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호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노동정책은 무엇일까

[오정환의 시대통찰] 산업혁명 그늘 속 태동한 노동자 단결권

  • 오정환 정치 칼럼니스트·전 MBC 보도본부장

    입력2026-06-01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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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와 타협했던 독일의 노조 운동

    • 독일도 타협으로 개혁하지는 못해

    • 정규직 양보가 필요한 기간제법 개정

    • 노란봉투법이 초래한 혼란과 갈등

    • 노동정책에 정답 없어…시대에 맞는 균형점 찾아야

    노란봉투법 시행 첫 날인 3월 10일 민주노총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서 진행한 투쟁 선포대회에서 조합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DB

    노란봉투법 시행 첫 날인 3월 10일 민주노총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서 진행한 투쟁 선포대회에서 조합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DB

    거대한 방적기 밑으로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노동자들이 기어다녔다. 기계에 끼지 않도록 실 조각을 줍는 이들을 썩은 고기를 찾는 ‘스캐빈저(scavenger)’라 불렀다. 아이들은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잠이 들면 감독관의 채찍이 날아왔다. 그래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거나 머리카락이 말려 들어가는 일이 빈번했다. 사고가 나도 보상은 없었다. 오히려 공장주가 죽은 노동자의 가족에게 기계 수리비를 청구하는 일도 있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간 집은 한 방에 몇 식구가 살아야 할 정도로 비참했다. 환기는 고사하고, 상하수도 시설도 없었다. 거리는 오물로 진창이고 각종 전염병이 나돌았다. 그래서 19세기 중반 영아사망률을 포함해 영국 상류층의 평균수명이 35세일 때, 노동계급의 평균수명은 15세에 불과했다. 

    1824년 단결금지법이 폐지된 뒤에도 파업이나 태업은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그러나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차츰 영국 사회에 퍼져나갔다. 1832년 새들러 위원회가 아동노동, 1842년 애슐리 위원회가 광산 노동 실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두 의원 모두 보수적인 토리당 소속이었다. 자유주의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저서 ‘정치경제학 원리’에서 부의 분배는 사회적 선택의 문제라며 이들을 뒷받침했다.

    1910년 12월 영국 웨일스 남부 바르고드의 한 탄광에서 석탄을 세척하는 소년들. Getty Images

    1910년 12월 영국 웨일스 남부 바르고드의 한 탄광에서 석탄을 세척하는 소년들. Getty Images

    자유당도 집권기인 1871년 노조의 법인 지위를 인정했다. 1906년에는 파업으로 인한 민사책임까지 면제했다. 노조의 협상력이 막강해졌고, 이것이 훗날 노동당이 자유당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같은 시기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도 고민이 많았다. 당시 독일의 폭발적 경제성장 이면에는 저임금과 산업재해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시한폭탄처럼 누적돼 갔다. 사회주의 세력도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그들 중 페르디난트 라살레와 협력을 모색했다. 



    국가와 타협했던 독일의 노조 운동

    라살레는 국가를 민중의 복지 실현에 유용한 도구로 봤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노동자들의 생산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모든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권 제도를 요구했다. 계급 혁명을 꿈꾸던 마르크스는 라살레를 “비스마르크의 주구(走狗)”라고 비난했지만, 오늘날 독일 노동운동의 초석을 놓고 사회민주당의 모태를 만든 건 라살레였다. 

    비스마르크는 국가가 노동자를 돌보면 노동자들이 왕정을 지지할 것이라는 라살레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880년대 그는 질병보험과 재해사고보험·노령연금을 도입했다. 다만 돈을 아끼기 위해 기대수명이 65~70세인 시대에 노령연금 개시 연령을 70세로 정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반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비스마르크가 시장의 원리를 저버렸다며 분노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만적 뇌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이 “국가가 노후를 보장한다”는 약속에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산업재해 등에 대한 혜택도 분명히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오래지 않아 실각했지만 그가 만든 사회보험제도는 독일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고 전 세계 복지국가 모델의 근간이 됐다. 

    노동자 권리는 계속 확대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경제학자 베버리지가 보고서를 제출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편적 복지를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전시 연립내각 중 노동당은 적극 찬성했다. 처칠 총리는 막대한 예산 소요 때문에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1945년 총선에서 참패해 노동당에 단독정권을 내줬다. 그제야 보수당도 입장을 바꿔 ‘전후 합의(Post-War Consensus)’가 이뤄졌다. 완전고용 유지,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 주요 산업의 국유화, 정부 정책 결정에 노조 참여 등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장밋빛 꿈은 점차 색이 바랬다. 기업의 수익성보다 노조 기득권이 우선시됐다. 정부는 구조조정이나 경제개혁을 할 수 없었다. 특정 노조 가입자만 채용하는 클로즈드 숍 제도로 고용의 유연성이 사라졌다. 걸핏하면 현장 노조 간부들에 의해 불법 파업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영국의 자동차·철강 산업 생산성은 독일·일본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불만의 겨울에서 오그리브 전투까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됐다. 국가경제는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무너졌지만 노조는 두 자릿수 임금 인상을 고집했다. 1978년 말 ‘불만의 겨울’이 시작됐다. 공공부문 파업으로 식량 운송이 중단되고 거리마다 쓰레기가 쌓였다. 병원 운영이 마비되고 심지어 묘지 노동자 파업으로 시신을 매장하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더는 견딜 수 없었다. 197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Labour Isn't Working)”를 슬로건으로 내건 마거릿 대처에게 몰표를 던졌다.

    대처 총리는 노조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1984년 광산노조 파업이 시작되자 대처는 불법 파업으로 규정하고, 거액의 벌금을 물린 뒤 노조 자산을 동결했다. 광산노조는 과거 승리했던 방식대로 오그리브 제철소 앞에 몰려가 석탄 반입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대에 기마경찰대가 돌진했다. 양측에서 100여 명의 부상자가 나오고 시위대는 해산됐다. 영국 노동운동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버티던 광산노조는 다음 해 초 백기를 들었다.

    1979년 1월 영국 런던에서 노동당의 임금인상 5% 상한선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Getty Images

    1979년 1월 영국 런던에서 노동당의 임금인상 5% 상한선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Getty Images

    여세를 몰아 대처 정부는 국영기업 민영화, 사회복지 축소, 금융자유화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영국은 1980년대 독일·프랑스를 능가하는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다만 쇠락한 북부 공업지대와 남부 금융중심지의 지역갈등은 빈부격차 확대와 함께 새로운 사회문제가 됐다.

    오늘날에도 영국 노동조합은 대처 이전의 위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연대 파업 금지가 여전히 유효하고, 2023년에는 철도·의료 필수 인력의 파업 금지법이 제정됐다. 그사이 여러 차례 노동당이 집권했지만, 정권 유지를 위해 노조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독일도 타협으로 개혁하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노동운동의 핵심은 기업경영에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공동결정제’였다. 먼저 일선 사업장에서 직장평의회가 경영진과 근로조건을 협의해 결정한다. 그리고 기업의 감독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들어가 투자 계획이나 대표 선임 등에 대해 투표권을 행사한다. 

    출발은 좋았다. 노조의 경영 참여는 노사 화합을 통한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업의 경쟁력을 깎아내렸다. 글로벌 시장 환경이 급변하고 경쟁국들은 뒤쫓아 오는데, 기업이 구조조정이나 전략 수정을 할 때마다 노조의 승인을 받느라 결정이 지체됐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침체됐는데도 독일 노조는 강력한 단결력으로 높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관철했다. 이때 노동계가 들고나온 게 ‘임금 주도 성장론’이었다. 임금을 올려 소비를 늘리면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였다. 수년 전 우리나라의 ‘소득 주도 성장론’과 겹친다. 노동계의 주장과는 달리 생산비용이 치솟으면서 기업들이 줄지어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1990년 독일 통일 뒤 서독 노조는 동독 지역 임금을 서독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앞장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