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호

황제와 교황이 다툰 원인도,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원동력도 ‘돈’이다

[‘돈’으로 본 세계사]

  •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입력2025-03-09 09: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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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움직이는 3가지 질서 = 권력·종교·화폐

    •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공인한 이유도 ‘세금’

    • 종교개혁과 로마 약탈→ 교황 권위·권력 추락

    • 돈·권력 위해 가톨릭 버린 독실한 신자 헨리 8세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위키피디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위키피디아]

    중세는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1000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 이전까지를 중세로 보기도 한다. 서로마제국이 몰락하고 화폐 질서가 무너지자 유럽은 물물교환 시대로 돌아갔다. 일반 백성은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스스로 군사력을 가진 영주에게 의탁하는 봉건제도가 성행했다. 봉건제와 함께 성(城)과 장원을 근거로 한 자급자족 형태의 장원 경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 외부에서는 게르만족이 남하하면서 크고 작은 게르만 왕국이 생겨났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

    중세시대 가장 큰 권력은 세속군주와 교황, 대주교, 성직자 등 종교 세력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인류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세 가지 보편적 질서인 권력, 종교, 화폐 가운데 화폐 질서가 무너지면서 권력(패권)과 종교, 두 질서가 서로 경합한 것이다. 그렇다고 시장의 질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후기 십자군전쟁으로 상업과 무역이 일어나면서 화폐 질서와 상인, 은행가 같은 시장 세력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 세력으로 뭉치지 못하고 종교 세력과 세속군주의 권력에 의지했다. 이들이 부상한 것은 근세 이후였다.

    중세의 특징은 종교 세력에 있다. 종교가 정신세계의 권위는 물론 세속적 권력도 행사했다. 통치 범위가 작게는 교회령이었지만, 전성기 교황은 실질적으로 기독교 국가 전체를 지배했다. 12세기 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말하면서 교황이 세속 권력까지 차지했음을 선포했다. 그래서 중세를 신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부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중세 유럽에 아직 절대 권력을 가진 근대국가가 자리 잡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세시대 국가는 지금의 국가와 사뭇 달랐다. 여러 형태의 영토가 뒤섞인, 아직 명확히 확립되지 않은 그런 상태의 국가였다. 절대왕권이 확립되지 않아서 국가라는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다. 각각의 통치자들은 특정한 지역에 대한 특정한 권리를 보유했다. 국왕이 왕국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주·주교 등의 통치자도 왕국 안에서 크고 작은 권리, 즉 과세, 관세, 독점 판매권, 재판권 등의 권리를 갖고 있었다. 영주, 지역 귀족, 대주교, 자치도시, 그리고 왕들 모두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세금 징세권, 사업 수입, 재판 관할권 등 돈에 관련된 것들이 다툼의 핵심이었다. 이런 수많은 권력을 제압하고 절대군주 국가가 등장한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래서 중세 후반의 전쟁은 고대 전쟁과는 성격이 달랐다. 토지 이외에 금은(金銀) 등 다른 중요한 자산이 등장했고, 점차 국민 의식도 형성돼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영토 확장’이라는 고대 전쟁의 의미는 퇴색하고, 전쟁의 목적도 다양화됐다.

    돈과 권력 위한 전쟁

    십자군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어났고, 백년전쟁은 왕위계승이나 산업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일어났다. 이처럼 전쟁에는 뭔가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돈과 권력을 위한 전쟁’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중세 패권 체제 때문에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 교황이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울 때 세속 권력은 교황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방식으로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종교 세계에 머물러 있던 교황을 세속으로 끌어낸 것은 어쩌면 세속군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이유에서 출발한 교황과 세속군주의 우호 관계가 영원할 순 없었다.

    중세를 이해하려면 교황과 세속군주의 권력투쟁에 대해 알아야 한다. 교황은 어떤 과정을 통해 교회의 대표자에서 중세 최고의 권력자가 됐을까. 로마 교회 초대 교황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로마에 와서 교세를 확장했지만,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그는 순교하면서도 그가 순교한 바티칸에 로마 교황청이 세워지고 자신이 초대 교황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교부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 교부 : 고대 교회에서 교회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한 성직자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교부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 교부 : 고대 교회에서 교회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한 성직자

    ‌그 후 250년이 지난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당시 기독교의 교리는 분명하지 않았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 선지자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로마제국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 신으로 보는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혼란을 종식했다. 그래서 ‘정통’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가톨릭’이 기독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그 수장인 교황도 널리 알려졌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사실 세금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재정 상황이 열악해 곤란에 처해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십일조를 내는 전통이 있어서 기독교와 국가를 연결하면 기독교인의 세금 납부로 재정이 개선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그로부터 100년도 지나지 않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교황은 서유럽의 유일한 권위가 됐다. 로마를 구심점으로 기독교는 계속 서쪽으로 전파됐다.

    한편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서로마가 멸망하자 유럽의 유일한 황제국이 됐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이 성행했고, 이에 따라 경제는 번성했고 제국은 부강해졌다. 동로마의 정교회(正敎會)는 로마 교회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정교회 밑으로 들어오라 압박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는 게르만 왕국의 하나인 랑고바르드(롬바르드) 왕국이 교황청을 위협했다. 랑고바르드는 ‘긴 수염들’이란 뜻을 가진 게르만어다. 로마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군사력을 가진 세속군주와 손을 잡아야 했다. 마침 그 당시 서유럽의 강국이 된 프랑크 왕국은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통치 이념과 더 큰 권위가 필요했다.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는 그들과 딱 맞는 통치이념이었다. 교황과 왕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이렇게 그들은 손을 잡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시작

    그러면 프랑크의 왕과 교황의 연합(유착)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졌을까. 5세기 이후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해 유럽 땅에는 서고트, 동고트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등 게르만 왕국들이 세워지고 멸망하기를 반복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왕국은 프랑크왕국이었다. 프랑크족은 라인강 유역에 본거지를 두고 갈리아 지방에 정착했다. 5세기 말 멜로빙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왕권이 약해지면서 8세기에 오면 재상인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크왕국의 실권을 장악한다. 프랑크왕국이 유럽의 강대국이 된 것은 이슬람제국의 굴기(屈起)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는 610년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됐고, 이후 무아위야 1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해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세웠다. 이슬람제국은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 여의치 않자 북아프리카를 돌아 서쪽에서 동로마제국을 칠 계획을 세웠다. 732년 피레네산맥을 넘어 서유럽을 침략했다. 이때 이들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 프랑크왕국이다. 프랑크왕국의 재상 카롤루스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서유럽을 이슬람교로부터 지켜낸다.

    이 전투 이후 카롤루스 마르텔의 권력은 더 강해졌다.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허수아비 왕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멜로빙 왕 중 누가 왕이 되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 이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의 손을 들어준다. 교황으로부터 명분을 얻은 피핀은 751년 멜로빙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루스 왕조를 연다. 756년 피핀은 이에 대한 답례로 이탈리아로 진격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몰아내고 중부 이탈리아의 땅을 교황에게 헌납한다. ‘피핀의 기증(증여)’이라고 하는 이 사건으로 로마 교황령이 시작된다.

    아버지 피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는 프랑크왕국의 전성기를 이끈다. 카롤루스 대제는 주위의 세속군주로부터 고초를 겪던 로마 교황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해 교황 레오 3세의 입지를 굳건하게 해준다. 800년에 교황 레오 3세는 성탄절 미사에 참석한 카롤루스에게 ‘로마제국의 황제’라 부르며 그를 추대했다. 이렇듯 9세기 즈음부터 교황은 황제와 결탁해 세속 권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후 프랑크왕국은 서프랑크왕국(프랑스), 동프랑크왕국(독일), 중프랑크(이탈리아)로 분열된다. 동프랑크왕국은 오토 1세 때 유럽에 쳐들어온 아시아계 마자르인을 격퇴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962년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는 대관식을 치렀고, 서로마제국을 부활시킬 임무를 부여받는다. 황제의 관을 교황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교황이 황제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였다. 700년 이상 존속한 신성로마제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교황과 황제 반목의 상징 ‘카노사의 굴욕’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과 황제의 반목이 불거져 터진 사건이었다. [Gettyimage]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과 황제의 반목이 불거져 터진 사건이었다. [Gettyimage]

    이렇게 끈끈하던 교황과 왕(황제)의 관계는 11세기 들어 슬슬 금이 가기 시작한다. 동로마제국이 강할 때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거의 혈맹관계 같았다. 그러나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었다. 동방의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제국이 동로마제국을 쳐들어오면서 동로마제국이 급속도로 약해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적이 사라지자 교황과 황제가 손을 계속 잡아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교황과 황제의 반목이 불거져 터진 사건이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주교 임명권, 즉 서임권 때문이었다. 피핀의 교황령을 헌납한 대가로 받은 것이 서임권이었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황제의 주교 서임을 금지했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회의를 소집해 교황의 폐위를 결의했다. 교황도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며 대립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의 주교와 공작들은 교황 편에 섰다. 황제 입지가 불안해지자 카노사성에 체류하고 있는 교황을 방문해 3일을 기다린 끝에 파문을 면했다. 교황의 우위를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9세기 비스마르크 재상은 로마의 교황과 대립하자 의회에서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교황청과 화해하지 않음을 표현했을 정도로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교황의 권력은 황제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교황의 권력을 최고로 만들어준 사건은 십자군전쟁이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에서 동로마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가 셀주크튀르크군에 포로로 잡히면서 셀주크제국의 왕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의 신발에 입을 맞추는 치욕을 당한다. 이후 이슬람의 위협을 견디지 못한 동로마제국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교황에게는 더없는 기회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에서 “신께서 원하신다”라며 기독교 국가들의 참전을 호소한다. 십자군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교황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자신과 세속군주의 경쟁 구도 속에서 세속군주들을 누를 만한 위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셀주크제국을 격퇴해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동방에 왕국을 세운다. 십자군의 지도자인 교황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고 황제들을 압도했다.

    14세기에 들어서자 교황의 권력은 다시 세속군주의 도전을 받게 된다. 결정적 사건이 1309년에 터진 ‘아비뇽의 유수’다. 70년 동안 로마 교황청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전해 7대에 걸쳐 교황이 프랑스 왕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다. 14세기 초 프랑스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는 국가의 통일 체계를 갖추고 왕권을 강화했다. 필리프 4세는 플랑드르 영토를 두고 영국과 싸웠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은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1302년 이에 대항해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리프 4세에게 교회에 대한 과세를 금지한다고 통보한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국민이 교회에 헌납하던 십일조를 정지했다. 1303년 이에 화가 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했고, 이에 필리프 4세의 측근인 기욤 드 노가레는 교황의 반대파인 콜론나 가문과 합세해 교황이 휴양하던 아나니로 쳐들어가 교황을 사로잡는다. 로마 시민들의 도움으로 교황은 위기를 넘겼지만 당시 충격으로 한 달 뒤 숨졌다.

    프랑스는 로마 교황청을 압박해 1305년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에 선출되도록 했다. 이후 1309년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압박에 못 이겨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했고, 이때부터 68년 동안 교황은 아비뇽에 거주했다.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의 7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간 이후에도 프랑스는 따로 프랑스인 교황을 내세웠다. 이후 40년 동안 교황과 교황청이 둘이었고, 이 사태는 1417년이 돼서야 수습된다.

    교황, 금융가와 손잡다

    이렇게 교황과 세속군주의 반목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교황은 돈 많은 상인, 금융가와 손을 잡았다. 교황은 추기경 가운데 선거로 뽑았기 때문에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선거자금이 필요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였다. 그는 뇌물을 써서 교황에 올랐고, 교황이 된 후에도 여성 편력은 물론 교황청의 알몸 파티 같은 기행을 벌였다. 정말 타락과 탐욕의 끝판왕이었다. TV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도 그를 역사상 가장 탐욕스러운 교황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생아인 그의 자식들도 유명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그의 장남 체사레 보르자를 가장 바람직한 군주상으로 소개했고, 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팜파탈의 전형으로 수많은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교황과 결탁해 성공한 대표적 상인 가문이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들은 교황 선거에 돈을 댔고, 이를 통해 교황청의 재무 업무를 맡으면서 많은 부와 권력을 쌓아갔다. 특히 ‘위대한 로렌초’라 불린 로렌초 메디치(1449~1492)는 르네상스의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메디치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직접 교황을 배출하기도 했다. 로렌초의 차남 조반니는 1513년 교황에 올라 레오 10세가 됐고, 그의 조카인 줄리오는 1523년 교황에 올라 클레멘스 7세가 됐다.

    16세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추락하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가 1517년 촉발된 종교개혁이고 두 번째가 1527년 이탈리아 전쟁, 흔히 로마약탈이라고 하는 사건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건 모두 메디치 출신의 두 교황에 의해 촉발됐다는 점이다.

    종교개혁 뇌관에 불을 붙인 교황 레오 10세(왼쪽)와 알브레히트 대주교. [위키피디아]

    종교개혁 뇌관에 불을 붙인 교황 레오 10세(왼쪽)와 알브레히트 대주교. [위키피디아]

    ‌종교개혁은 1517년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마인츠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분노에 찬 편지와 95개의 논제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성경에는 면벌부의 근거가 없으며, 교황은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고,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근거라는 내용이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왜 면벌부를 사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일까. 역시나 돈 때문이었다. 그는 푸거 가문에 돈을 빌려 매관매직을 일삼던 교황 레오 10세에게 뇌물을 줬고, 이로 인해 그가 마인츠의 대주교가 된 것이다. 그가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면벌부 판매였다. 수익 일부를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교황으로부터 면벌부를 팔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한 것이다. 면벌부 사업만큼 눈감고 헤엄치기식 장사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뇌관에 불을 붙인 인물은 교황 레오 10세와 알브레히트 대주교였다.

    종교개혁 도화선 된 루터의 반박문

    사실 면벌부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었다. 면벌부 판매 수익은 가난 구제로부터 전쟁에 이르는 많은 사업에 쓰였다. 스페인에서 면벌부 수입으로 국토 회복 전쟁을 치렀고 신대륙 원정도 나섰다. 문제는 15세기 인쇄기의 발명으로 면벌부가 대량생산되면서 면벌부 수입은 교회의 주 수입원이 되면서였다. 교회가 면벌부를 남발해 그 돈으로 교황청과 성당도 짓고 성직자들이 개인 치부까지 했다. 교회세를 내는 상황에서 면벌부까지 사야 했던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뿌려진 루터의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

    개신교가 유럽 전체에 그렇게 빨리 퍼진 것은 개신교에는 의무적인 교회세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교회세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이 개신교로 개종했다. 1521년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파문했으나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제후와 성직자들은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유럽 사회가 구교와 신교로 분열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527년 교황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약탈 사건이다.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이 강력해지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코냑 동맹을 주도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려 했다.

    카를 5세는 교황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로마를 침략해 로마 교황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교황은 카를 5세에게 싹싹 빌어 목숨은 부지했다. 가톨릭의 수호자라 불리는 카를 5세가 가톨릭의 적인 신교도를 용병으로 고용해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을 공격했으니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돈의 관점으로 보면 납득이 간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종교나 사상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보면 클레멘스 7세는 왜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간다. 카를 5세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교황이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을 이혼당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교회를 둘러싼 많은 사건이 사실은 돈과 권력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교회세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세가 뭐길래 교황과 세속군주가 이렇게 싸웠을까. 로마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성서를 통합하면서 교회 체제를 선호했다. 돈을 거두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세도 처음에는 세금이 아니었다. 교회세의 대표적인 것이 번 수입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십일조였다. 구약성경에는 고대 유대인들이 수확물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도 수확물의 10분의 1을 사제에게 공납했다. 유대인에게 중요한 의무였던 십일조는 가톨릭교회에도 계승됐다.

    처음에는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냈다. 하지만 기독교가 유럽 전체로 전파되면서 585년 프랑크왕국의 공의회에서 십일조를 가톨릭 교인의 의무로 명문화했다. 이에 더해 카롤루스 대제는 779년 모든 국민은 십일조로 내야 한다고 천명한다. 십일조가 세금이 된 것이다. 십일조로 인해 가톨릭교회에는 돈이 넘쳤고 이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점차 교회의 설립이 ‘비즈니스’가 됐다. 교회세의 4분의 3은 지역 교회에 귀속됐기 때문이다. 이러자 지역의 유력자들이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교회세를 두고 교회 간의 다툼도 일어났다. 귀족들은 교회를 사유화해 십일조의 징수권을 가졌고, 심지어 이를 사고팔았다.

    기독교 전파의 원동력, 교회세

    이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세가 아이러니하게 기독교 전파의 원동력이 됐다.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지면 그곳에서 교회세를 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없는 미개척지에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런 교회세 제도는 신대륙 주민들에게는 큰 재앙이었다. 근세가 시작되면서 대항해라는 국가적 사업은 기독교 포교라는 명분 속에서 행해졌다. 대항해가 성공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세계와 동방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직접적으로는 향신료를 확보하고 금을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신대륙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급기야 1494년 로마 교황의 승인 아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절반씩 나눠 가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한다. 서경 46도 36분을 경계로 전 세계를 둘로 나눠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땅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양국이 책임지고 미개한 나라들에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16세기 유럽에 개신교가 늘어나면서 교회세가 줄자 해외 포교는 교회 비즈니스에서 점점 중요해졌다. 스페인은 식민지에 ‘엔코미엔다 제도’를 도입했다. 이것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현지인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할을 맡기고 대신 현지인에게 자유롭게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쉽게 말해 현지인들을 약탈하고 착취할 수 있는 허가증이었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로 간 스페인인들은 기독교 포교라는 명분 아래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교황의 말에 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신대륙에서 나오는 금과 은은 모두 약탈했고, 광산 개발에는 노예나 다름없는 현지인들이 동원됐다. 이후 200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의 90%가 전염병에 걸리거나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 죽었다.

    중세 기독교 국가들은 교회세 때문에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사람들이 교회에 교회세를 내니 국가에 세금을 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교황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군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점차 교황의 힘이 약해지자 군주들은 교회세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의 대표적 사례가 앞서 얘기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교황의 다툼이었다.

    영국의 헨리 8세(재위 1509~1547)가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성공회를 세운 것도 사실은 교회세 때문이었다. 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그의 형 아서의 요절로 왕세자가 되면서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그는 왕이 된 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한다. 이 사건은 이혼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돈 때문이었다. 절대 권력을 원하던 헨리 8세는 대륙에서 종교개혁의 불씨가 타오르자 교회세를 자신이 차지할 궁리를 한다.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헨리 8세는 돈과 권력을 위해 가톨릭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전 유럽에 퍼지면서 구교와 개신교의 갈등이 격화됐다. 급기야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유럽 전체를 휩쓴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중심의 가톨릭 천하가 무너지고 가톨릭교회는 결국 개신교를 인정한다. 루터교, 칼뱅교 등 다양한 개신교가 가톨릭과 함께 기독교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바로 종교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서서야 종교전쟁이 어느 정도 종결됐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강승준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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