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고 그는 현장에 투입된다. 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친구한테는 안 간다, 기아출신 사우들에게는 접근하지 않는다, 고향사람들에게는 가지 않는다.
그러자니 정수기 외판에 나선 그의 발길은 고달팠다. 상품인 정수기가 200만~300만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다보니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팔 수 있는 상품은 또 아니었다. 다방이나 병원 등을 돌며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는 구매자를 찾아 발로 뛰는 그 사업이 자동차 파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고 그는 고백한다. 정말로 친구들에게는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내게, 더러 ‘틈새 친구들’한테 찾아가서 딱지맞는 경우가 더욱 힘들더라고 말한다.
첫 매상을 올렸던 것이 입사한 지 열흘 만이었다. 취급했던 상품이 정수기만은 아니었고, 공기청정기에다 좌변기, 그리고 김치통까지 다양했다. 이후, 그가 정수기 외판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더러 자진해서 구매를 요청해오기도 했다. 그는 곧 5명의 에이전트(일선 판매원)를 거느린 팀장으로 승격했다. 월수입이 300여만 원. 그는 자신이 땀을 쏟아 번 수익금 중 상당액을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에 기부하여 평안남도 협동농장에 식량을 지정 기탁하기도 했다.
팀장은 일명 부장이었는데, 팀장이 되자 그가 이상한 선언을 했다.
“오늘부터 나는 오너부장이다. 휘하의 판매원을 내가 해고할 수도 있고, 새로 채용할 수도 있고, 그러니 팀 자체가 독립된 경영체가 아니냐.”
이후 그의 별명 겸 직함이 ‘오너부장’이었다. 그는 판매팀의 부장이자 판매원에 대한 교육담당 강사이기도 했다. 그가 교육할 때 가장 강조했던 얘기는 정도(正道) 판매였다. “한때 판매원으로 회사 내에서 명성을 드날렸지….” 그는 지금도 정수기 외판 시절을 돌이키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정수기 자체가 고가상품인 탓에 판매원을 지망하고 찾아온 사람들 중엔 중소기업의 간부 출신이 많았다. 현역시절의 대인관계가 무시할 수 없는 판매 루트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왕년에 잘 나갔던 그들 대부분은 3, 4일 교육을 받는 중에 발길을 끊는 경우가 많았다. 정수기 파는 일이 들통날까 봐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거기 비하면 도씨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99년 설 연휴 때 모처럼 상도동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손윗 동서인 YS에게도 ‘요즘 정수기 외판원으로 일한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기아 임원 시절 ‘경실련’ 발기인 참여
“사실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나갔을 당시에 저는 정수기 외판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이나 의원들이 요즘 뭣하느냐는 얘기는 안 묻더라구요. 물었더라면 당당하게 정수기 팔러다닌다고 얘기했겠지요. 증인으로 채택된 일부 인사들은 출두를 거부하는 등 말썽이 많았지만, 나는 제발 청문회에 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기아에 있을 때 청와대 쪽하고 무슨 커넥션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의혹을 벗을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지요.”
―경실련 발기인으로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기아그룹의 임원이었는데, 대기업의 간부가 경제정의를 실천하겠다고 나선 시민단체에 그것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는 건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었을 텐데요?
“당시 제가 기아서비스 전무이사였습니다. 경실련 설립취지를 들어보니까 괜찮겠더라구요. 평소 서울 이코노믹스클럽 회원으로서 잘 알고 지내던 변형윤 교수 등 거기 참여한 면면들이 믿을 만한 분들이었구요. 게다가 나는 공과대학 나온 사람으로서 경제를 좀더 알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우리 회사 경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대기업 임원으로서는 유일한 발기인이었는데, 참여하는 데에 어떤 제약은 없었습니까?
“당시 YS가 통일민주당의 총재였어요. 한번은 찾아가서 경실련에 가입했다고 했더니 대뜸 하는 얘기가 ‘거기 몹쓸 놈들 많다’ 이러더라고. 아마 좌경 성향 가진 일부 인사들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아요. 나야 본업이 경영인이니까, 한쪽 발만 살짝 담그고 거기서 얘기되는 부조리도 좀 파악하고 경영일선하고는 또 다른 사회도 좀 알고 싶어서 배우러 간 겁니다, 그러고 그냥 나왔지요. 만나면 원래 길게 말 안 하거든요.”
―당시 김선홍 회장은 별 말이 없었습니까?
“사전에 얘기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나서 통고를 했지요. ‘잘 했어. 말썽나면 안 돼’, 그런 정도였어요.”
―노태우 정권 때인데, 권력 상층부로부터는 어떤 압력이 없었나요?
“‘노통’한테 혼이 났지요. 그때가 한창 세대교체론이니 뭐니 하는 바람이 불 때였는데 김준엽씨, 김동길씨, 김우중씨 뭐 해가면서 차세대 주자들이 거론되는 등 시끄러운 일들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어느 잡지에 투고를 해서 ‘나이가 젊다고 모두 바람직한 차세대 일꾼인 것은 아니다’라는 내용의 주장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권력의 눈밖에 보인데다, 또 한 번은 도산 아카데미 주최로 힐튼호텔에서 세미나를 열었는데, 김우중 회장이 기업인의 영역을 벗어나서 통일론을 한바탕 연설하더라구. 연설 끝나고 내가 질문을 했지. ‘6·25 때 나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회장님은 경기중학교 1학년 이었는데, 회장님 자서전을 보니까 신문 가판을 했습디다. 그때 나는 신문을 몇 부 못 팔았는데, 회장님은 이재(理財)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는지 엄청 많이 팔았습디다. 요즘 세대교체니 뭐니 얘기가 많은데, 이재에 특별히 밝으신 회장님 같은 분은 경영인으로서 전문을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비꼬았지. 행사장에 기관원들도 많았어요.”
다음날, 김선홍 회장이 그를 불러 “도 전무, 근래 무슨 일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대단한 압력을 받은 눈치였다. 그 길로 그는 계열사의 작은 회사 사장으로 좌천된다. 모기업의 상무급이 가는 회사에 기아서비스의 부사장이었던 그를 발령낸 것이다.
야당 정치인 YS의 지근거리에 있었던 도씨는 ‘서당개 10년’의 감(感)으로 자신의 투고에 대한 정보기관의 간섭이 거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다니고 있던 대치동 성당에 가서 사무장에게 얘기한다. “정보기관에서 틀림없이 나를 조사하러 성당에 나올 것이다. 오거든 김수환 추기경한테 얘기해서 혼쭐을 낼 것이라고 야단쳐서 보내라.”
일주일 후에 정말로 정보형사가 성당을 찾아왔고, 그는 오히려 성당 사무장으로부터 야단만 맞고 돌아간다. 도씨가 말하는 자신의 ‘필화사건’이었다. ‘반독재 활동을 해온 김영삼·김대중 등 2김을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내세워 도태시키려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서서 세대교체 운운하는 것이 경우에 어긋나 보여서’ 그런 투고와 발언을 했다는데…글쎄, 그는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가 YS의 동서라는 사실을 제쳐두고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가 말했다. “이 얘기는 처음 하는 겁니다. 여성지 기자들한테 이런 얘기 할 수 있나요. ‘신동아’니까 하는 거지.” 같은 값이면 ‘소설 쓰는 아무개니까 특별히 얘기해 준 것’이라고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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