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땀과 발로 쓴 우리 기록 황석영이 베꼈다”

문화권력 황석영에게 묻는다. 그 후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0-12-21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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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땀과 발로 쓴 우리 기록 황석영이 베꼈다”
    신동아’는 2010년 11월, 12월호에서 황석영 작가 일부 저작과 관련해 표절 및 베끼기 시비가 불거진다고 보도했다.

    황 작가는 신동아가 12월호를 발간한 직후인 11월22일 인터넷매체 ‘프레시안’에 ‘신동아 의혹 제기에 답한다’는 제목이 붙은 글을 보냈다. 프레시안은 “나의 문학 인생을 뿌리째 흔들려 하는가”라는 문장을 제목으로 뽑았다.

    신동아가 황작가의 문학 인생을 뿌리째 흔들 까닭이 없다. 황 작가 문학을 존중한다. ‘삼포 가는 길’(신동아 1973년 9월호를 통해 발표)을 비롯한 황 작가의 주옥같은 단편이 신동아 지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표절 시비

    황 작가가 서술한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도 1989년 신동아에 연재됐다. 동아일보 칼럼 ‘횡설수설’은 이 연재와 관련해 “예리한 통찰력과 판단력으로 그려낼 북한 실상이 어떻게 비춰질지 기대를 부풀게 한다”고 썼다.(동아일보 1989년 5월25일자 참조)



    황 작가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악의적인 접근” “오해와 불신을 조장하는 기사”라고 묘사했으나 신동아는 일부 저작과 관련한 표절시비, 도덕성, 서술 경위를 따졌을 뿐이다.

    ‘강남몽’과 관련해 신동아는 저작권 침해 피해자다. 조성식 기자와 신동아는 황 작가로부터 송구하다거나 사과한다는 얘기를 아직도 듣지 못했다.

    남자 對 남자

    프레시안에 실린 황 작가 글을 읽고 두 사람이 격앙했다. 황 작가 이름으로 초판이 출간된 ‘어둠의 자식들’ 저자인 이철용 전 의원과 소준섭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국제관계학 박사).

    이철용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프레시안에 실은 글은 삼류저질 소설이다. 일일이 사실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 황석영과 직접 만나 당신이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지 물은 뒤 뭐가 틀렸는지 세상에 밝히려 했다. 그런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 일단은 남자 대 남자로 만나려고 한다. 그 후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내가 납득할 수 있다면 넘어갈 것이고, 아니면 낱낱이 밝힐 것이다. ‘어둠의 자식들’은 내 삶이다. 누가 대신 써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황 작가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던가 ‘어둠의 자식들’ 외에도 나는 수많은 선언문, 현장 대본, 노랫말을 썼으며 당시의 현실 속에서 사회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이름과 몸을 팔았을지언정 그것을 사유화한 적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후회해본 적도 없다.”

    인천 구월동 골방

    신동아는 1982년 발행된 ‘광주백서’를 들고 소준섭 박사를 찾았다. 그는 ‘연평도 도발 이후 중국’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었다. 한 언론이 기고를 부탁했다고 한다. 전민련 부대변인을 지낸 그는 중국 푸단(復旦)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광주백서’를 그에게 보여줬다.

    “땀과 발로 쓴 우리 기록 황석영이 베꼈다”

    ‘광주의 분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왼쪽부터)

    “프레시안에 실린 황석영 글을 읽었다.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다. 남의 글을 옮긴 것도 시간이 흐르면 자기 글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 마음이지만….”

    그는 기사를 쓰지 않는 조건으로 ‘광주백서’의 작성 경위를 설명하면서 “오래 지난 일이다. 괜스레 잡음을 일으키기 싫다”고 했다. ‘광주백서’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의 넘어’의 골간(骨幹), 세부(細部)를 비교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이 부분은 단어 순서만 바뀌었네요.”

    그는 1981년 1월 수배망을 피해 광주로 내려갔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 광주 사람들은 상흔을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매일 술을 마시고,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그는 회고한다.

    “진상을 전국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사관(史官)의 심정으로 객관적으로 적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광주백서’를 1982년 탈고했다. 서울 을지로에서 타자기를 샀다. ‘광주백서’는 인천 남동구 구월동에서 제작됐다. 골방에서 소준섭, 민종덕(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박우섭(인천 남구청장)이 함께 작업했다. 소준섭이 쓴 글을 민종덕이 타이핑하고 박우섭이 등사했다.

    민종덕은 이렇게 말했다.

    “구월동 15평 주공아파트에서 작업했어요. 글은 소준섭이 썼어요. 수기를 타이핑한 뒤 팸플릿으로 만들어서 뿌렸습니다.”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증언.

    “소준섭 박사, 조봉훈 선생이 광주에서 1차자료를 수집했죠. 소준섭이 수기(手記)로 썼고요. 가톨릭 쪽을 통해 책을 내려고 했습니다. 도망 다니는 처지여서 여의치 않았습니다.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도 우리 옆 동에서 숨어 지냈어요. 골방에서 한 장 한 장 등사해서 100부인지, 200부인지를 프린트했습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제작한 것처럼 위장하고자 광주로 내려가 이창복 전 의원을 비롯해 20여 명에게 ‘광주백서’를 등기로 배달했다.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서울대 학회실 같은 곳에도 1~2부씩 가져다놓았다.

    북한 책과 황석영 기록이 닮은 까닭

    신동아는 2010년 12월호에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북한 책 ‘광주의 분노’(1985년 5월16일 인쇄),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1982년 4월10일 발행)이 닮았다고 보도했다.

    황 작가 기록과 디테일이 비슷한 부분이 숱한 ‘광주의 분노’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년 5월15일 발행)와 우연히도 ‘같은 때’ 세상에 나왔다. “두 책이 같은 1차 자료를 참고한 것일 수 있다”고 신동아는 2010년 12월호에서 분석했다.

    ‘광주의 분노’는 ‘광주백서’가 소개한 에피소드를 부지기수로 베꼈다. 그중 한 대목만 소개한다. 광주에서 직접 확보한 증언을 바탕으로 쓴 ‘광주백서’를 먼저 읽어보자.

    [여대생으로 짐작되는 세 명의 아가씨들이 공수병에 의해서 서서히 껍질이 벗겨지고 부라자와 팬티까지 모조리 찢어내고 그중 유독 험하게 생긴 공수병이 워커발로 아가씨의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빨리 꺼져 이년들아.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고 데모하고 지랄이야.” 성난 늑대처럼 내몰았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하랴. 처녀들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가슴을 쓸어안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이때 한 놈이 고함쳤다. “이 썅년들이 살기가 싫은가봐. 그럼 할 수 없지.” 순간 아가씨들의 등에는 대검이 똑같이 꽂아지면서 분수를 뿜어냈다]

    ‘광주의 분노’는 이 대목을 이렇게 베꼈다.

    [공정대 놈들은 붙잡아온 세 명의 녀학생을 세워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면서 겉옷부터 시작하여 속옷까지 차례차례 벗겼다. 세 녀학생을 알몸으로 만들어놓은 놈들은 한참 히히닥거리더니 군화발로 녀학생들을 걷어차며 “빨리 꺼져 이년들아, 지금이 어느 때라고 지랄이야!” 하고 울부짖었다. 녀학생들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 알몸이 된 것이 부끄러워 앞가슴을 그러안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우악스럽게 생긴 한 놈이 “이 썅년들이 살기가 싫은가봐”하고 지껄이며 녀학생들의 잔등에 차례차례로 총검을 내려박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북한 책이 닮은 것은 ‘같은 기록’을 베끼거나 윤문해서다.

    진실

    ‘광주백서’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겹쳐보자.

    [이들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의 1차 작전부터 충정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 임무를 띠고]

    [이들은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의 1차 작전에서 충정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 임무를 띠고]

    [학생 시위에서 민중봉기로 : 5월 19일, 공포의 하룻밤을 지샜다]

    [학생 시위에서 민중봉기로 : 공포의 하룻밤을 지샌 시민 학생들은]

    [이들 공수대원들이 얼굴이 벌게 있었으며 눈이 충혈되어 있었으며 술 냄새가 역겹게 풍겼다]

    [공수대원들이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눈은 술기운과 살기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특히 젊은 남자들은 팬티만 남긴 채 마구 때리고 찔러 거꾸로 원산폭격을 시켰고]

    [잡힌 사람들은 팬티만 입고 알몸으로 원산폭격 등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문을 닫고 커튼을 치라고 고함쳤다]

    [“문을 닫고 커튼을 쳐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한 공수대 중령은 부상시민 수송을 지휘하던 안영택 전남도경 작전과장에게 “부상시민을 빼돌리거나 시위학생을 피신시키면 당신들도 동조자로 처벌하겠다”는 폭언을 퍼부었다]

    [공수대 지휘자인 중령은 전남도경 작전과장에게 “부상 폭도를 빼돌리거나 시위학생을 피신시키면 너희들도 동조자로 취급하겠다”면서 폭언을 퍼부었다]

    [공수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지켜보던 진압경찰의 간부는 충장로 등 골목길에서 서성이는 시민들에게 “제발 돌아가라, 군인들에게 걸리면 죽는다”며 안타까와하며 울먹였다]

    [공수대의 잔인한 만행을 지켜보던 진압경찰의 간부 한 사람은 충장로 주변 골목길에서 서성이는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하면서 울먹였다]

    [심지어 수창국교 입구에서는 공수대가 산 사람을 전봇대에 거꾸로 매단 일까지 벌어져 시민들을 경악케 했다]

    [수창초등학교 앞에서는 시위 군중 속에서 잡힌 청년을 발가벗기고 전봇대에다 매달아 놓고는]

    [이를 목격한 곁의 노인들이 공수대를 만류하자, 공수대는 노인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려까 수명이 실신했다]

    [이를 보고 있던 주위의 노인들이 공수대원의 폭력을 만류하자 그들은 노인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쳤다]

    [지하도의 시민들이 거의 몰살당하는 참극을 빚었다]

    [어두컴컴한 지하도 속에서 공수대원 멋대로의 요리가 되어 숨져갔다]

    [최소한 3명의 운전사들이 살해되었다. 이는 다음날(20일) 차량 시위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최소한 3명의 운전사들이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차량 시위의 직접적 계기가 된다]

    윤문(潤文) 가필(加筆) 베끼기

    “땀과 발로 쓴 우리 기록 황석영이 베꼈다”

    소준섭이 집필한 ‘광주백서’

    좀 더 읽어보자.

    [전면적 민중 봉기로 발전 : 5월20일 오전 9시까지 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비를 맞으며 변두리 지역에서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시내 곳곳에서 길가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내 아들 살려내라고 울부짖는 아주머니들의 뒷모습이 많이 보였다]

    [전면적인 민중항쟁 : 지난밤부터 내리던 비는 이튿날인 20일 오전 9시쯤까지 내리다 그쳤다.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변두리 지역에서부터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가끔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하는 아낙네들이 보였다. 아낙네들은 옷을 찢어대며 내 아들 살려내라고 거의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비가 그치자 시민들은 시내 중심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전 10시경 대인시장 주변에는 천여 명의 시민들이 결집했다. 고교생, 가정주부, 50대 장년층까지 포함된 군중들은]

    [비가 그치기 시작하면서 오전 10시경 대인시장 주변에는 천여 명의 시민이 모여 있었다. 가정주부, 고등학생, 50대 노년층까지 합세한 군중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된 사실 등 전날의 피해 상황을 주고받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날의 피해 상황, 살육 광경을 이야기하며 울분과 적개심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착검하지도 않고 말씨 또한 공손했다]

    [착검을 하지 않았고 말씨도 공손했다]

    [한 공수대 장교(중령)는 시민들에게 자신은 전남 곡성 출신이라고 했다]

    [한 공수부대 중령은 자신의 고향이 전남 곡성이라고 시민들에게 말했으며]

    [오후 5시 50분경 충장로 입구 쪽의 군중들은 도청을 향해 육탄돌격을 감행, 경찰과 충돌했다]

    [오후 5시 50분 충장로 입구 쪽의 시위 군중 5천여명은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애국가, 진짜 사나이, 우리의 소원 등의 노래를 부르며 태극기를 휘둘렀다]

    [애국가, 진짜 사나이, 우리의 소원 등의 노래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데스크, 편집자

    두 책을 그만 읽자. 상관(相關)을 증명하고자 더 인용하는 건 지면을 낭비하는 행위다.

    신문사에서 현장기자가 기사를 출고하면, 데스크가 사실 관계를 검토하면서 글을 윤문(潤文)한다. 가필(加筆)할 때도 있다. 출판사가 책을 출간할 때도 마찬가지다. 편집자가 글을 가다듬고, 때로는 첨삭(添削)도 한다.

    황 작가는 ‘광주백서’를 윤문했으며, 가필했고, 베꼈다. 물론 신문이나 출판의 사례와는 다르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6년 내란 수괴,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황 작가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간한 때는 독재정권 서슬이 푸를 때다. 황 작가는 전두환 집단이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을 적은 글을 데스크, 편집자처럼 가다듬고, 가필한 뒤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반부는 사실상 소준섭 작품이다. 조봉훈, 김상집, 정용화도 함께 작업했다.

    조봉훈 전 광주시의회 의원 증언.

    “우리가 수집한 육성증언과 자료를 소준섭이 글로 옮겼다. 신뢰도를 따져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한 것도 소준섭이다. ‘광주백서’를 책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황석영 선생 별명을 알지 않나. 황 선생이 썼다는 건 별명대로 이해하면 된다. 아마추어가 쓴 글을 윤문한 거다.”

    소준섭 그룹은 광주 기록의 1기팀 격이다. 구속된 이들이 교도소에서 출감하면서 정보가 늘어났다. 2기팀 격인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소속이던 이재의와 조양훈이 석방된 이들을 만나고 자료를 추가로 수집하면서 광주 기록을 풍부하게 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반부는 ‘광주백서’에 전적으로 기댔다. 골간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전개 순서, 디테일이 같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엔 ‘광주백서’출간 이후 수집한 내용도 섞여 들어가 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후반부에도 ‘광주백서’ 내용이 그대로 담겼으나 전체 내용의 일부일 뿐이다. 후반부는 2기팀의 작품이다.

    조봉훈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1기 기록을, 2기가 보충했고, 황석영이 다듬었다. 그걸 ‘썼다’라고 표현해선 안 된다.”

    신동아는 2010년 11월, 12월호와 같은 방식으로 황 작가에게 ‘어둠의 자식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관련한 질문지를 보냈으나 편집 마감 때까지 답이 오지 않았다. 황 작가 의견은 프레시안 기고문에 서술돼 있다.

    해장국집

    서울에 함박눈이 내리던 날 밤 종로구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소준섭 박사를 다시 만났다.

    “‘광주백서’를 쓰던 때 나이가 스물둘, 스물셋이었다. 신동아가 오래된 기억을 깨웠다. 선후배, 친구들에게 기사로 다룬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시끄러울 거라면서 하지 말라고 하더라. 출판사 하는 이들에게 황석영 작가 평판도 물었다.”

    그가 막걸리 잔을 들고 눈이 흩날리는 창밖을 내다본다.

    “황 작가가 자기 이름을 내건 걸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전두환 정권이 패악질을 하던 때다. 프레시안에 실린 글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지인에게 들은 평판 탓에 선입관을 가졌는지 모르겠으나 황 작가는 광주기록을 이름값을 높이는 데 활용했다. 명성을 누리고자 이름을 팔았다는 얘기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서문엔 우리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

    황 작가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광주를 말하지 않고는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보관해 왔던 자료들은 보따리에 싸여서 장롱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필자는 이것이 문학이나 소설적 차원의 일감이 아니라, 사실적인 사건 자체가 한시라도 빨리 여러 이웃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눈이 쌓인다. 행인이 옷깃을 여민다.

    “우리 기록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땀과 발로 쓴 글이다. 바로잡는 게 맞는 것 같다.”

    술자리를 파하고, 거리로 나왔다. 그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 우산을 들고 종종걸음을 걷는다. 뒷모습이 쓸쓸하면서도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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