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김종필 중령은 정군 대상이 되어야 할 장성들의 이름을 줄줄이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어서 더 놀라운 말이 나왔다.
“정군운동, 숙군운동은 일종의 양동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 알려진 것은 숙군형식이지만, 저희가 정말 하려는 것은 혁명입니다. 사실 저는 4·19혁명 전에도 혁명에 대해서 고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후 시국이 흘러가는 걸 보니 혁명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구한 날 시위가 일어나고 대학생들이 판문점에 가 통일을 외치고 있는 현실은 선배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이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젊은 장교들이 나서서 혁명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리더는 존경하는 박정희 소장입니다.”
그날 김종필 중령은 참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혁명이 성공하면 중앙정보부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혁명과 개혁의 전위조직으로 삼겠다는 거였다. 자기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 일을 꼭 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언제가 D데이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혁명이 끝나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만나서 다시 이야기하지요.”
1961년 5월16일 새벽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 나는 해군 장교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세운 조그마한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육군본부와 이태원 사이에 있었다.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은 총소리였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였다. 당장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혁명이 성공할 것을 예감하였다.
혁명이 일어난 지 약 2개월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JP는 중앙정보부를 만들려고 하는데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JP는 나에게 언론 및 사회, 교육 담당 고문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미련 없이 해군을 떠나 혁명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일선 정치현장을 둘러보았다. 주로 JP와 함께 정치인들을 만났는데,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그의 설득력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야당의 중진들도 그와 30분 정도 대화하고 나면 그의 논리와 생각에 설득되었다.
요즘도 다른 사람들에게 6대 국회 시절의 박대통령을 거론할 때 나는 ‘박통’이라는 말 대신에 ‘그분’이라는 표현을 쓴다. 당시의 박대통령은 존경할 만한 행적과 자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변한 것은 7대 국회 초반을 지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초창기에 매우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였다. 6대국회 후반기 내가 재경위원장을 할 때의 일화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