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대 ‘강철’이란 필명으로 주사파학생운동의 이론적 대부로 활동하다가 91녀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김영환(37). 북한과 연결된 민혁당사건으로 지난해 국정원의 조사를 받았으나 반성문을 쓰고 사상전향을 하고 나온 그는 오늘의 급변한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은 50년 전에 서로 수백만 명을 죽인 당사자인데 바로 그 책임자들이 반갑게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화해의 악수를 하고 조선인민군의 사열까지 받았으니 이 어찌 감격스러운 일이 아니랴.
그러나 여기서 나는 감격스러워 할 수만은 없었다. 김대중대통령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백만 명의 북한 동포들을 굶어죽게 하고 지금 정치범수용소를 비롯하여 북한 전역에서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바로 그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으면서 매초마다 반가움과 감격,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교차했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러한 감정은 ‘남북문제’와 ‘북한문제’라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차원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문제가 겹쳐서 생겨난 것이다. ‘남북문제’란 남한과 북한이 화해하고 평화롭게 지내며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고 지원하고 더 나아가 통일하는 문제이고 ‘북한문제’란 북한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경제적으로는 굶주림과 궁핍에서 벗어나 유복한 삶을 누리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보다 많은 권리를 향유하는 문제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 지금의 북한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결정적 책임이 있는 김정일정권 대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그 새로운 정부 주도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남북문제’는 남북분단과 6·25전쟁, 냉전, 대결정책 등으로 야기된 모든 문제를 평화적이고 상호존중적이고 협력적인 관점과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남북분단이나 6·25전쟁이나 과거의 대결정책 등에 관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부분들이 많을 것이지만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다 보면 화해와 협력과 통일의 길로 가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털어버리고 남북대결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한 이번의 남북정상회담은 정당하고도 정확한 일이었다. ‘남북문제’만 있다면 뭐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남는 ‘북한 민주화’ 문제
나는 ‘북한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꼭 대한민국 정부나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있다고 해도 좋고 없다고 해도 좋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북한 지역도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져야 할 지역이니까 책임이 있다고 해도 좋고.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주민들을 대표하고 있고 남한 주민들에 의해 구성된 정부이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해도 좋고 형식 논리를 떠나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해도 좋다. 그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그에 관해 시비 걸 생각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북한문제’의 해결과는 초연하여 남북간의 대결종식과 화해와 교류에 힘을 집중한다고 해서 이를 올바르지 않다고 몰아붙일 생각도 전혀 없다.
사실 한국 정부는 남북긴장완화와 화해 등에서는 주연의 하나로서 결정적인 구실을 해야 하지만 ‘북한문제’의 해결에서는 주연이 아니다. ‘북한문제’의 해결에서는 북한 인민이 주연이며 한국 정부는 조연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또 남북대결과 냉전이 북한 인민의 해방과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 노릇을 해 온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남북대결을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와 교류의 시대를 연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북한 인민의 해방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민간단체나 개인이 할 일은 정부의 역할과는 다르다. 어떤 민간단체나 개인은 정부가 할 일을 단순히 보조하거나 선도할 수도 있겠지만 또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맡아서 하는 단체나 개인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북한민주화’와 관련된 주장을 편다면 이는 화해와 교류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조성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현 정세 속에서는 적절하지 않지만 민간단체나 개인은 정부와는 다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북한민주화’를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북한민주화’는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남북문제’의 해결보다는 ‘북한문제’의 해결이 훨씬 중요하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체제 대결도 이미 끝났고 군사력도 한미연합군이 인민군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좀 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화해와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문제’는 이보다 훨씬 절박하다. 경제가 최악의 상태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민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과 인권유린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모든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의 문제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과 최소한의 건강과 최소한의 인권이라도 보장하는 것인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북한에서 김정일 주도의 개혁과 개방이 성공한다든지 등의 다른 발전경로를 생각하면서 ‘북한민주화’ 노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적절한 주장이 아니라고 본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리더십을 만드는 노력이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는 것은 북한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이로운 것이다. 70년대에 김대중, 김영삼, 재야, 학생 등이 완전히 새로운 질의 민주적 리더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한 것은 그 어떤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더라도 그 이후의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됐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박정희정권의 공(功)을 강조하든 아니면 과(過)를 강조하든 박정희를 영웅으로 보건 아니면 악마로 보건 바뀌지 않는다.
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고 현재의 북한과 비교해 훨씬 자유로웠지만 그래도 민주화운동이 필요했다면. 경제정책의 실패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 아래 있는 북한은 더 말해 무엇하랴?
어떤 사람은 우리가 북한 인권 문제를 자꾸 거론하거나 북한민주화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국론분열’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그 나름대로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어떤 정치인이 한일관계나 역사문제에 대해 적절치 않은 발언을 했을 때 이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와 민간단체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국가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정석이고 민간단체는 외교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외교적인 측면보다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하게 따지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국론분열이 아니라 일종의 역할분담과 같은 것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대결적인 자세를 취하고 남북간에 긴장을 조성하는 일은 북한 정부의 자세를 더욱 경직되게 하고 북한의 문을 더 걸어닫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지만 민간단체는 북한의 현실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이를 사실대로 알릴 의무가 있다. ‘북한민주화’는 분명히 북한 인민이 주체가 되어서 해야 할 일이다. 국제적으로 아무리 난리를 친다고 해도 북한 인민이 나서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단체와 개인들도 ‘북한민주화’를 위해 해야 할 그에 맞는 구실과 의무가 있다. 특히 동족인 우리들이 해야 할 구실과 의무가 특별히 크다.
중국식 개혁·개방이 어려운 이유
북한민주화를 추구하면서도 북한의 앞날에 대해 어느 한 가지 가능성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며 거기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중 하나가 최근에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김정일정권 주도의 개혁과 개방의 길’이다. 그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하는 사람이 많은데 솔직히 말해 낙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이러한 정책이 성공한 것만 생각하고 78년 당시의 중국과 현재의 북한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실 중국식 개방정책을 북한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다. 78년의 중국 상황과 현재의 북한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방을 추진하는 것이 개방을 추진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약간 망설여지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선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 장황하게 설명하기로 하자.
첫째, 78년의 중국은 새롭게 집권한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현재의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 76년의 모택동 사망과 4인방 타도, 78년의 등소평의 당내 투쟁 승리와 실권 장악 및 노선의 대전환은 사실상 하나의 커다란 혁명이었다. 이러한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세력이 중국을 주도했으나 북한은 그 반대다.
둘째,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잔혹한 행위들과 경제적 파탄에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가장 큰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김정일은 지금까지의 북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에 결정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의 등소평은 중국 실상과 과거의 잔혹한 일들이 알려지더라도 별타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정적들을 공격하고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데 이용할 수 있었는데 비해 북한의 김정일은 실상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될 가능성이 많다.
셋째, 78년 당시 중국에는 매우 강력하고 높은 권위를 가진 공산당이 있었지만 북한에는 이런 것이 없다. 78년 당시 중국에서 혁명적인 대전환이 가능했던 것도 강력한 공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오랜 기간에 걸쳐 1인독재의 도구로만 이용되어오다보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북한에서 오래전부터 당이 무슨 내린 결정을 내리는가보다 김정일이 무슨 지시를 하는가가 훨씬 중요했다. 당이 내린 결정이라도 김정일의 새로운 지시에 반하는 것이면 즉각 수정했으며 만약 김정일의 지시에 어긋나는 당의 결정이 나오는 경우에는 설사 그것이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반혁명’의 죄로 처단되거나 까다로운 심사의 대상이 된다. 오랜 기간 이렇게 길들어 있다 보니 설사 김정일이 죽거나 제거된다 하더라도 조선노동당이 자기 중심을 확실히 잡지 못하고 누가 권력을 잡을지에 관심이 쏠릴 것이다.
개방이 되면 김정일의 권위에 손상이 가게 될 것이 분명한 조건에서 조선노동당이 확실히 자기 자리를 잡고 있어도 어려운 판에 이처럼 조선노동당의 입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넷째, 78년의 중국에서 등소평의 권위와 인기는 급속히 올라가고 있었는데 비해 북한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김정일의 권위가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김정일은 북한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오직 숭배와 복종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에 인기 같은 것은 따질 수도 없다.
70년대말 80년대초의 등소평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78년 사상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등소평이 북경의 축구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는데 이때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북경 시민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일어나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이 박수치는 시민들의 편안하게 웃는 모습에서 이 사람들이 정말 등소평을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다섯째 중국이 개방을 시작한 78년과 지금은 국제정세가 크게 다르다. 78년 당시는 미국이 상당히 어려운 상태에 있었고 사회주의국가들이 (속으로는 상당히 많이 썩고 있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건재했으며 공산주의 이념도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주의 진영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공산주의 이념은 엄청난 타격을 받아 거의 빈사상태에 있다.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중국에서도 공산주의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는 정말 보물찾기보다도 더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런 조건에서 개방을 시작하는 것은 78년에 비해 크게 더 힘들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런 차이들을 살펴보면 북한에서 개혁과 개방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또 꼭 그렇지도 않다. 북한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모든 권력과 권위가 김정일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약점이자 장점이기도 해서 개혁과 개방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지금부터 확실한 자세로 개혁과 개방을 동요 없이 강력하게 추진해 나간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30%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경제개발에 성공하려면 시늉뿐이 아니라 확실하게 개방을 해야 하며 전면적인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경제부문에서는 초기부터 모든 영역에서 시장경제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해야만 한다. 모든 부문에서 기업과 개인의 실리추구를 용인하고, 국유기업들에 의한 독점체제를 국유기업과 민간기업을 포함한 경쟁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만 한다.
시늉뿐인 개방은 별효과가 없다는 것이 나진선봉지역 특구 개발사업에서 드러났다. 나진선봉지역을 특구로 설정한 지 올해로 10년째 되는데도 별성과가 없다. 오히려 그 10년 동안 북한 경제는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개방과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만 외국인 투자도, 기술도입도, 수출활성화도 가능해진다.
지금과 같이 소심하고 소극적인 태도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개혁과 개방만 확실히 하면 북한 체제의 성공이 보장되나? 문제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데 있다. 박정희나 리콴유 식의 개발전략이 됐든, 중국식의 개혁·개방정책이 됐든 필수조건은 북한이 전면적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북한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전면적 개혁·개방이 전면적 체제위협으로 전화될 것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망하느냐, 개방하다 망하느냐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으로 남쪽에서는 북한대개방의 물꼬가 곧 바로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북한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극히 일부 분야에서 그들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까지로 대외개방 폭을 제한할 가능성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제한된 개방은, 심지어 그 개방된 부문에서조차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데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아온 북한 관리라면 누구나 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딜레마가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분명한 것은 개혁·개방과 체제수호라는 어떤 관점에서는 이율배반적으로도 보이는 두 방향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동시에 대단히 불행히도 북한 정부가 이러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호한 태도는 북한 정부에도 북한 인민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북한 정부가 10년 전이나 혹은 20년 전에 ‘합영법’이니 ‘나진선봉 특구’니 해서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과감하게 개방했더라면 경제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체제붕괴 위험이 지금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철권독재는 불가능하고 유순한 독재로 그 체제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겠지만.
지금 북한에서 중국식 개방정책이 성공하겠는가 하는 문제와 별도로 북한이 중국식 개방정책을 받아들일 것을 간곡히 권유하고 싶다. 현재의 북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중국식 개방정책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냥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2가지 밖에 없다.
그냥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인민을 더욱 비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길이고 체제가 붕괴되고 난 후 역사적 단죄를 피할 수 없는 길이지만 개방정책을 추진하다가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에는 그래도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중국식 개방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매우 특수한 나라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기초로 북한의 앞날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전인미답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일관성 있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펴면 주위 나라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인민의 지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개혁과 개방이 김정일정권에는 유일한 선택이요 시기적으로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는데 모든 것을 예단해서 지레 겁을 먹고 소심하게 나오지 말고 대담하고 대범하게 개혁과 개방의 큰 길로 나올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진심으로 존중하고 조건없이 도와줘야
마지막으로 우리가 북한과 교류하고 협력하고 더 나아가 통일하는 과정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관해 꼭 언급하고 싶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는 북한과 북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조건 없이 헌신적으로 도와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북한을 보다 적극적으로, 혹은 이런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지만, 공격적(?)으로 포용하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통일비용’이라는 말에 대해 심히 불쾌감을 갖고 있다. ‘통일비용’이라는 말 자체에 뭔가 내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돈을 낸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깔려 있는데다가 통일될 경우에만 도와주고 통일이 되지 않으면 돈을 내지 않겠다(대대적으로 도와주지는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민주화되더라도 남한과 북한은 사회발전단계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 상당 기간 지연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럴 경우 막대한 액수의 돈이 요구되는 북한의 SOC 건설 등 북한재건비용은 남한이 적극 도와주지 않으면 조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를 적극 도와주려면 남한 주민의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건 없이 헌신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북한이 완전히 민주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도 어느 정도 민주화되고 지원금이 군사비 등의 용도로 전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설 정도가 되면 조건 없이 대대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이해타산에 의한 것이거나, 마지못해 할 수 없이 내는 것이 아닌, 북한 인민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심이 없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내도 거리가 가까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구 서독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어 구 동독 지역에 투자를 했지만 거기에는 사랑하고 존중하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거나 아주 적게 담겨 있어 아직도 그들 사이는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의 자존심을 제대로 배려해주지 못했고 동독인들의 이상과 열정과 노력과 좌절 등이 공정하게 평가되지 못했으며 동독과 관련된 모든 것이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때문에 통일 후 구 서독인들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서도 구 동독인들에게 심한 욕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북한 사람, 북한 말, 북한의 풍습 등을 진심으로 존중하도록 학생들을 교육하고 탈북자나 북한의 식량난민 등을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도와주려는 운동을 더욱 확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