악 교육 붐이 일었다. 아울러 음악을 전공하거나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피아노, 바이올린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국산악기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전문가용이나 특수악기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그러한 풍토에서 민사장은 악기 수입·유통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 코스모스악기를 세계적인 악기업체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올해는 민사장이 한 우물을 판 지 30년이 되는 해다. 1972년, 아내 정진숙 씨와 단 둘이 시작한 악기전문유통회사 코스모스악기는 현재 임직원 110명의 탄탄한 중소기업이 됐다. 올해 3월4일에는 제36회 납세자의 날 기념 산업포장을 받기도 했다. 2001년 법인세 15억원, 부가가치세 9억6000만원을 성실 납부한 공로다.
올 10월에는 ‘코스모스가와이’ 란 이름으로 첫 자체 브랜드상품을 출시한다. 일본의 세계적 피아노제조업체 ‘가와이’의 디지털피아노를 OEM방식으로 제작, 판매하는 것. 한국인의 정서와 취향에 맞는 기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코스모스악기는 가와이 악기의 국내 독점 공급권을 갖고 있다.
국내 악기 유통 분야에서 코스모스악기는 경쟁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시장점유율을 자랑한다. 피아노· 바이올린을 제외한 모든 악기의 70% 이상이 코스모스악기를 거쳐 판매된다. 지난해 매출액은 378억원. 가와이 외에도 ‘로랜드’ ‘로저스’ ‘피베이’ ‘반도렌’ ‘바하’ 등 유명악기 제조업체의 한국 독점 판권을 갖고 있으며 100여 군데의 악기 및 부품 제조업체와 거래하고 있다. 서초동 사옥과 낙원상가에 위치한 4개 직영점을 비롯, 전국에 12개의 직영점을 갖고 있으며, 6개 지사와 3개 물류센터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음악잡지 ‘The Music Traders’가 세계 악기업체를 대상으로 선정한 200대 업체 중 46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고향은 전남 해남군 황산면이다. 목포와 연결하는 도로가 개통되기 전만 해도 섬이나 진배없을 만큼 후미지고 낙후한 시골이었다. 할아버지 대에는 제법 부농 축에 끼던 집안은 아버지 대에 기울어 중학교도 다니기 힘들 만큼 곤궁한 처지가 됐다. 어린 시절 곧잘 ‘총명하다’는 칭찬을 들었던 그는 공부를 더하고 싶은 마음에 남의집살이를 하러 목포로 갔다.
“한 집에 들어가 머슴처럼 일하며 어찌어찌 중학교를 마쳤어요. 하지만 고등학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상황이었죠. 서울 가면 공부할 길이 있겠지 싶어 17세인가 18세 때, 거기 사는 친구 하나만 믿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그러나 친구 역시 고학을 하던 터라 그를 도와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는 서울역에서 지게도 지고, 용산역 앞에서 장작도 패주고, 때로는 껌팔이, 구두닦기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럴수록 돈을 모아 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은 단단해져 갔다.
“그러다 명동의 한 악기점 일을 잠깐 보게 됐는데 사장님이 절 부르시는 거예요.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냐’시며, 먹이고 재워주고 학교도 보내준다고 하셨습니다.”
월급은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숙식만 해결돼도 좋은데 야간학교까지 보내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성심껏 일했다.
그가 근무한 한국악기(수도피아노사의 전신)는 피아노 부품을 수입해 조립·판매하는 회사였다. 처음 주어진 일은 청소와 심부름. 남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하는 등 남다른 성실성을 발휘한 덕분에 차츰 중요한 일을 맡게 됐다. 나중에는 음악회 티켓 판매며 은행 심부름까지 도맡아 하게 됐다.
주경야독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일하고 공부하며 저축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날 입대영장이 나왔다. 비둘기부대 의무병이 된 그는 베트남 첫 파병부대에 끼어 바다를 건넜다.
“입대할 때 사장님께선, 제대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신임해 주시니 기쁜 마음으로 입대할 수 있었죠. 고생이야 그저 남들 하는 만큼 했고, 오히려 제겐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파병 군인들에게 최고의 즐거움은 고국에서 오는 위문편지였다. 그에게도 수십통의 편지가 날아왔는데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필체가 야무진 것이 성실한 여성으로 보였다. 답장을 보내자 다시 편지가 왔다. 그렇게 1년여 서신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민사장이 제대한 후에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여성이 현재 코스모스악기 감사로 재직중인 부인 정진숙 씨다.
정씨는 지금도 민사장과의 첫 대면을 떠올리면 웃음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때 전 여상을 졸업하고 교학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었어요. 회사에서 단체로 월남 파병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보낸다기에 저도 썼어요. 그런데 저만 답장이 와서 화제가 좀 됐지요. 그렇게 1년인가 지났을 때 저이가 갑자기 회사로 찾아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나오라며 막무가내로 우기는 거예요.”
그때 교학사는 새학기 교과서 준비로 무척 바빴다고 한다. 그런데 웬 새까맣게 탄 군인이 정문에서 “정진숙 나오라”고 냅다 소리를 질러댔으니 얼마나 민망했겠는가.
정씨는 무일푼이었지만 근면한 자세와 씩씩한 행동이 맘에 들어 민사장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제대 후 수도피아노사에 재입사한 민사장이 부장으로 승진한 1967년, 두 사람은 마침내 혼례식을 올렸다. 정씨는 남편 못지 않은 성실성과 경영 수완으로 오늘의 코스모스악기를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신혼여행 후 주례를 서주신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목포에 내려가 지점을 맡아 운영해 보라는 제안을 하시더군요. 사장님이 제 집사람을 잘 봐 주셨어요. 그래서 집사람은 지점 관리 및 경리를 맡고 저는 영업을 맡아 두 사람 손으로 일을 꾸려가게 됐지요.”
사글세방에서 시작한 신혼이었지만 민사장은 그렇게 신나고 행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루 세끼 아내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좁지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결혼 전 그의 잠자리는 피아노 창고였고, 마땅한 자리가 없어 피아노 위에 몸을 누인 날도 부지기수였던 까닭이다.
목포지점의 실적이 오르자 두 사람은 대전으로 옮겨갔고, 다시 부산지점을 맡게 됐다. 그즈음 문제가 생겼다. 수도피아노사의 경영이 악화된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고민 끝에 회사를 나와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맨주먹으로 무작정 상경한 지 13년 만의 일이다.
“두 사람이 월급을 받는다지만 큰돈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쓰는가 아니겠어요. 아끼고 아껴 마련한 사업밑천이 좀 있어 쉽게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1972년 처음 문 열 때만 해도 명동의 코스모스백화점은 인기가 좋았다. 악기는 고가제품이라 부유층을 겨냥해야 했고, 그러려면 명동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처럼 많은 손님이 들지 않았다. 백화점 영업 자체가 시들했던 것이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탓에 민사장은 영업을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다행히 수도피아노사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며 알게 된 분들이 많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두 절 잘 봐주신 덕분에 장사가 잘됐죠. 사업 시작 후 한 해도 적자를 보거나 매출액이 전해보다 떨어진 적이 없으니까요.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늘어났는데 아무래도 제가 운이 좋았던가 봅니다.”
결정적인 성공 요인은 ‘통기타 붐’이었다. 1970년대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시기였다. 통기타 수요가 급증해 점포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지금의 낙원상가 2층에 따로 통기타 전문 매장을 열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악기 소매상가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낙원상가 2층은 텅 비어있다시피 했습니다. 제가 점포를 열 무렵에 한 3개 정도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제가 낙원상가 터줏대감인 셈이지요.”
민사장은 서초동 사옥으로 옮긴 후에도 세적(稅籍)을 낙원동에 그대로 둘 만큼 이 낙원상가에 애착을 갖고 있다. 지금도 그곳에서 종합악기, 드럼, 키보드, 기타 등 4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 민사장에게 낙원동은 마음의 고향이다.
1976년 명동 매장을 정리한 민사장은 낙원상가 매장 운영에 전력을 기울였다. 1978년,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악기 수입자유화 조치가 단행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양악기 중 국산품이 존재하는 것은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정도였다. 나머지는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량 반입이 금지돼 있어 소비자나 판매상 모두 어려움이 많았다.
“악기 판매만 해서는 질적 도약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수입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경제성장이 계속되는 한 전문악기의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고 예상했죠. 그래서 악기 수입 사업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한국 시장의 잠재력을 높이 산 외국 유명 악기상들도 그의 상담 요청에 호의적으로 응했다. 선두주자였던 만큼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982년에는 일본 야마하사의 한국 독점 공급권을 따냈고, 때마침 이루어진 통행금지 해제로 밤업소가 호황을 누리면서 야마하 상표의 전자악기 판매로 큰 수익을 올렸다.
“물건이 달릴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그때는 특히 전자악기는 모두 외제를 쓰던 시절이었거든요. 공급자가 많지 않으니 줄 서서 기다릴밖에요. 악기를 사준 밤업소에 인사치레하느라 술 팔아주러 다니는 것이 고역이긴 했습니다만….”
당시는 소주 3병을 마셔도 끄떡없었지만 지금은 한 병이면 족하다며 민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1990년 드디어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회사 규모는 여전히 오퍼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민사장은 코스모스악기를 명실상부한 대규모 악기유통전문회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음악인들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체계적인 애프터서비스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악기 공급이었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자연히 소비자들은 불만에 차 있었고 판매상들에 대한 신뢰도도 낮은 편이었죠.”
민사장은 자사를 통해 판매된 악기가 아니더라도 코스모스악기가 독점공급권을 갖고 있는 브랜드일 경우에는 모두 애프터서비스를 해주었다. 전문교육을 받은 직원도 해외연수를 보내, 더 수준 높은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못 고치는 것이 생길 때는 산지로 보내거나 외국 기술자를 초빙해서 수리를 마무리했다. 현재 관악기·일반 전자악기·오르간·피아노 등 4개 부문에 애프터서비스 요원만 20명을 두고 있을 정도로 코스모스악기의 사후관리는 수준 높고 신속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플루트나 오보에 등 수요가 많지 않은 악기는 기본적으로 주문생산 체제이므로 회사에 한국인의 체격과 취향에 맞도록 제작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좀더 대중적인 악기들은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대량 구입하는 회사는 외국사에 ‘한국인에 맞게 만들어달라’고 당당히 주문할 수 있지요. 그래서 다 같은 가와이피아노라도 일본에서 팔리는 것과 우리나라 판매용은 좀 차이가 있습니다.”
‘코스모스악기는 믿을 만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매출액이 급속히 올라갔다. 외국 유명회사와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마진을 없앤 덕분에 코스모스악기와 거래하는 대리점 수 또한 나날이 늘어갔다. 특히 파이프오르간이나 신시사이저 등 고가 제품들과 전문가용 악기는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민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악기 및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방법으로 소비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했다. 또 매년 외국의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 연주회를 개최해 음악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코스모스악기 서초동 사옥의 분위기는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다. 쇼룸이나 사무실은 물론 직원들의 차림새도 나무랄 데 없다. 악기를 다루는 회사인 만큼 자유분방하고 시끌벅적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전직원이 정장 차림으로 근무하는 것이 이 회사의 규칙이다.
“저는 단정한 것을 좋아합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이젠 화려한 색상의 셔츠나 머리 기르기도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몇 년 전만 해도 와이셔츠의 경우 흰색과 파란색 외에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수성가해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직원들에게 단정한 차림과 친절 의식, 성실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술 냄새 풍기며 출근하는 직원, 구두가 더러운 직원 등 자기관리에 철저하지 못한 사람들을 그는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1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제가 회사일을 가르쳤습니다. 전 아들이 지각하면 며느리까지 불러 함께 혼냅니다. 외아들이 건방져질까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를 들곤 했지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미국에서 MBA 과정을 마친 후 일본 게이오 대학원을 졸업한 아들은 현재 부사장직을 맡고 있다. 역시 미국 유학파인 딸은 얼마 전까지 그가 데리고 있었는데 최근 음향관련 벤처기업을 차려 독립했다.
자기관리에 엄격한 데다 성격 또한 다혈질이고 일할 때는 쉴 새 없이 밀어붙이는 불도저형이지만 직원들에게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다. 코스모스악기에는 오래 근무한 직원들이 유난히 많다. 25년, 27년씩 근무한 직원이 있을 정도다. 정년퇴직한 직원 중 세 사람은 계약직으로 재입사해 일하고 있다. 최고령이 67세나 된다. 코스모스악기의 정년퇴직 연령은 60세. 처음에는 55세였으나 58세로 늘렸고 최근 60세로 연장했다.
“제가 좀 보수적이고 일을 독하게 시키는 편인 만큼 근무 외적으로는 직원들에게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점심식사는 되도록 직원들과 함께하고 대우도 업계 최고 수준을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직원들 입장에선 부족한 점이 많겠지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회사에 헌신하는 직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법 탄탄한 기업의 사장이지만 그는 3년 전에야 골프를 배웠다. 지금도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얼마전 자전거 한 대를 구입했다.
가톨릭 신자인 민사장은 지난해 경기도 양주군에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무료양로원을 지어 성빈센시오수도회에 기증했다. 양로원 운영에도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이런 방식으로나마 달랠 수 있어 다행이라며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민사장 부부는 신혼여행을 해남의 선친 묘소를 찾는 것으로 대신했다. 선친에게 눈물의 큰절을 올리며 ‘돈을 벌면 꼭 좋은 일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악기유통업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코스모스악기지만 민사장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가 창립 30주년 인사말에서 ‘2002년은 다시 시작하는 해’라는 점을 강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외국의 유명 악기제작사들이 국내 시장에 직접 뛰어드는 등 경영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년간 저희가 독점 공급했던 야마하가 내년부터는 직접 판매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국내에 야마하의 명성을 심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우리로서는 결코 유쾌한 뉴스가 아닙니다만, 어쩌겠습니까.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 이상 대책을 마련해야겠지요.”
민사장 앞에 놓인 또 다른 도전은 올 10월로 예정된 ‘코스모스가와이 디지털피아노’의 성공 여부다. 디지털피아노는 판매 신장 가능성이 무한한 품목이므로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민사장의 판단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음악회가 열릴 때면 가보지 않아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는 민명술 사장. 음악회에서 사용되는 악기 대다수가 그의 손길을 거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알아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악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