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센트를 사랑한다. 형제처럼 부모처럼 친구처럼 애인처럼 연인처럼. 나는 그를 존경하거나 숭배하지 않는다. 그는 위인도 천재도 거장도 대가도 사표도 스승도 도사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모자랐고 약했으며 슬펐다. 지독하게 못났고 어설펐으며 서글펐다. 나도 그렇기에 그를 사랑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다. 아무 노력도 없이 오직 약간의 손재주와 감각으로 예술가연 하고자 짐짓 미친 체하는 예술가들은 강한 자다. 그들은 순수하지 못한 정신적 사기꾼이다. 그들은 똑똑하고 영리하며 재빠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가짜로 미친 체한 적이 없는 빈센트가 결국 진짜로 미쳐버린 것처럼 보인 것은 그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술수를 부리거나 사기를 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정신이 순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이 책을 빈센트를 사랑하는 약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들, 열심히 노력하지만 언제나 실패하는 내 마음의 벗들에게 바친다.…”
지난 10월 중순 발간된 책 ‘내 친구 빈센트’의 머릿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지은이는 영남대 법대 박홍규(朴洪圭·48) 학장. 박교수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이 땅에서 까마득히 먼 유럽 땅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한 화가를 스스럼없이 ‘내 친구’라고 부르며,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박교수가 사랑하는 그 ‘친구’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학창 시절에 배운 기억에 의하면,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파 화가다.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어느 날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자기 손으로 한쪽 귀를 자르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자살해버렸다는 ‘미친 천재’다. 생전에 ‘해바라기’ 단 한 점이 헐값에 팔렸을 정도로 지독한 가난과 세인들의 철저한 무시 속에 살았지만, (신문 해외토픽난에 이따금 실리는 단신에 의하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것 정도가 일반인들이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이다. 또 있다. “starry starry night /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로 시작하는 돈 매클린의 영어 노래 ‘빈센트’….
박홍규 교수는 그런 ‘빈센트’를 왜 새삼 한국에 소개한 것일까? 100년 전 유럽에서 살다 간 ‘미친 천재 화가’가 2000년대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각별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더욱이 박교수는 미술이나 미학이 아니라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자다. 차갑고 냉철한 법 논리를 공부하는 학자가, 불꽃 같은 예술혼을 주체하지 못해 끝내는 스스로를 불살라버린 예술가의 평전을 쓴다?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앞의 인용문에도 희미하게나마 드러나 있다. 즉 박교수는 이 책에서 후세인들에 의해 신비화한 ‘천재 화가’가 아니라 ‘나약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인 빈센트 반 고흐, 세상과 담을 쌓고 혼자만의 광기로 똘똘 뭉친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시대를 고뇌하면서 노동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자 했던 한 인간인 빈센트 반 고흐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가의 평전을 쓴 법학자의 심사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 정도 ‘짐작’만으로 박홍규 교수를 직접 만나볼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를 인터뷰할 생각이 든 것은, 몇 사람으로부터 그에 관한 약간의 ‘사전 정보’를 듣고 나서였다. 예컨대 그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점, 교수생활을 시작한 이래 20년 동안 도시락을 싸들고, 자전거로 출퇴근해왔다는 점, 이번 책말고도 서양의 동양에 대한 편견, 다시 말해 서구중심적 제국주의 문명에 통렬한 비판을 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저 ‘오리엔탈리즘’과 미셸 푸코의 고전 ‘감시와 처벌’을 번역하는 등 그동안 법학자로서는 ‘상습적인 외도’를 해왔다는 점 등이 그의 주변에서 나도는 이런저런 얘기들이었다. 이런 것들이 ‘인간 박홍규’에 대한 호기심을 부쩍 자극했다.
30년 만에 완성한 숙제
그를 만나기 위해 대구 영남대로 향한 것은 초겨울 바람이 더욱 스산하게 느껴지던 11월 어느 날이었다.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두꺼운 스웨터에 콤비 저고리, 그리고 적당하게 헝클어진 머릿결이 서울의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만나는 ‘법대 교수님’과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연구실을 온통 채운 책들 제목을 찬찬히 살펴보기 전까지는 철학이나 불문학쯤을 가르치는 인문학자로 착각하기에 딱 알맞다.
─ 언제부터 ‘내 친구 빈센트’를 쓸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내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10년이 넘어요.”
─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게 1964년입니다. 신구문화사에서 ‘세계의 인간상’이라는 12권짜리 책이 나왔어요. 당시로는 장정이나 내용이 획기적인 책이었습니다. 거기 화가편에 미켈란젤로·세잔·밀레·고흐, 이렇게 네 사람의 얘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고흐 책이었는데, 당시 그 책에 굉장히 열광했어요.
알고 보니 스테판 폴라첵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는데, 지금도 고흐가 자기 귀를 잘라서 손에 들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아버지가 ‘태양은 붉다’고 했더니 소년 고흐는 ‘아니다. 태양은 노랗다’고 말하는 대목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그 땐 소년다운 유치한 차원에서 고흐에 열광했던 것이지요.”
─ 왜 하필 고흐였지요? 얼핏 생각하기엔 예술 뿐 아니라 과학에도 천재성을 발휘했던 미켈란젤로에게 열광할 만한 부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 미켈란젤로나 세잔, 밀레 얘기도 좋았어요. 저는 언젠가는 밀레에 대한 책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 네 권 중 폴라첵의 고흐 전기는 유일하게 소설 형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생 시절에 고흐 얘기가 더 와 닿지 않았을까…”
─ 물론 고흐를 미친 천재로 묘사한 책이었겠지요?
“그래요. 어릴 때부터 아주 유별나고 특이한 아이였고, 완전히 미쳐버린 천재였다, 말하자면 고흐에 대해서 지금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상식을 기본으로 만든 책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책은 1930년대에 독일에서 나온 책이었고, 그 때는 고흐가 막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할 때였다는 것도 알게 됐지요.”
─ 중학 시절에 읽은 고흐 이야기가 30여년이 흐른 지금 이 책으로 결실을 보게 된 거로군요?
“우리 세대 모두가 그렇게 자랐지만, 저 역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거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데모하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서도 혼자서 스케치를 하곤 했어요. 친구들은 그런 저를 비웃었지요. 그림이라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부르주아 짓인데, 하면서 말이죠(웃음).”
─ 교수님 시절에는 데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았나요?(웃음)
“아, 그래도 우리는 데모를 했습니다(웃음). 그것도 열심히 했어요.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빈센트를 잊고 살았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고흐에 관한 책이 나오면 꼭 챙겨봤고, 그림을 그린다든가 그림책을 본다든가 하는 정도는 계속했지만….
그런데 80년대 말쯤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반성을 했겠지만, 뭐라고 할까, 지식인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 도그마가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저에게 80년대는 도그마의 시대였거든요. 많은 사람이 마르크스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양 믿던 시절인데,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대세에서 좀 벗어나 있었어요. 사회주의나 노동문제에 대한 저의 관심은, 그런 사상이 구현되는 세상과 예술은 어떻게 상관관계를 맺느냐에 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 마르크스를 열심히 읽던 본류 진보지식인들과는 좀 거리가 있었지요.”
‘사회주의자’ 빈센트 반 고흐
─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빈센트가 다시 떠오른 겁니까?
“그래서 80년대 말 이후로 좀 더 다양하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도 읽고,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게 된 거지요. 사실 나에게 빈센트 반 고흐는 숙제였어요. 어린 시절에 읽었던 기억대로 고흐를 미친 천재로만 이해하는 게 과연 옳은지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남아 있었던 거지요.”
─ 말하자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기려면 다들 저렇게 미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군요?
“그래요. 거기엔 또 나 같은 범인(凡人)들의 질투심 비슷한 감정도 있었겠지요.
내가 빈센트의 작품을 처음 본 게 1983년입니다. 일본에 유학을 갔는데, 일본에 빈센트 그림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작품 ‘해바라기’도 일본에 있어요. 그런데 그 전에 손바닥만한 사진으로 봤을 때와는 느낌이 굉장히 달랐어요.
뭐랄까, ‘해바라기’든 무엇이든 참 좋은데, ‘이건 잘 그린 그림이다’ 혹은 ‘아주 능숙한 그림이다’ 이런 생각은 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왜 이 사람의 그림이 이렇게 감동적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지요. (책 표지에 나온 고흐의 자화상을 가리키며) 이 그림만 해도 그래요. 인물화로 잘 그린 그림, 미술 기법상 뛰어난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터치나 색깔 묘사는 어떻게 보면 유치하지 않아요?
─ 고흐는 르누아르나 세잔같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지요. 더 거칠다고 할까….
“그럼요. 많이 다르지요. 그래서 일본에 있으면서 고흐 전기나 논문들을 죄다 찾아서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는 평생 고흐만 연구한 의사가 있는데, 책을 네 권이나 냈어요. 그 책을 읽고 고흐가 간질 환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위대한 화가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치기어린 생각들, 마치 어떤 사람이 바이런을 좋아해서 30리 길을 매일 절름발이 흉내를 내면서 걸었다는, 그런 콤플렉스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후 89~90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에 가 있으면서 좀 더 자료를 모았고, 91년에 처음 유럽여행을 하면서 고흐와 관련된 곳들을 둘러봤습니다.
그러면서 ‘아, 빈센트가 자기 귀를 자른 건 단순히 광기 때문이 아니었구나’ ‘빈센트가 아를(남프랑스의 도시)에 간 것은 나름의 화가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구나’ 등등의 생각을 굳혔고, 이런 생각들이 제가 80년대에 고민했던 사회주의 문제와도 맥락이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90년대 초반에는 미술사나 미학 쪽에도 사회사적 관점이랄까, 이런 게 폭넓게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 이른바 예술사회학이지요.
“그래요. 예술을 사회학 내지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이런 글에 고흐가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고흐 초기의 농민화나 탄광촌인 보리나주에 머물던 시절의 노동화 같은 것들도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 말하자면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단순히 천재의 개인적인 열정과 재능의 소산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군요?
“고흐의 삶을 반추하다가 고흐만이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시대적 고민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고흐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그림 속에 그런 사상을 녹여 넣었기 때문에 화풍의 유치함이나 혹은 미술의 기법적 측면과는 상관없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고흐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중간중간에 미술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우리 기준으로 보면 예술가가 될 소질이나 기회가 전혀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노동현장에 직접 투신하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열정을 그림으로 쏟아냈다는 거지요. 결론적으로 나는 고흐의 이런 면에 매료됐고, ‘내가 한번 정리해보자’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겁니다.”
노동자와 예술
─ 빈센트 반 고흐의 그런 삶이 박교수의 삶에도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 같은데요.
“나는 1981년부터 대학에서 노동법을 가르치면서 노동현장에서 무료 강연도 하고, 나름대로 노동조합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런 강연에 나가면 마지막 5~10분은 반드시 고흐 얘기, 아니면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나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흐라는 사람은 여러분의 친구다, 고흐는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몇 년간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여러분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이다, 나는 여러분의 근로시간이 단축되고 삶의 질이 조금 더 나아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여러분은 고흐의 그림도 즐길 수 있고 베토벤의 음악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회가 정말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무튼 내게는 고흐가 정말 친구였어요. 내가 지금까지 맞닥뜨린 노동문제나 인권문제, 사회문제들이 고흐의 삶 속에 그대로 다 녹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흐를 통한 19세기 후반기에 대한 이해, 고흐를 통한 사회인식이라는 게 나 자신에게 참으로 중요한 판단의 자료가 됐고, 또 그런 것을 통해서 삶을 좀 더 다양하게 인식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요.”
─ 제가 하려던 질문을 그냥 숨쉴 겨를도 주지 않고서 다 말씀해버리셨는데요(웃음).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통념상 법대 교수가 예술가 평전을 썼다는 사실을 생경하게 느끼는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내 전공인 노동법이나 인권문제를 공부하는 것과 같은 태도와 성의로 빈센트에 대해서 제가 구할 수 있는 것, 봐야 할 것은 죄다 봤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고 얼마 안 돼 방송국에서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진행자의 첫 마디가 ‘법대 교수가 어떻게 이런 책을 냈느냐’는 거였습니다. 그 말이 한편으론 법대 교수가 쓴 미술책은 조금 소홀해도 괜찮다는 뉘앙스로 들려서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나는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나라에서 미술사나 미학을 하는 분들이 전공 논문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글을 보면 ‘왜들 이렇게 공부를 안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튼 아마추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 박교수께서 예전에 번역한 ‘오리엔탈리즘’을 수박 겉핥기로나마 읽으면서 느꼈고, 오늘 또 느끼는 것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르네상스형 인간’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만….
“아이구, 그건 과찬이고요(웃음).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한다면, 요즘 인문학의 위기다, 인문정신이 사라졌다, 이런 말들을 하잖아요? 특히 대학에서 학부제를 도입한다고 하면서 그런 말이 많은데, 나는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엄밀하게 말하면 인문학과의 위기 아닙니까?
무엇보다 나는 지금처럼 전공 간에 높은 장벽을 쳐놓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같이 이렇게 엄청난 장벽을 쳐놓은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요? 법대 교수가 인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고, 이건 사실 천박한 풍토 아닙니까?”
전공 간 벽을 허물어야
─ 지금은 소위 스페셜리스트가 존중받는 시대라고들 하지요. 반면에 제네럴리스트의 미덕은 사회적으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제네럴리스트를 강조하는 겁니까?
“그렇죠, 속담에 한 우물을 파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저보고 잡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공 분야가 따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예술이나 사회사상 등 제가 관심있는 분야도 강의해보고 싶어요. 다만 대학에서 전공에 장벽을 워낙 높이 쳐 놓고서 그걸 막고 있어서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책도 쓰게 된 건데….
─ 말하자면, 이런 책을 쓰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런 벽을 허무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전공의 장벽을 허무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끼리 장벽을 쌓아놓고서 마치 자기 것만이 가치있는 것인 양 얘기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 아까 80년대를 도그마의 시대라고 하신 것처럼, 균형감각을 상실한 도그마라고 할까, 그런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대학에서 교양영어를 가르치잖아요. 내가 ‘우리 법대 학생들에게는 그저 그런 수준의 교양영어는 관두고 차라리 법률영어를 가르쳤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한 동료 교수에게 했더니 그분이 화를 버럭 내면서 ‘법률영어를 가르치더라도 영문과 출신이 가르쳐야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왜?’ ‘법대 출신은 인문정신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속으로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생각했어요(웃음).
이건 물론 문학으로서의 영문학과는 차원이 다른 얘깁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은 자기 전공에 함몰돼서 인문주의를 아주 좁게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다른 예로 제가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고 출간할 때에도 굉장히 애를 먹었어요.”
─ 왜요?
“출판사가 나서려고 하지 않았거든.”
─ 장사가 안 될 거라는 이유 때문에요?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우선 번역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내가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지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몇 군데 출판사에 부탁했다가 죄다 거절당했거든요. 결국은 교보문고, 말하자면 책장사로 돈을 좀 벌어서 잘 안 팔리는 책을 몇 권 출판해주는 교보문고 출판사에서 그 책이 나왔어요.
그래도 그 책은 번역자가 인문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받지는 않은 편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인문학자들은 지금도 그 책을 많이 인용하면서도 출처를 거의 밝히지 않습니다. 원서로만 밝힐 뿐이지요.
‘오리엔탈리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야말로 르네상스적인 인간입니다. 그 책은 서구문화에서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를 조목조목 밝혀내고 비판한 책인데,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사회학 등등 안 다룬 분야가 없어요. 그런 작업이 우리 나라에서는 왜 안 되는지 그게 의문스럽다는 것이지, 내가 그 책을 번역한 게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풍조는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 아까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과의 위기라고 하셨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현저하게 낮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잖아요?
“학생들의 인문학 지식이 언제는 대단했었는지 모르겠지만…(웃음). 더 큰 범위에서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겠지요. 사회의 위기, 체제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이런 문제를 짚어봐야 하는데…. 아무튼 내 생각은 학자들,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 전공에 매몰돼 있다든가, 그네들끼리의 언어로만 소통한다든가, 이런 짓을 이제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 영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런 자세,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앞에서 노동자를 상대로 한 강연에서 고흐 얘기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사실 대다수 사람들은 예술 세계와 현실 세계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박교수께서 빈센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 노동자 대중에 대한 헌신, 이런 점이 중요한 요인이 됐는데, 예술적 취향과 삶의 자세를 그렇게 일치시키는 게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상이나 운동에 대한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도 예술에 대해서는 일단 배척하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사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취향을 보이는 경우를 종종 보거든요. 내 경우엔 이게 좋은 것인지 어떤지 모르겠는데, 좋아하는 예술과 싫어하는 예술을 확연히 구분합니다. 가령 우리 집에 르누아르 화집은 없어요. 안 보니까. 한 마디로, 보기에 아름다운 그림은 제 취향에 맞지 않아요. 아무튼 내 경우엔 예술에 대한 취향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 그러면 이른바 순수예술, 예술지상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박교수님의 관심 영역 밖인가요?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논의는 굉장히 단순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오스카 와일드류의 예술지상주의는 반체제적인 정서를 바닥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귀족이나 왕족, 돈많은 부르주아를 위한 예술 형식에 대한 저항으로 18∼19세기에 순수예술운동이라는 게 시작됐다는 것인데, 이건 시대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반항적인 것이었어요. 슈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도 마찬가집니다.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슈르리얼리스트들의 대응점은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들이었거든요. 오스카 와일드도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잖아요?
─ 박교수께도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요. 사실 내가 모 출판사와 아나키즘에 관한 책을 내자고 약속을 해놓고 아직 완성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나키즘에 대한 글도 여러 차례 쓴 적이 있구요.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았던 19세기 후반기에 고흐와 친했던 사람들, 예를 들어 피사르도 아나키스트였어요. 고흐의 경우에는 그의 일기나 연구서를 봐도 그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을 입증해주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지만….”
─ 박교수님의 아나키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나는 70~80년대 학창시절에 사회주의 책을 읽었는데, 뭐 반공교육을 워낙 잘받은 탓인지 몰라도(웃음), 체질적으로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나 중국식,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저항감이 강했어요.
나로선 뭐랄까, 그다지 조직화되지 않은,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는, 비조직·비체제·비체계적인, 자유로운 개인을 중심에 놓는 아나키즘이 상당히 일찍부터 체질에 맞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노동법을 공부하면서 인권문제나 사법개혁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고 있는데….”
─ 그것들이 다 맥락이 통하는 얘기들이지요?
“물론이지요. 나는 우리 사회의 온갖 고질적인 문제가 국가주의에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면에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한다는 국가우선주의…. 그런 점에서 군사독재 시절은 군인의 독재였다는 것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 사회의 체질 자체가 국가주의로 굳어져버렸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 아나키즘에 의하면, 결국 가장 큰 폭력은 국가 자체이므로….
“그렇지요. 국가의 폭력에 저항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법의 목적이고 정의의 본분이라면, 국가에 대해서 강력하게 안티테제를 거는 수단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까지 읽고 보고 느낀 것 중에서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아나키즘이었다는 겁니다.”
한국 사회의 엄청난 국가주의
─ 간단히 말해서 아나키즘이란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이고, 전체에 대해서 개인을 앞세우는 사상인데, 예컨대 박교수님의 전공인 노동법은 국가의 법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준다는 취지 아닙니까? 그렇게 보면 서로 충돌하는 게 아닌가요?
“국가가 법으로 노동자를 보호해주는 게 노동법이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보통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노동계의 가장 본원적인 침해자·가해자가 바로 국가다, 그러니까 국가에 의한 보호를 가능한 한 배제시키자, 물론 국가의 보호가 필요한 최소한의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특히 노동조합운동 같은 것은 오히려 국가에 의해서 침탈당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한 개인의 자유결정권, 자율권을 주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법개혁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80년대 말부터 우리 나라 사법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사법절차에 시민이 참여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왔어요. 미국 영화에서 배심제 같은 걸 보잖아요? 그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법 제도나 사법절차에서 우리 나라만큼 국가중심주의가 강한 나라가 없거든요.”
─ 우리가 법제도를 도입해온 독일이나 일본은 어떻습니까?
“거기는 우리보다 훨씬 덜해요. 가령 독일 노동법에는 국가개입적인 요소가 거의 없어요. 일본도 우리보다는 훨씬 약하지요. 사법제도도 독일에선 참심제라고 해서 시민이 재판에 참여합니다. 재판장과 똑같은 위치에서 시민이 중심이 되는, 시민이 주인이란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시민이 주인이 되는 체제라고 한다면, 교육이나 문화 등 우리 나라의 다른 부분에도 국가주의가 팽배해 있지만, 특히 법 체제와 사법에서는 엄청난 국가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기본권, 자기결정권이다, 다시 말해 모든 시민은 모든 문제에 대해서 판단능력과 해결능력이 있고, 자율능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개인의 그런 능력을 부정하잖아요?
“그렇죠. 그걸 부정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맡겨두면 안된다,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 이게 국가주의거든요. 이런 국가주의적 성향이 우리 나라만큼 강한 데가 없다는 겁니다.
─ 아까 말씀대로 우리가 법체계를 수입해온 일본이나 독일에서는 국가주의가 훨씬 덜하다, 이 얘기는 피상적으로 본다면 사회의 성숙도와 관련되는 건가요?
“나는 오히려 제도적인 요인이 많다고 생각해요.
─ 민주주의를 경험한 수준과도 관련되겠지요?
“아니오, 그보다는 통치계층, 지배계층의 인식문제라고 나는 생각해요. 지배계층의 시민들, 민중들에 대한 폄훼….
─ 국민을 통치 대상으로만 본다는 거지요?
“그렇지요, 객체로만 바라보는 거지요. 나는 누구에게나 예술이나 학문을 할 능력도 있고, 인식 능력도 있고, 스스로를 재판할 능력, 스스로 통치할 능력도 있다고 봅니다. 저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내 친구 빈센트’를 쓴 것이나 배심재판을 주장하는 것, 노동자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것, 나아가 더 큰 세계질서 속에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우리가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이런 이야기들이 다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계층이 우리 시민을 객체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양이 동양을 객체화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이거든요.”
자유, 자치, 자연의 삼자주의
―그렇지요. 서구의 아시아에 대한 편견이지요.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나는 가끔 이런 얘기를 해요 ‘로빈슨 크루소’가 도대체 왜 명작이냐, 로빈스 크루소가 제주도나 울릉도에 왔다면, 그래서 어느 날 우리 선조 한 사람을 불러서 ‘너, 이제부터 프라이데이 해라’ 해서 영국에 데려갔다면, 그런 얘기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로빈슨 크루소’를 어린이 명작문고에서 없애 버리자, 내 생각은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여기저기에 써봐도…”
“없어요.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썼고, 또 우리 영문학계에서 그런 데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여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이 더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자는 겁니다. 법이라는 것도, 국가가 정해주는 법이 아니라 시민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서 부드럽게 형성되는 법, 생활의 규범적인 차원을 더 중시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실천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노동문제도 국가가 설계하고 강요하는 식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제도화하는…”
─ 그런데, 박교수께서는 현실 세계에서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요. 아나키즘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항상 가능성 문제를 따지는데…(웃음). 아나키즘이 그리는 사회를 나는 세 가지 요소로 정리합니다. 자유와 자치, 그리고 자연의 문제, 이 세 가지입니다. 이걸 나는 손문의 삼민주의에 빗대서 삼자주의(三自主義)라고 불러요(웃음).”
─ 자유와 자치와 자연이라…. 여기서 자연의 문제란 어떤 의미입니까?
“아나키즘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서 논리를 이끌어냅니다. 자연 속의 인간이 가장 자유로웠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 속에서야말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치는 결국 자연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사회주의에 있는 가장 큰 맹점도 자연의 문제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을 쓴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도 마르크스가 제3세계를 식민 대상으로 정당화했다고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정복도 사회주의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거지요. 그런데 아나키즘에서는 이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자율교육이라든가 에콜로지(생태학) 문제와 함께 아나키즘이 떠오르게 된 이유가,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사상보다도 자연의 문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국가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국가란 자치공동체의 느슨한 연대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제 생각은 그래요.
우리의 경우에도 전라도나 경상도, 대구나 서울을 각각 독립된 나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런 자치공동체들로 구성된 연방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냐, 나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위스 같은 작은 나라도 직접 민주주의를 하면서 연방으로 존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경우엔 좁은 땅덩어리 위에서 중앙집권국가가 체질이 돼 살아왔기 때문에 분권주의에 대해서….”
─ 체질적인 거부감 같은 게 있지요.
“그래요, 그렇지만 사람들과 이런 문제를 놓고 얘기해보면 별로 막힘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판단능력을 갖고 있잖아요?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성선설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게 내가 아나키즘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을 바탕에 깔고 논리를 이끌어간다는 점, 그래서 자연에 대한 침해가 결국은 인간의 본성에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또 자치공동체가 작을수록 그 속에서 구성원끼리 의견 교환이 훨씬 원활해질 수 있다는 점들…, 나는 그런 게 단순히 이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를 아시나요
─ 지금 세계적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얘기되고 있고, 전자과학의 발달로 인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제3의 길’에 대한 논의도 있었고….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얘기하면서 자기 이론의 대척점 비슷하게 얘기하는 한 가지 흐름이 바로 아나키즘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생태에 대한 기본 가치를 전제로 한 아나키즘적인 분권사회론, 이런 데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아요. 난 그게 참 기이하다고 생각하는데…”
─ 국가주의자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건지…(웃음).
“그래서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법학자로서, 또 시민으로서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정말로 치열하게 저항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말, 인간이 주체라는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겁니다. 말로는 함부로 민주주의를 떠들면서 시민권과 인권에 대한 억압이나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침해를 합리화하는 그런 행태를 더 이상 인정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물론 폭력의 형태로 표출되는 아나키즘 같은 것은 곤란하겠지만.
그러나 우선은 우리 지식계나 문화계의 사고가 좀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졌으면 합니다.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교류하고 토론되는 구조,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걸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항상 어느 쪽엔가 편향돼 있었고, 획일적이었고…. 아나키즘에 대한 논의도 너무 빈약해요.
─ 혹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일말의 불안감 같은 것은 없나요?(웃음) 앞으로 지식계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당하지 않을까 하는….
“(웃음) 아, 나야 뭐, 시골 선생에 불과한데….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내가 98년에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쓴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충분히 얘기가 될 만한 사람인데,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에 관한 얘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데, 왜 이 나라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얘기가 없느냐는 거였어요. 윌리엄 모리스는 19세기 말에 영국에서 살았던 아나키스트였고, 생활의 예술화를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는 아나키즘 사회란 예술사회였습니다.”
―예술사회요?
“그래요. 건축이나 생활도구, 이런 생활 예술이지요. 그는 생활예술과 고급예술의 구별을 철저하게 배격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민의 일상에 관계되지 않는,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반대한 사람인데, 나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국내에는 그 사람에 관한 책이 번역된 게 없는 건 물론이고, 논문조차 찾기가 어렵더라는 거지요. 윌리엄 모리스라면 건축관련 책에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나오고, 공예 관련 책에는 ‘현대 공예의 아버지’라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영미의 좌익운동, 신진보운동에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고, 그런가 하면 영미 시문학사에도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국내에는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소개돼 있을 뿐 당시 시대적 상황에 그가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저항을 했는지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앞에서 나온 말처럼 르네상스형 인간의 전형인데, 우리 나라에선 전공이 모호해서 소개가 잘 안 된 건지 모르겠네…(웃음). 그래서 나는 앞으로 전공이 모호한 사람만 골라서 국내에 소개하는 작업을 해볼까 하는데…(웃음). 그렇게 보면 에드워드 사이드도 전공이 모호한 사람이네요.”
─ 말이 나온 김에, ‘오리엔탈리즘’은 어떻게 해서 번역을 하게 됐습니까?
“그 전에 미셸 푸코 얘기부터 해야 해요. 나는 푸코를 아나키즘적인 견해에서 이해하거든요. 예컨대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은 국가 권력의 최악의 형태로 감옥, 그 속에 갇혀 있는 개인, 이런 구조를 가지고 현대사회를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감옥이라는 틀, 규제, 감시, 처벌체계의 해체를 말하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아주 재미있는 반국가주의, 개인의 해방논리에 관한 얘기인데, 희한하게도 푸코나 데리다 같은 사람들의 이론이 우리 나라에만 들어오면 이건 완전히 불문학 특유의 무슨 이론으로 바뀌어버리곤 합니다. 이게 사실은 그렇게 어렵기만 한 얘기도 아닌데 그래요.
80년대 후반에 강원대학에 계신 한 교수와 얘기를 하다가 푸코의 책 중에서 ‘감시와 처벌’을 번역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이렇게 돼서 제가 번역을 했습니다. 그 때도 출판사를 잡지 못해서 결국 강원대 출판부에서 책이 나왔어요. 그리고나서 89년부터 하버드대학의 인권 프로그램에 가 있는데, 그분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푸코 논문집을 만들려고 하는데 함께 해보자는 제의였어요.
그래서 내가 그분에게 그랬어요. 한국에서는 푸코를 불문학 특유의 현학적인 얘기로 논하는데 나는 그게 싫다, 푸코보다는 차라리 내가 미국에 와서 에드워드 사이드란 사람의 책을 봤는데 이 책이 굉장히 재미있다, 그렇게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오리엔탈리즘’이 번역돼 나온 뒤에도 한참동안 국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드물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에서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를 좀 더 쉽게 써서 출판사에 보냈는데, 아직도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도시락, 자전거, 카피레프트…
화제가 빈센트 반 고흐에서 아나키즘으로, 인문학의 위기로, 국가주의로 종횡무진하는 사이에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대로 간다면 밤 새워 얘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제는 화제를 좀 더 가볍고, 좀 더 현실적인 데로 돌려야 할 것 같다.
─ 박교수는 원래 미술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부친이 반대하는 바람에 법대로 진학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습니다만.
“그 때는 다들 그랬어요.”
─ 법대에 들어간 것은 타의였다고 해도, 노동법을 선택한 것은 자의였지요?
“노동법밖에는 달리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웃음). 제가 노동법을 한 게 75∼76년이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노동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노동법 강의도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때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노동 야학을 했었는데….”
─ 야학이요?
“대학원에서 노동법을 공부하면서 노동문제에 관심있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 학생들은 또 교회나 성당같은 데에 야학을 만들어서 노동자를 가르치고, 나도 가서 가르치고 그랬어요. 그런 재미로 노동법 공부를 했었지요. 그러다가 81년에 전임이 됐고, 운좋게 지금까지 선생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원래 댁이 부르주아 집안이었습니까?
“부친이 초등학교 선생이셨습니다. 4·19 이후에 교원노조 활동을 좀 하셨고, 5·16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시절을 좀 불우하게 보낸 편이지요. 부친이 교사셨던 덕분에 독서는 많이 할 수 있었어요.”
─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산다고 들었습니다만, 좀 소개해주시죠.
“글쎄요,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데…. 시골에 살면서 집에서 밭농사를 좀 짓는 게 다른가…”
─ 식탁에 오르는 음식 재료를 직접 경작하시는군요?
“그래요. 이제 겨울이니 올해 농사는 끝났습니다.”
─ 언제부터 그렇게 해왔습니까?
“시골 집으로 이사한 것은 얼마 안 돼요. 곧 완전히 자급자족을 할 채비를 하고 있어요.
─ 자전거와 도시락 얘기도 들었는데요(웃음).
“아, 그거요? 교수가 된 이래 특별한 점심 약속이 없는 한 집사람이 싸주는 도시락을 갖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미국과 영국에서 몇 년간 살면서도 자가용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구요. 운전면허도 물론 없습니다. 그 얘기는 10여년 전에 쓴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는 책에 나와 있어요.
그 책 제목을 원래는 어떤 남미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사회주의는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고 붙였었는데, 출판사 측에서 사회주의란 말을 행복으로 바꿨어요(웃음).”
─ 그렇게 살기로 원칙을 세운 겁니까?
“글쎄, 나름대로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돈이 좀 생기면 운동단체나 그런 데 주고, 그냥 막 쓰는 편입니다. 이번 책도 인세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출판사측에 주기로 했어요. 그 책을 낸 ‘소나무’라는 출판사가 조합공동체로 운영되는 곳이거든요.”
─ 책을 써서 인세를 전혀 안 받는다는 말입니까?
“전혀 없어요. 내가 지금까지 쓴 책이 20여권 되는데, 지금까지 책을 써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요. 미국에서 일고 있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이라고 들어봤지요? 저작권(copyright)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건데, 나도 그 취지에 찬성하거든요.”
─ 저작권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겁니까?
“무엇에 대해서 책을 쓴다는 게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의 독창적인 것이냐, 이런 얘깁니다. 다시 빈센트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까 얘기한 방송 진행자가 ‘박교수만의 독특한 고흐 해석’이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부정했어요. 아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 중에서 내가 독창적으로 쓴 부분은 거의 없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했던 얘기들이다, 이랬어요.
나는 내가 쓴 책이라도 그것이 나의 권리,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써서 번 돈을 개인적인 용도로 쓰지 않았어요. 97년에 ‘법은 무죄인가’라는 책으로 백상출판문화대상을 받았는데, 그 때 받은 상금도 학회에 다 내놨습니다. 내가 받는 교수 월급만 해도 다 쓸 방법이 없을 정도로 많아요.”
다면체적인 인간
─ 통념상 돈이란 건 항상 모자라는 것 아닙니까?
“나는요. 한국강사노동조합, 강사협의회에서 시작해서 시간강사노동조합에 강연도 하고 글도 쓰고 그랬는데, 교수 월급을 절반으로 깎고 지금의 교수 수만큼 강사를 채용하자고 주장해왔습니다. 똑같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면 자격은 다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교수라고 300만∼400만원씩 월급을 받고 누구는 그 10분의 1도 안되는 30만∼40만원밖에 안 주느냐, 세상에 이런 임금착취가 어디 또 있습니까?”
─ 오늘, 다른 교수님들이 좋아하지 않을 말만 골라서 하시네요?(웃음)
“교수 월급을 절반으로 깎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아내도 나만큼 바쁜 사람인데 밖에 나가 주로 돈쓰는 일을 하고 다녀요(웃음). 참교육학부모회라든가 환경운동, 이런 데로 뛰어다니죠. 그렇게 둘이서 쓰고 다녀도 월급이 남아요. 그래서 20년 전세살이하다가 얼마 전에 시골에다 몇천만원짜리 집도 샀잖아요? 땅도 100평쯤 되고, 아주 살만한 집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나를 기준으로 본다면, 책 사보는 것말고는 교수가 돈 쓸 일이 정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월급에서 절반까지는 안 되더라도, 내가 꼭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곳은 돕습니다. 그리고 노동단체 쪽에 강연해주는 것 외에는 정부나 기업체 쪽에서 오는 강연 요청이나 연구비 지원은 아예 받지 않구요.”
점심식사 뒤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저녁 6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끝났다. 박교수의 저녁 강의 때문에 더 붙잡을 수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뷰로는 꽤 장시간을 한 셈이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뭔가 모자란 듯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는 지금까지도 그런 느낌은 계속 남았다.
기자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박홍규’라는 사람은 꽤 다면체(多面體)적인 인간이라는 점, 그 각각의 면들을 기자가 다 구경하지 못했다는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몇 마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지만 다면체적인 인간이면서도 그 각각의 면들이 모두 한 군데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얘기할 때에나 아나키즘을 주장할 때, 사법제도 개혁과 인문학의 위기를 논할 때, 심지어 월급 얘기를 할 때에도, 일견 전혀 무관해보이는 각각의 화제들은 결국 하나의 초점,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모아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기자는 아직 잘 모르겠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엔 척박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서, 그가 꿈꾸는 이상이 과연 얼마만큼의 현실성을 가질 수 있을는지를.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노동자가 빈센트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고, 직접 그려볼 수도 있다고 적극 권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우리에게 참 좋은 일이라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