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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넘고 ‘월드컵’ 거쳐 ‘02년 신체제’로”

최상용 전주일대사

“‘교과서’ 넘고 ‘월드컵’ 거쳐 ‘02년 신체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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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어떻게 움직였습니까.

“일본 문부성에는 관련 단체를 지도하는 ‘지도요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도요강 중에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어렵게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인국(隣國, 이웃나라) 조항’이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표기된 역사 왜곡은 인국조항을 발동해 고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부성이 발동할 수 있는 인국조항은 강제력이 있는 강제조항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부성은 인국조항을 발동해 137군데를 수정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137군데나 고치라고 지시하는 것은 사실 검정 자체를 포기하라는 뜻인데, 새로운 역사교과서 모임은 검정 통과 자체를 목적으로 했으니 내용을 수정해 검정을 받아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업무 협의’라는 명목으로 일시 귀국해 잘 나가던 한일관계가 2∼3달 정체되었습니다.”

-그러나 검정 과정에서 수정됐다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도 우리를 분노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는 한일합방을 할 때 조선인 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물론 엄격히 보면 일진회 같은 한줌도 안되는 매국노들이 합방에 찬성했으니 합방을 받아들이는 조선인이 있었다는 표현은 사실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한 일진회조차도 강압이나 회유를 받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서 25군데, 다른 역사 교과서에서 10군데 등 도합 35군데를 더 고치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일합방을 받아들이는 조선인도 있었다는 문구는 삭제되었습니다.

그 교과서에는 ‘일본은 신라시대 한반도에 복속국을 두었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식민지’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무가(武家)정권을 수립한 에도시대(1603∼1867) 초기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일본에 문화를 전달해주는 전수자(傳授者)였는데 복속국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한국을 짓밟는 것이라고 항의했고, 결국 그들은 복속국이란 말을 ‘정치적 영향력’이란 표현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국 지식인 중에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교과서도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도 솔직해지자는 의견이 있는데요.

“우리의 역사 왜곡 문제는 이미 산케이(産經)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 왜곡을 지적하는 만큼 우리도 스스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점검하면서 상대를 비판해야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항일(抗日)이든 친일(親日)이든 먼저 지일(知日)부터 한 후에 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로 삐걱대긴 했지만 한일 양국간 교류는 확대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한일 교류사는 일본의 관점에서는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황실 중심의 교류사입니다.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옛 칸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을 이임할 때 저희 부부는 천황 부부와 20여 분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제가 ‘천황의 역사 발언에 대해 한국내의 반응이 좋습니다’라고 하자, 천황은 ‘사실인 걸요…’라고 하더군요. 칸무 천황은 일본에 율령제도를 도입한, 일본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천황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한반도를 거쳐 중국식 율령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둘째는 세종 11년(1429)부터 18세기까지 계속된 조선통신사 등을 통한 교류입니다. 거의 선비들로 구성된 통신사 사절단은 대개 300∼500명으로 편성돼, 6개월에서 1년까지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현대의 정보시대에도 500 여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간다고 하면 톱뉴스일 텐데, 교통수단이 열악했던 시절에 500여 명이 일본에 갔으니 얼마나 큰일이었겠습니까. 일본에 도착한 후 이들은 각 번(藩)의 대접을 받으며 처음에는 교토, 도쿠가와 이후에는 도쿄까지 갔습니다. 이때 이들이 유숙하던 객사에서는 각종 문화교류가 빈번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선진문물을 접하는 대단한 행사가 아닐 수 없었지요.

셋째가 식민지 시대의 교류로, 우리로서는 가장 비참한 기억입니다.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전수자인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데 대해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낍니다. 그러다보니 흔히 한일 교류사 하면 식민지 시대의 교류만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 천황에 영양을 끼친 사실과 조선통신사 등을 통한 문화 전수자로서의 교류사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는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계기로 한 최근의 교류입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총리 시절 이래 양국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한일공동연구포럼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월드컵이 열리는 올해에 양국 정상이 ‘국민교류의 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올해를 ‘한일국민교류의 해’로 정해 교류를 더욱 확대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일간에는 하루에 일본에서 7000여 명, 한국에서 3000여 명이 각각 상대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1965년 국교를 정상화한 직후 1년간 양국 사이를 오간 사람의 숫자가 1만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하루에 그만큼의 사람이 양국 사이를 오갑니다.

요즘 일본의 20대 사이에서는 한국 선호도가 70%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김이나 김치를 맛보기 위해, 간단한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 대한 차별의식은 대개 공교육보다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사교육에서 형성됩니다. 공교육에서는 아무래도 특정 나라를 비난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일본 가정에서는 한국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이 줄어들고 있어요. 양국 국민들 간의 교류는 더욱 늘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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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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