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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김연경의 ‘세계 명작 다시 읽기’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도스토예프스키‘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김연경│소설가 koshka1@hanmail.net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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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카라마조프’에서 친부 살해는 일차적 의미의 범죄(아비를 죽이다)를 넘어 정치적 혁명(왕-차르를 죽이다), 나아가 형이상학적 반항과 무신론(신을 죽이다)을 아우른다. 실제로 이 소설이 쓰일 무렵 무신론과 허무주의를 표방한 급진파 쪽에서 각종 테러가 일어났고 황제(알렉산드르 2세) 시해 시도도 있었다. ‘카라마조프’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극우파 작가의 우려와 불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젊은 날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에 목말라 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편력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단순한 ‘찬반’(Pro et Contra)에 그칠 리는 없지 않겠는가.

무신론자 이반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작 노트에 이반을 무신론자라고 정의했다. 소설 속에 자주 나온 표현을 정리해보자.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멸에 대한 믿음을 제거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반은 알료샤를 앞에 두고 반문한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할까? 인간이 신의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면 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 부조리함 속에 뭔가 대단히 고매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설령 그럴지라도 나의 ‘유클리드적’, 즉 3차원적 지성으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이반은 말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테제가 나온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예로 들어가며 역설한다. 신이 의도한 ‘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마저 희생해야 한다면 그 비싼 입장료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입장권을 양심에 따라 정중히 반납한다고. 알료샤의 말대로 ‘반역’이다. 신에 대한 반역, 즉 이반의 무신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 없는 유토피아’ 건설이다. ‘대심문관’을 보자.



에스파냐의 세빌리아, 종교재판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5세기말, ‘그’가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민중을 사로잡은 ‘그’를 곧바로 체포한다. 이어 밤이 되자 남루한 수도복을 입은 대심문관이 감옥을 찾아온다. 대심문관의 기나긴 고백의 내용은 실상, 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유혹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다. 악마가 황야에서 수행 중인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제안을 연거푸 내놓는다. 돌을 빵으로 바꿔라,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내 앞에 경배하라 등. 대심문관은 그것을 각각 기적과 신비와 권위에 대한 유혹으로 풀이한다. 어떻든 그리스도가 당당히 물리쳤던 저 유혹을 대심문관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대심문관의 논리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빵과 자유의 역학 관계에 있다. 인간이란 본디 그리스도의 믿음과는 달리 너무도 나약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자유라는 짐을 덜어주고 빵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대심문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빵”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 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권, 김연경 옮김, 민음사, 2007, 535쪽)

이것이 신 없이 건설된 유토피아의 실체다. 여기서 우리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전조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 역사 속의 대심문관이 많은 경우 세속적 권력에 눈이 먼, 극도로 부패한 가톨릭 위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또 저 ‘선택받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황야에서 풀뿌리와 메뚜기로 연명하며 수도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가 신이 아닌 악마의 원칙을 받아들여 유토피아 혹은 반(反)유토피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무덤 뒤엔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신도, 불멸도, 저 세계도 없다면 결국 양떼(우매한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의 양식인 빵과 우상(경배의 대상)밖에 없다. 이 도저한 허무주의가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경멸의 복합작용에서 비롯됐다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데 그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그림자 신)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그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오직 자기 혼자만 이 거대한 ‘기만’의 고통을 감수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대심문관의 오만한 선민의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어떻든 이반의 이론적 극단인 이 분신은 일종의 ‘악마’이되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인간의 본성과 맹점,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대심문관만큼 날카롭게 꿰뚫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무신론이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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