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교과서’ 넘고 ‘월드컵’ 거쳐 ‘02년 신체제’로”

최상용 전주일대사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4-09-03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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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교과서 왜곡은 건전한 한·일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
    • 일본의 과거사 사과는 무라야마 담화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 한국과 일본은 군사교류를 포함한 각종 교류를 늘려야 한다.
    •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해야 한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끊임없이 상대를 경멸하고 불화하는 세력들은 틀림없이 영토를 근접하고 상호 연관된 것이 많은 세력이다”라며, 이를 ‘사소한 차이점에 대한 과도한 집착(Narcissism of minor differences)’으로 부른 바 있다. 프로이트의 지적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되는 한일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김대중 정부 출범은 한일관계의 복원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일관계는 일본측의 일방적인 한일어업협정 폐기로 인해 출렁거린 후, 김영삼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함으로써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어 김영삼 정부 말기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만기가 도래한 한국 채권에 대해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았고, 설상가상 인도네시아의 경제위기로 위기를 맞은 한국은 IMF 관리체제로 전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일 신어업협정을 맺고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는 등 한일관계 복원에 주력했고, 덕분에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도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일복 극우인사들이 펴낸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다시 삐걱거렸다. 김대통령이 추진해온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서도 일본은 일본인 납치문제 등을 거론하며 북한과의 수교를 미루는 등 협력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5월31일부터 역사적인 한일월드컵 대회에 들어간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한일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최상용(崔相龍·60) 고려대 정경대 교수(정치사상사)는 한일관계가 요동치던 2000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주일대사를 지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최 전대사는 일본 아사히신문의 유명한 국제문제 대기자인 후나바시(船橋洋一)씨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인물.

    최 전대사는 1965년 일본으로 유학 을 떠났으며, 귀국후 고려대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을 연구해왔다. 고려대에서 그를 만나 한일문제를 어떻게 보고 풀어나가야 할지 들어보았다.



    -주일본 대사로 근무하며 이룬 성과 중에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 재임중에 한일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실천이 저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한국어를 일본 대학입시 외국어 과목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일본의 대학입시 제도에는 과거 한국에 있었던 예비고사처럼 대학입시센터에서 실시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시험의 외국어 과목에는 영어·독어·불어만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영·독·불어 중에 한 언어를 택해 시험을 보는 것이었죠. 그러다 수년 전에 아시아 언어 대표로 중국어가 추가됐습니다. 그리고 올해 1월에 치러진 시험부터 다섯번째로 한국어가 추가되었습니다. 이제 일본의 고등학생들은 영국·독일·프랑스·중국·한국어 중에 하나를 택해 시험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대학입시 수능시험에는 일본어가 선택과목인 제2외국어로 들어가 있으니, 당연히 한국어가 일본 대학입시 과목에 들어가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어 시험을 본다고 해서 미국이나 영국에서 한국어 시험을 치르지 않습니다. 솔직히 한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로 봤을 때 일본 대학입시 과목에 한국어가 들어갔다는 것은 ‘뜻밖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어를 일본 대학입시에 집어넣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한국어를 대입 과목으로 채택하는 데 대한 일본 내 반대가 만만치 않았죠. 대국 러시아어, 남미의 공용어인 스페인어, 유럽 주요언어인 이탈리아어도 입시 과목이 되지 못했는데, 어찌 한국어부터 집어 넣느냐며 반발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어를 대입 과목에 넣게된 데는 모리 요시로(森喜郞) 일본 총리의 도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모리 총리와 저는 한국어를 대입 과목에 넣기로 합의한 바 있습니다. 덕분에 한국어는 거론된 지 1년 만에 대학입시 과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중국어가 대학입시 과목으로 채택되는 데 5년 걸린 것에 비하면 아주 짧은 기간입니다. 모리 총리는 참 인정이 많은 분인데, 과소 평가된 면이 없지 않아요.”

    -일본에서는 한국보다는 ‘조선’이라는 말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는 우리말을 조선어라고 하고 있고요. 그러니 한국어가 아니라 조선어란 이름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맞아요, 일본에서 우리말 명칭은 한국어, 조선어, 코리아어, 한글, 그리고 남북한간에 중립을 취한다고 해서 만들어진 조선·한국어 등 다섯 가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일본문화에서 우리말을 가리키는 친근한 명칭은 ‘조선어’입니다. 일본 문부성은 조선어로 이름을 정하려고 했지요. 그래서 마쓰무라(松村謙三) 문부상을 만나 ‘언젠가 한반도는 통일되는데 통일의 중심은 한국이 된다. 그러니 한국이라는 용어를 선취(先取)해라. 한국어를 입시과목으로 택하지 않으면 모를까, 이왕 택하기로 했으면 한국어로 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이름이 정해졌지요. 이제 일본에서 우리말을 가리키는 명사는 한국어로 통일될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게 된 것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겠지요.

    “그럴 겁니다. 일본 정부도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결의가 대단하니까요.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회담을 갖고,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구축한다는 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한일 파트너십 선언은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일 파트너십도 한국어를 대입과목을 채택하게 한 요인일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1998년 10월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깁니까.

    “그럼요. ‘98년 체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한국과 일본이 수교한 것이 1965년입니다. 일본 학계에서는 한일 국교정상화부터 1997년까지의 한일관계를 ‘65년 체제’라 하고, 한일 파트너십 선언 이후로는 ‘98년 체제’로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일관계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일본에서는 왜 역사 교과서 왜곡이 일어납니까. 최근에는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인 ‘최신일본사’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또 다시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최교수께서 대사로 근무하실 때는 중학교 검인정 교과서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왜곡 파문이 적지 않았지요.

    “저는 700일간 주일대사로 근무하며 100여 차례 공개강연회를 가졌습니다. 대개 일본의 자치단체와 지역 언론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강연회에 초청받았는데, 그때마다 역사문제를 거론했습니다. 한일 파트너십 선언 제10항에는 한일공동 역사연구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細川護熙) 총리가 만났을 때도 양국은 역사 인식을 공유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런 요지로 연설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기로 한 역사 인식이 무엇이냐? 나는 역사인식을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역사 인식은 두 가지 지적(知的) 작용의 결합으로 보는데, 첫째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확인된 역사적인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나는 첫째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역사학자인 랑케(Ranke)도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신이다(A historical fact is a God)’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둘째, 역사 해석은 확인된 사실(史實)을 토대로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너무 자의적으로 이뤄져 백인백색(百人百色)의 해석이 난무해서는 안된다. 역사 해석은 유네스코 국제학계의 합의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왜곡하고 감춰버리는 것이 바로 자의적인 역사 해석에 해당하는데, 바로 이러한 것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역사는 모래 위에 쓴 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일본 지식인들은 사실과 논리를 갖고 비판하는 것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그들도 그들이 행하는 역사 왜곡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으로 기대합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새로운 역사 교과서’라는 제목을 붙여 후쇼사(扶桑社)를 통해 출간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문제였습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왜곡 내용은 충분히 고쳐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측은 1999년 일본에 존재하는 신화를 애국주의 차원에서 확대 해석한 ‘국민의 역사’라는 책을 만들었지요. 이 책은 황국사관과 천황주의를 짙게 깔고 있지만, 교과서는 아닙니다. ‘국민의 역사’에서 드러난 사관을 토대로 지난해 출간된 것이 ‘새로운 역사 교과서’란 제목을 붙인 중학교 역사 교과서입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이미 ‘국민의 역사’를 통해 그들의 사상을 극명히 드러냈기 때문에, 그들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만든다고 하자 논란이 일었습니다. 일본의 각급 학교 교과서는 국정이 아니라 검인정제인지라, 누구든지 만들어 검정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과서가 일본에서 교과서로 채택되면 안되지만 우리가 통과를 시켜라, 시키지 말아라 하는 것은 내정간섭에 해당합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신청했을 때 일본 문부성은 137군데를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문부성이 그러한 지시를 내릴 때까지 내정간섭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는 뒤에서 움직여야 했습니다.”

    -뒤에서 어떻게 움직였습니까.

    “일본 문부성에는 관련 단체를 지도하는 ‘지도요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도요강 중에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어렵게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인국(隣國, 이웃나라) 조항’이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표기된 역사 왜곡은 인국조항을 발동해 고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부성이 발동할 수 있는 인국조항은 강제력이 있는 강제조항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부성은 인국조항을 발동해 137군데를 수정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137군데나 고치라고 지시하는 것은 사실 검정 자체를 포기하라는 뜻인데, 새로운 역사교과서 모임은 검정 통과 자체를 목적으로 했으니 내용을 수정해 검정을 받아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업무 협의’라는 명목으로 일시 귀국해 잘 나가던 한일관계가 2∼3달 정체되었습니다.”

    -그러나 검정 과정에서 수정됐다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도 우리를 분노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는 한일합방을 할 때 조선인 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물론 엄격히 보면 일진회 같은 한줌도 안되는 매국노들이 합방에 찬성했으니 합방을 받아들이는 조선인이 있었다는 표현은 사실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한 일진회조차도 강압이나 회유를 받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서 25군데, 다른 역사 교과서에서 10군데 등 도합 35군데를 더 고치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일합방을 받아들이는 조선인도 있었다는 문구는 삭제되었습니다.

    그 교과서에는 ‘일본은 신라시대 한반도에 복속국을 두었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식민지’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무가(武家)정권을 수립한 에도시대(1603∼1867) 초기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일본에 문화를 전달해주는 전수자(傳授者)였는데 복속국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한국을 짓밟는 것이라고 항의했고, 결국 그들은 복속국이란 말을 ‘정치적 영향력’이란 표현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국 지식인 중에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교과서도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도 솔직해지자는 의견이 있는데요.

    “우리의 역사 왜곡 문제는 이미 산케이(産經)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 왜곡을 지적하는 만큼 우리도 스스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점검하면서 상대를 비판해야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항일(抗日)이든 친일(親日)이든 먼저 지일(知日)부터 한 후에 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로 삐걱대긴 했지만 한일 양국간 교류는 확대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한일 교류사는 일본의 관점에서는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황실 중심의 교류사입니다.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옛 칸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을 이임할 때 저희 부부는 천황 부부와 20여 분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제가 ‘천황의 역사 발언에 대해 한국내의 반응이 좋습니다’라고 하자, 천황은 ‘사실인 걸요…’라고 하더군요. 칸무 천황은 일본에 율령제도를 도입한, 일본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천황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한반도를 거쳐 중국식 율령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둘째는 세종 11년(1429)부터 18세기까지 계속된 조선통신사 등을 통한 교류입니다. 거의 선비들로 구성된 통신사 사절단은 대개 300∼500명으로 편성돼, 6개월에서 1년까지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현대의 정보시대에도 500 여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간다고 하면 톱뉴스일 텐데, 교통수단이 열악했던 시절에 500여 명이 일본에 갔으니 얼마나 큰일이었겠습니까. 일본에 도착한 후 이들은 각 번(藩)의 대접을 받으며 처음에는 교토, 도쿠가와 이후에는 도쿄까지 갔습니다. 이때 이들이 유숙하던 객사에서는 각종 문화교류가 빈번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선진문물을 접하는 대단한 행사가 아닐 수 없었지요.

    셋째가 식민지 시대의 교류로, 우리로서는 가장 비참한 기억입니다.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전수자인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데 대해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낍니다. 그러다보니 흔히 한일 교류사 하면 식민지 시대의 교류만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 천황에 영양을 끼친 사실과 조선통신사 등을 통한 문화 전수자로서의 교류사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는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계기로 한 최근의 교류입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총리 시절 이래 양국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한일공동연구포럼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월드컵이 열리는 올해에 양국 정상이 ‘국민교류의 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올해를 ‘한일국민교류의 해’로 정해 교류를 더욱 확대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일간에는 하루에 일본에서 7000여 명, 한국에서 3000여 명이 각각 상대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1965년 국교를 정상화한 직후 1년간 양국 사이를 오간 사람의 숫자가 1만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하루에 그만큼의 사람이 양국 사이를 오갑니다.

    요즘 일본의 20대 사이에서는 한국 선호도가 70%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김이나 김치를 맛보기 위해, 간단한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 대한 차별의식은 대개 공교육보다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사교육에서 형성됩니다. 공교육에서는 아무래도 특정 나라를 비난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일본 가정에서는 한국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이 줄어들고 있어요. 양국 국민들 간의 교류는 더욱 늘어나야 합니다.”

    -저도 일본에 몇 번 다녀왔습니다만, 일본에 가보면 배울 점도 많아, 일방적으로 일본을 비판만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일본이 개국으로 가기 전인 에도 중기(1800년대 후반)까지는 우리가 일본에 문화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일본이 먼저 개화했다고 식민지로 삼았으니 문화 전수자인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문화 교류는 ‘특정 시점에서의 우열’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는 매우 상대적인 것이어서 우월한 쪽의 문화도 그렇지 않은 쪽의 문화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저는 문화를 상호학습의 긴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화 교류는 상호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 더욱 증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교류를 확대하려면 한일간의 과거사 정리가 필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식민지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토까지도 잃었습니다. 즉 그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 땅을 폴란드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전범국인 일본은 영토를 잃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소련이 점령한 쿠나시리(國後) 등 북방 4개 섬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잃은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키나와를 반환받을 때 일·중 간에 영유권이 불분명하던 센카구(尖閣)섬까지 돌려받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독도마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지요. 일본이 독일만큼만 했어도 동북아의 정치 질서가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이 독일처럼 과거사를 청산하기를 기대해 왔습니다만,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켜왔습니다. 제2차대전에서 패전하고 나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지만,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은 강력한 반공(反共) 정권이었고, 일본을 항복시킨 미국 또한 반공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원수는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않는 것이 일본 국민을 미국으로 기울게 하고, 반대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에 대항케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천황은 (공산주의를 막는) 20개 사단에 필적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여러 정파 중에서 그래도 우리의 정서에 와닿는 말을 하는 쪽은 좌파입니다. 2차대전 패전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15일,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총리가 된 무라야먀(村山富市)는 일본 국회에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라고 연설했습니다. ‘무라야마 담화’로 명명된 이 연설은 우리나 중국의 요구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전후 자기 성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담화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했습니다. 그러다 가해자는 일본이고 피해자는 한국이었다고 명시한 것이 1998년 10월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발표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에는 ‘오부치 총리대신은 …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비록 독일식으로 과거를 청산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으로 양국은 어느 정도 과거사 문제를 매듭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김대통령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습니다.”

    -패전으로 영토를 상실한 바도 거의 없고, 한국처럼 침략했던 나라에게 영토를 넘겨 준 것이 전혀 없는데 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합니까. 그리고 역사 교과서 왜곡은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러한 일본 극우파의 행동은 한일 파트너십을 퇴행시키는 행위이고 무라야마 담화를 뒤엎으려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존중하듯, 일본의 극우세력도 우리의 존엄성을 존중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미래로 주제를 돌리겠습니다. 얼마 후 한일 월드컵이 열립니다. 2002월드컵은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월드컵대회일 뿐만 아니라 역사상 최초로 두 나라가 공동 개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몇 차례 유럽을 여행하며 파리와 런던 등을 보고 나니 북유럽이나 남유럽의 도시는 파리와 런던 그리스 로마의 아류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베이징(北京)과 도쿄를 방문한 서양인에게 서울은 두 도시의 아류로 비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북아의 핵심국가는 한·중·일인데, 그중 한국과 일본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공유하고 똑같이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자기 나라와 한국·일본을 비교할 것이고, 공동개최도 눈여겨볼 것입니다.

    월드컵은 한국을 알릴 좋은 기회입니다. 사실 구미인들은 한국을 중국의 일부이거나 일본과 비슷한 나라 정도로만 생각해왔습니다. 다행히 금세기 들어 우리의 예술단이 유럽을 순방하며 성공적인 공연을 치러냈습니다. 르몽드를 비롯한 유럽 언론은 ‘한국인의 불타오르는 영혼을 느꼈다’고 평가했는데, 이러한 느낌이 한국을 중국 일본과 다르게 인식시키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중국으로 구성된 동북아는 결코 작은 세계가 아닙니다. 세 나라가 차지하는 경제력은 세계 GDP의 22%에 이릅니다. 인구대국인 중국을 빼고 한국과 일본의 인구만 합쳐도 서유럽 인구에 육박하는 2억명에 이릅니다. 이렇게 큰 세계를, 서양인들은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다시 바로보게 될 것입니다. 월드컵을 통해 유럽인들은 ‘한국과 일본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까 98년 체제를 말씀하셨는데, 2002년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다면 ‘02년 체제’란 말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아- 있고 말고요. ‘98년 체제’를 완성해 한일 월드컵이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고, 어쩌면 월드컵 이후 한일관계가 진일보해 ‘02년 체제’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요. 한국과 일본은 역사문제로 인해 언제나 삐걱대지만 그같은 일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월드컵 성공 개최는 한일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최교수께서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FTA를 해야지요. 한일 자유무역협정은 오래 전부터 양국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연구해 왔는데, 협정을 맺는 것이 양국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국의 기업인 포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도출됐습니다. 이에 따라 FTA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가 양국 정부에 보고된 것으로 압니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도 김대중 대통령과 FTA를 논의하자는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나라 사이의 역사적인 반감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제교류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한국과 일본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경제적인 상호 의존을 확대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한일 FTA 체결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FTA 체결에 적극적인 것은 중국을 의식한 행동이 아닌가요. 한국과 중국이 더 이상 가까워지기 전에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세를 확대하자는 의도가 깔려있지는 않은가요.

    “그런 시각은 신냉전주의적이지 않은가요. 이념에 기초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해요. 과거 일본이 내걸었던 대동아공영권도 있기 때문에…. 과거의 사건을 교훈 삼아 미래를 지향하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해보자는 것이지요. 아직 중국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먼저 한국과 일본이 FTA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만은 왜 포함시키지 않습니까.

    “경제외적인 이유, 중국과의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겠지요. 동북아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자고 FTA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은 경제통합을 시작으로 군사통합(NATO) 화폐통합(유로화)을 거쳐 EU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일 FTA도 유럽연합과 같은 동북아연합 출범을 목표로 한 것입니까.

    “그것은 해봐야 압니다. FTA가 잘 되면 유럽처럼 갈 수도 있는 것이고, FTA가 잘돼도 양국 국민들이 원치 않으면 가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니 그러한 목표를 갖지 말고 FTA가 양국에게 도움이 되니 이것부터라도 조금씩 해보자는 것입니다.”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한국과 일본 해군이 해오던 해상 구조훈련이 중단되었습니다. 한일간 군사교류는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과거에도 해왔으니 앞으로 해나가야지요. 군사교류도 필요하고 경제교류·문화교류도 다 필요합니다. 한국이 일본과 군사교류를 확대하는 것이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막는 길입니다. 일본도 주변국들과 사이가 좋아야 군사대국화 경향을 수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헤겔 철학의 핵심은 상호 인정(mutual recognition)입니다. 인간관계든 국가관계든 서로 인정해야 발전합니다. 서로 인정하면 평화가 이뤄지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도 ‘역사의 종언’에서 ‘인생은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인데, 사회주의 국가들은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는 데 실패했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중 간의 협력은 어렵겠지요. 일본도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천황까지 나서서 칸무 천황을 거론하며 한국을 잡아끄는 것은 아닌가요.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대국간의 경쟁의식이 있어, 한국-일본 같은 협력 관계는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동북아의 안정을 위해서 우리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과도 가깝고 중국과도 가까운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 간에는 상당히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것을 활용하면 그만큼 협력할 기회도 늘어나겠지요.

    “일본을 아는 한국 지식인들은 두 나라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제3국에 나가서도 외모와 정서가 비슷하기 때문에 두 나라 국민들은 쉬 가까워지고 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사이에는 다른 점도 많습니다. 다른 것을 인정할 때 서로 상대를 인정하게 되고, 그 인정에서 이해와 존중이 나옵니다. 이질성에서 출발했을 때 발견되는 동질성은 반가운 것이나, 동질성에서 출발해 발견하게 되는 이질성은 서로를 힘들게 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협력해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지도부는 북한과의 교섭문제에 적극적입니까.

    “저는 일본 지도층들에게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남북한이 똑같이 일본과 경제협력을 하자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한국이 일본과 협력하면 북한은 외면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도 일본과의 교류를 바라고 있다. 일본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10억달러를 투자하고 있으나 이를 더 늘려야 한다. 일본은 경제력에 비해 국제무대에서 정치력이 미약한데, 남북한 투자하는 기회를 이용해 정치력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아라’라고. 일본은 북한과의 교섭에 더욱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끝으로 가장 상투적이면서도 궁금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적입니까 친구입니까. 인접국가끼리는 협력한 역사도 길지만 싸우고 다툰 역사도 짧지 않습니다. 이런 의문은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웃 나라가 쑥쑥 크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국제관계의 상식입니다. 둘째, 현재 일본은 1인당 GDP가 3만5000달러 선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절반 가까운 1만9000달러로 줄어들어도 일본은 여전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일본인들은 한국이 자라는 것을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일본인의 뇌리를 지배했던 두려움은 한반도 전역이 공산화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에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기(赤旗)가 휘날리는 ‘부산적기론’이 일본이 가상하는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에 대해 훨씬 덜 적대적인 한국이 통일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은 북한이 통일의 주체가 되는 것보다는 한국이 주체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이 대세가 돼가는 한 일본은 한국 주도의 통일을 방해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친구로 인정하는 한 일본도 우리를 친구로 바라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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