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성심을 중심으로 뭉쳐진 형제 같은 동지애’라는 수식어를 가진 동교동계가 ‘양 갑’의 갈등으로 흔들린다. YS 집권 후 갈라지기 시작했던 상도동의 전철을 동교동도 밟을 것인가.》
민주당 권노갑 고문은 지난해 9월 출간한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는 자서전을 통해 동교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충성심을 중심으로 뭉쳐진 형제 같은 동지애.’ 이는 동교동 비서진에 대한 수식어이자 만년 야당대통령후보 김대중을 실제 대통령으로 만든 원초적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책 출간 이후 채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세상은 많이 변했다.
눈물로 맺어졌다는 동교동은 분명 분화과정을 겪고 있다. 권고문이 동교동내 주류라면 한화갑 의원은 비주류로 불리고 있다. ‘양 갑’의 갈등은 부인하지 못할 현실이 됐고 전쟁으로까지 묘사되고 있다.
권고문은 7월12일 ‘팍스코리아나 21’이 주최한 조찬강연에서 “동교동은 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고 강조했지만, 그날 저녁 한화갑 계보의 한 의원은 “동교동은 한의원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측과 신질서를 만들려는 움직임 사이에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한의원의 진군나팔은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상황으로 비유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충돌이 사생결단의 대결로 이어질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권고문이 최고위원 경선 출마를 포기함에 따라 일단 정면대결을 피해 놓았기 때문이다.
권고문과 한의원의 애증관계는 30여년 전으로 돌아간다.
알다시피 동교동은 권노갑 고문, 김옥두·한화갑 의원의 3인방 체제다. 권고문이 나이에서 앞서고 동교동 합류시점이 다소 이르긴 하지만 권고문 스스로 세 사람을 ‘동교동 1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도 권고문측은 서열이 매겨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딱히 상하관계를 따질 수 없다는 게 한의원 측근들의 설명이다.
‘장형’권노갑, ‘넘버3’ 한화갑
동교동에서 일을 시작한 시점으로 보면 권고문은 63년, 김의원은 65년, 한의원은 67년 무렵이다.
같은 1세대지만 합류시점상 한의원은 ‘넘버3’이다. 권고문과 김의원이 한의원의 독자노선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것도 넘버3이 ‘큰 형님’을 제치고 조직을 장악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감정적 반발기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권고문과 한의원은 김대통령에게 합류한 뒤 직책, 업무 성격 등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열혈청년이던 시절 김대통령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찾아간 점은 공통되지만, 권고문은 비교적 빨리 김대통령 측근이 된 반면 한의원은 외곽에서 김대통령을 지원하는 역을 맡았다.
권고문이 김대통령을 처음 찾아간 것은 60년 4·19혁명 직후였다. 김대통령은 당시 장면총리에 의해 민주당 대변인으로 발탁됐지만 이미 4번이나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상태였다.
권고문은 “내가 존경하는 김대중 선배를 반드시 국회에 보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보탬이 될까 하여 ‘재경 목상동창회’를 조직하고 간사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동창회 대표 자격으로 김대통령을 무작정 찾아가 선거사무원으로 활약했다. 다행히 김대통령은 그때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됐다.
권고문은 선거 후에도 김대통령 캠프에 합류하지 않고 있다가 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다시 한번 김대통령의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6대 총선에서는 김대통령이 지역구를 옮겨 고향인 목포에서 출마했는데 권고문의 지원이 나름대로 힘을 발휘했다는 평가다. 권고문은 목포상고시절 복싱을 하며 인맥을 쌓았고, 목포여고 영어선생을 하며 목포 유지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목포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권고문은 선거 후 조길환 비서관과 함께 국회의원 비서로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비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비석에 ‘김대중선생 비서실장’이라고 새겨주면 영광”이라는 권고문의 말은 이때 시작된 인연에서 비롯된다.
권고문은 특유의 친화력과 마당발로 단시일내에 김대통령의 측근이 됐다. 활동적이고 저돌적인 성향이 대권을 꿈꾸던 김대통령의 눈에 든 셈이다.
반면 한화갑 의원은 비교적 고생스러운 합류과정을 겪게 된다. 한의원은 67년 6·8선거(제7대총선) 때 김대통령 캠프에 합류했다.
6·8선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DJ를 낙선시키려고 표적공천을 했으며 관권선거를 집중적으로 자행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박대통령은 체신부장관을 지낸 거물급 김병삼씨를 공천한 뒤 지방순시를 명분으로 목포에 내려와 지원연설을 하는 등 선거전을 과열시켰다. 박대통령이 부정선거를 해서라도 DJ를 낙선시키고 말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
이로인해 목포에는 ‘DJ를 살리자’는 움직임이 형성됐다. 목포의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한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의원은 DJ를 도와야 한다는 정의감이 발동해 선거전에 동참했으며, 이것이 인연의 출발점이었다.
동교동 3인방의 인연
당시 권고문과 한의원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김옥두의원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권노갑비서관은 각 지역의 동책들을 통해 시시각각 올라오는 제반 상황을 종합하여 대책을 마련했으며…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의 한화갑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거운동원으로 뛰어들었다”고 적고 있다.
동교동 비서출신 모임인 인동회의 방대엽 회장(63년부터 DJ캠프에서 활동)은 한의원이 당시 비선에서 조직을 담당했던 엄창록씨 산하에 있었다고 기억했다. 한의원은 엄창록씨 산하에서 비공식적인 조직비서로 김대통령 활동을 도왔다. 말이 좋아 조직비서인지 맨땅에 기어다니는 식으로 고생을 했다. 담당지역은 경남이었으며 이때부터 쌓은 영남인맥이 한의원의 튼튼한 토대가 되고 있다.
한의원은 80년 계엄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동교동내 자신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김대중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래 지금까지 그분 곁에서 말석을 지키고 있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단 한번도 실망해본 적이 없다. 나는 결코 김대중 총재 밑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김총재 곁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은 갖고 있다.”
한의원의 저력은 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드러났다.
유진산 총재 시절 김영삼 의원과 김대중 의원이 40대기수론을 내걸고 맞붙었는데 유진산 총재가 김영삼 의원 지지를 선언했으며 대의원 3분의 2가 YS에게 넘어간 것으로 분석돼 있었다. 하나마나한 선거였다. 하지만 김대중 진영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결국 김대중후보는 458대 410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거두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여기서 놀랍게도 한의원은 경남 대의원 60%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한의원은 71년 대통령선거에서도 경남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 후 한의원은 김대통령의 사조직인 내외문제연구소 정책전문위원으로 한등급 격상됐다. 물론 동교동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직에서 맴돌던 한의원은 유신 직후 김대통령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유신이 터지고 김대통령이 망명생활을 하게 되면서 동교동은 사실상 해체됐다. 모두들 생업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는데 유독 3인방만 남게 됐다. 이들은 매일 동교동으로 출근하면서 이희호 여사와 함께 김대통령이 없는 집을 지켰다.
언제 시련이 닥칠지 모를 엄중한 상황에서 서열보다는 동지애가 우선이었다. 권고문에 대한 호칭은 언제나 ‘노갑이 형’이었다. 이들은 역할분담을 한 뒤 나름의 활동을 벌였다. 권고문은 조직과 자금, 김의원은 총무 및 내부관리, 한의원은 공보업무를 맡았다. 권고문과 한의원이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각각 다른 파트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출신으로 영어를 할 줄 알았던 한의원은 외신기자들을 집중적으로 만났고 이는 외교인맥을 쌓는 기회로 작용했다. 하지만 권고문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직책이었다. 한의원은 그때까지 겨우 ‘외곽조직관리-정책-공보 업무’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한의원은 김대통령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야당시절 “나는 김대중 선생님에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는 말을 측근들에게 자주 해왔다고 한다. “내가 좋아 지근거리에서 모실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희호 여사가 끔찍이 아끼는 한의원
한의원은 지금도 김대통령을 대단히 어려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의원은 비서들에게 “김대통령을 만나면 지금도 떨린다. 정동영이나 김한길 같은 사람이 DJ에게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대통령은 동교동 3인방을 한결같이 아꼈다. 그러나 한의원의 직책 소외는 계속됐다.
한의원은 78, 79, 80년에 3차례 구속된 뒤 81년 출옥했다. 그리고 85년 김총재가 귀국했을 때 정책전문위원이 됐으며 85년 독일유학길에 오르면서 보좌역 타이틀을 받았다. 86년 민주인권연구회 조사연구실장으로 일하다가 87년 특별보좌역이 됐다. 87년 대선 때는 선거대책본부 상담실장으로 일했다. 이것이 90년대 국회의원 당선 전까지 한의원이 가졌던 직책의 거의 전부다.
한의원은 최근까지도 비서실장 한번 해보지 못한 가신이다. 일부에서는 권고문이 한의원을 견제한 탓이라고도 본다. 권고문은 최근에도 “한의원은 당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지만 살핀다”며 한의원의 정치적 야심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희호여사는 한의원을 끔찍이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0~80년대 동교동에서 동고동락하면서 가장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이여사가 한의원을 지목했다는 추측이다.
95년 전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할 당시에도 한의원은 이여사에게 김대통령의 뜻을 물어봐달라고 부탁, “나가도 된대요”라는 이여사의 대답을 듣고 준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렵사리 DJ의 눈에 조금씩 들기 시작한 한의원과 달리 권고문은 80~90년대에 승승장구했다. 85년 총선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김대통령의 만류로 그만뒀지만, 88년 13대 총선에서 동교동 가신 가운데 1순위로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김대통령은 동교동 3인방에게 똑같은 기회를 줬다. 권고문에게 목포 출마를, 김옥두 총장에게 전국구를, 한화갑 의원에게는 신안 출마를 권했다. 그러나 한의원과 김총장은 78년 받은 실형으로 피선거권이 없다는 선관위의 유권해석에 따라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한의원의 한 측근은 “김대통령이 13대 국회에서 권고문을 조직에, 한의원을 대외교섭에 기용해 쌍두마차 체제를 형성하려 했다”며 “그러나 한의원이 13대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권고문과 격차를 벌여 놓았으며 그 공백을 메운 게 한광옥씨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한의원이 13대에 진출했더라면 그때 벌써 동교동은 양갑체제로 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고문과 한의원의 첫번째 갈등은 95년 전남도지사 선거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한의원은 92년 14대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성공, 95년 전남도지사 선거에 나설 결심을 했다. 한의원이 독자노선을 걷겠다고 선언한 첫번째 시도인 셈. 한의원의 출마는 “호남사람이 바깥에 나가서도 ‘내가 호남사람이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호남을 만들고 싶다”는 소신에서 비롯됐다.
한의원은 대의원의 70% 이상을 장악하며 승리를 낙관했는데 막판에 김성훈교수(현 농림부장관)라는 복병이 등장했다.
동교동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장관 카드는 당시 도지사 꿈을 갖고 있던 김영진 의원 등 몇몇 의원이 한의원 출마를 막으려고 내놓은 것이었다. 김의원 등은 초선인 한의원이 도지사에 나서면 자신들이 지역구에서 힘들어진다고 판단해 ‘농도인 전남에 농민을 대표하는 지사를 내세워야 한다’는 논리와, 목포가 지역구인 한의원이 당선되면 도청 이전 문제로 전남이 양분된다는 논리로 한화갑 불가론을 폈다. 귀가 솔깃해진 김대통령은 이를 권고문과 상의했고, 권고문은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한의원 출마 브레이크에 일조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번째 양 갑 갈등은 국민의 정부가 집권한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구주류와 신주류의 대립이 벌어질 당시 한의원이 신주류에 가까웠다는 의혹 때문이다.
권고문은 대선 직전인 97년 한보비리사건으로 구속돼 97년 대선과 집권 초반기에 2년 가까이 소외돼 있었다. 98년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98년 12월30일 귀국한 권고문은 99년 2월 당고문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권고문이 귀국하던 무렵 동교동에선 한의원이 총무직을 맡다가 특보단장으로 옮겨가면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99년 상반기 정국은 이른바 ‘김영배대행-한화갑-김중권실장’ 체제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런데 권고문의 정계복귀 이후 김실장으로 대표되는 신주류는 권고문을 강하게 제어, 이른바 ‘신-구주류 갈등’이 표출됐다. 신주류에 의한 ‘권노갑 제치기’시도 기류를 한의원이 방조하고 있다는 섭섭함이 권고문측에서 제기됐다.
양 갑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지난 4월 총선 공천 때였다. 한의원 주도로 이뤄지던 공천작업이 선거 막바지에 권고문의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감정에 앙금이 쌓였다. 특히 한의원 계보로 분류됐던 장성민 의원의 공천을 두고 권고문과 한의원은 심각하게 대립했다. 장의원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권고문과 김옥두 총장은 절대로 장의원을 공천할 수 없다고 버텼다. 실제 공천발표 전날까지 공천자명단에 장의원은 없었다. 그것이 한의원에 의해 밤 사이에 뒤집혀 버렸다.
옮아가는 무게중심
전면적으로 갈등이 심화된 것은 총선후 한의원의 최고위원 출마 때였다. 한의원은 동교동의 대표주자로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작업을 시작했다. 한의원 측근들은 단순한 킹메이커가 아닌 ‘호남지역 차세대 인물론’을 내세우며 한의원의 대권도전 의사까지 흘렸다. 한의원도 정권출범 초기 주장했던 ‘호남후보 불가론’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언론에서 동교동의 분화가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권고문과 김옥두 총장은 크게 화를 내며 한의원의 최고위원 출마에 반대했다.
권고문은 우선 전당대회 연기론을 들고나왔다. 대권경쟁이 조기에 가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한의원을 견제하는 카드로 해석됐다.
이에 맞서 한의원은 오히려 조기 전당대회를 주장하고 나섰다. 양 갑의 갈등은 심각해졌으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권고문은 청와대를 찾아갔지만 한의원의 출마를 만류하라는 김대통령의 의사를 받아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한의원에 가까운 사람으로 분류됐던 서영훈 대표는 6월19일 “최고위원 경선은 9월 정기국회 이전에 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8월 전당대회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김옥두 총장은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6월21일 청와대 당무보고에서 김옥두총장이 “전당대회 과열이 우려된다”며 다시 한번 뒤집기를 시도했으나 김대통령은 “어차피 경쟁인데 신경쓰지 말라”며 8월 대회를 지시, 한의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5월 청와대에서 한의원을 만나 최고위원 출마를 권유했다. 비슷한 시기 김대통령은 박상천 의원의 최고위원 출마도 ‘윤허’했다.
청와대의 무게중심이 한의원으로 옮겨졌다는 분석이 집중 제기됐다. 권고문도 “동교동계 후보는 한의원과 박상천 의원”이라고 말하며 대세를 수긍하는 쪽으로 변했다.
하지만 권고문은 최고위원출마의사를 피력하며 다시 한번 반전을 시도했다. 권고문은 6월22일 김대통령을 독대한 뒤 경선 불출마 입장을 번복했다. 권고문은 “이인제 고문도 출마할 것으로 안다”며 이고문과의 연대를 경선출마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권고문의 경선 출마에는 한광옥 비서실장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갑 의원의 독주에 우려감을 갖고 있던 한실장은 “한화갑 의원이 동교동계 대표로 최고위원이 되면 한의원 우산 아래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로 인해 동교동 결속력에 지장이 생긴다”는 논리를 펴며 권고문과 한의원의 동시 출마를 김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고문도 6월23일 “93년 최고위원 선거에서도 나와 한광옥 실장이 동교동대표로 출마해 동반 당선된 적이 있다”며 “이번에 한화갑 의원과 같이 진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이 논리를 뒷바침했다. 대세는 다시 권고문쪽으로 쏠리는 듯했다.
6월25일 서영훈 대표 경질론이 흘러나오면서 권고문측의 세과시가 본격화됐다. 경선에서 1등한 사람이 대표가 돼야 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는 권고문이 직접 당권을 거머쥐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됐다.
누가 동교동계 1인자인가
6월29일 권고문과 한의원, 김옥두 총장 등 3인의 회동이 있었고 권고문 중심의 동교동 단결론이 천명됐다. 한의원은 회동 후 “동교동은 김대통령 임기 후에도 영원한 형제애로 단결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데 합의했다”며 “특히 권고문을 우리 조직의 영원한 장형으로 모실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서대표 경질론을 부인하면서 이상기류가 감지됐다. 서대표의 유임은 한의원측 시나리오였고 권고문은 서대표를 경질해야 한다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권고문의 세과시에 당 안팎에서 역풍이 거세게 일었다. 불공정 경선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안동선 의원은 권고문을 찾아가 아예 “경선에 나서지 말고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나가라”고 건의했다. 전당대회가 ‘동교동계의 축제냐’는 비난여론이 계속되자 7월7일 권고문은 마침내 경선불출마를 선언했다. 경선 출마선언 뒤 정확히 2주일만의 번복이었다. 역시 김대통령을 만난 뒤 나온 결정이었다.
스타일을 구기긴 했지만 권고문은 다시한번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존재가치를 부각시킴에 따라 큰 손해는 보지않았다는 손익계산서가 나왔다.
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은 “이미 대세가 한의원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라며 “하지만 권고문은 가만히 있으면 위상이 더욱 좁아들 것이 뻔한 상태에서 최고위원 경선파동으로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여당 안팎에선 김대통령이 권고문을 버릴 거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대통령이 이번 경선을 대권이나 당권과 연결짓지 말라고 한 것은 한의원을 견제하는 의미가 크다는 지적이다. 한의원이 당권을 의식, 1위 득표에 집착한다면 또다른 폐해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덧붙여진다.
사실 김대통령은 한의원과는 달리 권고문에게는 빚이 많은 편이다. 김대통령은 85년 2·12총선에 나가려던 권고문에게 출마포기를 지시했다. 권고문은 15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를 홍일씨에게 물려줘야 했고, 16대 총선에서는 서울 동대문 출마를 준비하다 김대통령으로부터 제지당했다. 또 최근 최고위원 경선을 앞두고도 출마를 포기하는 등 ‘주인’의 뜻에 따라 여러번 날개를 꺾었다. 제2인자의 비운 같은 것일까. 대신 권고문은 이러한 고비마다 군소리없이 김대통령의 뜻을 따르면서 오히려 김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지는 계기로 삼았다.
김대통령과 권고문의 특수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김대통령이 한의원보다 권고문에게 킹메이커 역을 맡길 것으로 본다. 권고문은 그 자체가 김대통령의 ‘히든카드’이기 때문이다. 권고문이 최근 “이인제 고문에 대한 지지는 덕담 수준이었다”며 이고문 지지대열에서 한발 뺀 것도 킹메이커로서 몸값을 높이기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 또 한의원이 킹메이커든 킹이든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쟁취해가는 과정을 막겠다는 생각도 보이지 않는다. 실제 한의원의 이러한 행보는 이고문이 가장 경계하고있다.
민주당에선 이런 상황이 된 원인을 김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서 찾는다. 1명에게 절대로 많은 권한을 주지 않는 스타일상 김대통령은 당분한 권고문과 한의원을 모두 껴안고 갈 것이며 결정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내부경쟁도 용인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꺼지지 않는 불씨
권고문과 한의원의 영토확장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권고문은 최고위원을 포기했지만 한의원의 1위 당선은 막으려 애쓸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의원의 1위 당선은 권고문의 입지를 축소시키킬 터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시 한번 양 갑의 갈등이 표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항간에는 김옥두 총장을 지명직으로 진출시켜 최고위원의 격을 떨어뜨리면서 한의원을 견제할 것이란 전망도 대두되고 있다.
현재 세력분포는 백중지세다. 최근 최재승 의원이 권고문 대열을 이탈하면서 한의원쪽이 탄력을 받고 있는 상태다.
한의원 캠프에는 문희상 의원을 비롯해설훈, 정동채, 김덕배의원 등 동교동계 소장파가 집중 포진하고 있다. 최재승 의원도 조만간 합류하리라는 예상이다.
반면 권고문 진영에는 김옥두 총장, 윤철상, 이훈평, 조재환의원 등이 ‘의리’로 뭉쳐 있다. 이들은 전당대회 이후 당직 인선에서도 또한번 대결할 것이다. 한의원측에서는 벌써부터 문희상 의원이 차기 사무총장감으로 거론되고있다.
현재 권고문 측근들로 포진된 사무처 중하위직 당직에도 변화가 보인다. 부대변인의 경우 권고문측은 박홍엽씨를, 한의원측은 구해우씨를 기용하려 하고 있다.
최근 동교동 사람들은 “동교동은 상도동과 다르다”는 말을 부쩍 자주한다. 상도동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실제 동교동이 상도동처럼 사분오열될 거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조직의 보스가 결정되면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데 별어려움이 없다는 전망이다. 권고문이든 한의원이든 구심점이 확보되면 밑에서는 따라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 갑의 소모적 갈등과 대결이 오래 지속된다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식으로 아랫사람들은 커다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는 김대통령에게도 부담이다.
하지만 현재의 지형상 이른 시일내 양 갑갈등이 정리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2002년 전당대회 때까지 내부갈등이 이어질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