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고지가 바로 저긴데…”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0-12-22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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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중국 건국 61주년 기념일인 2010년 10월1일 후진타오 국가주석(앞줄 왼쪽에서 4번째) 등 중국 지도부가 베이징 톈안먼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헌화의식을 갖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 8명이 참석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중국 미래권력 후보는 5명으로 모두 ‘4.5세대’ 인물이다. 4.5세대란 1945년 1월1일부터 1949년 12월31일 사이에 출생한 고위간부로 후진타오(胡錦濤·69)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 지도부와 시진핑(習近平·58)을 중심으로 한 제5세대 지도부 사이에 낀 세대란 의미에서 필자가 만들어낸 말이다.

    중국 공산당이나 중국 정부가 자국의 지도부를 ‘○세대 지도부’라고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중화권과 한국, 일본 등 이웃 국가에서 중국 지도부를 분석할 때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세대를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당 총서기 및 국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국무원 총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등 권력서열 1~4위에 해당하는 핵심 요직이 한번 취임하면 보통 10년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최근 10년을 주기로 지도부 세대를 한 번씩 바꾸고 있다.

    세대별 지도부를 연령별로 보면 제3세대는 주로 1930년대, 제4세대는 1940년대, 제5세대는 1950년대, 제6세대는 1960년대 출생자다.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 시절만 해도 나이에 따른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 주석이 집권한 2002년 이후 중국 공산당은 연경화 정책에 따라 나이 규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상무위원 놓고 치열한 경쟁

    이에 따라 2007년 제17차 당 대회에선 1930년대 출생인 쩡칭훙(曾慶紅·1939년 7월생) 전 국가부주석을 비롯해 뤄간(羅幹·1935년 7월생), 우관정(吳官正·1938년 8월생) 등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모두 퇴진했다. 이들과 같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던 황쥐(黃菊·1938년 9월생) 부총리는 제17차 당 대회를 4개월여 앞둔 2007년 6월2일 사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세대 사이에 끼듯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뒤늦게 진입해 나이 제한에 걸려 5년 만에 퇴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쩡칭훙, 뤄간, 우관정, 황쥐는 모두 2002년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한 3.5세대 인물들이다. 마찬가지로 1940년대 후반 출생자는 2012년 제5세대 지도부와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다 해도 제19차 당 대회가 열리는 2017년엔 모두 퇴진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1950년 이전 출생자는 모두 제한 연령인 만 68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이 위정성(兪正聲·1945년 4월생) 상하이(上海)시 당 서기, 장더장(張德江·1946년 11월생) 국무원 부총리, 장가오리(張高麗·1946년 11월생) 톈진(天津)시 서기, 류옌둥(劉延東·1945년 11월생) 국무위원, 류윈산(劉雲山·1947년 7월생) 당 중앙선전부 부장 등 5명이다. 이들은 1940년대 후반 출생자지만 아직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연령대의 선두주자는 대부분 2002년 상무위원회에 들어갔고 2007년엔 시진핑, 리커창(李克强·56) 부총리 등 1950년대 출생자마저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그러니 한마디로 선두주자 대열에서 탈락한 셈이다. 한편으론 모두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상무위원회 진입 일보 직전에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들이 1년여 뒤에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신동아’ 2010년 7월호부터 소개한 8명 중 7명은 2012년 가을에 구성될 제18기 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사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9개의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 가운데 남은 곳은 2, 3개에 불과하다. 그 사이에 또 다른 다크호스가 나타날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이들 5명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가능성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다.

    이들 가운데 비교적 진입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위정성 상하이 당 서기와 장더장 부총리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인물들로 점쳐졌다. 또한 류윈산 중앙선전부 부장과 함께 2002년 가을부터 중앙정치국에 진입했다. 특히 장 부총리는 중앙정치국에서 장 전 주석 퇴진 이후 급격히 줄어드는 상하이방(上海幇) 중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반면 위 서기는 시진핑, 왕치산(王岐山·63), 보시라이(薄熙來·62) 등과 함께 태자당(太子黨) 소속이다. 같은 계파에서 4명의 상무위원이 나오는 게 쉽지 않기에 치열하게 다퉈야 상무위원회 진입이 가능하다는 얘기.

    2007년 가을 중앙정치국에 진입한 류옌둥 국무위원과 장가오리 톈진시 서기는 각각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와 상하이방으로 분류되며, 상무위원회 진입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특히 류 국무위원은 지방 당 서기 경험이 없는 데다 같은 계파에 리커창, 리위안차오(李源潮·61) 중앙조직부장, 왕양(汪洋·56) 광둥(廣東)성 당 서기, 링지화(令計劃·55) 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판공청 주임 등 4명이 버티고 있어 진입이 쉽지 않다. 류 국무위원과 같은 퇀파이인 류윈산 중앙선전부 부장은 선전·선동 분야에서만 33년을 일한 전문가지만 일반 대중 및 지식인 그룹의 평가가 좋지 않다.

    하지만 중국의 최고지도부 인사는 그때그때의 상황과 계파 간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조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최종 결과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 위·정·성

    온갖 풍상 겪은 ‘황친국척(皇親國戚)’ 장쩌민이 발탁한 뒤 승승장구

    위정성(66)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상하이시 당 서기는 태자당 중에서도 ‘황친국척(皇親國戚)’으로 불린다. 이는 ‘황제의 가솔과 친척’을 일컫는 말로 거물급 세도가를 의미한다.

    위 서기의 부친 황징(黃敬·1912~58, 본명 위치웨이·兪啓威)은 항일투쟁 및 혁명전사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톈진시장과 국가기술위원회 주임 겸 제1기계공업부 부장까지 지냈으나 1958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황징은 항일투쟁 당시 한때 마오쩌둥(毛澤東)의 4번째 부인인 장칭(江靑)과 동거했다. 말 그대로 황친(皇親)인 셈이다. 이 때문에 장칭은 문화대혁명 때 베이징(北京) 부시장을 역임한 옛 연인의 처인 판친(範瑾·1919~2009, 본명 쉬미엔원·許勉文)을 심하게 박해했다.

    황징의 숙부 위다웨이(兪大維)는 대만의 국방부장을 지낸 인물로 그의 아들 위양(兪揚)은 장제스(蔣介石)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의 딸 장샤오장(蔣孝章)과 결혼했다. 대만 최고지도자의 친척이니 국척(國戚)인 셈이다.

    위 서기의 가족과 친척은 문화대혁명 때 직계와 방계가족 9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5남매 중 여동생 위후이성(兪惠聲)은 온갖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려 자살했다. 모친 역시 반당분자로 몰려 감옥살이를 했다. 외할머니는 공사판에서 굶어죽었다. 같은 태자당인 시진핑 국가부주석이나 보시라이 충칭(重慶)시 서기 집안보다 훨씬 심한 고초를 겪었다. 게다가 그의 큰형 위창성(兪强聲)이 1985년 국가안전부 간부의 신분으로 미국에 망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그가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 서기와 건설부장, 후베이(湖北)성 서기를 거쳐 2002년 가을 제16차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부친의 음덕과 장인, 형 등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친이 제1기계공업부 부장일 때 수하에서 일한 사람이 바로 장쩌민 전 주석이다. 덕분에 위 서기는 장 전 주석과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됐다. 부친의 보살핌을 받았던 장 전 주석은 1980년대 초 전자공업부 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밑에서 일하던 그를 적극 후원했다. 그가 상하이 당 서기로 오게 된 데도 장 전 주석의 지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한국과 인연…빠른 승진에 한몫

    그는 국무위원 겸 국방부장을 지낸 장인 장아이핑(張愛萍·1910~2003) 덕분에 군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 덩푸팡(鄧樸方)과 친한 둘째형 위민성(兪敏勝)의 도움으로 그는 덩푸팡이 설립한 중국장애인복리기금회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위 서기는 한국 덕을 많이 본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는 1992년 수교하기 전부터 한국인 사업가가 진출하기 시작한 산둥성 칭다오시에서 1987년부터 1997년 건설부 부부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무려 10년간 시장과 서기로 재직했다. 지방 시장에 불과하던 그가 일약 중앙정부의 부부장으로 승진하고 이어 건설부 부장으로 오른 데는 한국인 기업가의 대대적인 진출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칭다오엔 상주인구로 등록한 한국인이 무려 11만명으로 베이징에 이어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칭다오시 재정 수입의 3분의 1은 한국 기업에서 나온다는 얘기도 있다.

    1945년 4월생으로 4.5세대인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도전하는 다른 태자당 출신 간부들보다 경력 면에서 앞선다. 그가 정식으로 처음 부장급(장관급) 직책을 맡은 것은 1998년 건설부 부장이었다. 같은 중앙정치국 위원이지만 왕치산 부총리는 2년 뒤인 2000년 국무원 경제체제개혁 판공실 주임(부장급)을 맡았다.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는 2001년에 랴오닝(遼寧)성 성장에 임명됐다.

    장가오리 톈진시 서기나 류옌둥 국무위원도 2001년과 2002년에 정(正)부장급 직책에 임명됐다. 그보다 정부장급 승진이 빨랐던 사람은 1995년에 지린(吉林)성 서기를 맡은 장더장 부총리와 1997년 당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서 정부장급으로 승진한 류윈산 중앙선전부 부장뿐이다. 하지만 2012년 가을 제18차 당 대회에서 이번에 소개하는 5명 중 누가 최고지도부에 진입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 장·더·장

    조선족 출신 첫 각료 이덕수가 키운 최고의 ‘북한통’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중국의 내각인 국무원에서 공업, 전신, 에너지, 교통 분야를 맡고 있는 장더장(65) 부총리는 2002년 가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될 때만 해도 5년 뒤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으로 보는 분석가가 많았다. 이런 예상은 2007년 10월의 제17차 당 대회를 앞둔 몇 달 전까지도 이어졌다. 그 무렵 홍콩 언론은 장 당시 광둥성 서기가 리커창 랴오닝성 당 서기, 위정성 후베이성 서기, 저우융캉(周永康) 공안부장과 함께 당 최고지도부에 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시진핑 상하이 당 서기가 다크호스로 떠오르면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 구도는 크게 바뀌었다. 실제로 17차 당 대회 직후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사람은 5세대 지도부인 시 서기와 리 서기를 비롯해 4세대 인물인 저우 공안부장과 허궈창(賀國强·68) 당 중앙조직부장이었다.

    ‘백락(伯樂)’이란 인재를 알아보고 발굴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현재 중국 지도부 가운데 ‘최고의 북한통’으로 불리는 장 부총리를 처음 발굴해 키운 백락은 조선족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처음으로 각료를 지낸 이덕수(李德洙·68) 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다.

    랴오닝성 타이안(台安)에서 태어난 장더장은 유년시절부터 줄곧 지린성 창춘(長春)시에서 자랐다. 문화대혁명 시절인 1968년 창춘에서 명문학교인 제4중(중고교)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왕칭(汪淸)현의 농장으로 하방(下放)됐다. 그곳에서 당시 왕칭현 당 위원회 상무위원이던 이덕수의 천거로 왕칭현 선전조 간사가 됐다. 이덕수는 1972년 장더장을 옌볜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는 옌볜대에서 조선어를 전공했다. 이어 1978년 8월엔 교환 유학생으로 뽑혀 김일성종합대에서 2년간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가 유학을 마치자 당시 옌볜주 당 서기였던 이덕수는 1983년 3월 그를 옌지(延吉)시 부서기로 발탁했다. 이후 중앙지도부가 그를 눈여겨보면서 승진가도를 달렸고, 부장급(장관급)에 머문 은사(恩師) 이덕수를 크게 앞지르기 시작했다.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近墨者黑 近朱者赤!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때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에 이어 당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은 이듬해 10월 첫 북한 방문을 앞두고 그를 옌볜주 당 서기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장 총서기의 후원 아래 1992년 당 중앙후보위원에 뽑힌 데 이어 1997년부터는 내리 3번 연속 중앙위원으로, 나아가 2002년부터는 연속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장쩌민은 2003년 3월 국가주석 직에서 물러나기 직전에도 광둥성을 직접 찾아 막 이곳 당 서기로 부임한 장 서기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중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8분의 1, 무역액의 3분의 1을 자랑하는 광둥성은 ‘지린성의 촌뜨기’인 장 서기에게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그가 부임한 직후 광둥성에서 사스(중증급성 호흡기증후군)가 발생하고 이듬해인 2003년 2월엔 외지에서 온 농민공이 경찰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터졌다.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 등 진보적인 지방 언론이 책임론을 거론하자 광둥성에서는 장 서기 퇴진운동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장 서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남방도시보’ 책임자를 탈세 등의 혐의로 처벌하는 등 강력 대처하면서 꿋꿋이 버텨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장 부총리는 김일성종합대 동문이다. 장 부총리보다 4세 위인 김정일은 1964년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1월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이 광둥성을 찾은 것도 이런 끈끈한 ‘학연’이 작용했다고 한다. 장 부총리는 김 위원장과의 친분도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위원장이 광둥성에 머무는 동안 장 서기가 내내 직접 수행했다. 장 부총리는 한국어가 유창하다. 잘못된 통역을 현장에서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앞으로 북중 사이의 경협 사업에서 장 부총리의 역할이 클 것으로 보이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북한통’이라는 평가가 긍정적으로만 비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광둥성 서기로 재직할 때 광둥인들은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이라더니 세계에서 가장 사악하고 무뢰한 북한에서 유학하더니 (장더장이 우리말은 안 듣고) 자기 방식만 고집한다”며 조롱했다.

    ▼ 장·가·오·리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노동자로 출발한 자수성가 지도자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장가오리(65)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톈진시 당 서기는 청렴결백할 뿐 아니라 품행과 태도가 곧고 올바르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또 멸사봉공의 자세로 일하며 정치적 업적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가 1970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석유기업 노동자로 출발해 37년 만에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허언(虛言)을 좋아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며, 일을 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성격이라고 전해진다.

    장 서기는 푸젠(福建)성 진장(晋江) 출신이다.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최고의 지방관’인 성(省)·직할시 당 서기를 거쳐 2007년 10월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샤먼(廈門)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1960~70년대 중국 대륙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의 전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석유부 산하 광둥성 마오밍(茂名)시의 마오밍 석유공사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이후 마오밍 석유공사에서만 16년을 일하면서 일선 노동자에서 생산라인 지휘부 판공실 비서, 석유제련공장 부서기 및 서기, 계획처 처장을 거쳐 1985년 마오밍 석유공업공사 경리직까지 올라갔다.

    석유공사에서의 성실한 업무 태도는 차츰 광둥성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던 1985년 광둥성 경제위원회 주임으로 발탁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88년 광둥성 부성장을 거쳐 1993년 광둥성 상무위원 겸 부성장, 1997년 선전(深?)시 당 서기, 2000년 광둥성 부서기로 승진했다. 이어 2001년 산둥성 부서기, 2002년엔 산둥성 서기 겸 성장을 거쳐 지난해 3월엔 톈진시 당 서기에 올랐다. 기업에서 경제특구(선전), 경제대성(광둥성, 산둥성), 직할시(톈진)에 이르기까지 국가 지도자로 올라설 경력을 두루 갖춘 것이다.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정치 공적도 두루 쌓아

    정치 업적도 누구 못지않다. 선전시 서기로 일하던 1988~2001년에는 선전시를 하이테크 산업과 숲으로 싸인 정원 같은 선진도시로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산둥성 성장과 서기로 일한 2001~07년엔 산둥성을 무역 및 하이테크 산업, 민간경제의 대성(大省)으로 끌어올렸다. 2006년 산둥성의 국내총생산(GDP)은 처음으로 2조위안(약 257조원)을 돌파하면서 광둥, 장쑤(江蘇)성에 이어 전국 3위에 랭크됐다. 중국 중앙지도부는 장 서기의 당무 및 경제업무 처리 능력과 복잡한 문제를 전체 판도에서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특히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톈진직할시는 중국의 경제구도상 역사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다. 주장(珠江) 삼각주 경제권인 선전과 장장(長江) 삼각주 경제권의 상하이에 이어 환(環)보하이(渤海)만 경제권의 중심지가 바로 톈진이다. 2020년까지 톈진을 북방경제의 중심도시로서 국제항구 도시, 생태 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중국 정부의 장기 플랜이다. 중앙정부는 특히 톈진시의 빈하이(濱海) 신구(新區)에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산업, 환경을 해치지 않고 에너지가 적게 드는 서비스 산업을 양성해 중국의 새로운 경제개발 모델을 세움과 동시에 금융개혁의 혁신기지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에 따라 장 서기는 톈진을 빈하이 신구, 전통 도시지역, 교외의 농촌지역으로 나눠 세 지역을 상호 유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 아래 외자 유치에 진력했다. 2006년 6월 유럽의 에어버스사는 약 70억유로(약 8조5000억원)를 들여 A320 150인승 중형 여객기의 조립공장을 톈진에 세우기로 약속했다. 푸젠성 출신인 장 서기는 특히 대만 기업인을 톈진에 많이 끌어들였다. 현재 대륙에 있는 7만여 개 대만 기업 중 10%가 환보하이만 지역에 집중돼 있다. 특히 톈진에만 1800여 개 기업이 몰려 있다.

    장 서기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영수로 한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친분은 매우 느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그가 태자당의 영수인 쩡칭훙 국가부주석과 석유 분야에서 같이 일한 인연으로 후원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석유부의 마오밍 석유공업공사 부경리와 경리로 일할 때 후 부주석은 석유부의 외사국 연락부와 중국해양석유총공사의 연락부 부경리, 석유부 외사국 부국장을 지냈다.

    하지만 석유 분야의 인연으로 쩡 부주석과 알게 된 저우융캉 정치국 상무위원은 쩡 부주석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 장 서기-쩡 부주석의 관계와는 천양지차다. 일각에서 그를 무당파로 분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류·옌·둥

    미모와 패션 감각 뛰어난 중앙정치국 홍일점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현재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15명 중 홍일점은 류옌둥(66) 국무위원이다. 교육, 문화, 체육, 과학기술 분야와 홍콩 및 마카오 업무를 맡은 류 위원은 곧잘 ‘철의 낭자’로 불리던 우이(吳儀·73) 전 부총리에 비견된다. 중앙정치국 위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 말 그대로 자수성가해 중국 정치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한 점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과거에 장칭, 예췬(葉群), 덩잉차오(鄧潁超) 등 3명의 여성이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된 적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정계실력자인 남편의 등에 업혀 들어온 경우다. 장칭은 마오쩌둥, 예췬과 덩잉차오는 각각 린뱌오(林彪)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아내다.

    우 전 부총리와 류 위원은 자수성가한 것은 같아도 이미지는 크게 다르다. 우이 하면 곧바로 강철 같은 ‘여전사’를 떠올리지만, 류 국무위원은 원숙함이 묻어나는 미모의 여인이다. 류 위원은 일에 있어서는 굽힐 줄 모르는 굳센 의기를 보여주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늘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중화권 매체는 이런 그를 ‘굳셈과 온유함을 함께 지닌(剛柔相濟) 여인’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강유(剛柔) 겸비한 ‘여전사’

    류 위원은 패션 감각도 뛰어나다. 2004년 5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부주석과 중앙통일전선공작부(중앙통전부) 부장 자격으로 홍콩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하루 4번 치러진 행사 때마다 옷을 갈아입었다. 달라진 옷마다 행사 내용과 딱 맞게 어울리는 데다 그의 우아하고 고귀한 자태를 멋지게 표현해 홍콩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홍콩에서 ‘류 패션 선풍’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류 위원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퇀파이이면서 당·정·군 고위직 인사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 출신이다. 부친 류루이룽(劉瑞龍)은 어릴 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혁명운동에 참가한 혁명 원로였다. 항일전쟁 때는 대장정에 직접 참여했고 인민해방군 제3야전사령군 후근사령원(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건국 뒤엔 상하이시 당 위원회 비서장과 농업부 부부장을 지냈다.

    집안 배경은 좋았지만 류 위원은 다른 태자당과는 달리 화공공장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 허베이(河北)성의 탕산(唐山)시 카이핑(開平)현의 카이핑 화공공장에서 기술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해 10년간 허베이성과 베이징시의 화공공장에서 일했다. 기술자에서 공직자로 변신한 것은 1980년 베이징시 당 위원회 조직부 간부를 맡으면서부터. 특히 1982년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후 주석과 함께 일하면서부터 출세 길이 열렸다.

    그는 1984년까지 후 주석과 함께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근무했다.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와 함께 1983년부터 전국청년연합 주석 직도 맡았던 후 주석 밑에서 부주석으로 일한 그는 1985년 4월 후 주석이 구이저우(貴州)성 당 서기로 발령 나자 주석 직을 물려받았다. 후 주석과의 인연으로 치자면 같은 퇀파이 가운데 리커창 상무위원이나 리위안차오 중앙정치국 위원보다 더 끈끈한 셈이다.

    류 위원은 30년에 달하는 공직생활 대부분을 공청단과 중앙통일전선공작부에서 보냈다. 특히 중앙통전부에서는 1991년 부비서장을 시작으로 정치국 위원에 오른 뒤 중앙통전부 부장 자리를 두칭린(杜靑林·65) 쓰촨(四川)성 당 서기에게 물려줄 때까지 17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잇따라 쓴잔을 마셨다. 제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2007년 봄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 서기가 낙마하자 후 주석은 빈 자리에 류 위원을 천거했지만, 장쩌민 전 주석의 반대에 부닥쳐 이 자리는 시진핑에게 돌아갔다.

    2007년 가을 정치국 위원에 올랐지만 당초 예상되던 우 전 부총리의 자리는 그를 비켜갔다. 그가 맡은 자리는 과거 천즈리(陳至立) 국무위원이 담당했던 자리로 같은 부총리급이긴 하지만 정치국 위원이 아닌 사람도 차지할 수 있는 자리다. 현재 5개인 국무위원 자리는 그를 제외하면 모두 정치국 위원이 아닌 사람이 맡고 있다. 그로서는 참기 어려운 치욕이다.

    ▼ 류·윈·산

    13억 중국 인민의 ‘이데올로기 차르’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중앙서기처 서기인 류윈산(64) 중앙선전부 부장은 13억 중국 인민의 ‘의식형태(意識形態) 샤황(沙皇)’으로 불린다. ‘의식형태’란 이데올로기를 의미하는 중국어다. ‘샤황’은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의 황제를 일컫는 차르(Tsar)를 의미한다. 중국 내 사상 통제의 최고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그의 실제 직책으로 보면 선전 분야의 1인자라고 볼 수는 없다. 중국의 모든 사상 통제와 선전·선동의 최고책임자는 중국 정치권력 서열 5위의 리장춘(李長春·67)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하지만 하얼빈(哈爾濱)공대를 졸업하고 랴오닝성에서 오랫동안 지방 관료로 일하다 허난(河南)성 서기를 거쳐 중앙 정계에 진출한 리장춘은 200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서 이데올로기 분야를 맡을 때까지 한 번도 이 분야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이에 비해 유 부장은 당 선전분야에서만 26년, 신화(新華)통신 기자 경력까지 포함하면 무려 33년을 선전과 선동, 사상통제 분야에서 일했다. 말 그대로 ‘사상통제의 대가’인 셈이다. 그러나 류 부장의 독자적인 목소리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중화권 정치분석가들은 “류 부장이 1인자 리장춘의 그림자만 따라다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류윈산이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된 것은 26년 전인 1985년 9월 중국 공산당 제12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에서다. 당시 그는 38세로 최연소 후보위원이었다. 제2세대 핵심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집권하던 시절 그와 함께 중앙위원이 된 사람은 대부분 제3세대 인사였다.

    ‘4.5세대’ 5인방의 좌절과 야망
    1985년 최연소 중앙위 후보위원

    4세대 지도부 역시 후진타오 주석과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는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 모두 각각 2년, 7년, 12년씩 늦게 중앙위원회에 진입했다. 후 주석은 1982년 후보위원이 됐고 우 상무위원장은 류 부장과 같은 해 후보위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 12년 늦게 후보위원과 중앙위원으로 올라온 시진핑, 리커창 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뒤로 밀렸다.

    류 부장의 원적은 산시(山西)성 신저우(?州)지만, 출생지는 네이멍구(內蒙古) 투모터유(土默特右)기(旗)다. ‘기’는 소수민족이 많은 네이멍구 자치구 특유의 행정구역으로 다른 지역의 현(縣)에 해당한다. 네이멍구 지닝(集寧)시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를 거쳐 투모터유현의 타자원으로 일하던 그를 알아보고 키워준 사람은 톈충밍(田聰明·68) 당시 신화통신 네이멍구 분사 기자. 이후 톈충밍과 저우후이(周惠) 당시 네이멍구 자치구 제1서기의 후원으로 1984년 2월 네이멍구 당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임명되는 등 승진가도를 달렸다. 당시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였던 왕자오궈(王兆國·70) 현 정치국 위원이나 서기처 서기였던 후 주석, 류옌둥 서기 등 공청단 세력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시기다. 1993년 4월 당 중앙선전부 상무부부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는 그를 후원해준 톈충밍보다 앞서나갔다.

    당 중앙선전부장은 인민의 사상을 통제하는 책임 직위다. 금서(禁書)의 출판과 판매를 막고 인터넷을 통제하며, 주요 반체제 인사의 감시 작업도 그가 총괄한다. 인민에게서 좋은 평가를 얻기 어려운 자리다. 실제로 건국 이래 역대 11명의 중선부장 중 이후에 잘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총서기 자리에 올랐던 후야오방(胡耀邦)은 결국 중도에 쫓겨나 현재까지도 공식 복권이 되지 않고 있다. 나머지 중에서도 부총리나 당 중앙서기처 서기까지 오른 사람은 있으나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사람은 아예 없다.

    게다가 현재 일반 인민을 상대로 공청단 인사 중 가장 평판이 나쁜 사람을 꼽으라면 십중팔구 류 부장을 꼽는다. 같은 공청단 인사지만 후 주석과의 친밀도 역시 리커창 부총리나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 류옌둥 국무위원과 달리 크게 약하다. 항간에서는 그와 중국 금융업계의 거물로 알려진 아들 류러페이(劉樂飛·38)가 탈법과 편법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며 네이멍구 자치구에 석탄광산을 갖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이래저래 최고지도부 진입이 쉽지 않은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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