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는 “고마(그만) 자라. 내일 뉴스 들으면 되지 마로(뭐하러) 안자고 그카노?” 하셨지만 나는 끝까지 듣고 싶었다. 당시 한국대표팀엔 골키퍼에 이세연, 수비에 김호 김정남이 있었고, 박이천 정병탁 이회택 정강지 정규풍 등이 공격수로 활약했다. 반면 말레이시아엔 골키퍼 아르무감, 수비수 소친온 찬드란 등이 있었다.
전반전 중반 한국이 한 골을 넣자 시끄럽던 말레이시아 관중이 조용해졌다. 한국이 주도권을 잡고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관중이 응원을 멈추자 라디오의 잡음도 잦아졌다.
그런데 잠시후 라디오 중계 때마다 생기는 징크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중계를 하다가 “여기는 말레이시아 국립경기장입니다” 하면서 잠시 중계를 끊는 게 그때의 관례였다. 아무래도 방송장비가 워낙 낙후된 시절이라 중간점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계방송이 끊기면 여자 아나운서가 나와 “여러분은 지금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축구중계를 듣고 계십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잘살기 위한…” 이런 식의 판에 박은 홍보방송이 1분쯤 이어진다.
문제는 그 시간만 되면 한국이 골을 먹는 것이다. 중계가 다시 시작되기 무섭게 운동장이 시끄러워지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말레이시아 관중들의 함성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상대팀이 공격할 때보다 중계가 끊어지는 순간을 가장 두려워했다.
후반전 휘슬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꺼풀은 무거워졌다. 졸음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지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누나가 옆방에서 책 읽는 소리가 아련히 들릴 무렵이면 나는 어김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아버지께 “어떻게 됐어요?”하고 물어보면, 아버지는 웬만해선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가 계속 달려들어 물어보자 웃으면서 “1대2로 졌다”고 하는 것이다.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라디오 뉴스도 놓쳤고, 신문도 하루가 지나야만 결과를 보도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물어보지만 조무래기들은 딱지나 구슬 모으는 데 정신이 팔려 축구는 안중에도 없었다.
학교 사택 옆에는 지방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었는데, 그곳에 나를 귀여워하는 고등학생 형이 살았다. 나와 축구를 같이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는 분이었다. 나는 그 형한테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형도 나를 놀리느라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맛있는 것을 가져오면 알려준다는 ‘미끼’를 내밀었다. 나는 그 말만 믿고 부엌을 뒤져 사과를 가져가서 반쪽씩 나눠먹었다.
그런데 그 형은 한국이 1대3으로 졌다고 말했다. 난 황당했다.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하나? 아무래도 그 형의 말이 맞을 것 같았다. 사과까지 갖다바치고 얻은 대답이니까.
다음날(경기 이틀 뒤) 조간신문에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국이 2대1로 이겼다는 게 아닌가. 나는 기분이 좋다고 만세를 부를 수도 없고, 속은 것이 억울해 울 수도 없었다. 다짜고짜 아버지에게 따졌더니 아버지 하는 말씀 “누가 먼저 자래?” 이번엔 고등학생 형에게 따졌더니 “사과가 맛이 없어서 그랬어” 이러는 거다. 지금도 그때 살던 초가집 사택과 잡음이 많던 내쇼날 라디오가 생각난다. 나에게 장난치던 고등학생 형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명의 이기(利器)는 시골마을까지 들어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1973년, 우리 학교에도 TV라는 최첨단 제품이 등장했다. 나는 20세기에 인간이 발명한 물건 중 TV만큼 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서 세계를 하나로 연결시킨 것은 전적으로 TV 덕분이다.
옆집에 교사 부부가 새로 이사왔는데 별로 넉넉한 살림이 아닌데도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텔레비전이었다. 나는 우리 집이 먼저 TV를 사지 않은 것이 섭섭했지만,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웃으면 복이와요’ 같은 코미디를 실컷 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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