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동·서양 문명 첫 충돌 : 페르시아 전쟁

  • 김기영│서울대 강사·문학박사 kimky@snu.ac.kr

    입력2010-12-22 17: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서구 열강이 ‘문명(civilization)’의 전파라는 명분을 내세워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했을 때 ‘문명’이라는 단어가 ‘야만’의 미성년을 벗어난 성년기 인류의 교화된 상태를 의미했다면, 식민 지배를 강요받은 이들에게 ‘문명’은 무엇보다도 총과 대포로 대표되는 무력과 그 가공할 만한 폭력을 생산해낸 과학기술을 가리켰다.

    조선 말기 한반도를 휩쓸었던 ‘척화’와 ‘개화’의 대립과 갈등은 일본 강점을 거쳐 남북 분단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소위 ‘서양’에 대한 무분별한 선망과 근거 없는 멸시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문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그리고 이 문명의 미래는 무엇인가?

    이제 서양이 ‘문명’이라는 말을 독점하는 시기는 지났고, 동양에도 ‘문명’이 엄연히 존재했다는 게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리하여 동양문명 대 서양문명이라는 대립 구도가 문명 담론의 기본 틀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세계사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그러한 단순 대립 구도에 잘 맞지 않는 경우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아랍의 국가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또 인도는?

    ‘동서’라는 단순 대립 구도를 탈피해서 여러 문명권으로 나누어놓고 보더라도 한 문명권 안에서 이질적인 여러 문명의 요소들을 만나게 되고, 그 문명의 요소들조차 자세히 보면 시대에 따라 변모해왔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문명사업단과 ‘신동아’가 공동으로 기획·연재하는 ‘문명의 교차로에서’ 시리즈는 세계사에서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현상에 주목해, 이질적인 ‘문명들’이 서로 어떻게 만나고 부딪쳤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지리 등 상이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인문학자들이 독자 여러분을 구체적인 문명의 교차 현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문명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문명의 교류와 충돌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은 특정 시대와 장소에 등장한 문명들의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명’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류 문명사에 대한 거시적 조망을 시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문명의 교차로들을 향해 출발하자!

    - 송유례·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문명이 교류하고 충돌하는 극적인 양상은 전쟁이다. 전쟁은 세계관의 차이, 정치와 경제의 문제, 종교와 관습의 대립, 과학과 기술의 성과 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무대인 것이다. 집단이나 종족, 민족이나 국가는 자기(自己)의 서사로 전쟁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타자(他者)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전쟁은 여러 도시국가 사이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건이었다. 작은 도시국가들 모두 저마다 독립을 열망하고 각자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마치 운동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서로 경쟁하고 투쟁했다. 전쟁은 또한 서양문학을 탄생시킨 요람이었다. 서양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다. 이 작품은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지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다루면서 두 문명의 충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페르시아 전쟁

    역사시대에서 동서양 문명이 첫 충돌한 사건이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년)이다. 페르시아 전쟁을 경험한 그리스인들도 자기 관점에서 그 전쟁을 바라봤으며, 페르시아인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과 역사가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4년)의 ‘역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페르시아 전쟁은 유럽 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처럼 작은 도시국가 시민이 거대 제국의 백성을 물리쳐 승리한 예상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진영이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유국가로 남지 못했을 것이고, 아테네에서 자라기 시작한 민주주의 싹도 개화하지 못하고 고전기 문명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제국이 성취한 업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초의 거대 제국으로 여러 민족을 분할해 통치하는 정책을 구현하며 평화와 질서를 보장함으로써 다인종·다문화·세계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가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하면서 그리스인 처지에서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서문은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의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을 보존하고 전쟁이 발발한 원인을 탐구하는 게 저술 목적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스인이 아닌 이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고, 비교적 객관적 시각과 합리적 서사로 전쟁을 기록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다리우스3세와 벌인 이수스 전투.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한 그리스·페르시아 병사.

    아쉽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페르시아 쪽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기록물로는 관료가 새겨놓은 석판과 왕궁 벽에 조각된 왕의 포고령이 있을 뿐이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작품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이다. 이 비극은 페르시아 전쟁 전반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페르시아 전쟁의 경험을 헤로도투스보다 더 멋지게 비극의 형식으로 전유한다. 대체로 그리스 비극은 전통신화를 소재로 극화하지만,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민주주의 개혁을 목격했다. 기원전 510년 참주 힙피아스가 축출되자, 508~507년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권력을 가진다’는 이소노미아(isonomia) 정신으로 행정구역 개편을 골자로 하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또 아이스킬로스는 직접 마라톤 평원과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그는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는데, 그의 형이 마라톤에서 적군의 도끼에 손목이 잘려 전사했다. 기원전 525년 혹은 524년에 태어난 이 위대한 비극 시인은 기원전 456년 혹은 455년에 사망했는데, 묘비명에는 놀랍게도 그가 마라톤 전쟁에 참전한 용사라는 사실만이 적혀 있다.

    전해오는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472년에 대(大)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1등상을 거머쥐었다. 이 작품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훗날 저 유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였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고 8년이 지난 어느 봄날, ‘페르시아인들’이 대 디오니소스 제전의 무대에 올랐다. 아크로폴리스의 남동쪽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이 작품을 감상하고, 페르시아 전쟁 중에 불탄 아크로폴리스의 신전(神殿)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전쟁에서 패한 적국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전쟁의 과정을 바라보는 놀라운 콘셉트를 보여준다. 비극의 주인공을 페르시아 왕으로 삼은 점은 실로 획기적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Susa)를 무대로 펼쳐지는 ‘페르시아인들’의 극은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1)페르시아의 장로들은 크세르크세스 왕이 원정을 떠난 경위를 설명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전쟁 결과를 기다린다. 태후 아톳사가 등장해 불길한 꿈과 전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의 마음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2)사자가 등장해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일격에 무너졌다고 보고한다. 전사한 장군들의 이름을 열거하지만 다행히도 왕은 생존했다고 한다. 불길한 꿈과 전조가 패전을 암시했던 것이다.

    (3)아톳사는 다리우스 왕의 무덤에 제주를 바쳐 남편의 혼령을 불러낸다. 젊은 크세르크세스가 정신의 질병에 걸려 불경한 교만함으로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신들의 벌을 받아서 전쟁에서 패한 것이라고 혼령은 분석한다. 아울러 페르시아 군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도 패배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4)크세르크세스 왕이 등장해 옷을 찢고 울부짖으며 통곡한다. 잔인한 악령이 페르시아 종족을 파괴한 것이다. 코러스는 왕과 함께 통곡하고 제국의 운명을 한탄한다.

    적국의 왕과 백성들이 패전으로 겪는 고통과 슬픔을 비극이란 형식으로 재현해 보여준 아이스킬로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페르시아인들’에서는, 오만방자한 말과 행동을 뜻하는 휘브리스(hybris)를 범한 인간이 신에게 벌을 받는다는, 그리스 비극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티프를 기본 틀로 삼으면서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상고 시대 현자들이 개진한 인간 멸망의 패턴을 ‘페르시아인들’에 반영하고 있다. 그 인간 멸망의 패턴이란 엄청난 부와 명성으로 번영을 누리는 인간은 휘브리스를 범하고 아테(ate) 상태에 빠져 파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테’란 신의 개입으로 정신이 홀려 헤매다가 판단력을 잃고 정해진 한계를 망각해 파멸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멸망의 그리스적 사유 틀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그리스에 대패한 크세르크세스 왕.

    페르시아 제국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아톳사는 다리우스의 혼령을 불러낸다. 그 혼령이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도출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다리우스를 이러한 캐릭터로 형상화하는 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에 해당한다. 1세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후 복수심에 가득 차서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겠다는 야욕에 불탄 존재였다. 복수의 한을 품은 채 죽은 자가 다리우스가 아닌가.

    그런데 아이스킬로스는 극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해 다리우스의 혼령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다리우스에게 실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부여하는 한편, 페르시아 제국의 패전에 그리스적 사유의 인간 멸망 패턴을 적용한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자기의 전통적 사유 틀로써 타자인 페르시아인들의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해석해 그것을 정당화한 것이다.

    인간 멸망의 첫 번째 단계가 엄청난 부와 번영이다. 페르시아는 황금으로 넘쳐나는 막대한 부를 가진 나라로 번영을 구가하는 제국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부와 번영은 휘브리스를 낳는 조건이 된다.

    이 작품에 나타난 휘브리스의 구체적 양상은 세 가지다. 첫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보여준 불경한 오만함이다. 그는 인간인 주제에 오만방자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리스 본토의 신상(神像)들을 약탈하고 신전들에 불을 질러 제단들을 사라지게 하고 신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등 불경죄를 자행한다.

    두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자연과 세계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다리우스의 혼령이 보고하듯 크세르크세스는 배들을 이어붙여 헬레스폰토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에 부교(浮橋)를 놓았다. 이렇게 해협의 물길을 억지로 바꾸고 인간인 주제에 포세이돈 신마저 지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세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제 영토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의 자유 시민을 정복해 노예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러한 휘브리스는, 패전의 소식이 도착하기 전에 서사된 아톳사의 꿈에서 암시된다. 그 꿈에 따르면 아시아 여인과 그리스 여인이 서로 다투게 되자 크세르크세스는 그들을 제지하고 자신의 전차 앞에 그들을 매고 목에 멍에를 얹었다. 아시아 여인은 복종하지만, 그리스 여인은 발버둥치며 두 손으로 마구를 찢어버리고 고삐도 없이 전차를 끌다가 멍에를 두 동강 낸다. 그러자 크세르크세스는 전차에서 추락하고 아버지 다리우스를 보자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이제 휘브리스는 ‘아테’ 단계로 넘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다리우스의 혼령은 시적으로 표현한다.

    일단 교만(휘브리스)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아테)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그런데 이 단계로 넘어가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악령이다. 신/악령은 인간을 기만하고, 이로써 아테의 덫에 걸려든 인간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크세르크세스도 지혜를 잃고 말았다. 아울러 신/악령은 전쟁에도 참여해 페르시아 제국을 파괴하는 힘으로 현현(顯現)한다. 페르시아 군대를 망가뜨리고 페르시아 종족을 짓밟으며 페르시아 남자들을 잘라버린다. 전쟁에 패해 왕궁에 도착한 크세르크세스는 아직도 악령이 자신에게 덤벼들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패전을 도덕적 · 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제국의 재앙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페르시아의 선왕인 다리우스의 혼령은 그리스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테네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유물 황금마스크.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페르시아를 통해 그리스를 보다

    ‘페르시아인들’에서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가 전쟁 상대국이었지만 페르시아인들을 비웃거나 비하하지 않고 동등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아톳사의 꿈에서 묘사한 그리스 여인과 페르시아 여인의 두 자매처럼 말이다. 하지만 비극 시인은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그리스의 자기 정체성을 부각한다. 작품 속에서 페르시아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페르시아 제국은 왕이 통치하는 전제정치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에 기초한다. 태후 아톳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장로들로 구성된 코러스가 태후에게 말한다.

    저기 신들의 눈과 같은 광명이,

    왕의 모후이신 태후 마마께서 납시오.

    나는 부복할 것이오.

    우리 모두 태후 마마께 마땅히

    말로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또 장로들은 태후를 여주인이라고 부르면서 “힘이 미칠 수 있는 한 말이든 행동이든 두 번씩 하명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의 제기란 불가능하고 단지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사자(使者)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 보고하는 연설에서 크세르크세스 왕이 제독들에게 명령하는 장면을 보면 전제군주의 전형적인 잔인성을 엿볼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그리스인들이 배를 타고 도주하면 제독들의 목을 모두 베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아테네 시민 관객은 자유 시민들의 평등에 기초한 자신들의 행동방식과는 다른 페르시아인들의 행동방식에 주목했을 것이다. 아톳사와 코러스가 나누는 대화는 전쟁 상대국인 아테네가 민주정치로 통치하는 나라임을 강조한다. 아톳사가 “누가 그들의 목자로서 군대를 지휘하지요?”라고 묻자, “그들은 누구의 노예라고도, 누구의 신하라고도 불리지 않사옵니다”라고 코러스가 대답한다.

    둘째, 페르시아 제국은 과도한 부와 사치가 넘쳐나는 왕국으로 묘사된다. 페르시아 궁전은 황금으로 장식되고 군대도 황금으로 번쩍인다. 페르시아의 중심 도시인 사르데이스와 바빌론도 황금으로 넘쳐난다. 신과 같은 인간 크세르크세스도 황금의 종족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부유함을 바탕으로 페르시아 문화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세련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갑옷이 찢긴 크세르크세스 왕이 왕궁에 도착해서 코러스에게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통곡하시오”라고 명령할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유약하고 여성적인 것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인들의 물질적 풍요와 세련되고 우아한 생활방식은 절제와 검약을 중시하는 그리스인들의 생활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다리우스1세 교시를 새겨놓은 돌.

    셋째, 페르시아인들은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기 훈육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높은 언덕에 놓인 옥좌에 앉아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를 지켜보며 통탄하고, 옷을 찢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보병부대에 명령을 내리고 급하게 도주했다고 사자가 보고한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무대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다. 왕은 가슴을 치고 수염을 뽑으라고 코러스에게 명령한다. 이윽고 코러스는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하고 자신도 “아아”로 화답한다. 이처럼 ‘페르시아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왕은 물론 모든 백성이 패전을 슬퍼하고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통곡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행동방식은 당시 관점에서 보면 여성적 특성이기에 크세르크세스가 비극의 영웅이 되기엔 부족한 인물을 암시한다. 다른 그리스 비극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웅 가운데 오이디푸스나 헤라클레스는 좌절과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한다. 따라서 크세르크세스 왕에겐 자기 통제라는 그리스인의 미덕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페르시아인은 전쟁에서 무질서하게 행동하고 비겁했다. 사자의 보고에 따르면 살라미스에서 해전을 앞둔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의 함성에 벌써 크게 실망해 겁을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결전을 앞두고 지휘관의 통솔하에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또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하자 페르시아인들은 무질서하게 허둥대며 도망친다. 전투방식마저 페르시아인들의 비겁함과 그리스인들의 용감함을 대비시킨다. 페르시아인들은 비겁하게도 멀리 떨어져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는 것이 장기지만, 그리스인들은 용감하게도 창과 방패로 무장해 적과 맞서 싸운다.

    페르시아인들은 전제정치의 위계질서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 풍부한 물질로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는 것, 과도하게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 전쟁에서 무질서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과 같은 악덕을 보여준다. 페르시아인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하면서 그리스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민주정치로 자유 시민들이 평등한 권력을 가지는 것, 절제와 검약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 감정을 잘 절제하고 통제하는 것, 전쟁에서 질서 있고 용맹하게 적과 맞서는 것과 같은 미덕을 부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페르시아인들’에서는 그리스인이 비록 소수지만 모두 하나가 되어, 모래알처럼 흩어진 다수의 페르시아인과 맞서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자가 살라미스 해전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아이스킬로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인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물론 다른 장수들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임진왜란의 명량대첩을 서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반면 페르시아 장군의 이름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용맹과 무용을 강조한다. 아미스트레스, 아르타프레네스, 메가바테스, 아스타스페스, 아르템바레스 등 낯선 이방인의 장군 이름들이 허황되게 관객의 귓전을 때렸을 것이다. 그리스 군사들이 살라미스 해전에 임하면서 외치는 함성만이 관객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리라.

    오오, 헬라스인들의 아들들이여, 진격하라!

    우리의 조국을 해방하라!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과,

    조국의 신들의 처소들과, 조상들의 무덤을 해방하라!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이렇듯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공동체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 작품의 영웅은 평등한 자유 시민들이 일체가 되어 단결하는 도시국가 공동체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의 강건함이 페르시아인들의 무기력을 물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전쟁은 문명의 교류와 충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건이다. 기원전 472년에 공연된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극화한 것으로 그리스인들이 타자 페르시아 제국과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무엇을 성찰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비극 작품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비극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색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쟁에 패배한 페르시아인들의 운명을 동정하면서도 그 패전의 원인을 분석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인들은 자기의 사유 틀로 타자의 비극을 정당화한다. 상고 시대 현자와 시인들이 개진한 인간 멸망의 패턴으로 페르시아인들의 재앙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타자 페르시아인들의 정체성을 규정함으로써 자기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부각한다.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위계질서, 엄청난 부와 사치, 감정표현의 과도함, 무질서, 비겁함에 대해서 그리스의 민주정치와 평등주의, 검약과 절제, 자기훈육과 질서, 용감함을 맞세운 것이다.

    요컨대 동서양 문명의 충돌인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인에게 자기(그리스) 안에서 타자(페르시아)를, 타자(페르시아) 안에서 자기(그리스)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비극 ‘페르시아인들’의 분석과 해석을 계승한 헤로도투스는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 전제정치와 민주정치의 이분법을 더욱 발전시킨다. 이렇게 하여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사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참고도서

    ● 김기영, 「아이스퀼로스 비극에 나타난 전쟁관」:『페르시아인들』,『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장수들』,『아가멤논』을 중심으로, 『서양고전학 연구』, 37(2009).

    ● 천병희 옮김,『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고양: 숲, 2008.

    ● 천병희 옮김, 헤로도투스 『역사』, 고양: 숲, 2009. 홀랜드, 톰, 『페르시아 전쟁-최초의 동서양 문명 충돌, 지금의 세계를 만들다』

    ● 이승호 옮김, 서울: 책과 함께, 2006. Hall, Edith, Inventing Barbarian. Greek Self-Definition through Tragedy, Oxford1989.

    확대경 페르시아 전쟁 小史

    오리엔트를 통일한 巨大 제국, 그리스에 무릎 꿇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바탕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정리해보자.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지중해 일대로 세력을 뻗치려 했다. 그런데 소아시아 지역에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들이 걸림돌이었다. 페르시아가 이들 도시를 압박하자, 기원전 500년경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선단(船團)을 보내 이 봉기를 지원했다.

    처음에 이오니아인들은 승전을 거듭했고, 마침내 페르시아 왕권의 중심인 사르데이스를 접수했다. 사르데이스는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다. 이윽고 소아시아의 거의 모든 종족이 봉기에 가담해, 페르시아 제국에 저항하는 불길이 최고조로 타올랐다. 하지만 봉기의 기세도 이오니아인들이 498년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하자 시들기 시작했다. 494년부터 페르시아는 봉기에 가담한 도시들을 차례로 진압해 이오니아를 평정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인들의 봉기를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복수하고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려는 대규모 원정을 계획했다.

    제1차 원정은 기원전 492년 시작됐지만,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을 만나 난파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자연의 힘이 그리스인을 도운 셈이다. 491년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전역에 사자를 보내 물과 흙을 복종의 상징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많은 도시국가가 이러한 요구를 수락했지만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들, 그리고 아테네는 거절했다. 490년에 시작한 제2차 원정은 함대 600척, 지상군 20만명, 기병 1만명 규모로 이뤄졌다. 이오니아 봉기를 도운 에레트리아를 잿더미로 만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의 북동쪽에 위치한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때 종교행사를 치르던 스파르타는 군대를 파병하지 못했다. 어쨌든 아테네의 1만 중갑병은 1000명의 연합군과 함께 마라톤 평원에서 보병 10만과 기병 1만의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마침내 두 진영이 격돌한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좌우익에서 우세를 보이고 무너진 중앙을 상쇄하며 페르시아군을 해안으로 밀어냈다. 한 전령이 오늘날의 마라톤 풀코스 거리를 달려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전의 소식을 전하고 죽었다.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지 수년 후 복수를 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친 뒤 기원전 480년 시작한 제3차 원정은 크세르크세스 왕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지상군 260만명과 1207척의 3단 노선 등으로 무장한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스파르타를 맹주로 삼아 테르모퓔라이에 1차 저지선을 설정했다. ‘뜨거운 문’이라는 뜻인 테르모퓔라이는 중앙 그리스로 진입하는 협로로 전략상 중요한 거점이다. 여기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결사대가 연합군과 함께 사흘간 결사 항전해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꺾고 수많은 적을 도륙했다. 결국 협공을 당해 스파르타인 모두가 몰살되고 말았지만 도덕적으로는 승리한 전투였다. 테르모퓔라이 협로가 열리자, 그리스 연합군은 이스트모스를 2차 저지선으로 결정했고, 아테네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아크로폴리스마저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스 연합군은 코린토스 지협을 수비하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함대는 살라미스 섬 주변에 포진했다. 거짓 정보에 속은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해협 안으로 진입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함대가 해협 안에 갇혀 포위되자 사방에서 그리스 함선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페르시아의 배들이 서로 부딪쳐 침몰하고 그리스 중장보병들이 배 위에 올라타 페르시아인들을 죽였다. 페르시아군 시체와 난파선 파편이 해협을 뒤덮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지상군을 남기고 귀환했다. 479년 페르시아 군대는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지만 패전하고 만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을 소아시아 연안까지 추격했다. 결국 그리스 본토를 정복해 복수하려던 크세르크세스 왕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