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어린아이의 얼굴을 가진‘달마대사’

  • 허문명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입력2007-01-23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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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평론가 김병익씨가 몇 년 전 남미에 갔을 때 일이다. 페루의 한 문학 행사에 참여했던 그는 당시 소회를 ‘페루에는 페루 사람들이 산다’는 산문집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들(남미 사람들)에게 있어 한국이란 발전되었지만 경제적 동물 이상의 나라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이곳 문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네들은 한국에 대해 대우와 현대를 아는 정도로 끝나지만 우리는 당신네들의 경제를 모르는 대신 네루다를 알고 존경한다. 이 잘못된 거래는 해소되어야 한다.”

    남미에 가면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할 만큼 한국이 무척 커 보인다. 칠레의 산티아고에 굴러 다니는 승용차 넉 대 중 한 대는 한국 자동차고 대우는 페루에서만 한 해 5000대의 자동차를 판다고 한다. 안데스 산맥의 오지인 푸노 거리에 티코가 돌아다니고 아마존의 정글도시에서도 효성의 오토바이를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공항에는 삼성 LG의 광고가 커다랗게 걸려 있고 국도변에는 현대와 대우 혹은 금호 타이어의 선전탑까지 서 있으며 산티아고의 진열장에는 소니와 함께 LG 텔레비전이 비싼 값으로 진열되어 있다. 한국인들은 다른 숱한 나라들, 대륙들과 마찬가지로 태평양을 마주하여 그림자가 서로 반대로 지고 별자리가 전혀 다른 이 남미의 나라들에도 그 손길을 뻗쳐 휘젓고 있고 한국 상품들이 리마의 우범지역을 쑤시고 다니고 고급 식당의 시설품으로 장식되고 있으며 그런 움직임과 물건들을 통해 한국이 다른 역사와 인종과 언어 속에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고유의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어떨까? 불국사와 석굴암,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한글과 김소월을 그들은 모른다.

    한국정신의 부활

    ‘세계 속의 한국’도 예전 같진 않지만 한국인 하면 경제 동물을 떠올리고 한국하면 삼성이나 현대 대우만을 떠올리는 세계 사람들의 시각은 이해할 만하다.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는 신흥 졸부들이 속출하고 너도나도 주식시장으로, 코스닥으로 몰려가고 경제와 돈만이 21세기의 키워드가 되는 요즘 현실에선 문화와 정신을 거론하는 일조차 낯설다. 심하게 말해서 불교 유산을 비롯한 5000년 문화 전통이란 흡사 6·25 때 고생담 정도에나 비유될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기자는 올 여름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한국 정신의 부활을 경험했다.

    다름아닌 미국 하버드대학 옆 케임브리지 젠센터(Zen Center)에서였다. 그곳은 한국 불교의 선승 숭산(崇山) 행원(行願) 큰스님이 1970년대 후반에 세운 참선방이다. 4층짜리 아담한 건물을 사서 만들었다는 이 선방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석굴암 사진이 눈에 띈다. 방 정면에는 큰 불상이 앉아 있었고 옆 벽면에는 경허(鏡虛), 만공(滿空) 등 한국 선불교의 맥을 잇는 고승들 사진이 죽 걸려 있었다. 복도 곳곳에는 한국도자기와 나무원앙새 등 메이드 인 코리아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다. 실내는 모두 방석을 깔아놓는 좌식(座式)으로 꾸며졌으며 입구에는 큰 신발장도 눈에 띄었다. 언뜻 보아서는 한국인지 미국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하버드와 예일대생들을 비롯, 인근 보스턴의 샐러리맨 100여명이 오가면서 참선수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곳에서 60명 정도는 아예 먹고 자고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리고 참선수행과 일상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서 최근 미국에 선풍적으로 일고 있는 불교 열풍을 새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그 열풍 한가운데 한국 불교가 서 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한국 불교를 세계화한다는 것은 곧 한국 정신을 세계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김병익씨가 지적했던 ‘불공정한 거래’가 이제야 해소되는 것 아닌가 하는 희열까지 느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화계사 조실 숭산행원 선사.

    요즘 노자사상의 전도사로 나선 도올 김용옥 선생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최근세 조선 선종(禪宗)의 종맥(宗脈)을 따지자면 경허 만공의 거맥(巨脈)을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에 우리 귀에 익숙한 고승 대부분이 이 경허―만공맥의 문하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만공 문하 고봉의 수제자로 숭산 행원이라는 인물이 있다. 내가 다녔던 한국신학대학 뒤켠 물 건너 수유리 우이기슭에 있는 화계사의 큰스님으로서 참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숭산 스님을 하버드 다닐 때 케임브리지 어느 허름한 미국집 안방에서 만났다. 내가 숭산 스님을 만나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할 정도였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들 대강(代講)을 하고 있을 때 학생 중에 한국 불교 전공을 지망하는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그 학생 이름은 베키였고 그녀는 하버드 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대학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도올이 미국에서 만난 ‘쑹싼쓰님’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쓰님’에 대한 존경은 절대적이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번 ‘쑹싼쓰님’을 만나 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 ‘쑹싼쓰님’이란 분이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딱 정해진 날만 케임브리지 젠센터(하버드대와 MIT 사이에 숭산스님이 세운 절)에 오셔서 달마 토크(Dhar-ma talk·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까 그때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키 말에 따르면 ‘쑹싼쓰님’ 달마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 학생 수백명이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적(邪敎的)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에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디일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무적 김용옥도 이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 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임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구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 동사 주부 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시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콩글리시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 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 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김태정 전 검찰총장이 구속된다는 뉴스로 시끌벅적하던 지난 12월4일 토요일 오전. 기자는 서울 수유리 화계사로 숭산스님을 만나러 갔다. 과연 그는 동자승처럼 환한 미소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낯익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반겼다. 흔히 고승 하면 연상되는 위압감이 그에게는 없었다. 6개월 전 화계사에서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보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여독과 지병인 당뇨병이 겹쳐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힘이 넘쳐 흘렀다. 이야기 내내 그는 너털웃음을 여러 번 터뜨렸고 시종 밝은 미소로 인터뷰에 응했다.

    “과밀인구가 문제의 근원”

    이날 인터뷰는 숭산 큰스님의 미국인 제자로 큰스님 비서를 맡고 있는 무심 스님의 안내로 큰스님 방에서 이뤄졌다.

    ―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요즘 몸이 좀 시원찮아서.”

    ― 요즘 괜찮으세요?

    “예,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요.”

    ― 이제 2000년이 며칠 안 남았다고 세상이 들썩들썩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는 이 시점에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에… 우리가 2000년, 2000년 하는 것은 인간 생각을 중심으로 카운트해서 2000년인데, 불교 원리로 따져 볼 때에는 본래 시간 공간이라는 게 없는 것이거든. 그런데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1년, 1년 규정한 것이 2000년이야. 따지고 보면 2000년도 예수님 탄생시작을 기준으로 해서 2000년이지 우리 불교로 따지면 2500년이고 단군으로 따지면 4000년이라. 그러니까 뭐 꼭 2000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없는 거여. 다만 사람들이 어쨌든 새로운 세기니까 2000년대에는 무슨 변화가 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변화는 이미 시작됐어. 소련이 붕괴됐잖아. 이제 공산주의 민주주의하는 것이 다 무너졌어. 그 얘기는 뭐냐, 사상이 없어졌다는 얘기야. 인간이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렸어. 요새는 전체가 다 ‘경제’‘경제’해요. 경제는 개가 똥덩어리를 좇아 가는거나 마찬가지여. 개가 똥덩어리를 좇는 거나 사람이 ‘경제’‘경제’ 하는 거나 똑같단 말이야.

    그러면 2000년대에 무엇을 할 것이냐. 우리 방향을 찾자 이거여.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을 좀 찬찬히 봐야혀(이 대목에서 그는 약간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이 땅에 인간이 너무 많이 살고 있는 게 문제의 근원이 아닌가 해. 1945년 광복하던 해 전체 지구 인구는 한 20억 됐어. 그런데 겨우 5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오늘날은 60억이나 된다구. 수천년 동안 인간 역사 중에서 이렇게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때는 없었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게 하나도 없어. 어떤한 원인이 있었기에 갑자기 이렇게 인구가 팽창했느냐. 이것을 알아야 해.

    그저 현상에만 급급해서 ‘돈’‘돈’ ‘경제’‘경제’ 하지 말고 사회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에 이 지구상에 평화란 것이 돌아와. 우리 인간은 지구에 살면서 너무 독재가 심해. 동물을 죽이고 산야를 훼손하고 우주에 로켓 쏘고 대기오염시키는 등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제일 악질 동물이라. 그런데도 아직 각성을 못 하고 있어. 우리가 나쁜 사람들한테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욕하는데 그건 사람행동이 개 소 말 같아서 하는 말이야. 동물이나 다름없거든. 이 시대에 인간이 좀더 각성을 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인간 사회를 리드하는 것이 우리 같은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 아니겠나.”

    ―갑자기 인구가 늘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영혼, 즉 정신의 에너지가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몸이 죽는다고 함께 죽는 것이 아니여. 매일매일 이 세계에서 수십만 수백만 동물이 인간의 먹이로, 놀잇감이나 액세서리 재료가 돼 한꺼번에 죽어간다구. 동물의 몸이 죽으면 그 순간 동물의 의식은 몸에서 떨어져. 이 세상의 인과관계는 항상 명확해. 이 죽는 동물들 중에서 0.0000001%라도 인간으로 환생한다면 이건 엄청난 이야기야. 이건 불교 얘기가 아니라 과학이야 과학, 물리학이라구.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기를 별로 즐겨 먹지 않았어. 아시아 사람들은 1년 가야 한두번, 끽해야 명절 같은 날 겨우 고기구경을 했다구. 하지만 요즘엔 하루에도 몇 번씩 고기를 먹어. 서양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사람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라구. 사람들이 동물의 의식을 갖고 있어. 그들 마음속엔 인간과 동물의 의식이 섞여 있다구. 그래서 더 많은 폭력이 생겨나고 서로 싸우고 하는 거여. 원래 우리 마음은 순수하고 맑지. 조금 욕심이 있어도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구. 하지만 동물은 욕심을 지배하지 못한다구. 이것이 고통을 만들어 내는 거여.”

    ―옛날에는 상상도 못 했던 범죄가 나타나고 맘에 안 들면 총으로 사람 죽이는 게 예사인 현대사회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옛날에는 땅에다 동그라미 그려놓고 죄인한테 너 여기 가만 있어 하면 있었다구. 벽이 없어도 되고. 요새는 아무리 높은 철창으로 가둬놓아도 사람 죽이고 감옥소에서 나오는 시대라고. 또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요. 이게 동물의 마음이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여자 제자 중에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던 이가 있었어. 어느날, 선방으로 그 여자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으니 빨리 병원으로 와야 한다는 거여. 그런데 그 여자는 ‘뱀을 돌볼 사람이 없다’고 안 가더라구. 그런데 며칠 후 뱀 한 마리가 병이 들었어. 그러니까 난리가 났어. 어머니가 아프다고 했을 때는 눈도 깜빡 안 하던 사람이 뱀이 병 나니까 병원을 찾아간다, 수의사를 찾아간다 법석을 떨더라구. 그 여자 의식은 인간보다는 뱀과 더 친한 거여.”

    ―불교에서는 이 세상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안에 있는 참자아, 본성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요.

    “본성품을 찾는 것은 별것이 아니여. 우리 생각을 쉬는 것이여. 우리 머릿속에선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이 생각이란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고. 그런데 원래 마음이란 것이 없는거여. 내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내 맘을 만들어낸다 이 말이여. 우리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아퍼짓 싱킹(opposit thinking), 즉 상대적인 생각이여.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온다 간다 모두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만 진리인 상대적인 생각이여. 우리가 보는 세계는 모냥(모양)과 이름의 세계여. 그 세계는 자꾸자꾸 변해. 우리는 그 상대적인 생각을 없애서 본체로 돌아가야 혀. 그렇게 되면 우주의 본체나 인간의 본체는 하나가 된다구.

    그 본체로 돌아가는 공부를 하는 것이 신앙심이여. 기독교나 불교나 다 본체로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공부여. 본체로 돌아가면 대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고 그러면 (배를 두드리며) 이 센터가 생겨.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이거여.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다 진리 아닌 게 없어.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고 설탕은 달고. 우리는 진리 속에서 살면서 진리를 몰라. 말로만 진리 진리 하지 진리가 뭐냐 하면 몰라. 허허허. 진리를 깨달아 대자연과 하나 되는 공부, 그것을 수도라고도 하고 신앙이라고도 하지. 이 대자연과 하나가 됐을 때 진리도 하나가 돼. 그럴 때 대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지. 그러면 이 진리가 하나될 때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게 중요한 포인트여.

    우리가 수도를 하고 진리를 찾는 목적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여.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고. 그것을 보살행이라고 하는 거여.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고 하고. 어느 종교에서나 다 사랑을 얘기하지만 참말로 중생을 위한 사랑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과 생물에게 뻗어나가야 혀. 그 중생들을 위해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혀. 그것이 참사랑이요 참진리요 옳은 길이라 이 말이여.”

    ―스님께서는 그 본성을 과일의 ‘씨’에 비유하셨지요.

    “과일이라는 것이 말이지. 봄에 꽃이 펴서 쬐그만 열매가 된다구. 그 열매가 가을에 잘 익어서 색깔이 붙게 되거든. 노랗고 빨갛게 되는데 색깔이 좋다고 해서 다 익은 게 아니여. 말랑말랑 맛이 들어. 맛이 들 때 나무에서 뚝 떨어지면 썩는다구. 이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돼 있어. 우리 인간들이 최고로 발전을 한다고 하지만 최고로 발전을 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여, 썩는다는 증거라고. 썩어 문드러져 뚝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썩어 없어진다구. 그걸 말세라고 하지. 말세가 가까이 왔어.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말이지, 귀신들이 나와서 막 설치는데 이제 그런 시대가 온다구. 지금부터 50년 후 100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정신세계하고 과학의 세계가 싸움을 벌여. 그러면서 인간사회가 망하는 것이지.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정(人情)이 많이 없어지는 것이지. 말세가 반드시 온다고. 와요.”

    ―그럼 무서워지겠네요.

    “하하하.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센터가 탄탄하면 불 속에 들어가서도 문제가 없어. 참선혀야 혀 참선. 과일이 썩어도 그 속에 있는 ‘씨’는 다시 땅으로 들어가 싹을 내잖아.”

    미국사람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많은 사람이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는데 왜 세상은 이 모양이에요 ?

    “그 사람들은 말로는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거여. 정치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한다 국민을 위한다 하지만 ‘나’ ‘나’ ‘나’만 자꾸 올라가. 죽을 때까지 ‘나’ ‘나’ ‘나’ 하다 죽는 거여. 정작 자기자신은 모르면서 말이여. 본래 불교에서는 나가 없는 거여. 무아를 깨달을 때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거여. (옆에 앉아 있는 무심 스님을 가리키며) 우리 무심 스님 이름처럼 무아라 이 말이야. 허허허.”

    ―그런데 요즘 교육은 ‘나’를 강조하는 교육이잖아요. 배워서 남 주냐 하는 말도 있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그렇지. 교육이 잘못됐어. 요새 학교에서나 모든 사람들이 강의하는 거 들으면 뭔가 절름발이여. 옛날엔 수신(修身)이란 것이 있었는데 요즘은 수신이란 것이 없어. 지식만 자꾸자꾸 높아져. 머리는 커지는데 인간성이라는 것이 없어졌어.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면 나중에 인간들이 인간이 만든 로봇한테 지배당하는 거라구.”

    ―사람까지 복제한다고 하는 판인데요, 뭐.

    “사람 몸뚱어리 복제하는 것은 괜찮아. 그런데 식(識), 컨셔스니스(consciousness)는 어디서 오는 거냐? 이것이 중요하다구. 보라구, 똑같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들이라도 행동이나 생각이 다 다르잖아. 식이 다르기 때문이여. 사람을 복제하고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 식을 어디서 갖다 집어 넣느냐에 따라 그 복제한 인간이 달라. 그것이 문제여.”

    ―주제를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오랫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포교를 하셨는데요. 요즘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미국식을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보세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가만히 보면 절름발이여.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민주당 공화당 두 정당만 존재하지 공산당이라는 것은 붙어서 살 수가 없어. 영국이나 독일처럼 여러 생각을 가진 정당이 연립해서 만든 나라가 아니여. 미국은 생각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나라라 이 말이여. 미국에 가면 사람 살기는 좋지만 완전한 나라라고는 할 수가 없어.”

    ―불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이여. 미국식으로만 생각한다 이거지. 뭐든지 미국식으로만 생각하고 미국 주장대로만 밀고 나가는 게 미국이지.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나’만 강해지는 나라, 나만을 생각하는 나라, 미국만을 생각하는 나라가 미국이여. 미국을 좇아가지 못해 안달이지만 미국의 리더십이라는 것도 돈 때문에 나오는 거잖아. 그런데 실상 돈 가지고도 잘 안 돼요. 국제 회의를 봐요. 아무리 미국식으로 하고 싶어도 쉽게 깨지거든.”

    세탁소에서 시작한 미국생활

    ―기독교의 나라에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미국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시대가 바뀌다 보니 서양 사람들이 더 열심히 마음공부를 해요. 서양 사람 머리라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보다 앞을 내다보는 정신이 있어요 .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그것을 내다 보니까 불교밖에 없거든. 대개 박사들이나 젊은 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좋아해. 지금까지 인간 사회가 걸어온 길을 쳐다보고 또 앞으로 세상을 쳐다보니까 더 이상 바깥을 바꿔 봐야 끝이 없거든. 안에서 찾아야지. 기독교라는 것은 현재와 미래밖에 없어. 과거라는 게 없거든. 불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뚜렷하면서도 찰나에 과거 현재 미래의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하잖아.

    본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교여. 시간 공간을 초월하지 않고는 본바탕으로 돌아갈 수 없어. 똑바른 시간과 공간을 가르쳐 줄 때에 공의 사상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여. 비웠다는 사상 말이여.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거여.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잖아. 나 자신을 찾는 길, 그 방법을 뚜렷하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한국 불교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서양사람들이 한국불교에 몰려들고 있어. 한국불교는 포교를 늦게 시작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왜냐? 참선을 가르치는 불교가 한국 불교밖에 없어.”

    ―큰스님이 미국 가신 게 1972년이지요. 그때는 한국 스님으로 미국 가서 포교하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지. 그때는 한국 사람으로 미국 가서 포교한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없지. 허허허.”

    ―처음 미국에 가셔서는 세탁소에서 일하셨다면서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돈벌이는 없고 언어는 안 통하고. 세탁소는 그저 일만 하면 됐거든. 힘들었지. 그런데 해야만 했어.”

    여기서 잠깐 큰스님이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1972년으로 거슬러가보자. 그때 스님 나이 마흔여섯살이었다. 당시 큰스님은 조계종 청담 종정스님과 함께 조계종단을 이끌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70년까지 그는 한국의 유명한 선승이었다.

    제자의 초청으로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가 아예 미국을 근거지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큰스님은 미국에 도착해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이웃은 대부분 가난한 흑인들이었다. 작은 불상, 목탁, 죽비, 향만 들고 미국으로 간 큰스님은 아파트에 작은 법당을 꾸미고 혼자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참선수련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존경받는 선승이었다. 그를 위해 요리해주고 빨래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미국에선 철저히 혼자였다. 게다가 영어도 전혀 못했고 무일푼이었다.

    미국에서 스님이 처음으로 한 일은 앞서 말한 대로 세탁소의 세탁기계 수리공이었다. 아침예불과 참선이 끝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세탁소로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고장난 세탁기들을 수리하고 청소를 하고 온갖 잡일을 했다. 고된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 저녁밥을 짓고 저녁예불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어느날 한 남자가 세탁소에 빨랫감을 맡기러 들어왔다가 허름한 차림에 머리 깎은 한국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난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한국의 숭산 스님 아니십니까?”

    그는 근처 브라운 대학에서 동양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루덴(Leo Pruden) 교수였다. 불교 문화 연구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그동안 숭산 스님을 사진에서만 뵙고도 대뜸 알아본 것이었다. 작은 키에 삭발한 머리, 기름때 묻은 작업복, 가슴에는 ‘미스터 리’라는 명찰뿐이었지만, 프루덴 교수는 그가 숭산 스님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루덴 교수의 놀라움에 큰스님은 ‘잉글리시 노노’만 연발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일본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어 프루덴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큰스님께 소개했다. 큰스님은 항상 밝은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고 직접 된장찌개와 칼국수 김치를 만들어 대접했다. 큰스님의 첫 법문은 프루덴 교수의 통역으로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한 법회는 정례적인 예불과 강연으로 이어졌으며 2년 뒤 드디어 예일대학 졸업생 두 명이 승려가 되면서 비로소 큰스님 제자들이 탄생했다. 바야흐로 한국 선불교가 미국에 뿌리 내리는 순간이었다.

    ―최근 조계종 분규를 둘러싸고 한국 불교에 대해 실망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살다 보니까 모기 물려 긁을 때도 있고 다리가 아파 두들길 때도 있고, 다 과정이여 과정. 우리 한국 불교가 정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35년밖에 안 됐어. 처음 정화할 때에 대처승이 2500명이고 비구승이 600명밖에 없었어. 그 600명이 대처승을 다 쫓아냈는데 비구승수가 모자라잖여. 자꾸자꾸 불어 몇 천명이 됐어. 그래서 급조승이란 게 생겨났다구. 스님 수가 한꺼번에 늘어나니까 그중에는 사기꾼 협잡꾼 깡패 별것이 다 머리 깎고 중이 됐다구. 그런 사람들을 옳게 가르쳐야 했는데 능력이 없었어. 우리 노장님들이 안목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힘이 모자랐던 거여. 갑자기 사람수가 늘어나니까 균형을 잃어버렸어요. 그때 중이 된 사기꾼 깡패 협잡꾼들이 요새 큰스님들이여. 종단을 휘어잡고, 싸움질하고, 협박질하고, 이 물이 다 지나가려면 한 20년은 지나야 혀.”

    ―20년이나 걸려요? 그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해요.

    “산에 얼마든지 공부 잘하는 스님이 많아. 그 스님들은 이 세상에 나와 설치는 사람들이 아녀. 겉만 보고, 명예나 돈만 보고 집착한 스님들 따라가면 안 되지. 그네들은 스님네 탈을 쓰고 안에는 스님 마음이 아닌데 스님입네 한다구. 그런 사람들을 또 좋다고 좇는 사람들도 있고. 산에는 얼마든지 공부 열심히 하는 스님들이 많으니까 겉만 볼 일이 아녀.”

    “모든 것을 버렸지만 진정한 스승을 얻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니 점심시간. 요즘은 화계사의 동안거철이다. 지난 12월 중순부터 2000년 2월 중순까지 3개월 동안 집중 참선수련이 이뤄진다. 미국 유럽 소련 동남아 등지에서 온 40여명의 외국인이 수행에 정진중이다. 스님이 되고 싶어 화계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행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왜 저들은 이 먼 곳 한국까지 와서 저렇게 머리를 깎고 스님 생활을 하고 있을까. 이 추운 겨울에 찬물에 손이 부르터가며 혹독한 절살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숭산 스님의 외국인 제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50여명이나 되는 큰스님의 외국인 제자 중에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많다. 출가라는 행위 자체가 파격이기도 하지만 서양에서는 불교가 아직 신(新)사상이기 때문에 불교 수행자, 그것도 한국 불교 수행의 길을 선택한 이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기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삶 하나 하나가 드라마틱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선 미국인이 많다. 그들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가 현각 스님.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을 나온 뒤 출가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만행’의 주인공으로 최근에는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열림원)라는 책을 냈다.

    나는 그를 지난 11월 중순 지리산 노고단 중턱쯤에 있는 상선암이라는 암자에서 만났다. 흙으로 지은 초가 같은 작은 집에서 그는 홀로 수행하고 있었다. 두 평 남짓 될까. 방 정면에는 커다란 석굴암 불상사진, 그 아래에는 작은 불단이 마련돼 있었다. 향로에서는 향이 피어 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풍채좋은 한국인 노스님 한 분이 크게 웃는 사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저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었다.

    “제 스승 숭산 큰스님입니다”

    그리고 현각 스님은 자신의 인생을 바꾼 큰스님과의 인연을 이렇게 얘기했다.

    “어릴 때부터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런 것들이 궁금했어요. 대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서양 철학을 공부한 것도 뭔가를 찾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지요. 그러던 1990년 5월 하버드 대학원 대강의실에서 특별강연을 하는 한국의 숭산 큰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마음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고통은 어디에서 오느냐, 삶은 무엇이냐 하는 이런 거대담론들에 대해 너무도 간단명료하고 막힘없는 대답으로 좌중을 파고들었습니다. 큰스님은 진리를 찾고 싶으면 수행을 하라고 했어요.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줘야지, 밥이 그려진 그림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요. 저는 그동안 진리를 찾기 위해 책과 성경만 파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책에서 얻은 지식이란 밥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하셨지요. 강의가 이어지는 두 시간 동안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졌던 진리에 대한 의문과 갈망이 확 풀리는 듯한 느낌, 이제야 진정한 스승을 만났다는 생각에 그날밤 잠을 못 이뤘습니다.”

    당시 스물다섯의 하버드 대학원생이었던 폴 뮌젠은 다음날 큰스님이 운영하는 케임브리지 젠센터로 달려갔고 2년여뒤에 중국 남화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현각’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차 훌륭한 교수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가족들과 그를 사랑했던 여자친구를 뒤로 하고 한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다.

    세계 제일 부자나라에서 태어나 그것도 중산층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승려가 된 자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한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매일 파티에서 술에 진탕 취했고 여자친구도 있었지요.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미국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지요.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찾아 헤맸으니까요. 더 좋은 옷, 더 좋은 차, 더 좋은 여자친구… 끝이 없었습니다. 97년 1년 동안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에 큰스님이 미국에 처음 세운 절인 홍법원 주지를 했습니다. 그때 대학동창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다들 미국의 상류사회에 진입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나를 부러워하더군요.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것 같은데 속은 허무감으로 가득했어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바깥 상황은 언제나 변합니다. 여기에 집착해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면 오직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만이 내 안에 있는 참자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영원한 행복이 찾아옵니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다면 하루 10분만이라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수행을 해보세요. 책이나 남의 경험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오직 수행, 수행하는 일만이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고통의 바다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환생

    현각 스님보다 훨씬 먼저 큰스님의 제자가 된 무상 스님은 숭산 큰스님의 1세대쯤 되는 제자다. 1964년 하버드대학에서 고대문학을 전공한 그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러시아문학까지 두루 섭렵했다. 러시아어는 물론 불어 독일어 라틴어 고대그리스어에 유창하고 한국어까지 한다. 쇼펜하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다 고대희랍비극, 셰익스피어까지 모두 그의 머릿속에 저장돼 있다.

    무상스님은 하버드 대학 졸업 후 흑인 인권운동을 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 남부인 앨라배마와 미시시피로 내려가 흑인에게 참정권을 주자는 인권운동을 했다. 당시 그 운동에 뛰어들었던 젊은이 몇몇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살해 당하기도 했다. 무상스님은 1년 동안 그곳에서 헌신한 뒤 예일대 법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약자를 보호하고 도울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우선 법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을 공부하면서 그는 더 큰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 법을 공부하니 법이란 것이 약자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통제하는 방편에 불과하다고 느낀 것이다. 법을 공부하는 것이 정의나 진리의 삶과는 거리가 먼, 힘과 엘리트주의를 구현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은 그는 삶과 진리와 정의에 대해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쫓아다니며 물었지만 어느 누구로부터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5년 예일대학에 법문을 하러온 숭산 스님을 만난 것이다. 그때 일을 떠올릴 때면 무상 스님은 항상 이렇게 얘기한다.

    “큰스님의 법문을 들은 그날 밤, 나는 소크라테스가 환생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큰스님 가르침방식은 완전히 소크라테스의 문답식었다. 그의 언어는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였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답을 주지 못했다.”

    무상 스님은 그 다음날로 큰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부모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백만장자였건만 그는 하버드와 예일이라는,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보증서를 모두 팽개치고 스님이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소개할 스님은 대봉 스님. 지금 숭산 스님이 짓고 있는 계룡산 국제선원의 선원장으로 내정된 스님이다.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원래 ‘도문’이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지난 여름 숭산 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받아 ‘대봉’이라는 새로운 법명을 받았다.

    본래 유태인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베트남 전쟁세대다.

    대학 다닐 때 국방성 앞에서 반전 데모를 했다. 매번 50여만명이 모이는 대규모 시위였는데 시위대 지도부였던 대봉 스님은 지도부 안에서 드러나는 의견차이와 질시에 큰 실망을 느꼈다. 서로 헐뜯고 싸우고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와 싸우기 위해 모였는지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평화를 외치지만 정작 외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평화가 없었던 것이다. 극도의 좌절과 환멸이 그를 짓눌렀다.

    당시 그는 반전운동을 하는 평화단체에 속해 있었는데 그 일을 겪고 난 뒤 그 단체에서 나왔다. 자신의 전공인 심리학을 이용, 좀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모색했는데 그렇게 찾은 일이 정신병원 상담사였다.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정신 질환자를 만났다. 겉보기에는 좋은 교육과 부를 갖고 있었지만 정신적 방황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배웠다는 의사들이 환자들을 거만하고 폭력적으로 다루는 태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먹물근성’을 빼고 싶어 공장에 취업했다. 그런데 하필 핵잠수함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지금껏 자기가 만났던 먹물들보다 덜 배운 사람들인데도 훨씬 착하고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무기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책감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미국 뉴헤이븐에 있는 큰스님 젠센터에서 수행하는 공장 동료와 친하게 지내던 그는 동료로부터 큰스님에 대해 듣게 되고 마침내 제자가 된다. 대봉 스님은 현재 계룡산 공사장의 조립주택에 살고 있다.

    무량 스님은 예일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할 당시 요가수행에 심취해 있었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잘생기고 머리도 좋아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1978년 예일 대학에 강연을 왔던 큰스님을 만난 뒤 제자가 된다. 1983년 출가한 그는 이듬해 한국으로 와 화계사 국제선원을 만들어 5년간 일한 뒤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는 한국에 있으면서 전국사찰을 걸어서 여행한 경험이 있다. 그는 현재 LA에서 차로 두 시간쯤 달리면 닿는 거리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속한 해발 1000m 산에 한국 사찰을 세우고 있다. 그 절을 방문했던 현각 스님말에 따르면 ‘너무 아름다운 자연 때문에 무공해 천연의 나라인 티베트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을 정도’라고 한다.

    스님은 변호사인 아버지한테 사정해 유산을 미리 받아 그 돈을 모두 사찰 건립에 쏟아붓고 있다고 한다. 산에 작은 간이텐트 하나를 세워 먹고 자고 하면서 공사를 ‘혼자’ 해낸다고 한다.

    큰스님 인터뷰를 도와주었던 무심 스님도 미국 출신이다. 현재 화계사에서 살며 큰스님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는 스님이다. 큰스님이 작년에 몇 번 병원신세를 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무심 스님이 어찌나 열심히 간호를 하는지 미국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무심 스님 정성에 탄복해 큰스님께 ‘누구냐’고 여쭌 적이 있었는데 그때 큰스님은 선뜻 ‘내 아들’이라고 대답해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무심 스님은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대학교수이고 동생은 유명한 해양생물학자다. 그는 명문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해 1984년에 출가했다.

    그는 숭산 큰스님 외국인 제자로는 처음으로 한국 조계종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미국 관음선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는데 무심 스님 이후로 현각 스님(미국) 청안 스님(헝가리)이 한국 조계종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국제 사찰’ 화계사

    청안 스님은 헝가리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심장병전문의고 어머니 역시 의사다. 그는 자랄 때부터 영어 연극 스포츠 등 여러 방면에 재주꾼이었다. 대학 다닐 때는 실험연극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도 중요한 예술장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실험연극은 대본을 사용하지 않고 배우들이 즉흥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전에 계획된 말보다는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당시 그 경험을 통해 청안 스님은 순간에서 순간, 상황에서 상황, 말이 필요없이 현실을 인식하는 선불교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1990년 헝가리에 법문을 하러 온 숭산 큰스님을 만나게 된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대형 강의실은 큰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당시 청안 스님은 이미 헝가리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창업한 번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 청안 스님은 큰돈을 벌었다. 때로는 그의 한달벌이가 아버지 4개월 월급을 합친 것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큰스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순전히 큰스님을 뵙기 위해 미국을 서너 차례 방문한다. 또 1993년 10월에는 3년에 한 번씩 전세계에 흩어진 큰스님의 제자들이 미국에서 모이는 ‘세계는 하나의 꽃’(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미국 프로비던스 젠센터에서 3개월간 안거수행을 했다. 그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상이 온통 고통으로 가득한데 자기 혼자만 돈을 벌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나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출가를 했다.

    부모는 거의 혼절을 했다.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많았던 아들에게 부모가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의 출가는 곧 부모의 노후를 책임질 자식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인데도 출가한 것이다. 그리고 5년 전부터는 아예 부모 곁을 떠나 한국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출가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화계사 국제선원의 총무 및 재무 담당으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지난 여름, 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받았고 곧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가 젠센터 주지를 맡을 예정인 그는 한국불교를 유럽에 알리는 선구자가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다음은 폴란드인 현문 스님.

    화학 생물학 문학 역사학 음악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는 또 고장난 것은 뭐든 고쳐내는 재주가 있어 ‘황금의 손을 가진 스님’이라고 불린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장차 폴란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자랐고 지금도 피아노만 있으면 바흐 헨델 모차르트 곡을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그를 새장 속 새처럼 가둬놓았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이유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통을 당하는 일들을 겪으면서 폴란드 정부가 강대국인 러시아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러면서 조국 폴란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과학자가 되기로 한다. 당간부나 엘리트 당원을 위한 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화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조국에 더 유용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청년시절 유명한 운동권이었다. 고등학생 때 반정부 지하단체에 가입한 뒤 열정적인 투쟁정신(?)으로 운동권에 대표가 된다. 명석한 머리와 대담한 용기를 가진 그는 운동권의 스타였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운동권에 이론을 제공하는 이론가였으며 화학물질 제조기술도 갖고 있어 각종 시위용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당시 폴란드 반정부 운동의 신화였다. 그러다 체포돼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심리학을 전공하는 여교수가 어느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충실한 당원이었다. 당시 그녀는 현문 스님을 비롯한 반정부 인사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중이었다. 정신적인 신념과 정치적 행위에 관한 연구였다고 한다.

    인터뷰는 3일간 지속됐다. 마지막날 그 교수는 현문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을 믿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리하여 신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처럼 큰 고통에서 허우적댈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신이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이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만들어내신다는 말입니까.”

    그 교수는 충격을 받았다. 당시 폴란드 대다수 국민은 가톨릭을 믿고 있었고 반정부 투쟁은 대부분 성당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유물론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공산당 간부들은 당연히 무신론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무신론자’는 그들과 적어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출가를 두려워 말라”

    그리하여 2주일 뒤 그는 뜻밖에 석방통보를 받는다. 자신의 사면이 그 여교수의 보고서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오랜 저항운동과 감옥생활. 그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정치적 행동으로는 사회에 이바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문과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이 가져다준 변절은 아니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나는 누구인가’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토록 열심히 반정부 투쟁을 했건만 마음속은 허전했다. 그와 투쟁하던 동지 몇몇은 티베트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폴란드 정부는 가톨릭을 탄압하는 대신 불교에 대해서는 무신론이라 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티베트불교 대선사인 카루 린포체에게 그를 소개했고 현문 스님은 그의 지도 아래 참선수행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현문 스님은 불교신자인 한 친구로부터 녹음테이프 한 개를 선물받는다. 그것은 숭산 큰스님의 영어법문녹음이었다. 그는 이 테이프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분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이 그제서야 끝나는 듯한 환희에 휩싸였다.

    며칠 뒤 현문 스님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큰스님이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운영하고 있던 젠센터를 방문하게 된다.

    바르샤바 젠센터는 1978년에 문을 연 곳으로 당시 큰스님의 가르침은 폴란드 젊은이들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현문 스님은 이곳에서 용맹정진을 마치고 다시 고향 크라콥으로 돌아갔다.

    1년 후 현문 스님은 숭산 큰스님의 폴란드 방문소식을 듣는다. 강의가 열리던 바르샤바 대학으로 간 현문 스님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미 선방에는 수백명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했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새나오는 큰스님 목소리만 들어야 했다. 큰스님은 강의를 마치고 곧장 바르샤바 젠센터로 갔다. 젠센터 선방 역시 초만원이었다. 참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현관과 복도에까지 빼곡히 앉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엌에서도 참선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큰스님과 인연을 맺은 현문 스님은 본격적으로 큰스님 일을 돕는다. 우선 고향 크라콥에 젠센터를 만드는 데 공헌하고 숭산 큰스님이 좀더 자주 폴란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왔다.

    현문 스님은 바르샤바 젠센터에서 생활했지만 오랜 기간 출가를 주저했다. 결혼도 않고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였기 때문에 출가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긴 했지만 출가보다는 돈을 벌어 큰스님을 지원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석사업을 시작해 돈을 꽤 많이 번다. 수익금 대부분은 각 나라에 세워진 큰스님 젠센터에 송금했다. 폴란드 사람들이 한국의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비행기표와 생활비를 대주었다. 어느날 큰스님이 그에게 “이제 출가할 때가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대답했다. “아직 때가 안 됐습니다. 몇 년 더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태어날 때 자기 자신에게 내가 태어날 준비가 되었느냐 하고 물어보고 태어났습니까? 또 죽을 때 내가 죽을 때가 되었는가 하고 죽습니까. 자, 이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십시오.”

    두 달 후 그는 출가했다. 한국문화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는 한국의 전통예술, 그중에서도 목공예와 도금공예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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