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년에 달하는 우리 역사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지식인은 수없이 많다. 그들 가운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지식인들은 시대적 과제에 적극 대응한, 다시 말해 시대정신의 심장을 겨눈 지식인들이다. 과연 이들은 어떤 삶과 사상, 그리고 저작을 통해 자기 시대에 맞서왔는가.
이번 기획에서 나는 우리 역사에서 시대정신을 탐구한 24명의 지식인과 그의 대표작을 골라보았다. 선택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 그가 자기 시대를 얼마나 대표하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어떤 지식인이건 시대적 구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지식인의 ‘존재구속성’이라고 말하는데, 이 존재구속성은 지식인이 당대의 사회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둘째, 그가 자기 시대가 주는 한계를 얼마나 극복하려 했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생각이 깊은 지식인일수록 자기 사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존재구속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사회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게 지식인의 ‘자유부동성’이라면, 이 자유부동성은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본디 지식인이란 존재구속성과 자유부동성 사이에 놓인 존재일 것이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인간을 ‘구부러진 나무’라고 말한 바 있다. 현실이라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나무는 하늘이라는 이상을 향해 자라는 법이다. 시대가 주는 구속 내지 한계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경계를 끊임없이 벗어나고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역사와 사회를 해석하는 담론을 생산하고 가야 할 비전을 탐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미리 이야기해두고 싶은 것은 24명의 지식인을 다루는 데 특히 그의 대표작을 하나 골라 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책은 지식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다. 둘째, 지식인이 쓴 책을 직접 읽음으로써 독자는 그의 사상을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대표작을 고르는 데 한문으로 씌어 있는 경우 한글로 옮긴 책을 선택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서론이 다소 길어졌다. 한국 지식인의 모험에서 첫 번째로 주목하려는 지식인들은 원효(元曉)와 최치원(崔致遠)이다. 두 사람은 우리 고대사를 대표하는 사상가다. 원효는 한국 불교사상의 태두이며, 최치원은 한국 유학사상의 개척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을 통해 우리는 한국 고대사에서 지식인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원효와 최치원, 같고 다른 길
원효는 의천, 지눌, 휴정, 그리고 경허로 이어지는 우리 불교사상의 거목 가운데 거목이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 그가 남긴 저작들은 중국과 일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숱한 일화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당당히 걸어갔던 한 고대 지식인의 인간적인 삶을 생생히 보여준다.
최치원은 문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신라 후기 최고의 학자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해 문명을 떨쳤을 뿐 아니라, 신라에 돌아와서 사회개혁을 모색했던 실천적 지식인이다. ‘사산비명(四山碑銘)’ 등 그가 남긴 저작들은 전환기를 살아간 지식인의 고뇌와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두 사람은 여러 점에서 비교된다. 첫째, 원효가 승려라면 최치원은 유학자다. 둘째, 원효가 신라가 통일신라로 발전하는 시기에 활동했다면, 최치원은 통일신라가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아갔다. 셋째, 원효가 이른바 국내파 지식인이었다면 최치원은 유학파 지식인, 그것도 조기유학생 출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통점도 존재한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출신 배경은 사회 활동의 기본 조건을 이뤘다. 둘째, 두 사람의 지적 활동은 신라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원효의 저작은 중국과 일본에서 고평(高評)됐고, 최치원의 문장도 중국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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