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정보혁명을 넘어서

  • 피터 F. 드러커

    입력2007-01-17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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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천년의 세계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일찍이 갈브레이스가 설파했던 ‘불확실성의 시대’를 넘어 ‘총체적 불가지(不可知)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도대체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신동아’는 세계 석학들이 보는 새 밀레니엄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순서는 미래를 꿰뚫는 혜안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가 보는 ‘정보혁명의 미래’다. 2000년에 91세가 되는 피터 드러커 박사는 수많은 거대 기업의 경영 컨설턴트로, 30여 권에 달하는 경영서의 저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원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러나 현재 엄청난 기세로 기존 틀을 바꾸고 있는’ 전자상거래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자신의 신조어인 ‘지식노동자’의 앞날을 조망하고 있는 이 글은 미국의 유서 깊은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최근호에 실린 드러커 박사의 기고문을 전문 번역한 것이다. 》

    사람들은 ‘정보 혁명’이라는 실로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제 막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충격은 ‘정보’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 충격은 ‘인공지능’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의사결정, 정책·전략 수립에 활용되는 컴퓨터나 전산처리 기법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 충격은 그야말로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으며, 10∼15년 전만 해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았던 전자 상거래(e-commerce)에서 비롯됐다.

    전자상거래는 이제 범세계적인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놀랍게도 전문 직업까지 유통시키는 하나의 주요―아마 최종적으로도 가장 중요한―창구가 됐다. 이 전자상거래는 ▲경제, 시장, 그리고 산업구조 ▲상품과 서비스 및 그 유통 ▲소비계층의 세분화, 소비자의 가치관, 소비행위 ▲직업과 노동시장 등에 심오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하지만 전자상거래가 가져온 가장 큰 충격은 우리 사회와 정치,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과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보는 시각이 준 충격 아닐까?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신종 산업이 빠른 속도로 등장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미 생명공학이 모습을 드러냈고 어류양식도 등장했다. 앞으로 50년 안에 어류양식은 바다에서 수렵·채취 경제를 영위해가는 인간의 현재 지위를 ‘해양 목축업자’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약 1만년 전에 이와 비슷한 혁신이 땅 위에서 수렵·채취 경제 활동을 하던 인류의 조상을 경작자나 목축업자로 바꾸어놓은 것을 상기해 보라.

    난데없이 신기술이 등장해서 신흥 주력산업군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신기술들이 머지 않아 등장할 것이라는 개연성은 아주 높다. 아마 확실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기술도―그리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어떤 산업도― 컴퓨터나 정보기술과는 별반 관계가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생명공학이나 어류양식에서 보듯이 나름의 독특한, 기대도 않던 기술로부터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건 단지 예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1455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 혁명 이후 지금까지 500여년 동안 신기술에 바탕을 둔 몇몇 ‘혁명’들이 걸어온 궤적을 정보혁명도 따라 가리라는 가정 아래 내린 예측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보혁명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산업혁명과 비슷한 과정을 밟으리라는 가정이다. 실제로 지난 50년 동안 정보혁명은 산업혁명이 초창기에 보여준 것과 정확하게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산업혁명과 정보혁명

    그런 점에서 정보혁명은 현재 1820년대의 산업혁명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1820년대는 제임스 와트의 개량형 증기기관(1776년에 처음 제작됐다)을 산업 활동, 구체적으로는 방적기계에 처음 응용한 1785년에서 약 40년이 지난 시기다. 이 증기기관이 1차 산업혁명을 일으켰듯이 컴퓨터는 정보혁명의 방아쇠가 됐고, 나아가 그 상징이 됐다.

    오늘날 사람들은 경제학 사상 정보혁명만큼 빨리 진행되면서 큰 영향을 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업혁명도 (지금의 정보혁명과 같은 발전 단계에서 보면) 정보혁명만큼 빠르게 진행됐으며, 더 크지는 않더라도 정보혁명에 비견할 만한 영향을 주었다. 산업혁명은 18세기와 19세기 초에 가장 중요한 소비재인 섬유 생산분야에서 시작돼 지체없이 대다수 제조업 부문을 기계화시켰다.

    정보혁명의 기본 구성요소인 마이크로 칩의 가격은 18개월마다 절반으로 떨어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있다. 1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기계화된 제품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면직물 가격은 방직을 기계화한 18세기부터 50년 사이에 90%나 떨어졌다. 같은 기간에 면직물의 생산은 영국에서만 150배 증가했다. 섬유가 1차 산업혁명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상품이긴 하지만, 종이 유리 가죽 벽돌 등 거의 모든 주요 상품 생산에 기계의 힘을 빌리게 됐다.

    기계화는 소비재에 그치지 않았다. 철과 철물―예를 들어 철사― 생산도 섬유산업과 같이 빠른 속도로 기계화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였으며, 비용과 가격 그리고 생산에서 직물과 같은 경로를 밟았다. 나폴레옹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에는 유럽 전역이 대포를 만드느라 증기기관을 가동했다. 증기기관에 힘입어 대포 제작이 이전보다 10~20배 빨라졌고, 비용도 3분의 2 이상 떨어졌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엘리 휘트니가 장총 생산을 기계화해서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산업혁명 초기의 40~50년 동안 공장과 ‘근로계층’의 수가 증가했다. 공장과 근로계층은 1820년대 중반까지도 영국에서조차 그 수가 미미해 통계상 별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는 그들이 이미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았으며, 얼마 안 가서는 정치적으로도 주도세력이 됐다.

    미국에 공장이 들어서기 전인 1791년 알렉산더 해밀턴은 자신의 저서 ‘제조업에 대한 보고서’에서 산업국가의 도래를 예견했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1803년 프랑스 경제학자인 장-밥티스트 세이는 산업혁명이 ‘기업가’를 낳아 경제학을 새로 써야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산업혁명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공장이나 근로계층의 탄생뿐만이 아니다. 사학자인 폴 존슨이 자신의 저서 ‘미국인의 역사’(1997)에서 지적했듯이,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한 섬유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은 노예를 부활시켰다. 사실상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노예가 조면기의―이것도 얼마 안 가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게 된다―기계소리와 함께 되살아난 것이다. 조면기를 돌리기 위해 엄청난 수의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했고, 노예 양성은 이후 몇십 년간 미국에서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산업혁명은 가족관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핵가족은 산업혁명 훨씬 전부터 이미 하나의 생산단위였다. 밭이나 가게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일했다. 그러나 공장은 사상 처음으로 노동력과 일거리를 가정 밖으로 끌어내 작업장으로 옮겼고 다른 가족 구성원은 집에 남게 됐다. 배우자가 공장 근로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특히 산업혁명의 초창기에는 아동들이 공장 근로자가 되면서 부모가 집에 남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가족의 위기’라는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위기는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해 산업혁명과 공장제도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요 쟁점이 됐다. 노동과 가족의 결별, 그리고 그 양자가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은 찰스 디킨스의 1854년 작 ‘힘든 나날’에 잘 묘사돼 있다.

    혁명의 견인차, 철도

    이러한 영향에도 산업혁명의 첫 반세기는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상품들의 생산을 기계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생산은 대폭 늘어났으며 비용은 대폭 줄어들었다. 산업혁명은 소비자와 소비재를 동시에 창출해낸 것이다. 하지만 소비재인 상품 자체는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은 생김새가 각양각색인 전통 제품들과는 달리 모양이 똑같고, 아주 뛰어난 장인이 만든 제품이 아닌 한 흔히 있었던 결함이 더 적다는 것 외에는 차이가 없었다.

    단 하나 눈에 띄는 예외라면, 산업혁명 초창기 50년 사이에 등장한 새 상품 증기선(蒸氣船)을 들 수 있다. 1807년 로버트 풀턴이 실용화한 첫 증기선의 등장 후 30∼40년 동안은 별다른 파장이 없었다. 사실 19세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해양운송에는 범선이 증기선보다 더 많이 투입됐다.

    한편 1829년에 철도가 등장했다.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발명품이 등장해 경제·사회 그리고 정치에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돌이켜보면 철도의 발명이 왜 그렇게 늦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탄광에서 수레를 옮기기 위해 궤도를 사용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 궤도 위에서 수레를 움직이는 데 사람이 밀거나 말이 끄는 것보다 증기기관으로 돌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광산에 부설된 궤도는 철도로 발전하지 못했다. 철도는 아주 독자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애초에 화물 운반을 위해 고안한 것도 아니었다. 철도는 상당 기간 승객수송 수단으로 간주됐다.

    화물 운반에 철도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30년이 지난 뒤 미국에서였다(사실 1870년대와 80년대에 막 서구화한 일본은 승객수송용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영국 토목 기술자들을 초빙했다. 지금도 일본의 철도에는 화물운반을 위한 시설이 없다). 이 화물용 철도가 실제 개통되기 전까지는 화물운송 철도는 기대 밖이었다.

    하지만 화물용 철도가 등장한 후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서방세계는 역사상 가장 큰 붐, 즉 철도건설 붐에 돌입했다. 1850년대 경제학사상 가장 끔찍했던 불황이 몰아칠 때까지 유럽에서 철도붐은 30년 동안 계속됐다. 오늘날의 간선 철도망 대부분이 이 무렵에 건설됐다. 철도건설 붐은 미국에서는―그리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시베리아, 중국 등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30년 정도 더 이어졌다.

    철도야말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혁명분자였다. 경제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심리적 거리감’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진정한 이동성을 갖게 됐고, 사상 처음으로 서민들에게도 지평선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심리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이 시대 사람들도 깨달았다. 전환기를 맞은 산업혁명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잘 묘사한 조지 엘리엇의 1871년 소설 ‘미들마치(Middlemarch)’는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자신의 마지막 역작인 ‘프랑스의 특성’(1986)에서 프랑스를 하나의 문화를 가진 국가로 만든 것은 철도였다고 주장했다. 철도를 건설하기 이전의 프랑스는 서로 고립된 지역의 정치적 집합체에 불과했다. 미국의 서부 개척사에 철도가 한 일은 불문가지이다.

    2세기 전의 산업혁명처럼 정보혁명도 아직까지는―1940년대 중반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우리 주변에 늘 존재해왔던 정보처리의 과정만 바꾸어 놓았다. 사실 정보혁명의 진정한 영향은 ‘정보’의 형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40년 전에 예상했던 정보 측면에의 파급효과는 완전히 빗나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업계나 정부에서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법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없었다. 정보혁명은 수많은 분야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던 과정을 정형화시킨 데 불과하다.

    피아노를 조율하는 소프트웨어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3시간 걸리던 일을 20분 과정으로 바꾸어 놓았다. 임금계산, 재고조사, 물품배달 일정짜기, 그리고 경제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상적 반복업무를 위한 소프트웨어도 있다. 25명의 뛰어난 전문 제도사가 50일 정도 걸릴 교도소나 병원 같은 건물의 내부배치도(난방, 상하수 배관처리 등) 제도 업무를 2∼3일 안에 뚝딱 해치워내는 프로그램이 있다. 비용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다.

    세금정산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가 있는가 하면, 병원의 레지던트 의사들에게 쓸개 적출 기술을 가르치는 소프트웨어까지 있다. 증권투자 분석을 하는 사람들은 1920년대의 선배들이 증권회사 사무실에 틀어박혀 매일 몇 시간씩 허비하던 것과 똑같은 일을 온라인으로 처리한다. 과정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단지 점차 정형화됨으로써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줄였을 뿐이다.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정보화혁명이 주는 심리적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아동의 학습방법에 던진 영향이 아마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살 정도 되면 (혹은 더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컴퓨터 기술을 눈 깜빡할 사이에 익혀서 곧 어른들을 앞서게 된다. 컴퓨터는 이 또래의 장난감인 동시에 학습도구가 됐다. 앞으로 50년 후 사람들은 “20세기 말에 ‘미국 교육의 위기’는 없었다. 단지 20세기 학교의 지도방법과 20세기 말 학생들의 학습방법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인쇄기와 그에 맞는 활자의 발명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16세기의 대학 교육에도 비슷한 전례가 있다.

    정보혁명은 여태껏 해온 우리의 일상활동을 그대로 정형화했을 뿐이다. 20여 년 전 오페라나 대학 교과과정, 작가 전집 등을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선보이기 위해 발명된 CD-ROM이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증기선의 경우처럼 CD-ROM도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전자상거래의 의미

    정보혁명과 전자상거래의 관계는 산업혁명과 철도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둘 다 전혀 새롭고, 듣거나 보기는커녕 상상도 못 했던 진전이다. 170년 전 철도의 경우처럼 전자상거래는 새로운 붐을 일으키며 우리의 경제·사회 그리고 정치에 눈에 띄게 빠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의 중서부 산업지대에는 1920년대에 문을 연 중소기업이 있다. 지금은 창립자의 손자들이 꾸려가는데, 공장을 중심으로 100마일 안에 있는 패스트푸드점, 학교나 회사의 구내식당, 병원 등에 값싼 식기류를 납품해 시장점유율이 60%에 이르렀다. 도자기는 무겁고 깨지기 쉬워 생산자로부터 멀지 않은 시장에서 팔리는 것이 과거의 통례였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이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어느 병원 구내식당이 인터넷을 검색해 유럽에 있는 제작자를 알게 됐다. 이 유럽 회사가 질이 훨씬 좋은 제품을 더 싼 값에 항공편으로 배달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지역의 다른 고객들도 거래선을 이 유럽 회사 쪽으로 옮겨갔다. 고객들은 그 물건이 유럽에서 오는지도 모를 것이고, 설령 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철도가 창조한 새로운 심리적 거리감으로 ‘먼 거리’를 지배하게 됐고, 전자상거래가 창조한 심리적 거리감을 통해서 이제 ‘먼 거리’라는 것은 사라졌다. 단 하나의 경제, 단 하나의 시장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결과 국내 시장이나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제작 판매되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일지라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제 경쟁은 국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국경은 사라지게 됐다. 모든 회사가 국제화한 경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와 더불어 종래의 다국적기업은 구식이 될지 모른다. 다국적기업은 세계 여러 곳에 ‘지역’ 회사를 두고 한정된 지역에서 생산 및 유통활동을 하는데, 전자상거래는 지역 회사나 한정된 지역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제작하고 어디서 어떻게 판매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사업상의 중요한 결정사항이다. 하지만 앞으로 20년 안에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할 것인가 하는 결정을 회사가 내릴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전자상거래를 통해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 팔고, 어떤 상품이 이 새로운 방식에 맞을까 하는 것은 아직 분명치 않다. 이는 새로운 유통 채널이 등장할 때마다 겪던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철도는 어떻게 서방세계의 심리적·경제적 지도를 바꾸었을까? 세계무역과 승객 수송에 똑같이 영향을 준 증기선은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지 않았는가? 왜 ‘증기선 건조 붐’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동네 잡화점이 슈퍼마켓으로 바뀌고, 개인 슈퍼마켓이 슈퍼마켓 체인으로 대체되고, 그 슈퍼마켓 체인이 월마트나 다른 할인점 체인으로 옮겨간 유통산업의 변화도 그 파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전자상거래로의 이행도 마찬가지로 선택적이며 예측이 불가능할 것이 틀림없다.

    틀린 예측들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25년 전 사람들은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인쇄물이 각 구독자의 컴퓨터 화면으로 전송될 것이라고 믿었다. 구독자들은 그것을 컴퓨터 화면에서 읽거나 다운로드 받아서 프린트를 한 다음 읽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CD-ROM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에 따라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신문과 잡지사들이 너도나도 온라인망을 깔곤 했는데, 여태껏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20년 전에 누군가 Amaz on.com이나 barnesandnoble.com처럼 인터넷을 통해 책을 팔고, 활자로 인쇄된 무거운 책을 배달해줄 거라고 요즘 상황을 예고했다면, 사람들은 그냥 웃어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Amazon.com과 barnesand noble.com이 바로 그 사업을, 그것도 범세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나의 책 ‘21세기 경영의 위기’(1999)는 첫 주문이 Amazon. com으로 들어왔는데, 아르헨티나에서 온 것이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보자. 10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떤 자동차 회사가 당시 막 선을 보인 인터넷이 자동차 판매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조사는 인터넷이 중고차 거래에는 주요 채널이 되겠지만, 새 차 고객들은 여전히 자동차를 직접 만져보고, 시운전해보기를 원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까지의 실정은, 대부분의 중고차가 인터넷이 아니라 중개인을 통해 거래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판매되는 새 차의 (고급 승용차를 제외하면) 절반 가량이 인터넷상에서 ‘구매’되고 있다. 자동차 딜러들은 고객이 이미 선택해 놓은 차량을 단지 배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게 고작이다. 이런 현실이 20세기에 가장 수지맞던 소규모 사업인 자동차 딜러들의 앞날에 대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는 또 있다. 미국에서 증권 투자 붐이 일었던 1998년과 1999년에 온라인을 통해 주식 매매를 하는 투자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투자자들이 온라인을 통한 매입을 줄이려는 것 같다. 미국에서 주요 투자 대상은 뮤추얼 펀드다. 몇 년 전만 해도 투자자들이 매입한 뮤추얼 펀드의 거의 절반이 온라인을 통해 거래됐는데, 이 온라인 매입 비율이 내년에는 35%, 그리고 2005년 무렵에는 20%까지 떨어지리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는 10년이나 15년 전에 ‘모든 이들이 예측했던’ 것과는 정반대 현상이다.

    미국에서 가장 급속히 성장하는 전자상거래 분야는 전문 직업인이나 경영인을 위한 일자리 알선이라는, 여태까지는 ‘상거래’로 분류되지 않던 영역이다. 세계적인 대기업의 거의 절반이 웹사이트를 통해 직원을 뽑고, 약 250만의 전문 직업인이나 경영인이 (이들 가운데 3분의 2는 엔지니어나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다) 이력서를 인터넷에 띄워놓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구인광고를 검색한다. 완전히 새로운 인력시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 현상은 전자상거래의 의미심장한 영향을 대변해준다. 새로운 유통 채널이 고객층을 바꾼 것이다. 전자상거래는 고객의 구매방법뿐만 아니라 구매상품에까지 변화를 가져온다. 소비자 행위와 저축성향은 물론 산업구조까지, 한 마디로 경제 전체에 변화를 주고 있다.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 그리고 중국 대륙을 포함한 신흥국가에서 이런 변화가 진행 중이다.

    철도는 산업혁명을 기정사실화했고 혁명은 일상생활이 됐다. 산업혁명이 일으킨 붐은 거의 100년이나 지속됐다. 증기기관 기술은 단순히 철도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1880년대와 90년대의 증기 터빈, 철도광(狂)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1920년대와 30년대 미국의 웅장한 마지막 세대 증기기관차로 이어졌다.

    하지만 증기기관과 제조업 가동의 중심이었던 기술은 더 이상 중추적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됐다. 기술의 원동력은 철도 발명 직후에 등장한 완전히 새로운 산업군으로 옮겨갔는데, 이들 가운데 증기나 증기기관과 관련 있는 산업은 하나도 없었다. 1830년대에 전신기술과 사진술이 먼저 나왔고 곧이어 광학과 농업용 기계가 나왔다. 1830년대에 시작된 새롭고 색다른 비료산업은 순식간에 농업에 변화를 가져왔다. 검역 활동과 백신 접종, 그리고 깨끗한 물 공급, 하수처리를 통한 공중 보건이 주요 성장산업이 됐다. 이로 인해 사상 처음으로 도시가 시골보다 위생상태가 더 좋은 생활공간이 됐다. 이와 동시에 마취제가 처음 개발됐다.

    이 새로운 기술들과 함께 현대적인 우편 서비스, 일간 신문, 투자 은행, 그리고 상업 은행 등 새로운 사회제도가 선을 보였다. 몇몇 예를 들었지만, 이들 중 증기기관이나 산업혁명 당시에 널리 사용된 기술과 이렇다 할 관련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 새로운 산업군과 제도들이 1850년경에는 선진국의 산업 및 경제에 주역이 된 것이다.

    이는 현재의 세계를 탄생시킨 첫번째 기술혁명인 인쇄혁명에서 비롯된 일과 아주 비슷한 진전이다. 구텐베르크가 수년간 연구해온 인쇄기와 그에 맞는 활자를 완성한 1455년 이후 50년간 인쇄혁명은 유럽을 휩쓸며 유럽의 경제와 유럽인의 심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첫 50년 동안 인쇄된 책은 대개 수도사들이 오랜 세월 힘들게 필사해온 종교 관련 소책자나 선현들의 작품이었다. 이 기간에 7000여 종의 책 3만5000권 가량이 출간됐다. 이중 최소한 6700종이 과거부터 전해오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쇄혁명의 초창기 50년이 전래의 정보나 자료를 점점 싼 값에 얻기 쉽게 해준 것이다.

    그런데 구텐베르크 이후 60년이 지나 나온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 수천 부가 순식간에, 믿을 수 없는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루터의 성경을 매개체로 하여 인쇄기술은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켰다. 인쇄기술이 개신교를 낳고, 이 개신교는 이후 20년 만에 유럽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붙인 것이다. 루터는 새로운 매체를 이용하여 종교를 개인의 삶과 사회의 중심으로 되돌려놓았다. 또 이로 인해 150년간의 종교개혁, 종교폭동 그리고 종교전쟁의 소용돌이가 유럽을 뒤덮었다.

    루터가 기독교 정신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으로 인쇄술을 사용하던 바로 그때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1513)을 출간했다. 이 책은 유럽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 않거나 옛 사람의 작품을 참고하지 않은 책으로는 거의 1000여년 만에 처음 나온 책이었다. ‘군주론’은 하룻밤 사이에 16세기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로, 가장 악명 높고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됐다.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순수 세속 소설과 과학·역사·정치 그리고 얼마 뒤에는 경제학 관련 책이 잇달아 출간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순수 세속 예술의 새로운 장인 연극이 영국에 출현했다. 예수회, 스페인 보병, 최초의 현대식 해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권민족국가 등 새로운 제도도 출현했다. 이처럼 인쇄혁명은 300년 뒤의 산업혁명과 현재 진행중인 정보화혁명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걸었다.

    앞으로 어떤 산업과 제도가 나올지 아직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1520년대에 세속 연극은 물론 세속 문학이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1820년대에는 아무도 전신이나 공중 보건, 혹은 사진을 상상할 수 없었다.

    확신은 못 하지만 앞으로 20년 안에 새로운 산업들이 등장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와 더불어 이 가운데 정보기술, 컴퓨터, 전산처리나 인터넷 업계에서 떠오를 산업은 없으리란 것 또한 거의 확실하다. 이는 역사상의 모든 전례가 암시해주고 있다. 새로운 산업이 빠른 속도로 떠오르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생명공학이 이미 우리 주변에 와 있다. 어류양식 또한 마찬가지다.

    25년 전만 해도 연어는 진미였다. 큰 모임 후의 식사자리에는 닭고기나 쇠고기가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요즘 연어는 일상적인 식품이 돼서 연회에서 선택 메뉴로 골라 먹을 수 있다. 오늘날 식탁에 오르는 대부분의 연어는 바다나 강에서 잡은 것이 아니라 농장에서 사육된다. 송어도 마찬가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많은 어류도 똑같이 사육될 것이 분명하다.

    돼지고기가 육류를 대표한다면 가자미는 대표적인 어류다. 이 가자미가 이제 막 바다에서 대량 생산될 단계에 와 있다. 이런 양식업이 유전공학을 통해 다른 새로운 어종의 개발로 이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양과 소, 그리고 닭이 가축이되면서 새로운 종이 개발되었듯이 말이다. 아마 수많은 신기술이 25년 전 생명공학이 막 떠오르려던 단계와 같은 시기에 와 있을 것이다.

    외환 리스크에 대비하는 보험처럼 탄생을 앞두고 있는 서비스도 있다. 이제 모든 기업이 지구촌 경제의 한 부분이기에, 화재나 홍수와 같은 물리적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산업혁명 초창기에 종래의 보험이 등장했듯이, 환 리스크 등에 대비하는 신종 보험이 절실하다. 환 리스크 보험에 필요한 지적 정보는 있지만, 이를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기관은 아직 없다. 앞으로 20년이나 30년 동안 컴퓨터의 등장 이후 수십년간 있었던 것보다 큰 기술의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변화가 산업구조, 경제구조 그리고 사회구조를 바꿀 것이다.

    기술적인 면으로 보아 철도의 등장 이후에 떠오른 새로운 산업들은 증기기관이나 산업혁명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업종이었다. 이 신산업들은 산업혁명의 ‘육신의 자손’이 아니라 ‘정신의 자손’이었다. 그것들은 산업혁명과 거기에 속하는 기술들이 창조해낸 의식구조가 있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발명과 혁신을 기꺼이 수용하고, 신상품과 새로운 서비스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의식구조였다.

    신사 vs 기술자

    이 의식구조는 신산업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가치관을 창조해냈다. 무엇보다 이 의식구조는 ‘기술자(technologist)’ 낳았다. 1793년에 철도와 함께 산업혁명의 주요 발명품인 조면기를 최초로 개발한 미국의 기술자 엘리 휘트니는 사회적·금전적 성공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불과 한 세대 만에 기술자는―당시까지도 자수성가형이었다― 미국 대중의 영웅이 되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금전적인 보상도 받게 됐다.

    전신기를 발명한 새뮤얼 모스를 첫 주자라고 한다면, 토머스 에디슨이 가장 빛을 발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경우 ‘비즈니스맨’은 오랫동안 사회적 신분이 낮은 이들로 간주됐는데, 대학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은 1830년대와 40년대 들어 ‘전문인’으로 존경받게 되었다.

    영국은 1850년대로 접어들자 선진 산업경제로서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해 먼저 미국에, 다음으로 독일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영국이 뒤처진 이유는 경제나 기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주된 이유는 사회적인 데에 있었다. 경제적으로, 특히 재정적으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강대국의 지위를 지켰다. 기술적으로도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었다. 현대 화학산업의 첫 산물인 합성 염료가 영국에서 발명됐고, 증기터빈도 영국에서 나왔다.

    하지만 영국 사회는 기술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술자는 ‘신사’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인들은 인도에 최고 수준의 공업계 학교를 세웠지만, 영국에서는 그런 학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상 영국보다 ‘과학자’를 우대한 나라도 없었다. 19세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국은 제임스 맥스웰을 필두로 마이클 패러데이, 어니스트 러더퍼드까지 시종일관 물리학계의 태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줄곧 ‘장사꾼’ 지위에 머물렀다(예를 들어 디킨스는 1853년의 소설 ‘쓸쓸한 집’에서 벼락출세한 제철업자를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영국은 자본금을 날릴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산업에 투자할 자본과, 또 그럴 마음을 가진 벤처 자본가의 성장에 한발 늦었다. 발자크의 기념비적인 소설 ‘인간희극’에 처음 등장한 벤처 자본가는 프랑스인들이 처음 고안했는데, 미국에서는 J.P. 모건에 의해 제도화됐고 독일과 일본에서도 은행을 통해 제도화했다. 영국은 교역에 자금줄 노릇을 하는 상업은행을 창안하고 발전시켰으면서도, 산업에 자본을 제공하는 기관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인 바르부르크와 그룬펠트가 망명해서 기업은행을 열기 전까지는 등한히 했다.

    미국이 영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21세기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 사회적으로 의식구조를 뜯어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철도가 등장한 뒤 산업경제의 견인차를 ‘장사꾼’에서 ‘기술자’ 혹은 ‘엔지니어’로 신속하게 바꿔 부른 것처럼 말이다.

    지식노동자의 미래

    정보혁명은 사실상 지식혁명이다. 자료처리 과정을 정형화한 것은 기계가 아니다. 컴퓨터는 단지 계기가 됐을 뿐이다. 소프트웨어는 지난 수세기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종래의 일을 지식, 특히 체계적인 논리로 분석하여 재조합한 것이다. 요체는 전자공학이 아니라 인식과학이다.

    다시 말해, 세계 경제와 새로 부상하는 기술에서 주도권을 견지하려면 전문 지식인의 사회적 지위와 전문 지식인이 지닌 가치관의 사회적 수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옛 인습대로 ‘피고용인’의 신분에 머무르고, 영국이 기술자들을 장사꾼으로 대접한 것처럼 전문 지식인을 대접한다면 미국도 영국과 비슷한 운명을 맞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이 부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자금줄을 대는 이가 우두머리가 되는 종래의 의식구조를 그대로 가진 채, 지식 노동자를 계속 피고용인 신분으로 묶어두기 위해서 보너스나 스톡옵션으로 매수하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다. 이런 양다리 걸치기는 신흥산업이 요즘의 인터넷 사업처럼 증시 붐을 탈 때에만 가능하다. 이에 반해 차세대의 기간산업은 종래의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고통스러운 수고를 들여야만 성장할 것이다.

    면방직, 제철, 철도와 같은 산업혁명 초창기의 산업은 발자크의 소설에 나오는 벤처 은행가나 디킨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제철업자처럼―몇 년 만에 하인 신분에서 ‘업계의 대표주자’가 된다―하룻밤 사이에 백만장자를 낳는 급성장 산업이었다. 1830년대 이후의 신흥 산업도 백만장자를 낳았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미 20년이라는 피땀 나는 노력과 경쟁, 절망과 실패, 그리고 검약하는 생활을 겪어야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앞으로 떠오를 신흥산업도 마찬가지다. 생명공학에서 이미 이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 신흥산업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지식노동자들을 매수하는 일은 말로는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신흥산업의 근간이 되는 지식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이 낳은 결실을 금전적으로 챙기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데 황금 알은 익는다 해도 더디 여무는 법이다. 이렇게 볼 때 10년 안에 (단기의) ‘주주 지분’을 목표이자 유인으로 제시하고 기업을 꾸려나가는 것은 비생산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신흥 지식산업의 성패는 어떤 방식으로 지식노동자의 관심을 끌고, 어떻게 그들을 잡아두고 동기를 부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현재의 방식으로는 지식노동자들의 물질적 욕심을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다면, 그들의 가치관을 만족시켜주고 사회적으로 인정해주고 나름의 힘을 실어주는 길밖에 없다. 그들을 하수인이 아니라 동료 이사로, 그리고 피고용인이 아닌 동업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번역/전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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