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국가를 바로 세우는 시스템 연구를 아십니까?

  •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환경학박사

    입력2007-01-23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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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른 채 무심히 사용하는 단어들이 꽤 있다고 생각한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최근까지도 ‘담론’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 그렇지만 IMF 위기를 맞으면서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 새로운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식의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막연하게나마 그 의미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하지만 막연하게나마 그 뜻을 유추해서 별불편 없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여럿 있으리라고 짐작해본다.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널리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시스템(system)’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엉망이라느니 서울시의 지하철 시스템이 어떻다느니, 우리 나라 정치시스템은 구제불능이라느니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사람들이 갖는 인상은 대체로 어떤 것일까? 어쩌면 시스템이란 단어가 붙는 집단이나 조직은 하나같이 규모가 대단히 크고, 그 내부가 복잡해서 아무도 그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그런 괴물 같은 존재로 쉽게 인식해버리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시스템이란 용어가 이처럼 일반 대중에게만 ‘잡힐 듯하면서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모호한 단어는 아닐 것이다. 필경 전문인 중에서도 과학의 여러 분과 중에서 시스템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시스템학(systemology 또는 system sciences)’이 있고, 또 시스템의 원리와 속성을 밝힌 ‘시스템 이론(system theory)’이 20세기 과학의 중요한 성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벽두에 왜 뜬금없이 시스템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부족한 연구 분야의 하나가 바로 시스템학이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시스템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없이는, 그리고 사회 지도층은 물론 일반 대중까지 시스템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없이는 우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필자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시스템 이론을 우리 사회에 접목시킬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중국은 왜 무서운 나라인가 ]

    1999년 현재 중국의 인구는 12억5000만명으로 세계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또 국토는 남한 면적의 100배에 이를 정도로 광대하다. 90년대에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줄곧 10%대를 유지해왔으며, IMF 위기로 아시아의 대부분 국가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에도 중국은 별로 영향받지 않았다.

    중국이 급격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하면서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젊은이들 사이에 서구의 퇴폐문화가 급속히 번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1990년 소련이 지상에서 사라진 이후 중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의 경제발전 속도가 지속된다면 중국의 경제력은 서기 2020년이면 일본을 능가할 것이며, 2050년에 이르면 미국마저 추월하게 될 것이다.

    이상은 우리의 이웃인 중국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 현시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가 아직은 국민소득 면에서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것이 사실이지만, 미래를 따져본다면 중국은 그야말로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호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한다면 우리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는 아닐지 적이 염려된다.

    따라서 이런 중국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약 중국의 엄청난 인구라든지 지속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 등의 가시적인 현상들만 보고 21세기 중국의 발전 가능성을 쉽게 짐작해버린다면, 그것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중국의 발전 잠재력은 전혀 다른 곳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매년 개최하는 전인대 회의와 병행해서 중앙정부 지도자들과 각 성(省)의 지도자들이 전원 참석하는 인구·자원·환경 회의를 개최하는 나라다. 전인대 회의가 일종의 정치행사라면 인구·자원·환경 회의는 국가운영 전략을 수립하는 실무회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로 친다면 매년 한 번씩 대통령과 총리는 물론 각부 장관과 지방 16개 시도의 지사들이 전원 참석하는 국가발전전략회의를 여는 셈이다.

    여기서 결정된 사안을 가지고 임지로 돌아간 성장(省長)들은 성 단위 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얻어진 결론에 의거해서 다시 시(市)-진(鎭)-향(鄕)-촌(村) 단위까지 일련의 회의가 열린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최고 발전전략이 중앙정부로부터 지방의 향촌까지 구석구석 전파되면서 범국가적인 지역발전 계획으로 성안되는 것이다(이런 시스템을 우리의 반상회 조직에 비교하면 정말 곤란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이토록 치밀한 국가관리 시스템으로 과연 무엇을 성취했을까?

    중국은 70년대부터 범국가적으로 ‘계획생육(計劃生育)’이라는 인구관리 정책을 엄격히 실시해왔는데, 그 첫 목표는 금세기 말까지 인구를 13억명 이내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목표를 달성해 세기말 현재 중국의 인구는 12억6000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21세기의 인구 증가 전망에 대해서도 서구 전문가들의 우려와는 달리 중국측 전략가들은 낙관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자국의 식량증산 속도에 맞춰 인구증가 속도를 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식량 생산이나 자연환경 보전, 국민 생활의 질 향상 등의 부문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원래의 관리목표를 달성해나가는 데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인구증가 억제 성공, 착실한 경제성장, 지속적인 개방정책 추구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은 21세기의 관리목표 달성을 위해서 착실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동안 국가 재정능력 때문에 비교적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 보전을 위해서 21세기부터는 환경보호 지출을 GDP의 5∼10%까지 끌어올리고자 1000여 개 항목을 정해서 185억 달러라는 거액을 책정하고 있다. 또 범국가적인 교육개혁을 위해서 26개 실천 목표를 수립했는데, 한 가지 예로 현재 7%대에 머물고 있는 대학진학률을 서기 2030년에는 30∼40%대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이런 중국의 국가관리 시스템은 얼핏 60~70년대 우리 나라의 개발독재식 국가관리 시스템을 연상케 한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라. 현재 중국의 국가관리 시스템은 군사독재의 산물이 아니라 그 동안 중국이 치밀하게 연구해왔던 시스템 연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현행 국가관리 시스템을 모든 것을 계획에 기초하는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시스템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우리는 중국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12억이 넘는 인구를 거느린 나라가 사회주의의 빗장을 열어 젖힌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칠 줄 모르는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다면, 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일치 단결해서 다음 세기까지 착실한 발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국가 백년대계’를 수립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국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이자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하겠다(중국을 러시아와 비교해 보라).

    [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

    역사적으로 과학에서 연구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체론, 다른 하나는 부분론이다.

    전체론이란 유일하게 실재하는 존재, 즉 사물은 전체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전체는 그 구성 부분들을 초월하는 총체이며, 부분은 단지 전체를 위해, 또는 그 전체로 인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질 뿐이다. 전체는 각 부분들의 속성에 환원될 수 없는 특유의 성질을 지니는데, 이런 성질은 오직 전체만이 가질 수 있으며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게 될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고유한 현상이다.

    예컨대 시계는 무수히 많은 나사와 톱니로 이뤄진 부품들의 집합이지만, 우리가 그 부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고 해도 그것들에서 나중에 만들어지는 시계의 속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체론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체론적인 과학사상은 16, 17세기까지 오랜 세월을 풍미했는데, 그것은 이런 전체론적 관점이 당시 사회현실과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즉 노예제도에 기초했던 왕권사회에서는 통치자가 곧 국가라는 신념이 강했는데, 전체론적인 입장이 곧 부분으로서의 노예나 국민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관점을 대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 이후 왕권과 신권이 약해지고 시민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과학계에 부분론이 등장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근대 과학은 부분론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부분론이란 전체 속에 포함된 각 부분들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그 부분을 탐구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과학사상이다. 이런 부분론에 의하면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은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며, 전체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성질을 집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부분론자들은 부분에 대한 연구만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분론에 의하면, 시계는 중요한 운동 부분인 진자와 그 진자의 힘으로 움직이는 톱니들을 세밀히 검토함으로써 그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진자와 톱니만으로는 시계를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부분론의 일환인 기계론이 시계의 기능을 충분히 증명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시계는 정교한 기계장치에 불과하고, 그 기계장치란 바로 부분론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계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체론과 부분론 중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체론과 부분론은 사물을 탐구하는 관점이 다를 뿐이지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다같이 일장일단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세기 들어서 한참이 지나기까지 과학은 거의 전적으로 부분론의 견해를 고수하면서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현대 과학의 찬란한 발전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부분론적인 관점이 지나치게 득세한 나머지 그 부작용이 나타나게 됐는데, 오늘날 대학의 학과나 병원의 진료과목이 지나치게 세분되는 현상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부분론을 고수하다 보면 자칫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20~30년대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전체론과 부분론의 한계를 직시하게 됐다. 그래서 그 양자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론을 찾았는데, 그 결과 나타난 과학사상이 바로 시스템론이었다. 시스템론은 전체와 그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 모두 실재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전체는 각 부분의 단순한 집합체나 각 부분을 초월하는 추상적 총체가 아니며, 상호 연관을 갖는 각 부분이 구성된 통일체라는 것이다.

    [ 우리 주변의 시스템들 ]

    시스템으로서의 전체는 각 부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갖는데, 이런 성질은 전체를 구성하는 순간 홀연히 나타난다. 따라서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성질과 변화 뿐만 아니라 전체 자체가 지니는 성질도 함께 연구해야 한다. 부분은 전체의 틀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또 전체는 부분을 자체의 존재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굳이 시계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시스템론에서는 진자나 바퀴의 운동을 규명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시계의 속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진자와 나사와 바퀴를 갖지 않는 시계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시계가 시계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자와 바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런 부분들이 갖지 못하는 시계 고유의 성질, 즉 시간을 나타내는 속성 때문인 바, 그것은 부분론에 의거해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시계 고유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고장난 시계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시계 속의 메커니즘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분이 전체에 기여하는 바에 대한 검토도 전체에 대한 검토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 시스템론의 견해이다.

    과학사에서 볼 때 시스템론과 시스템이라는 두 용어는 1930년대부터 사용됐다. 부분론과 전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사상으로 시스템론이 나타났고, 이런 시스템론에 입각해서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실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시스템(system)이란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이란 상호 작용하는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통합된 전체를 의미한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어떤 시스템들이 있을까?

    먼저, 사회의 가장 기본단위인 가족을 살펴보자. 가족의 구성원에는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때로는 조부모, 기타 일가친척이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성원 사이에는 분명히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부모는 부모 나름의 역할이 있고, 자식은 자식 나름의 책임이 있으며, 또 부모 자식 간에는 명백히 일정한 위계질서가 성립한다. 따라서 가족은 하나의 훌륭한 시스템이며, 가족관계는 시스템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학교에도 다양한 구성원이 존재하고 그 구성원 사이에서 많은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학교 시스템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회사나 정부도 그 각각이 시스템이며 군대나 경찰, 국제기구도 당연히 시스템에 해당된다. 각종 조합이나 시민단체, 동창회나 향우회 모임 등도 조직의 형태를 지니고 그 속에서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이 없을 수 없으므로 당연히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만든 모든 조직체계와 단체는 시스템 연구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스템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이제 시스템 이론이 처음 탄생한 당시로 되돌아가서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 시스템의 두 축,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

    기술 발전에 있어서 1,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20세기 초엽은 정보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개인용 컴퓨터와 인공위성을 매개로 한 범지구적 네트워크에 힘입어 그야말로 본격적인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런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된 정보통신의 기본 원리나 기본 기술은 대부분 한 세기 전에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통신기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유선으로 전달되던 전화나 전보는 무선전화와 무선전보로 대치됐고, 라디오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텔레비전 이론이 탄생했으며, 그 결과 대서양을 넘나드는 무선통신의 양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1940년대에 들어서자 무선통신은 한층 빠른 통신 속도와 신호 전달의 정확성이 요구됐는데, 이런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연구가 전개되는 과정에 새로운 정보 이론들이 확립됐다.

    그런가 하면 2차 세계대전 때 유도탄의 탄도 계산을 위해서 처음 만들어졌던 전자계산기가 단순히 계산을 위한 기계가 아니라 정보처리를 위한 기계로 발전하면서 숫자계산을 논리연산으로 대체시키는 새로운 논리체계가 필요해졌다. 한편, 양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수많은 신기술이 개발됐는데, 그중에서도 잠수함에서 적 잠수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소나(Sonar) 기술과 적 항공기를 추적하는 레이더 기술은 놀랄 만큼 발달했다. 그런데 이런 추적기술들 역시 생성되는 방대한 양의 신호를 처리하기 위해서 새로운 정보이론이 필요했다.

    무선통신 기술과 전자계산기, 전파추적 기술들에서 요구됐던 새로운 정보이론이란 전선과 트랜지스터 속을 오가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들을 원활히 유통시키는 데에 필요한, 말하자면 정보의 교통정리를 위한 이론들이다. 쉽게 설명한다면 과거에는 전선 속을 흐르는 정보의 양이 지극히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하드웨어의 발달로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하자 마치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수가 증가하면서 교통통제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해진 것처럼, 정보처리용 소프트웨어가 절대적으로 요구됐던 것이다.

    이처럼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그 속을 흐르는 정보라는 소프트웨어도 하드웨어에 못지않게 중요시되는 그런 실체를 가리켜 전자공학자들은 시스템이라고 명명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자계산기를 전산기 시스템이라고 하고, 시내전화망을 지역전화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이런 복잡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성되는 존재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이렇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집합체로 본다면, 우리는 주변에서 훨씬 다양한 시스템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회사나 정부, 학교나 조합과 같은 인간관계가 주를 이루는 조직들뿐만 아니라 지하철, 철도, 버스 등의 교통 서비스, 은행의 금융전산망,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우편배달 서비스, 물류 등 정보나 상품의 이동과 배분이 주를 이루는 조직들도 시스템에 포함되는 것이다. 심지어 할인점이나 슈퍼마켓, 체인음식점 등도 네트워크화한 시스템이고, 가정에 설치한 방범설비도 보안시스템이며, 정부가 연구개발의 진작을 위해서 수립한 계획도 연구개발 시스템이다. 이처럼 시스템은 일반 대중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우리 생활 속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현대인은 이런 시스템이 없이는 한시도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됐다.

    시스템이 공학적으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된 복잡한 통신망의 구현에서 처음 연구되기 시작했다면, 과학적으로는 생물체의 특성을 구명하는 과정에 시스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세기 초엽에 들어서면서 일단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과연 생물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진지하게 대두됐는데, 그 해답을 찾는 과정에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던 것이다.

    과학의 역사에서 생물과 생명을 탐구하는 관점은 크게 생기론과 기계론으로 나뉜다. 생기론이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16, 17세기에 근대 과학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과학계를 풍미했던 관점으로,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생명체와 비생명체는 각기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물과 비생물은 구성물질이 다르며, 이들 구성물질은 다른 쪽의 재료로부터 얻을 수도 없고, 다른 재료로 환원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생물은 물질적인 재료 외에 생명성을 지닌 독특한 재료가 첨가되지만, 비생물의 구성에는 그런 생명성을 지닌 재료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이 생기론의 기본 개념이다.

    그런데 생명성을 지닌 재료가 구성한다는 생기론적 주장은 진화론의 대두와 함께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됐다. 진화론은 무생물에서 생물이 탄생하는 기적을 기정 사실로 인정해버렸기 때문에,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생명성의 재료는 그 기원을 무생물에서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생명성을 지닌 재료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면서 나타난 것이 생물 기계론이다. 생물을 자동인형이나 시계에 비유할 수 있는 아주 복잡한 기계로 간주하는 순간 생명물질의 필요성은 없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과학혁명은 기계론의 사조와 함께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찍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신이 창조한 거대한 기계장치에 비유했던 데카르트가 보기에는 생물체도 당연히 하나의 복잡한 기계일 뿐이었다. 16, 17세기 베이컨, 갈릴레이, 데카르트 등 선구적 과학자들에 의해 다듬어진 기계론적 사고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은 이후 실험과 관찰에 입각하여 자연 법칙을 밝히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일반적으로 생물 기계론은 두 가지 개념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모든 과학은 역학에서 유도될 수 있다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생물 개체를 단순한 기계로 취급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계론적 사고는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이런 기계론의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20세기 들어 생화학과 유전학, 분자생물학 등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특히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기계론적 사고가 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계론의 약점은 생물체가 지니는 통일성, 질서, 조직과 자율성 등을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생물은 가장 하찮은 박테리아나 아메바까지도 고도의 복잡성을 지니지만 결코 항상성을 잃지 않는다. 항상성이란 주변 환경이 변해도 그 자신은 항상 평온함을 유지하는 기능을 말한다. 예컨대 생물은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일정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는 생물은 겨울잠을 자거나 일시적으로 생장을 중지한다).

    [ 가장 완벽한 시스템은 생물 ]

    생물은 또 자신을 닮았지만 자신과 절대로 똑같지는 않은 자식을 생산하여 번식과 진화를 동시에 수행한다. 생물은 살아 있는 동안 매순간 세포 내에서 2000여 가지의 물질대사를 수행하면서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지만,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그런 고도의 조직성은 순식간에 와해돼버린다. 그런데 생명을 복잡한 자동기계에 비교하는 기계론적 사고로는 이런 생명의 특성을 담아내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따라서 생기론과 기계론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관이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버트란피(1901∼1972)가 발전시킨 생물유기체론이다.

    유기체론에서 생물체는 하나의 독특한 시스템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 시스템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조사하는 것으로 생명 현상의 전모를 규명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부분과 사건은 그것에 내재하는 조건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다소간은 그 시스템 전체에 내재하는 조건 및 그 시스템을 포함하는 더 큰 시스템에 내재하는 조건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기체론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각 부분이 나타내는 특성은 전체 시스템에서 그것들이 보이는 특성과 전혀 다를 수 있다.

    개별적인 현상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유기물 분자는 무기물 분자에 비해서 훨씬 더 복잡하지만,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작용이 발현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생물 고유의 과정들, 예컨대 호흡이라든지 소화, 형태 형성(수정란이 세포분열을 하고 점차 자라면서 성체의 모양을 형성하기까지의 메커니즘), 신경 활동 등 생물 특유의 작용은 기계론적인 도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또 그 대부분은 무생물적 모델로 모방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각각의 부분이나 각각의 과정을 한데 모아놓는다고 해서 우리가 생물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포를 구성하는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서 만족할 정도의 지식을 축적한다고 해서 세포가 갖는 생물적 특성을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가장 간단한 구조의 박테리아 세포조차 무한대의 복잡성을 지닌 조직체로 비유돼야 하는 것이다. 버트란피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기체의 기본 특징은 조직화다. 따라서 유기체의 각 부분과 각 과정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방법으로는 생명현상을 전반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그런 연구는 우리에게 각 부분과 각 과정이 조화되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때문에 현대 생물학의 주요 과제는 생물 시스템에서 조직화의 모든 단계에 기능하는 일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유기체론에서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전체는 그 각각의 부분이 지니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성질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생물이란 바로 조직화된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시스템을 구성하는 ‘생명물질’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시스템 속의 생명물질은 시스템 밖의 비생명물질과 전혀 다를 바가 없고, 이런 관점은 시스템이 와해될 때(즉 생물이 죽을 때) 극명하게 나타난다. 생물체는 가장 하등한 박테리아에서부터 가장 고등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완벽한 시스템인 것이다.

    [ 시스템은 살아서 움직인다 ]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이 만든 모든 조직이 시스템이고, 특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복잡하게 통합된 조직이 시스템 연구의 주요 대상이 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 가장 완벽한 시스템의 전형은 생물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밝혔다. 생물체가 신체라는 아주 복잡한 하드웨어와 그 하드웨어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정보를 원활하게 처리하는 내부의 신경 네트워크를 지닌 존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생물이 시스템의 전형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 몇 가지 속성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모든 시스템은 유한하다. 세상만사가 다 유한한 것이지만 구체적인 시스템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하기 마련이다. 생물체도 수명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고, 시계, 건물, 정부, 국가도 모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실재하는 시스템은 그 요소들의 수량도 제한되어 있다. 컴퓨터 속에 내장되는 운영시스템(OS)처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특정한 컴퓨터 속에서만 작동할 수 있으므로 유한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의 유한성은 시스템이 경계를 지닌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시스템의 경계란 시스템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특정한 부위 또는 특정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된다고 하면 그 경계가 제대로 구획돼 있고 또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으로 입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만약 어느 회사가 도산할 기미가 있다면 가장 먼저 그 회사의 경비체제가 불안해진다는 보고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회사가 망하는 것은 창고 관리가 허술해서 상품을 도난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망해가는 회사일수록 경비가 허술해서 도난당하기 쉬운 것이라고 시스템 이론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의 시스템들은 모두 특정한 구조와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 전통적인 기계론은 구조가 기능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스템 이론에서는 구조와 기능이 사실은 같은 성질이며 따라서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다리나 책상과 같은 간단한 구조물을 생각해보면 구조가 기능을 결정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인공물이라 하더라도 빌딩이나 공장, 컴퓨터 등의 복잡한 구조물을 만들 때는 - 이것들이 바로 시스템학이 주목하는 시스템 연구의 대상이다 - 구조가 기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기능을 고려해서 구조를 결정한다.

    기업이나 국가, 생물체도 일단 구조가 정해지면 그 기능도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시스템이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구조를 최적화해 나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버트란피는 시스템의 이런 특성을 직시해서 “기능은 시스템의 일시적이고 신속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구조는 장기적이고 완만한 과정”이라고 지적했으며 결국 구조(부분의 질서)와 기능(과정의 질서)는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설파했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시스템은 국가일 것이다. 그런데 이 국가라는 시스템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구조와 기능을 동시에 고려해서 정부의 구조조정을 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시스템 이론은 공무원 조직이라는 완강한 구조를 깨는 것과, 그 구조 속에서 진행되는 기능을 축소 또는 변화시키는 노력이 결국은 동전의 양면이며, 반드시 병행해서 추진해야만 성공을 기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스템은 그 내부에 소규모의 시스템을 구성 요소로 포함한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통신시스템을 보더라도 그것은 시내전화망과 시외전화망, 국제전화망으로 구분돼 있는가 하면, 또 유선전화망과 휴대용 무선전화망도 공존하고 있다. 이런 각각의 전화 네트워크는, 한편으로는 독립된 시스템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통신시스템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업이나 정부 같은 단체들에는 부(部)니 과(課)니 하는 소규모 시스템들이 모여서 큰 규모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렇게 큰 시스템 속에 작은 시스템들이 자리하고, 다시 그 작은 시스템들 속에 그보다 더 작은 시스템들이 자리하는 다층화된 시스템에서는 어떤 한 시스템을 변화시킨다고 해서 그 영향이 전체 시스템으로 퍼져나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한 시스템에서 일어난 사건이 자칫 전체 시스템으로 전파돼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 시스템을 운영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 또는 최고 경영자가 자칫 곤경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 나라가 외환위기를 자초해서 IMF 사태에 이르게 된 경위도 결국 따지고 보면 금융정책을 담당하는 고위 관료와 실무 경영자들이 이런 거대 시스템 운영에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스템은 마치 생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시스템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나 또 내부적인 필요에 의해서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시스템이 변화를 멈춘다면 그 시스템은 죽은 시스템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살아서 움직이는 시스템을 가능한 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렇다.

    [ 전문가의 세 유형 ]

    중국 후단 대학교에서 시스템 연구로 많은 업적을 쌓고 있는 박창범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시스템학’에서 현대의 전문가상을 다음과 같이 세 유형으로 분류했다.

    먼저, 우리 시대에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전문가 유형은 평생을 한 분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이다(편의상 이들을 A형 전문가라고 하자).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쌓은 전문지식을 유일한 무기로 삼으며, 오직 그 분야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명실공히 전문가임이 분명하다. 또 현대사회는 이런 전문가들이 없이는 제대로 작동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가 귀중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특히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사회의 구석구석이 모두 변모하는 시대에는 이런 A형 전문가가 자기 분야에서 계속 전문가로 살아남기는 어려워진다. 컴퓨터 분야를 예로 들어본다면 70년대에 대형 컴퓨터를 다루었던 전문가들은 80년대에 들어서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문가 자리를 내주어야 했고, 이들은 다시 90년대에 들어서 인터넷 전문가들에게 밀려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초과학이나 공학, 심지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이제 A형 전문가는 더 이상 안전한 직업인이 아니다. 어느 순간에 새 기술이 도입되고, 또 사회적으로 각광받던 자기 분야가 순식간에 전락해 언제 자신의 지위를 박탈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증권전문가들이 부침을 거듭했던 것이나 의료계에서 전공 과목의 인기도가 매년 바뀌는 현상은, 이런 A형 전문가들의 입지가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형의 전문가는 ‘팔방미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관해 상당한 지식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어느 분야에서도 A형 전문가들에는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B형 전문가들은 과학기술의 분화와 업종 전문화가 가속되는 현대 사회에서 어떤 탁월한 업적을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B형 전문가는 A형 전문가보다 현실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격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오히려 생존 가능성이 더 클 수 있다.

    IMF 사태로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기업들은 가장 먼저 연구소를 축소하거나 폐쇄했던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본사 기획실이나 품질개발실에 포진하고 있던 B형 전문가들이 주로 연구소에 몸담고 있던 A형 전문가들보다 이직률이 훨씬 적었다. 현대 사회에서 B형 전문가가 더 선호되고 있는 이유는, 전문 분야는 점점 더 세분되고 있는 반면 각 분야들 사이에서 협력의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특정 분야에는 A형 전문가에 못지않게 유능하지만, 이웃한 다른 분야까지 폭넓은 지식을 축적하고 있는 C형 전문가형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 C형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관련 분야도 상당히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지식을 자신의 전문 분야에 이식함으로써 때로는 A형 전문가보다 더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또 자신의 전문분야가 쇠퇴할 경우에는 쉽게 다른 분야로 전환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유형의 전문가들이 탁월한 성취를 보였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C형 전문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C형 전문가들이 득세하는 경향은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IMF 사태로 많은 기업과 금융기관이 도산하고 합병하는 과정에 외국 기업에 인수된 회사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리고 이렇게 외국에 넘겨진 기업 대부분에는 이제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최고 경영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국내 회사에 진주한 외국인 최고 경영자들은 C형 전문가임이 분명하다. 이들 대부분은 젊은 나이에 A형 전문가로서 기업에 입사해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은 후 그리 늦지 않은 나이에 C형 전문가로 변신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기업의 구석구석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한 한편 그 기업이 주력으로 하는 사업에는 전문가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나라 최고 경영자들의 대부분이 기껏해야 B형 전문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 외국계 회사들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 중국은 왜 시스템을 연구했나 ]

    이제 다시 처음의 중국 문제로 돌아가 보자. 중국에 시스템학이 처음 소개된 것은 70년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그 후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시스템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연구소와 대학 연구실을 설립했는데, 특히 개혁과 개방의 물결이 밀어닥쳤던 80년대에는 시스템 과학이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 시스템 과학이 환영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중국사회가 개혁과 개방을 달성하기 위한 과학적인 이론과 방법을 제공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창범 교수는, 당시 중국의 최고층 지도자들은 중국 사회의 개혁·개방과 발전을 거대한 ‘시스템 공정’으로 이해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지도층의 격려에 힘입어 오늘날 중국은 시스템 연구가 가장 활발한 나라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 연구는 중국에서 무엇을 이룩했을까?

    아마도 중국 시스템 과학의 가장 커다란 업적은, 12억 인구를 포용하는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개혁·개방의 과정을 일사불란하게 집행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국가관리 능력을 단기간에 배양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중앙정부의 고위 관리와 지방정부 간부, 기업 경영진과 대학과 연구소의 최고 관리자 등 중국 사회의 지도자들은 시스템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또 자신이 속한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줄 아는 기본 능력을 보유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창범 교수는 시스템 연구가 C형 전문가를 양성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하는데, 중국은 바로 시스템 교육을 통해서 사회 지도층을 길러내는 나라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필자의 경험 한 가지를 이야기하기로 하자. 필자는 8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중국 유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국이 개방 정책을 취하면서 내보낸 국비 유학생들이었다.

    나중에 그들과 친해지고 나서 필자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그들은 유학을 떠날 때 정부로부터 전공과목을 부여았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의 개혁과 개방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이미 결정해놓고 있었다는 말이다. 당시 한국 정부의 국비유학생 정책은 무엇이었을까? 미국 유명 대학교의 입학허가서만 받아오면 전공이 무엇이든 5년간 국비지원을 하는 것, 그 뿐이었다. 필자가 중국을 부러워하고 또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족 한 가지. 21세기의 벽두에 서 있는 지금 우리 나라에는 시스템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기관이 단 한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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