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成人 김정일’을 둘러싼 8가지 미스터리

  • 오사무 에야 북한전문가

    입력2006-09-13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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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키를 둘러싼 미스터리

    한반도에서 납치사건이 빈발하던 1978년, 한국의 여배우인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황해 연안의 남포에 상륙한 최은희를 맞은 남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서 오시오. 잘 오셨습니다. 최선생, 내가 김정일이오.”

    도착 사흘 뒤(1월25일), 김정일은 다시 최은희와 대면했다.

    “하하하, 최선생이 보시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내 몸은 작아서, 굵고 기다란 똥 같지요.”



    김정일이 소리내 웃는 바람에 최은희와 측근들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경하던 영화배우 앞에서 한 자조적 발언은 김정일이 강한 단신(短身) 콤플렉스를 안고 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나는 이 일화가 김정일의 인물상을 전부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신 콤플렉스로 인해 김정일이 굽 높은 구두를 애용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일의 키는 대체 몇 cm일까?

    “1980년에 독일에서 초청해온 의사가 김정일을 진찰한 일이 있다. 당시 김정일은 신장 166cm에 체중이 83kg. 그 독일인 의사는 살이 너무 찐 상태여서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빨리 사망할 수도 있으므로 감량해서 표준체중에 이르게 하라고 충고했다.”

    김정일의 처조카로 김정일과 생활을 함께 했던 망명자 고(故) 이한영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키가 166cm라면 단신 콤플렉스까지 느낄 정도는 아니다. 이 문장은 오타(誤打)거나 무언가 잘못돼 있는 게 아닐까?

    “김정일은 남자치고는 키가 작고 살이 쪘다. 신장 163cm, 체중 85kg. 김정일이 특수한 구두를 신기 시작한 것은 그가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임명된 1970년대 전반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오스트리아나 스위스 등 유럽에서 제작된 구두를 신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80년대에 들어서는 자신의 전용 제화 기술자가 만든 구두를 신었다. 뒤축 높이는 여성용 하이힐에 상당하는, 무려 7cm 정도라고 한다.”

    북한의 고위 관리였던 고영환의 증언이다. 이에 따르면 김정일은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170cm라는 계산이 되지만, 사진 등을 통해 보건대 이 숫자도 믿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최은희는 “신장은 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저서에 쓰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신장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은희의 증언으로 “신장 약 160cm, 체중 약 85kg”이라는 수치가 보고돼 있다.

    김정일과 친밀한 이탈리아 경제인 카를로 바에리는 인터뷰에서 “165cm 정도”라고 답하고 있지만, 이는 구두를 신고 있을 때의 신장으로 생각된다.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로 한국에 망명한 강명도는 이렇게 쓰고 있다.

    “(김정일 모친의 고향인 칠골) 촌장들은 김정일을 ‘꼬마’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신장이 158cm밖에 안되는 빈약한 체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증언으로부터 추정하건대 김정일의 키는 160cm에 미치지 못하며, 하이힐을 신으면 165∼166cm로 보이는 것 아닐까? 체중은 80kg 정도로 추정되지만 여러 사진을 비교해보면 시기에 따라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변화가 감량에 의한 것인지 이런저런 걱정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2.군복 콤플렉스

    최근 김정일의 앞 머리카락은 조금 엷어지고 있지만 언제나 퍼머를 하고 있다. 또 근시 때문에 30세 이후로는 안경을 상용하고 있다. 검정테, 금테, 무테 등을 번갈아 쓰며, 때로는 선글라스나 미러 선글라스도 애용한다.

    복장은 30세 이후로는 부친을 따라서 중산복(인민복) 등 간소한 스타일로 일관했다. 그러나 간소해 보이는 점퍼라도 여러 가지를 구비하고 있으며, 옷색깔에 맞추어 구두를 주문하는 사치를 하고 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테이블을 사이에 둔 반대편 정면에 미러 선글라스를 쓴 남성이 앉아 있었다. (생략) 미러 선글라스가 반사했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띄어 나의 시선은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그 남성에게 머물렀다. 엷은 감색 사파리풍 재킷 상하의는 흡사 금방 뱃놀이에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는 러프한 복장이었다. 약간 비만한 신체를 테이블 위에 기댄 채 천천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1982년 9월 평양 ‘국제클럽’ 호스티스로 북한에 체재하며 김정일을 가까이서 본 요시무라 게이코(吉村慶子)가 수기에 쓰고 있듯이, 김정일은 인민복과 점퍼 외에 여름에는 사파리풍의 오픈 셔츠를 입는 일도 있다. 선전용 사진 외에는 양복을 입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김정일은 패션에 관해 나름의 ‘미학’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수 취임 후 최초의 군사 퍼레이드인 1992년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축하 열병식에도 김정일은 원수복이 아니라 언제나 입는 인민복으로 나타났다. 공석에서는 군복을 입지 않지만 군복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이 갑자기 일어서서 ‘육군복!’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김정일의 뒤를 이어 삼삼오오 자리를 뜨더니 모두 재빨리 군복으로 갈아입고 돌아오는 것 아닌가. 똑같이 대좌 계급장이 붙은 육군복이었다. 김정일도 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1983년 3월8일 김정일이 주최한 오진우(사망·전 인민무력부장)의 생일파티에 참석한 한국의 신상옥 감독은 이런 흥미로운 일화를 전하고 있다.

    김정일에게 군복 숭배 경향이 있음은 다음 증언으로부터도 추측할 수 있다.

    “잘 보니 그것은 군복이었다. 게다가 원수의 견장이 붙어 있었다. 이것은 김정일이 이 날(장남의 5살 생일)을 위해 소련국방성에 의뢰해서 만든 육·해·공군 원수복 중 하나였다. 옷감과 견장도 진짜와 똑같고 유일한 차이는 키 100cm 정도 어린이에게 맞추어 만들었다는 점뿐이었다. ‘일남아, 이것은 원수의 옷이다. 작년에는 대장이었으니 계급이 더 높아진 거지.’”

    이일남이 본명인 이한영은 김정일이 장남(김정남)의 생일에 군복을 입혀 매년 계급을 높여주면서 ‘부관’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고 쓰고 있다.

    김정일은 아들에게 자신을 ‘파파’라고 부르게 하고 있다.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 부처는 김정일에게 ‘파파’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그 영향이 아닌지. 또 조선인민군의 군복은 소련군 제복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한영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정일이 군복차림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군대 경력이 없다는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파티에서 가장복으로 쓰거나 아이에게 입혀 욕구불만을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식성은 친일파?

    김정일의 식단은 당 재정경리부가 관할하는 ‘김정일 장수연구소’가 책임지고 있다.

    쌀은 평안남도 문덕군의 특별농장에서 수확한 것을 여직원이 한알 한알 체크하여 깨졌거나 고르지 않은 쌀을 제거한다. 이한영에 따르면 김정일은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을 싫어하기 때문에 백두산에서 잘라온 목재를 땔나무로 사용해 밥을 짓는다고 한다.

    음용수는 자강도 강계의 유명한 미네랄워터 ‘신덕수’를 마신다. 신덕수는 평양의 외환상점에서도 팔고 있지만 김정일 가족용은 전용 취수구에서 채취한 특별한 물이라고 한다. 해산물은 함경남도 신포 수산사업소에서 잡은 것이 사용된다.

    김정일은 내장탕, 설렁탕, 육개장, 꼬리곰탕 등을 좋아하고 김치도 모든 종류를 좋아한다고 한다. 또 생선으로는 청어를 좋아해 청어 초절임 등도 즐기는 음식이라고 한다. 건강에 좋다고 해서 대개의 경우 채소국이 상에 오른다.

    1952년 김정일은 만경대 혁명유자녀 학원에 다녔는데, 당시 담임교사가 전근하면서 인수인계를 위해 김정일에 관한 주의사항을 써놓고 있다. 이 메모를 보면 김정일의 소년 시절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알 수 있다.

    “김정일군이 좋아하는 음식은 겨울엔 된장국, 봄에는 쑥갓이나 봄나물 무침, 여름엔 찬 오이국과 비빔밥, 가을엔 배추에 싼 밥이나 불린 콩요리이며, 여럿이 어울려 식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김정일은 냉면 맛에 관한 한 조금 시끄러운 것 같? 1995년 8월23일 조선중앙방송은 김정일이 평양의 유명 식당인 옥류관을 방문했을 때 ‘맛을 결정하는 것은 고기를 삶아 우려내서 만드는 국물’이라고 비결을 전수한 결과, 옥류관의 평양냉면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추종기사는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무엇에든 참견하는 김정일의 성격을 전해주기도 한다.

    김정일은 스키야키, 튀김, 생선초밥 등 일본음식도 매우 즐긴다. 스키야키의 경우 고기 등을 날계란에 묻혀 먹는데 김정일은 그 날계란에 간장을 듬뿍 치는 버릇이 있다. 또한 생선초밥은 튜브에 든 고추냉이(와사비)보다 진짜 고추냉이를 갈아서 먹는 것이 맛있다고 할 정도로 일본통이다.

    김정일은 상당한 지일파(知日派)로서 맥주 브랜드에 관해 “일본 동포나 일본인은 기린 맥주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삿포로가 맛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북한을 방문한 재일 조선인에게 말한 바 있다. 술은 거의 모든 종류를 즐겨 소주, 마오타이주, 포도주, 브랜디, 위스키를 마신다. 브랜디 중에서는 헤네시를 즐긴다.

    고영환은 1977년 김정일이 외국의 유명한 담배 견본을 전부 보내라고 각 재외공관에 지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정일은 도착한 담배를 한 개비씩 다 피워 본 후 영국의 로스먼드와 던힐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며칠간 이 두 종류를 교대로 피우다가 결국 로스먼드를 골랐다고 한다.

    또 로스먼드의 생산과정을 자세히 분석시켜 맛이 비슷한 ‘백두산’이라는 북한 브랜드를 생산케 했다. 그가 북한산인 ‘백두산’이나 영국제 로벅, 던힐 등을 피운다는 목격담이 있으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로스먼드다.

    4.여성 취향은 귀엽고 둥근 얼굴

    1978년부터 7년간 북한에 머물던 최은희는 김정일이 주최한 파티에 가끔 참석했다.

    “(연회의) 음식은 한식과 양식이 반반이었다. 술은 코냑, 인삼주, 소주 등이 나왔다. 김(정일)은 헤네시를 마시면서 내게도 권했다. 내가 독한 술은 못 마신다고 하니까 프랑스산 백포도주를 내왔다. 그는 평양 음식이나 북한 술을 자랑했다.”

    김정일은 입만 열면 ‘주량이 도량이다’라고 할 정도로 술을 마셔 “그 주량과 체력은 옆에서 보기에도 감탄할 정도였다”고 일본인 호스티스는 회상하고 있다.

    최은희에 의하면 김정일은 처음에는 그녀를 옆자리에 앉혔으나, 이윽고 20대 후반에 미모의 여성비서인 유(柳)모를 앉혔다고 한다. 당시는 아직 ‘기쁨조’가 없었다. 기쁨조는 파티의 여흥에 동원된 여성조직의 총칭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김정일을 비롯한 당·정부 고관의 피로회복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정일 옆에는 주로 고영희가 앉았다. 그녀가 고영희라는 것을 몰랐을 때엔 나는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파티장에 들어올 때부터 김정일과 함께였고 김정일이 직접 코트까지 벗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적당히 살집 있는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생략) 그러나 고영희가 파티를 할 때마다 오는 것은 아니었다. 파티에 참석할 때는 김정일과 춤을 추기도했다. 고영희가 없을 때엔 김옥이라는 삼지연조 단원이 김정일 옆에 앉았다. 삼지연조는 전자피아노 한 명과 기타 두 명으로 구성된 여성 기악조였다. 김옥은 작은 체격에 얼굴이 둥글고 귀여웠다. 김정일은 대개 둥근 얼굴의 미인형을 좋아한다.”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였던 신영희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강명도 또한 김정일이 좋아하는 타입은 한국에서 압도적 인기를 얻고 있는 여배우 최진실처럼 ‘아주 귀여운 느낌의 미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강명도는 1978년 당 통일전선부의 이동호 제1부부장이 문수초대소에 젊은 여성을 모아 김정일을 접대한 것이 기쁨조의 시작이고, 그 후 대남사업 담당비서인 허담이 본격화시켰다고 말한다. 1985년 북한에서 보천보 경음악단, 왕재산 전자악단이 데뷔했는데, 그 중에 기쁨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보천보 경음악단은 일본을 방문한 적도 있는데, 기쁨조 출신 단원들이 한결같이 김정일 취향인 ‘둥근 얼굴에 ‘귀염성 있는 미인’이라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감상이 아닐 것이다.

    김정일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은 알려져 있지만, 김정일의 본처가 누구인가 하는 점은 아직도 수수께끼고 결혼 경력도 분명하지 않다. 신영희가 증언하는 고영희는 알려진 바에 따르면 네 번째 처(애인)다.

    “1975년부터 고영희라는 무용수가 언제나 김정일의 파트너를 맡게 됐다. 그녀는 1953년 일본에서 태어나 60년대 전반 가족 전원이 북한으로 귀국한 재일 조선인으로 72년에 만수대 예술단에 무용수로 입단했다. 73년과 74년 만수대 예술단의 일본공연에서 각광을 받았고, ‘눈이 내리네’라는 15분 정도의 단편영화에 주연을 맡은 적도 있었다.

    1977년 들어 고영희는 연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김정일에게서 철봉리에 있는 별장을 받아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그녀는 79년 후반인가 80년에 창광산 관저에 들어가 그 곳의 ‘안주인’이 됐다.”

    이한영의 증언도 구체적이지만 신영희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영희는 만수대에서도 유명한 무용 배우였고 김정일의 마음에 들었다. 김정일은 이따금 연습실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연습을 지켜볼 정도로 열을 올렸다고 한다. 고영희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로 키도 크고 스타일이 좋은 미인이었다. 춤솜씨도 뛰어나고 무대에서의 인상도 화려하여 주변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었는데, 김정일도 그런 점에 주목한 듯하다. 그러던 중에 고영희는 점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됐고, 뒤에 김정일과 동거하고 있다거나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나돌게 된다.”

    고영희가 임신했기 때문에 김정일은 그녀를 창광산 관저에 살게 했고, 1981년 두 사람 사이에서 김정철이 태어났다. 이한영에 의하면 장남인 김정남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공부한 반면 김정철은 베른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첫 결혼에 대해서 강명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68년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내각 사무국 지도원 한 사람을 지명해 주었다. 귀여운 여성이었다. 약혼 단계까지는 진전된 것 같은데 결혼까지는 못 간 듯하다. 현재 그녀는 어느 초대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강명도는 그 여성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볼 때 이 여성은 김일성 종합대학 러시아문학부를 졸업한 혁명 유자녀인 홍일천으로, 김정일과 연애 끝에 1967년(66년 가을이라는 정보도 있음)에 결혼, 68년에는 혜경이라는 딸을 낳았지만 3년 후 (일설에는 5년 후) 이혼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일천은 그 후 1980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돼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문교부 차관)을 거쳐 지금은 김형직 사범대학 학장이 돼 있다. 때문에 얼굴 사진을 볼 수 있다. 지적 미인이지만 그녀가 김정일의 첫 부인이라는 결정적 증언은 없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망명소동을 일으킨 성혜림이다. 1955년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한 성혜림은 56년에 딸을 낳은 후 그 딸의 아버지인 이평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재학중이던 59년 ‘경계선의 마을에서’라는 영화에 출연해 배우로 데뷔했다.

    당시 김정일은 남산고급중학교 동창생(월북작가로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이었던 이기영의 아들) 집에 자주 놀러다녔는데, 그 동창생의 형수가 바로 성혜림이었다고 한다.

    이한영에 의하면 “숙모는 이평과의 사랑없는 결혼에 실망하고 있었고 68년 경부터는 김정일과 비밀 데이트를 즐기게 됐다”고 한다. 성혜림은 68년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나 69년부터 김정일과 함께 살게 된다. 그 당시 성혜림은 33살, 김정일은 5살 연하인 28살이었다.

    김정일이 중앙당을 통해 이평을 강제로 이혼시켰다고도 하지만 성혜림이 임신하자 200평 정도의 ‘15호 관저’를 세워서 성혜림을 본처로 대우했다. 성혜림과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 결혼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1971년 5월10일 성혜림은 고관 전용인 봉화진료소에서 김정남을 출산했다. 김일성이 김정남의 존재를 안 것은 4년 뒤의 일로, 그 때까지 김정일의 아들은 극비로 취급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성혜림은 마음고생이 많아 73년에는 모스크바 크렘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74년 봄 평양에 돌아온 성혜림은 다시 15호 관저에서 생활을 시작했으나 모스크바에도 아파트를 갖고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살았다. 그리고 1996년 망명을 시도한 후 현재까지 그녀의 거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내 4명에 자식 7명, 본처는 누구?

    사랑도 많이 하는 김정일 앞에 세 번째 여성이 등장한다. 다시 이한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김정일은 자신의 타이피스트가 마음에 들어 관계를 맺었다. 김정일이 첫눈에 반한 여성은 김영숙이라는, 1973년 당시 17살 처녀였다. (생략) 숙모가 충격을 받은 것은 김영숙이 여자아이를 낳아 김일성이 대단히 기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김정일은 74년에 김영숙에게서 장녀인 설송을 낳았다.”

    김영숙은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나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시기에 김철만 장군의 소개로 김정일을 만났다고 한다. 김영숙에게는 설송 외에도 1남1녀가 더 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김정일의 본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55년 생인 ‘김혜숙(김애숙)’이라는 여성이 본처라는 정보도 있다. 김혜숙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의 미인으로 부친은 청진사범대학 학장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72년(73년설도 있다)이라고 하며, 자녀도 있다고 한다.

    이한영의 증언을 신뢰한다면 김영숙과 김혜숙의 생년월일이 거의 일치하며, 같은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1988년에) 소련의 예술가가 출연한 어떤 연회에 김정일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나타나 일등석의 리더에게 소개했다. 김정일과 처자식은 6시간이나 연회에 참석했으며, 11∼13세로 보이는 딸은 일제 비디오 카메라로 계속 녹화를 했다.”

    러시아의 제빈 기자는 ‘내가 본 김왕조’라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딸이 태어난 연도는 1976년 또는 77년이며 김영숙의 차녀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정보를 정리하면, 제1부인(홍일천)과의 사이에 딸(김혜경) 한 명, 제2부인(성혜림)과의 사이에 아들(김정남) 한 명, 제3부인(김영숙)과의 사이에 1남2녀(김설송과 남동생 및 여동생), 제4부인(고영희)과의 사이에 1남(김정철) 1녀라는 가족 구성이 이뤄진다.

    이 외에 김정일에게는 다수의 애인이 있다는 정보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다른 자료 및 증언을 가지고 크로스체크해보는 것이 불가능한 소문들이다. 그러나 다음의 정보는 다른 곳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꽤 신뢰성이 있는 것 같다.

    “김정일은 80년대 초부터 현재 러시아주재 대사인 손성필의 여동생 손희림(1950년생)과 관계를 가져 딸 두 명을 얻었다. 손희림은 1991년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 현재 오빠 손성필의 도움을 받아 딸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살면서 치료를 받고 있다.”

    6.맹렬한 야맹성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보면 인민대학습당 뒤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가 있고, 1호 청사 구내에는 3층짜리 당 조직지도부 건물이 있다. 건물 3층에는 ‘85집무실’이라고 불리는 김정일의 사무실이 있다. 3층 전부가 김정일 전용이며, 당 조직지도부 서기실이라고 불린다.

    이한영은 “김정일은 낮 12시경에 일어나 심야까지 집무한 후 새벽 무렵에 관저에 돌아와 자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밤 11시 아니면 12시경이 된다”고 말했다. 또 고영환은 “낮에는 거의 일을 하지 않고,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집무한다”고 쓰고 있다. 이런 김정일의 야행성 생활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일의 전기에는 심야에 호출당한 간부들의 에피소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김정일의 근면성을 칭찬하려고 쓴 글이지만, 뒤집어보면 부하들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전기는 ‘1980년 10월5일’ 하루 동안 김정일의 업무가 소개돼 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김정일의 맹렬한 하루 일과를 살펴보자.

    “집무실에서 새벽을 맞이한 김정일은 새벽 일찍 어떤 건설현장을 방문해 실무지도를 한다. 정오를 한참 지났을 무렵에 현장을 떠나 점심도 먹지 않은 채 모란봉 경기장(현재의 김일성 경기장)에 가서 2시간 정도 제6회 당대회 경축 매스게임인 ‘당의 깃발 밑에서’를 지도하고 간부단의 배치를 확인. 오후 5시경 경기장을 나와 평양 제2 백화점에 들러 축일을 위한 상품 준비상황을 확인. 그 다음에는 신축한 중앙통신사 사옥을 시찰하고, 완공을 앞둔 창광거리로 향한다. 30층 맨션 최상층 베란다에 올라가 시내를 굽어보면서 건물의 전망에 대해서 말한다. 그 후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당 중앙청사에 돌아와, 집무실에서 밤 12시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한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강명도에 의하면 김정일은 통상 요일별로 각 부서의 안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월요일 - 당 조직지도부, 화요일 - 인민무력부, 수요일 - 주석 및 당 재정 경리부, 목요일 - 정무원, 금요일 - 당 중앙위원회, 토·일요일 - 연휴.

    이렇게 요일별로 업무를 나누어 하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김정일의 이야기가 연상된다.

    “수령님은 살아 생전 나에게 절대로 경제생활에 깊게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말려들면 당 활동도 할 수 없게 되며, 군사 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생략) 경제활동은 당 활동가와 행정경제 활동가들이 책임지고 해야 한다.”

    이것은 1996년 12월, 김일성 종합대학을 시찰한 후 간부들에게 행한 비밀연설 중 한 구절이지만, 김정일은 무책임하게도 경제부문의 책임을 부하에게 전가하고 있다. 업무처리에 경제부문을 처리하는 날이 없는 것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게 아닌가 라는 추리를 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증언도 납득할 수 있다.

    “그(김정일)는 한국이 북한에 비해 군사력을 제외한 전 부문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한국은 단지 외국 부품을 가져와 조립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만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의 공장은 60%가 가동을 못하고 있다는 고민도 솔직히 밝히고 있다.”

    신상옥은 이렇게 쓰고 있지만, 공장 가동률이 40%였던 것이 1984년(8월4일 담화)의 일이다. 지금이라면, 김정일은 무책임하게도 “가동률 10% 이하”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7.지워졌던 육성(肉聲)의 비밀

    김정일은 지금까지 공개 장소에서 연설한 적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때 비로소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나 그때도 연설은 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의 방북 전까지 그의 목소리는 최은희·신상옥이 녹음한 테이프 이외에는 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서 행한 “조선인민군에게 영광 있으라”는 단 한마디 육성이 알려져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최은희·신상옥 부부에 의하면, 억양에 평안도 특징이 있지만 평안남도 사투리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김정일)는 우리와 이야기할 때는 액센트는 좀 달라도 거의 표준어에 가까운 말을 사용하지만,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나 지시를 내릴 때는 ‘…하그래(하십시오)’와 같은 사투리를 자주 사용했다.”

    또 러시아 외무성 조선부의 스히닌 참사관은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 후 평양의 소련대사관에서 12년 근무한 북한 전문가인데, 1988년 북한 건국40주년 기념식 때 소련대표단 통역을 한 경험이 있다.

    “그때 김정일도 발언했지만, 정상적이었고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서방에서는 온갖 억측이 난무하지만 그의 발언에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히닌 참사관의 말처럼 김정일이 일상 대화는 물론 기지에 번득이는 풍부한 대화도 가능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김정일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설을 안 하고 뉴스 등에서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오래된 기록영화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선전선동 담당비서였던 당시의 김정일이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즉 김정일은 의도적으로 모든 기록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다. 그토록 철저한 일관성은 그의 패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비성을 높이려고 목소리를 지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김정일은 자신의 결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감이 없어서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얼굴도 금방 빨개졌다. 그 습성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른다.

    8.김정일이 정말 싫어하는 것

    “김정일 비서가 당간부의 생활과 품성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허식과 아부다.

    비서는 항상 당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에 있는 같은 연배 어떤 간부의 인간성을 칭찬했다. 어느 날 같은 부서의 사람들에게 ‘내(김정일)가 왜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 하면 성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허식과 아부입니다. … 혁명가는 처세술을 배워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이라는 전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지만, 같은 발언이 다른 전기에도 등장한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표리부동입니다. 앞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뒤에서는 책략을 꾀하는 무리들이 제일 위험합니다.”

    김정일의 이와 같은 말은 신상옥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김정일은 (환호하는) 밴드 대원들에게 손들어 답례하고,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손짓을 했지만 환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김정일은 내 왼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신선생, 저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설령 김정일이 술에 취해서 한 말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술김에 본심이 나타난 것처럼 들렸다.”

    강명도는 김정일에게 아첨한 인간의 무상한 최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쁨조를 발안했던 당 통일전선부의 이동호는 김정일의 오른팔이던 존재로, 김정일 옹립을 위해서 ‘유일사상체계’를 입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82년 이동호가 주관한 김정일 40세 탄생 축하 생일파티가 성대히 열렸다. 그 자리에서 술 취한 이동호가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강명도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 했더니 동호 아니야.’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지도자동지 기쁜 생신이니까 제가 지도자동지의 만세를 한번 부르고 싶습니다.’ ‘동호, 술 취했구먼, 자리에 돌아가라.’ ‘수령님이 살아 계신다고 한들 도대체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10년 더 사시겠습니까? 20년을 더 사시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만세를 부르겠습니다.’

    당시는 ‘유일 후계자’ 문제가 해결된 시점이었지만, 처세술을 익힌 혁명가의 아부가 문제되면 안된다고 걱정한 김정일은 그 자리에서 결단했다.

    ‘거기, 호위병 있는가! 이 자를 끌어내 즉시 총살에 처해라.’ 연회장은 갑자기 어수선해졌고, 함께 있던 간부들이 이동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지만, 김정일은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새끼, 아무리 술 취했다고 해도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하면 안 되는 게 있어. 당간부라는 인간이 수령님에 대해서 무례를 범하는가.

    나도 수령님 앞에서는 지도자 동지가 아니라 일개 전사에 지나지 않는다. 본보기가 되도록 이 놈을 죽여버리겠다. 그리고 이 놈을 살려달라는 사람도 이 놈과 같은 작자다. 호위장교는 뭘 머뭇거리고 있느냐! 얼른 끌어내 총살해라!’”

    이렇게 김정일은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부하를 처단했다. 이 사건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못하고 김정일에게 아부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기는 성격을 모자람없이 보여준다.

    강명도는 김정일에 대해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다. 다만 기질이 격하고 급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강명도는 또 “한 마디로 말해 대단히 급하다. 측근에게 야단을 칠 때는 더 심하다. 변덕쟁이며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하면, 내일은 다르다. 저돌적이고 맹목적인 부분도 있다. 또 술을 마시면 잘 울기도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한영은 “그(김정일)는 본질적으로 대단히 교양있는 사색형의 인간이다”고 전한다. 나는 이들 세 사람의 관찰이 다 맞다고 생각한다. 교양있고 사색형이면서 기질은 격하고 성격이 급한 인간도 있다. 어쨌든 김정일이 머리가 빨리 돌고, 무능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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