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문배주에서 강쇠주까지 민속주 베스트10

  • 허시명 여행칼럼니스트

    입력2006-09-22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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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 김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선물한 ‘평양 원산’ 문배주
    • ② 술샘마을의 술샘에서 퍼올린 물로 만든 영월 주천면 더덕주
    • ③ 300년 역사 가진 뱃길 나그네의 술, 충주 청명주
    • ④ 맛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앉은뱅이 술, 한산 소곡주
    • ⑤ 천년 전설이 담긴 진달래술, 면천 두견주
    • ⑥ 변강쇠의 고향 남원골 강쇠주
    • ⑦ 짙은 향에 강렬한 맛 자랑하는 전주 이강주
    • ⑧ 몰라서 못먹는 명주 찹쌀 해남 진양주
    • ⑨ 전국 시장 넘보는 포천 막걸리
    • ⑩ 벤처기업 배상면주가의 흑미주
    술도 옷처럼 제 몸에 맞아야 한다. 추운 지방에서는 도수 높은 술을 마셔 체온을 올린다. 40도가 넘어도 몸 상하지 않고 오히려 에너지가 보충된다. 더운 지방 사람들은 열이 많기에 자연히 낮은 도수의 술을 찾는다. 도수가 높으면 비지땀을 흘리면서 쩔쩔맨다. 그러니 지방마다 그 지방에 맞는 술이 필요하다. 소주도 제주도에서는 20도가 어울리고 경기 지방에서는 30도, 평양에서는 40도도 괜찮은 게 그런 이치다. 민속주니 전통주니 토속주니 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다. 한여름 여행에서 그 지방에 맞는 우리 술을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평양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평양으로 간 문배주

    “문배주는 주암산 물로 만들어야 제 맛이지요.”

    지난 6월14일 남북정상회담 목란관 만찬장에서, 남쪽에서 준비해 간 문배주를 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희호 여사에게 했던 말이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문배주의 고향은 평양이다. 평양 주암산(酒巖山) 밑의 평천 양조장에서 빚었는데, 그 규모가 대단해서 평천 양조장에서 내는 세금이 평양의 한 해 예산과 맞먹었다고 한다.



    현재 문배주를 빚는 이기춘씨(58)는 1951년 1·4후퇴 직전에 아버지 이경찬씨(93년 작고)를 따라 술도가의 트럭을 타고 피란 내려왔다. 북한에는 현재 문배주가 없으니, 문배주까지 함께 피란 나온 셈이다. 이경찬씨는 전쟁이 끝나자 서울에서 다시 술도가를 했는데, 5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곡물로 술을 빚을 수가 없게 되자 그만두고 말았다. 다만 집안 제사 때 조금씩 빚는 정도였다.

    문배주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86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90년 6월에 제재가 풀리면서였다. 이기춘씨는 500만원의 빚을 내 헌 보일러를 구입, 서울 연희동 집에서 술을 빚기 시작했다. 조그맣게 출발했지만, 술을 만든 지 두어 달 만인 90년 9월에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에서 남북회담이 열렸는데, 연형묵 총리가 양주말고 남한 술은 없냐고 청하는 바람에 문배주가 식탁에 오르게 된 거였다.

    이기춘씨는 술을 증류한 지 이틀 만에 숙성할 겨를도 없이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평양 손님에게 내민 평양 술이니 자연 화제가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언론에도 널리 소개되었다. 그 뒤로 러시아의 고르바초프가 한국에 왔을 때 150병을 가져가고, 올해에는 남북정상회담 만찬용으로 470병이 선발대 차에 실려 판문점을 넘어 고향땅을 밟는 행운을 누렸다.

    문배주는 북쪽 지방 술이라 독하고, 재료도 독특하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밀 누룩에 쌀술이 대부분이다. 한데 문배주는 조와 수수만 쓴다. 누룩도 조에다가 종국(種麴)을 넣어서 만든다. 조 누룩에 물을 잡아 밑술을 만들고 날이 좋으면 하루, 날이 좋지 않으면 이틀 가량 발효시킨다.

    이때 썼던 물이 평양의 주암산 물로, 석회암 지대의 지하수였다. 그래서 이기춘씨는 석회암 지대인 충북 단양에 술 제조장을 지을까 하다가 서울과 너무 멀어 포기하고,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마산리에 마련하게 되었다. 김포의 물은 화강암 암반에서 나오는 물이라 평양에서 빚던 문배주와는 차이가 있다.

    술이 발효되는 상태를 보아가며 쪄서 식힌 수수를 넣는데, 전체적으로 조와 수수의 비율은 4대 6 가량 된다. 10일쯤 발효시킨 다음 증류기에 넣고 끓인다. 지하실에서 지상까지 이어진 증류 탱크에서 60도 안팎의 온도로 진공 증류된다. 처음 5분 동안에 나오는 술을 ‘꽃술’이라 하는데 예전엔 약으로도 썼지만, 독성이 많아 그냥 버려야 한다. 처음 나오는 술이 68도쯤 되고, 그 뒤로 차츰 도수가 낮아지는데, 마지막에는 알코올 성분이 없는 수증기까지 올라온다. 현재 문배주는 50도, 40도, 25도 3종류가 생산되고 있다.

    50도라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술 중에 가장 독한 술인 셈이다. 이기춘씨는 독주(毒酒) 예찬론자다.

    “술은 독해야 합니다. 우선 부패할 염려가 없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과 향이 좋아져요. 독주는 술의 질을 까다롭게 따진 결과물이지요. 약한 술은 대개 재벌 주류 회사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낸 상품입니다. 일부 학자들이 그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약한 술로 취하려면 많이 먹어야 하니 위나 장에 부담이 갑니다. 독한 술은 조금 먹어도 취합니다. 빨리 취하고 빨리 깨는 거죠. 술은 그래야 합니다. 세계의 명주는 모두 독주입니다. 코냑 보드카 스카치를 보세요.”

    문배주는 증류되고 나서 1년쯤 숙성 기간을 거쳐야 제 맛이 난다. 무균 상태이긴 하지만 공기와 접촉하면서 무르익는다. 40도의 술이란 곧 40%의 알코올과 60%의 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물과 알코올이 치밀하게 섞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증류 소주는 숙성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술의 질이 최고에 도달하면 그 상태로 계속 유지된다. 그래서 오래 된 술일수록 좋다는 말이 생겼다. 그렇게 오래 된 것이라야 도수가 높아도 불쾌하지 않고 부담이 없다.

    40도짜리 문배주는 휘발성이 강해서 향을 맡으면 코끝이 찡해온다. 하지만 소주맛은 바다 속 같아서 향만으로는 그 깊이를 감지할 수가 없다. 술을 한 모금 머금으면 독특한 맛과 향이 입안에 가득 번진다. 코로는 감지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다. 입 속으로 한 마리 물고기가 들어와 휘젓다가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4대째 술을 빚고 있는 이기춘씨는 자존심이 세다. 문배주를 빚기 전까지는 대한항공 기획실에서 20년 간 근무했는데, 그 덕에 외국에 많이 돌아다녔다. “외국 술맛도 많이 보았겠습니다” 하고 묻자, “외국의 유명한 술도 별거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문배주는 술 향이 문배나무 꽃 향기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일 뿐, 돌배의 일종인 문배와는 무관하다.

    이기춘씨는 “주암산 샘물로 반드시 문배주를 빚어보라”는 아버지의 유언도 있고 하여, 평양에 문배주 공장을 설립하고 싶다는 꿈이 있다.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마냥 꿈으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 같다.

    2.술이 샘솟았다는 동네, 영월 주천면의 더덕주

    문배주가 태어난 평양 주암산(酒巖山)은 술바위산이란 뜻인데, 명주의 고향다운 이름이다. 그 산에 얽힌 전설이 있다.

    효성이 지극한 사내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위독해서 약초를 구하러 산에 갔으나 구하지 못하고 대신 물을 떠다 드렸다. 물을 마신 어머니는 웬 술이 이렇게 독하냐면서, 그 다음날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게 유래되어 주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땅 이름에 술주(酒) 자가 들어간 게 또 없나 찾아보았다. 마을의 품격을 배려해서인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한 곳을 발견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酒泉面) 주천리(酒泉里)다. 술샘 마을이라는 뜻이다. 술 기행을 하는데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찾아갔더니, 비석도 있고 전설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술이 솟아나는 샘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양반이 가면 약주가 나오고 상놈이 가면 탁주가 나왔다. 하루는 약주가 먹고 싶어진 상놈이 꾀를 냈다. 갓을 쓰고 양반 옷을 입고 양반 걸음으로 샘을 찾아간 것. 하지만 약주가 나올 줄 알고 샘물을 떠봤더니 여전히 탁주였다. 화가 난 상놈은 샘을 향해 돌을 집어던졌다. 그 뒤로 영영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샘터가 기원이 돼 주천 마을이 생겼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태가 묻혀 있다는 망산 밑 주천강가 샘터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흘러 나온다.

    주천 마을엔 술 제조장이 하나 있다. 근래에 생긴 더덕주 제조장이다. 94년 9월1일에 영월 더덕 영농법인을 설립했고, 그곳에서 99년 4월1일 더덕주를 처음 생산했다. 조합원은 모두 23명. 술을 시판한 지 1년밖에 안 되지만, 빚지지 않고 자력으로 기반을 닦으며 건실하게 운영하고 있다.

    영농법인 대표인 이재인씨가 더덕을 처음 재배한 것은 20년 전이었다. 군청에서 공무원을 하다가 그만두고, 땅을 1만평 마련하여 1250평에 더덕을 심었다. 산에서 씨앗을 채취하여 심었다. 남들 따라 옥수수, 콩을 심으면 소득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주변에선 미친 놈이라 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농촌진흥청에 가보았으나 재배 기술이 따로 없었다. 강원도 횡성 둔내에 더덕 재배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쫓아가보았으나, 재배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80년에 1250평에서 종자를 7가마 채취했다. 이듬해엔 더덕 상인에게 밭떼기로 950만원에 팔았다. 종자는 1가마에 250만원 받았으니, 순매출이 2700만원이 생겼다. 이웃 농민들은 놀라워했다. 재배를 계속하여 7000평까지 넓혔다. 재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기술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이재인씨의 노력으로 더덕 재배 농가가 확산되어, 지금은 평창 정선 영월에 300가구나 되고 있다. 영월에만 100가구쯤 된다.

    더덕 재배 농민들이 더덕을 가공 판매하다가 개발한 것이 더덕주다. 더덕 향은 알코올보다도 휘발성이 강하다. 방금 맡은 향도 바람이 한번 불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인지 더덕 향을 맡으면 얼마나 향긋한지 몸도 날아갈 듯하다.

    더덕을 넣고 탁주를 담그면 더덕 향은 다 증발해버리고 막걸리 맛밖에 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월 더덕 영농조합법인에서는 희석식 소주를 만드는 주정으로 더덕주를 빚게 되었다고 한다.

    더덕은 농약을 칠 수 없는 작물이다. 농약을 치면 뿌리가 녹아버린다. 2년생까지는 병충해가 없는데, 3년째 접어들면 전염성이 강한 검은줄무늬잎마름병이 생겨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강원도 영월처럼 해발 500m 이상에다 통풍이 잘되는 고랭지에서는 병이 별로 없어 다년생 더덕을 재배할 수 있다.

    특히 영월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서 재배되는 더덕은 섬유질이 발달하여 뿌리가 단단하게 여문다. 작고 마딘 것이 고생하며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충주 이남에서 자란 더덕은 크게 자라지만 무르기 때문에 맛이 덜하다고 한다. 주천면의 동강 더덕주가 경쟁력이 있는 것은 이런 재료에서 비롯된다.

    더덕주는 더덕을 100일 동안 주정에 담갔다가 건져낸 리큐르, 즉 침출주다. 대한주정회사에서 사온 95도의 주정에 지하수를 타서 45도짜리로 만들고 활성탄, 즉 숯에 한 번 걸러 독성을 제거한다. 세척한 더덕을 주정에 담가 100일 동안 우려낸다. 이때 술맛을 강화하기 위해 5가지 한약재를 넣는다.

    무슨 한약재를 넣느냐고 묻자, 조합 대표는 멈칫거린다. 비결이라 알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군청을 통해 술 제조장을 견학하고 싶다는 요청을 하는데, 그중에는 사업 정보를 캐러 오는 사람이 많다는 거였다. 시작한 지 1년밖에 안 돼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는 것이 느껴졌다.

    더덕주는 30도, 25도, 20도, 15도짜리가 나온다. 25도짜리를 맛봤더니 희석식 소주 냄새가 강하게 났다. 이건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30도짜리 술을 내온다. 5도 차이인데 술맛이 확연히 다르다. 독한데도 쏘지 않고, 술 안에 담긴 약재 향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비로소 더덕술에 대해 논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합 대표는 그제서야 이 술을 개발한 기술자가 30도짜리를 전략 상품으로 만들라고 충고했다는 말을 털어놓았다. 1.5ℓ짜리 더덕주에는 4년 이상 된 더덕이 서너 개 들어 있다.

    주천(酒泉)이라면 당연히 명주, 그것도 약주나 탁주로 명주가 있어야 될 텐데, 그런 술은 전해오는 게 없다. 다만 그 지명에 부끄럽지 않은 시도가 지난해부터 이뤄지고 있으니 눈여겨볼 만하다. 문의 033-372-1885

    술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태어난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고, 그러다 보면 경쟁도 치열해져 좋은 술이 등장하게 된다. 요즘은 유원지를 끼고 있는 곳의 술도가들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포천의 막걸리와 동래의 산성 막걸리가 대표적이다. 주천의 동강 더덕주도 영월 동강을 찾는 사람들을 겨냥한 상호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주막이 있었고 좋은 술이 있었다. 한강의 마포나루에서 가까운 공덕동에서는 공덕리 소주가 유명했고, 남한강 탄금대 아래의 창동리에서는 청명주가 유명했다.

    청명주(淸明酒)의 역사는 300년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월 초에 담가서 4월 청명일에 마시는 술이었다. 그 술을 빚는 곳은 충주 탄금대에서 탑평리 중앙탑 방향으로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왼편으로 나오는 첫째 마을 가금면 창동리다. 예전에 조창(漕倉)이 있던 마을이라 창동리(倉洞里)라 부르는데, 조세를 거두는 선박들이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다. 특히 이곳은 문경새재를 넘어와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과거를 보러 가던 경상도 선비들이 거쳐가던 곳이다.

    그러니 목 축일 술 한 잔이 그리운 동네였다. 청명주는 뱃길 나그네에게 사랑받았고, 그 맛이 한양까지 퍼져 마침내는 임금에게까지 진상되었다고 한다.

    그 술이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오래도록 묻혀 있었다. 게다가 술 빚던 사람들이 세상을 뜨면서 아예 잊혀버렸다. 그런데 충주시에서 나서서 복원을 서두르고, 창동 마을에서 청명주를 빚을 줄 아는 사람을 찾다가 적임자로 떠오른 게 박영아씨(99년에 86세로 작고)와 박씨 조카인 김영기씨(80)였다.

    이들은 김해 김씨 집안에서 전해오는 ‘향전록’을 참고하여, 술을 복원하기 위해 20년 가까이 애를 썼다. 무던히 노력한 결과 1986년에 술이 완성되었고, 1993년 6월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면서 1994년부터 시판하게 되었다.

    청명주는 순 찹쌀로 빚는 술이다. 찹쌀만 쓰는 이유는, 그래야 맑고 고운 술이 나오고 술량도 많기 때문이다. 예전엔 청명일(양력 4월5일경) 100일 전 추울 때 담가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요즘은 온도 조절을 할 수 있어 한 달이면 술을 빚을 수 있다. 물도 예전엔 창동리 뒷산에서 한강으로 합류하는 물을 수면의 석 자 3치 밑에서 길어다 썼다. 그러나 그 물이 오염되어 이제는 100m 가량 파고들어간 지하 암반수를 사용한다.

    요즘은 탁약주협회에서 공급하는 누룩을 사용한다. 밑술은 누룩과 물과 찹쌀을 항아리에 담아 3일 간 발효시키면 완성된다. 밑술에 두 번에 걸쳐 술밥을 넣는데, 처음에는 찹쌀과 누룩과 물을 넣는다. 하루가 지난 뒤에 두 번째로 찹쌀과 누룩과 물을 넣고 엿기름을 추가한다. 이 상태로 15일 동안 발효시킨다. 발효를 촉진하기 위해 술밥을 넣을 때마다 누룩을 넣고, 마지막에는 엿기름을 넣는 것이 특징이다. 겨울에는 온풍기를 틀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어서 술 도수와 비슷한 18도를 유지하며 발효시킨다.

    발효가 완료되면 1차 여과를 하고 나서 다섯 가지 약재, 인삼, 구기자, 갈근, 더덕, 탱자를 달여서 넣는데 누룩내를 희석시키기 위해서다. 약재를 넣고 일주일쯤 지나 살균하면 침전물이 생긴다. 그러면 한 번 더 여과해서 병에 담는다. 마지막으로 65도의 온도에서 병째 10분 정도 살균한다.

    이렇게 하면 17도짜리 술이 되는데, 700㎖ 한 병에 소비자가격이 9000원이다. 청명주를 처음 시판하던 5년 전에 찹쌀 한 가마니 가격이 10만원 했는데, 지금은 30만원 한다. 재료값은 3배가 올랐는데 술 출고가격은 6500원 그대로다.

    술 맛은 좋다. 약재 향이 진한 편인데, 찹쌀 곡주 특유의 부드러움이 있고 단맛이 적은 데다 잡스러운 맛이 없다. 더욱이 값이 싼 편이다. 전화(043-842-5005)로 택배 주문도 할 수 있다.

    여든 나이에 술을 빚느라, 김영기옹은 몸도 곧추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떨어진 상태다. 사업을 확장하기도, 새로운 디자인을 하기도, 영업망을 넓히기도 어려워 보인다.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갓 졸업한 김영섭씨(26)가 아버지 일을 돕고 있는데, 술도가 일을 도맡아 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적고 여려 보인다.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안주인(60)은 술을 빚느라 진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 내준 200평짜리 음식점을 빨리 팔고 싶어 애를 태운다.

    10대째 창동리에 살고 있는 김영기옹의 집안은 천석꾼으로 부유하게 살았다. 폐교가 된 동네 초등학교 부지도 그의 집안에서 기증한 것이다. 지금도 술도가 600평에 강가의 음식점 200평 해서 800평 대지에 살고 있는 괜찮은 외형이지만, 이제는 집까지 팔아서 빚을 갚고 운영자금을 마련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당장 밑지더라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술 빚는 일을 중단할 수 없어, 김영기옹은 다시금 술밥으로 찔 찹쌀을 물에 담근다.

    4. 앉은뱅이 술, 한산 소곡주

    충청남도를 대표하는 술로 한산 소곡주와 면천 두견주를 꼽는다. 소곡주는 조선시대에도 유명해서 경상도 영양에 살던 안동 장씨(1598∼1681년)가 지은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에 빚는 법이 소개되었고, 정약용의 둘째아들 정학유(1786∼1855년)가 지은 가사 ‘농가월령가’의 정월 편에는 “며느리 잊지 말고 소곡주 밑하여라, 삼춘(三春) 백화시(百花時)에 화전(花前) 일취(一醉)하여 보자”라는 표현이 있다.

    한산 지방에서는 아직도 소곡주를 많이 빚어 먹는데, 허가받은 곳은 한산 모시관 맞은편에 있는 한산 소곡주 양조장(041-951-0290)뿐이다. 양조장 대표 나장연씨는 충남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어머니 우희열씨(61)와 함께 술을 빚는다.

    1979년에 처음 문화재로 지정받은 나씨의 할머니 김영신씨(97년 작고)의 친정은 대대로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에 살면서 술을 빚어왔다. 그 집안에 전해오는 내력만도 300년을 거슬러 1664년생인 전주 이씨 할머니까지 가닿는다.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했다는 나장연씨는 만나자마자 음식점으로 이끌더니 소곡주 한 잔을 권했다. 잘 익은 벼이삭처럼 노릇한 술은 그윽한 누룩 내음을 풍겼다. 요새 사람들은 시원한 맥주나 독한 소주 양주에 익숙하지만, 이 누룩 내음이 본디 우리 선조들의 코끝에 맴돌던 술 내음이다. 술잔을 기울이니 입안에 달콤쌉싸래한 맛이 감돌고, 술잔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혀에 알알한 기운이 돌았다.

    술 맛을 좌우하는 것은 첫째가 물이고, 둘째가 누룩, 셋째가 온도다. 소곡주는 염분이 없고 철분이 약간 함유된 한산의 건지산 물로 담가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건지산 물이 좋다는 얘기는 양조장에서 고개 하나 너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년)의 묘와 사당이 있는 문헌서원 관리인에게서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여름에 모기 물려 가려워도 그 물에 목욕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은 ‘진짜 약수’라고 했다.

    누룩은 계약 재배한 통밀을 원료로 쓴다. 누룩을 만드는 데는 6개월 이상 걸리는데, 잘 띄운 누룩은 절구에 빻아 가을 이슬에 너더댓새 바래 잡냄새를 제거한 뒤에 사용한다. 누룩이 준비되면 비로소 술 빚기에 들어간다. 밑술은 물에 불린 누룩에, 쌀을 가루내 찐 흰무리 떡을 넣어 만든다. 3일 동안 발효시킨 뒤, 찹쌀 고두밥을 넣고 잘 저어 덧술을 만든다. 소곡주는 밑술 할 때만 누룩을 넣는데, 누룩을 적게 쓴다 하여 소곡주 혹은 소국주(少麴酒)라 부른다.

    덧술을 발효시킬 때 들국화 메주콩 엿기름을 넣는데, 이들이 독특한 향과 맛의 원천이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술이 잘 빚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붉은 고추를 술항아리에 꽂고 뚜껑을 덮어 낮은 온도에서 숙성시킨다. 100일이 지난 뒤에 술항아리를 열고 대나무 용수를 박아 떠내는데, 그 술이 18도의 한산 소곡주다.

    제조장 지하실엔 스테인리스 술통도 있고, 땅에 묻은 술독도 있었다. 저온에 오랫동안 숙성시켜야 하니 지하실은 서늘했다. 요즘은 대량 생산에 살균 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용수를 박아서 술을 떠낼 수가 없다. 여과기와 살균기의 힘을 빌려야 한다.

    나장연씨는 똑같은 공정과 정성으로 술을 빚어도, 한 배에서 나온 형제보다 더 제각각인 것이 술 맛이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땅에 묻은 술항아리를 열고 술국자로 떠준 술 맛이 모두 달랐다. 단맛에서부터 상쾌하고 개운한 맛까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이 술 맛을 보려고 며느리가 홀짝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취하여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었다는 얘기가 있고, 또 과객이 한두 잔씩 맛보다가 그 맛에 취해 일어날 줄 몰랐다는 얘기가 있어서, 앉은뱅이 술이라고 부른다.

    1990년부터 시판된 소곡주는 인터넷 홈페이지(www.sogokju.co.kr)에 들어가면 상세한 정보와 구입처를 알 수 있는데, 젊은 사장은 조만간 43도의 증류주도 시판할 예정이라며 강한 의욕을 보인다.

    술도가를 둘러보며 야금야금 술을 받아 먹었더니 취기가 돌았다. 청량한 바람이 그리웠다. 술기운에 올라간 곳은 흙으로 쌓은 건지산성이었다. 백제의 유민들이 울분을 삼키며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주류산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산정에는 끊어진 그네와 누각이 있었다. 누각에 오르자 한산벌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였다. 멀리 금강 줄기가 노랫가락처럼 에돌아 흐르고 있었다.

    예전엔 진달래꽃 피는 곳에서는 모두가 진달래술을 빚을 줄 알았다. 진달래 꽃잎을 따 먹고 화전을 부쳐 먹듯이 술도 빚어 먹었다. 요즘도 간편하게나마 진달래주를 담그는 사람들이 있다. 유리병이나 항아리에 진달래 꽃잎을 넣고, 소주를 부어서 한 달 이상 재놓았다가 마시는 것이다. 간혹 철을 못 맞추어 철쭉을 진달래로 오인하여 탈이 나기도 하는데, 이 점만 주의하면 누구라도 과일주 담그듯이 담글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진달래주는 누룩으로 빚는 것이다.

    그 진달래주, 즉 두견주로 인간문화재가 된 사람이 있다.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에 사는 박승규씨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사는 이가 어떻게 인간문화재가 됐을까 갸웃거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면천을 잘 모르는 소치다.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은 오래 전부터 인근의 중심지였다. 면천은 백제시대엔 혜군이었고, 통일 신라시대엔 혜성군이었다. 고려시대엔 면주로 승격했다가, 조선시대에 면천군이 되어 22개 면을 거느렸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이 61세 환갑의 나이(1797년)에 군수로 부임해온 곳도 여기다. 현재 군청이 있는 당진읍은 그때는 한 단계 아래인 현에 지나지 않았다.

    옛 명성에 견주면 오늘의 면천은 너무나 초라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다. 옛일을 돌이켜볼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향교와 무너진 성터뿐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아버지 전기 ‘과정록’에는 그 향교와 성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성 동쪽에 향교 앞에 버려진 연못이 있었다. 사방 100보쯤 됐는데 황폐해진 지 여러 해 되어 물을 가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백성들을 모아 연못을 준설하여 도랑물이 그 속으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이에 물이 가득 고여 넘실거렸으며,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았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6각의 초정(草亭)을 세워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초정은 없어졌지만, 그 연못은 아직 남아 있다. 향교로 들어가는 길을 넓히려고 물을 다 빼버렸지만, 길 안내를 한 면천면장 고경수씨는 연못에 물을 새롭게 가두고 둘레로 산책로를 만들 예정이라 했다. 그곳에 박지원의 옛일을 상기시키는 작은 팻말 하나쯤 서 있어도 좋을 성싶다.

    박승규씨가 운영하는 면천 두견주 제조장(041-356-4555)은 면천초등학교 뒤편에 있다.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양조장을 향하는 길가에 보호각을 쓰고 있는 우물이 있다. 예전 면천 읍성 안에 있었다 하여 안샘이라고 부르는 오래 된 우물이다. 이 우물에 두견주 탄생 전설이 서려 있다.

    마한시대부터 헤아려 근 2000년의 면천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은 면천 복씨의 시조인 복지겸이다. 복지겸은 궁예 밑에서 마군 장군(馬軍將軍)으로 있다가, 궁예가 민심을 잃자 신숭겸, 배현경, 홍유 등과 함께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그 복지겸이 큰병이 들었는데 어떤 명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그 당시 복지겸에게는 12세였다고도 하고 17세였다고도 하는 딸 영랑이 있었다. 영랑은 면천 마을 뒷산 아미산에 올라가 아버지의 병을 낮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100일 동안 기도를 올렸는데, 마지막 날 밤 꿈에 계시를 받았다. 아미산 진달래꽃을 따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 물로 빚어 아버지께 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 정성껏 기도하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영랑은 그 말대로 술을 빚었고 그 술을 마신 아버지는 건강을 되찾았다. 그 소문이 퍼져 면천 두견주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때 심은 은행나무는 근 1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높이 자라 면천을 굽어보고 있다.

    면천 두견주를 담그려면, 우선 찹쌀을 문드러질 만큼 푹 삶는다. 밥을 식힌 다음 안샘 물로 누룩 가루와 함께 버무린다. 항아리에 담아 5일이 지나면 밑술이 완성된다. 그리고 찹쌀 1말, 누룩 2되, 물 5되, 진달래 1되 3홉의 비율로 밑술에 부어 덧술을 만든다. 50일 가량 발효시킨 뒤에 압착기로 걸러낸다. 여과된 술을 다시 20일 간 숙성시키면 술 맛이 부드러워진다. 마지막으로 살균 처리하여 출고한다. 620㎖ 한 병에 소비자가격으로 1만원이니 우리나라 최고의 곡주치곤 그다지 비싼 값이 아니다.

    두견주는 진달래의 작용으로 담황색의 붉은 기운이 돈다. 도수는 19도로 곡주 중에서 가장 높다. 순 찹쌀에 진달래까지 가담했으니 술이 진하고 달콤해서 서너 잔에 갈증이 일 정도인데, 이럴 땐 떡이라도 한 조각 집어 먹어야 제격이다.

    두견주 석 잔에 5리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은근하게 취한다는 면천 두견주에 입맛이 들면, 사시사철 진달래향에 잠길 수 있을 것이고, 사라진 면천의 천년 영화가 아름다운 영랑 전설과 함께 되살아올 것이다.

    6.변강쇠의 고향, 남원골 강쇠주

    찌는 여름날 고속도로를 탔다. 지리산이 멀지 않았다. 지리산 주변에 술도가가 여럿 있다. 무작정 한 곳에 전화를 걸었다. 강쇠주라는 좀 미심쩍은 술을 만드는 술도가였다. 오후 서너시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고, 약속은 쉽게 이뤄졌다.

    공교롭게 그곳도 주천면이었는데 영월군 주천면과는 한자가 달라, 남원군 주천면은 붉은주(朱)자에 내천(川)자를 쓴다. 지리산에서 황토물이 흘러 생긴 지명이었다. 춘향묘와 육모정이 있는 동네로 주천면사무소 맞은편에 사무실과 주조장이 있었다.

    강쇠주, 솔잎술, 오미자술, 지리산약술 해서 모두 4종류의 13도짜리 약주를 만들고 있는데, 시장 반응이 가장 좋은 것은 강쇠주라고 했다. 사무실에는 강쇠주 상자가 가득 있었다. 술집에서는 3000원씩 받는다는데 약주 300㎖가 3000원이면 놀랄 만큼 싼 가격이다. 강쇠의 성적 이미지를 상징한 술병을 살펴보니 출고가격이 1449원이었다.

    “이렇게 싸게 내서 뭐가 남습니까?”

    양해준 사장(48)에게 묻자, 빙긋이 웃다가 천천히 입을 뗀다.

    “단가를 낮춰야 맛보는 사람이 늘지 않겠습니까. 마진이 적더라도 공급량이 늘다보면 이익도 남고요.”

    낮은 가격으로 물량 공세를 펴는 좀 색다른 술도가였다. 민속주 회사들은 대체로 선물용을 겨냥한 도자기 포장과 고가(高價) 전략을 편다. 어차피 명절 때 많이 찾기 때문에, 그때를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 강쇠주는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직접 고객과 상대하는 전략을 택했고, 가격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었다.

    음식점에 술을 직접 내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유통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대리점들의 마진을 최대한 확보해 주어야 하고, 때에 따라 밀어넣기도 하고 끼워주기도 해야 한다.

    게다가 음식점 진열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판매되는 술값은 출고가의 두세 배 되는 것은 기본이다. 찾는 사람도 드문 약주는, 음식점 주인이 부르는 게 값인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저기 언론사의 히트 상품으로 선정된 백세주만 하더라도 음식점에 따라 1000원에서 2000원의 차이가 난다. 그런데 강쇠주는 3000원을 못박아 놓고 시작하니 그 기상이 대단했다.

    “이쪽에서는 백세주 시장을 위협하고 있는 술입니다.”

    말수가 적은 사장을 거드느라 영업부장이 하는 말이었다. 지난해 매출 1000억원을 올린 백세주를 경쟁자로 생각하다니, 그 또한 대단했다. 이 술도가는 1995년에 지리산약초주 제조공장을 인수했다.

    양해준 사장의 어머니가 술 빚는 솜씨가 좋았다고 한다. 양사장 어머니는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전라북도에서 음식솜씨로 상까지 받을 정도로 손맛이 좋은 분이었다. 그런 집안의 자신감이 양조장을 인수하여 술을 빚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물음을 던졌다.

    “술 이름을 강쇠주라고 한 것은 무슨 의도입니까? 혹시 주접스럽다는 평은 듣지 않는지요.”

    “처음에는 낯부끄러워 어떻게 파나 했죠. 그런데 거부감보다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성 담론에 익숙하잖아요. 그리고 이곳 남원 땅이 변강쇠의 고향이고, 특히 이 윗동네에 강쇠바위와 옥녀바위가 있어요. 그래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판소리에 나오는 변강쇠가 실제로 이 동네에 살았다니. 귀가 번쩍 띄었다.

    “강쇠바위라고요? 어디 있습니까?”

    아홉 마리의 용이 아홉계곡에서 내려와 노닐다가 승천했다는 용호구룡계곡에 있는데 안내할 만한 사람이 술 제조장에 있다고 했다. 술 빚는 법을 소개하러 온 공장장과 함께 제조장으로 향했다.

    술 제조장은 마을 안쪽에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빈 병을 자동벨트 위에 올리고, 술이 담긴 병을 박스에 담느라 분주했다. 공장장 염규만씨(42)는 청주를 만드는 백화산업을 거쳐 술 빚는 일만 10년째 하고 있는 기술자였다.

    강쇠주는 국순당에서 만들어 공급하는 개량누룩에 멥쌀 고두밥을 지어 밑술을 만든다. 발효 온도를 25도쯤 유지하고 하루가 지난 밑술에 고두밥을 다시 넣어 덧술을 만든다. 밑술 때 들어가는 고두밥과 덧술 때 들어가는 고두밥의 비율은 3대 7쯤 된다. 흰쌀이 둥둥 떠 있는 발효탱크에 기포가 부글부글 올라오고, 그 열기로 발효실은 후끈후끈했다.

    덧술에 고두밥을 넣는 젊은 직원에게 염규만씨는 고두밥이 뭉치지 않게 골고루 천천히 넣으라고 당부한다. 이렇게 덧술하고 나서 3일째에 달인 약재를 식혀서 넣는다. 약재는 음양곽, 오미자, 산수유, 하수오, 구기자, 산사, 솔잎, 감초, 박하를 포함한 12가지가 들어간다. 덧술을 15일 동안 발효시킨 뒤에, 5일 동안 저온 저장했다가 3단계에 걸쳐 정밀 여과한다. 그리고 병에 넣어 출고한다. 특별할 것이 없는 약주 제조 방법이다.

    술은 약재 냄새가 강하고 누룩 향도 센 편이었다. 강쇠주의 상업적인 전략은, 선물용 고급 약주가 아니라 쉽게 맛볼 수 있는 대중적인 약주기에 납득이 가는 맛과 향이었다. 쓰디쓴 희석식 소주를 대체하기에 충분한 도수와 향을 지니고 있었다.

    술도가에서 일하던 동네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강쇠바위로 향했다. 그런데 강쇠바위는 계곡으로 두 시간쯤 올라가야 하고, 씨녀바위는 계곡 초입에 있었다. 강쇠바위까지 가기에는 해가 너무 짧았다.

    씨녀바위는 용호구룡계곡의 제1곡에 해당하는 송력동(松瀝洞)에 있었다. 큰 바위에 가로막힌 물줄기가 바위 틈새로 가늘게 흘러나와 아래쪽 돌에 복잡한 홈을 새겨놓았다. 씨녀바위였다. 그 옆에는 아들 낳기를 비는 기자석(祈子石)도 있었다. 그 계곡물에 여자들이 머리 감고 목욕하면 화장한 듯 피부가 고와지고 득남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그곳의 음기가 세서 아랫마을 호경리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계곡 아래에는 돌성을 쌓고 소나무를 심어놓았다. 울창한 숲에 싸인 바위 계곡은 숨겨놓고 혼자서만 즐기고 싶을 정도로 은밀한 곳이었다. 이 계곡은 판소리 ‘변강쇠전’을 잘 불렀다는 국창 권삼득(1771∼1841년)이 소리를 닦던 곳이라고 하는데, 여름이면 어디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지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전주 이강주(梨薑酒)는 서울의 문배주와 안동 소주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증류 소주로 분류된다. 세법(稅法) 용어로 말하면, 이강주는 증류 소주에 약재를 침출시킨 리큐르다. 리큐르는 과일이나 약재에서 추출된 첨가물이 2% 이상 들어간 술을 통칭한다. 우리 용어로는 약소주(藥燒酒)라 부르면 적합할 것이다.

    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에서 군산 방향으로 2km쯤 가면 농림부에서 명인으로 지정한 이미주(梨米酒) 공장이 나오고, 바로 옆에 이강주 팻말이 보인다. 이강주 제조장은 큰길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데, 제조장 옆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술도가는 추석 선물용 술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이미 봄부터 시작한 추석준비라 했다.

    이강주는 세시풍속집인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 최고의 명주로 소개돼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술이다. 황해도와 전주 지방에서 빚어왔는데, 이는 이강주에 들어가는 울금이라는 독특한 재료 때문이다. 황금색이 도는 울금은, 인삼처럼 뿌리를 쓰는데 왕실에서 사람을 직접 내려보내서 재배를 관장할 정도로 귀한 약재였다.

    현재 이강주를 빚는 조정형씨(60)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 조씨인 그의 집안은 고조부가 무주부사를 지내고 조부가 군수를 지내서인지 집안에 손님이 많이 드나들었다.

    집안에서 술을 많이 빚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술이 이강주였다. 조정형씨는 어머니에게서 술 빚는 법을 배웠고, 전북대 농과대학에서 발효학을 전공하여 주조기술사 1급 자격을 지니고 있다.

    체구 작은 조정형씨는 예순 나이지만 아무리 봐도 마흔댓밖에 안 돼 보인다. 그 비결을 묻자, 은행에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술을 먹더라도 앞서 계산하고, 오후면 장구 치고, 일요일이면 등산 가고, 요즘은 컴퓨터까지 배운다고 했다. 가방에는 아예 꽹과리를 넣어 갖고 다녔다. 풍류를 아는 전주 사람다운 낙천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한번 쏟아진 말은 끝날 줄 모르고 술술 나온다. 기자를 많이 상대해본 솜씨인가 싶어서 말씀을 잘하신다고 하니, 요즘 신지식인으로 뽑혀서 수원 농림부 교육원에 가서 특강을 한다고 했다. 민속주로 성공한 사례, 술과 인생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는 자리라고 했다.

    그는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금주로 묶여 있던 시절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술을 찾아내고 그 제조 비법을 채록했다.

    지금이야 판매용만 아니면 맘껏 술을 빚을 수 있지만, 그가 전국을 누비던 80년대 초만 해도 술 제조는 불법 행위였다. 그러니 혹시 술 빚는 집을 아느냐고 물으면 형사나 되는 줄 알고 기피하고, 산길을 걸어 걸어 마을에 도착하면 간첩인 줄 알고 신고하는 궂은일을 당하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돌아와 채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술을 직접 빚어보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 2층에는 그때 담가본 술이 실험용 밀폐 용기에 담겨 있는데 200개가 넘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64년에 목포의 삼학소주 연구실장으로 입사했다. 삼학소주가 전국에서 제일 클 때였다. 그 회사가 78년에 망하자, 이리 보배소주 공장장으로 옮겼다. 보배 연구실 직원이 6명이었는데, 그중 3명을 민속주 연구에 투입했다. 직원들과 규장각을 뒤지면서 2년 동안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82년에 1차 답사를 다녔다. 회사에 사표를 내지 않은 상태에서 ‘도둑 출장’을 다녔다. 출장이 잦아지자 회사에서 눈치를 챘고, 질책을 받았다.

    그는 84년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우리 술의 실태를 파악하러 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살림이 어려워졌고, 86년에는 급기야 집까지 팔아치울 정도로 쪼들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궂은 소리를 자주 들었다.

    “소주 공장 공장장이면 최고 월급을 받았는데 기절초풍할 일일 거 아녀.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겄어. 아무 생각도 없었응께, 그저 신앙처럼 그러고 댕겼어. 술을 빚으면 마음이 편해져. 술을 하나 빚어 완성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고. 산을 정복하는 그런 기분으로 또 하나를 정복하고 세상이 다 내 것 같아 보이고, 그런 기분으로 했을 것이여.”

    87년에 제주도 한일소주 사장이 그의 형편을 듣고 공장책임자로 와 있으면서 기술 지도를 해달라고 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제주에서 일하면서 전국 답사를 통해서 알게 된 민속주를 빚어보았다.

    그는 제주도에 있다가 90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전주로 올라왔다. 술 제조 신규 면허를 1호로 받았다. 91년에 전세금 1500만원을 털어 큰집 텃밭에 솥을 걸고 술을 빚었다. 어찌 소문을 들었는지 그 해 여름 신세계백화점에서 선금으로 8000만원을 가져와선 술을 납품해달라고 했다. 부지런히 만들어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마디로 “신세계백화점에서 날렸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백화점에서도 선금을 들고 왔다. 그 돈으로 땅을 마련했다. 술이 모자라 중간상들이 술도가에 와서 자곤 했다.

    전주 이강주는 쉽게 자리를 잡았고, 지난해에는 45억원 매출에 2억원어치를 수출했다. 민속주 회사로서는 최고 매출이라고 조정형씨는 자랑한다.

    이강주는 우선 누룩으로 약주를 빚는다. 누룩과 백미를 1대 3의 비율로 밑술을 잡고 3일 동안 발효시킨다. 밑술에 누룩과 보리쌀을 1대 6의 비율로 덧술하고 4일 동안 발효시키면 15도짜리 약주가 만들어진다. 이 약주를 증류해 소주를 내리는데 현재 이강주 회사에서는 25도짜리를 만든다.

    추운 북쪽 지방의 소주인 문배주는 40도짜리가 표준이라면 남도의 소주인 이강주는 25도에서 30도가 표준이다. 25도 증류 소주에 배, 생강, 울금, 계피를 넣어 침출시키고 꿀을 넣으면 술이 거의 완성되는데 마지막으로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증류 소주는 6개월 이상 공기와 접촉하면서 익어야 한다. 물론 오래 될수록 알코올과 물이 잘 섞여 부드럽고 향긋한 술이 된다.

    침출시키는 재료 중에서 계피만 빼고 배, 생강, 울금은 모두 전주 지방에서 궁중에 올리던 귀한 것이었다. 재료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보리쌀과 울금이다. 덧술할 때 보리를 쓰는데, 쌀보다 향이 좋기 때문이다. 울금은 습관성이 없는 신경안정제 기능을 한다. 음양을 고루 지니고 있어서 혈압이 높으면 내려주고 낮으면 높여준다. 요즘은 중국산을 쓰는데, 열대 지방에 자생하기 때문에 구하기는 쉽다. 중국에서도 술과 음식에 많이 썼는데, 조선 왕실에서는 양념으로 썼다고 한다.

    그럼 이강주는 향과 맛이 어떤가? 병마개를 따서 코를 들이대면,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향이 나다가 이내 자극적인 향이 뒤따른다. 앞선 것은 배향이고 뒤따르는 것은 계피와 생강에서 우러난 향으로 여겨진다.

    한 모금 입술을 적시면 톡 쏘는 소주 맛에, 복잡한 향이 입안 가득 번진다. 술에 녹은 생강과 계피의 매콤한 맛이다. 이렇게 자극적인 향과 맛은 다른 술에서 맛볼 수 없은 이강주만의 독특함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전통술 중에 가장 강렬한 향과 맛을 지녔으리라 여겨진다.

    보통 증류주는 증류된 상태에서 숙성 기간만 거치기에 향이 부드러워진다. 약주는 20도 이하여서 향을 강하게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강주는 증류한 25도 술에다 생강과 계피를 넣으니 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강주를 처음 먹어본 사람은 맛과 향이 무척 낯설면서도 인상적일 것이다. 훈련이 필요한 술인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벗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700㎖짜리가 14000원에 출고된다(문의 063-212-5765). 백화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8.땅끝에서 맛본 우리 조상의 참술, 해남 진양주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에는 두 개의 민속주가 있다. 해남군의 진양주(眞釀酒)와 진도군의 홍주(紅酒)다. 진양주는 발효한 약주고, 홍주는 증류한 소주다. 홍주는 문화재로 지정된 허화자씨 외에 대량으로 빚는 회사가 있어서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 견주면 진양주는 아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

    월출산을 뒤로 하고 해남읍으로 향하다보면 서해 쪽에 해남군 계곡면 덕정리가 있다. 흑석산이 멀리 보이고 넓은 논밭이 펼쳐진 마을이다. 모두 50여 호가 사는데, 45호가 장흥 임씨인 동족촌이다. 진양주 제조장을 물어 물어 찾아가니, 덕정리 한가운데 있는 민가였다. 대문 앞에는 사적지에서나 볼 수 있는 문화재 안내표지판이 서 있었다.

    “진양주는 조선 헌종 때 어주(御酒)를 빚던 궁녀가 영암군 덕진의 광산 김씨 집안에 시집오면서 민간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뒤 계곡 임씨 집안으로 시집온 덕진의 광산 김씨에 의해 임씨 집안에 전해지게 됐다.”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남도 특유의 일자식 한옥이 넓은 마당을 거느리고 있었다. 시멘트로 포장한 마당 건너편 정원에는 동백, 팔손이, 모과, 모란, 홍도화, 침향나무가 있고 석류꽃이 한창이었다. 바깥주인은 보리 수매하러 나가고, 문화재로 지정된 안주인 최옥림씨는 귀가 아파 광주 병원에 가고, 서울서 내려온 친정아버지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따로 일꾼을 두지 않고 술을 빚었고, 술 제조장도 부엌과 문간방을 개조한 상태였다.

    보리 수매가 잘못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최옥림씨(60)와 퇴짜를 맞은 보리를 다시 건조하여 수매를 마친 바깥주인 임종모씨(64)가 돌아오고서야 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93년 10월이었고, 인정서를 받은 건 1994년 1월이었다. 임종모씨는 80년대 중반에 문배주와 두견주, 경주교동법주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어떻게 하면 우리 집 어른들이 마시던 술도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을까 고심하다 해마다 한 말씩 술을 빚어 해남읍에 나가 기관장들을 초대하여 시음회를 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공을 들여 마침내 홍주보다 먼저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다.

    임종모씨가 80년대 중반에 작고한 아버지 임영희씨(당시 87세)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는 대문 앞 안내판 내용보다 좀더 상세하다.

    조선 헌종 때의 광산 김씨 어른은 사간원 벼슬을 한 김권으로, 궁궐에서 술을 빚다가 나이 들어 민가로 내려온 궁녀를 소실로 맞아들였다. 최씨 할머니라고 전해오는 궁녀는 남편을 위해 정성 들여 술을 빚었고, 그이의 손녀인 광산 김씨는 할머니로부터 술 빚는 법을 배워 덕정리의 장흥 임씨에게 시집왔다. 광산 김씨 부인은 영암의 친정에 갈 때면 덕정리 샘물로 진양주를 빚어 갔는데, 친정에서 그 술이 더 맛있다고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광산 김씨 부인은 임종모씨의 4대조니, 진양주는 최씨 할머니로부터 시작하면 영암과 해남에 걸쳐 6대째 전해오는 가양주다. 진미(眞米)라고 부르는 찹쌀로만 빚은 술이라 하여 진양주(眞釀酒)라 불렀다고 한다. 이 술이 인근에 소문이 나자 덕정리에서만 10여 호가 술을 빚어 팔기도 했다. 임씨 동족촌이니 모두가 술을 빚을 줄 아는데, 지금은 임종모씨 집에서만 빚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뒤로 술을 찾는 사람이 생겨 페트병에 술을 담아 팔았는데, 한번은 세무서에서 나와 탈세라며 모두 수거해 가버렸다. 순진한 임종모씨는 문화재 지원금도 받으니 술은 담가야겠고, 술을 담그니 찾는 사람이 생겨 팔았을 뿐인데 이게 법적으로 소란을 빚게 될 줄은 몰랐다며 그때 고생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얼마 후 술 제조 허가를 내고 진양주 상표 등록을 하려 했더니, 이번에는 서울의 누군가가 이미 등록을 해둔 상태였다. 실제 술을 빚지 않는 사람이 술 명칭만 등록해놓은지라 재판을 거쳐 지난 여름에야 간신히 진양주 상표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 진양주가 공식적으로 유통된 것은 1년밖에 안 된다. 더욱이 해남 덕정리 임종모씨 집에서만 팔고 있으니, 진양주 맛을 본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다.

    임종모씨는 문화재로 지정받은 것에 만족할 뿐 술을 빚어 팔 생각은 없었다. 선조가 드시던 것을 명주로 인정받았으니 그에 만족하지 따로 돈 벌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화 주문이 오고 또 술 맛은 이어가야겠고 해서, 여과기를 한 대 들여놓고 명절 때 팔 만큼만 빚고 있다. 살균기를 따로 들이지 않아서, 70도의 뜨거운 물에 술병을 담그는 방법으로 살균한다.

    진양주는 누룩과 찹쌀과 물로 빚는다. 임종모씨는 1800평 논에서 직접 재배한 찹쌀을 재료로 쓴다. 누룩은 탁약주협회에서 사다 쓴다. 물은 덕정리 우물물을 쓰는데 바닷가라서 약간 짠맛이 돈다. 이 짠 물이 진양주의 비결이라고 한다.

    덕정리에는 우물이 하나뿐이었다. 덕정리(德鼎里)는 솥으로 큰 덕을 베푸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마을이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다른 우물을 파지 못하게 했다. 솥에 구멍이 나면 마을이 쪼들리게 되니, 하나 있는 우물로 밥도 짓고 술도 빚고 얼굴도 씻었다.

    진양주는 찹쌀 10되로 술 10되를 빚을 정도로 진한 술이다. 밑술을 담글 때 찹쌀 고두밥을 찌지 않고 죽을 쒀서 넣는다. 발효가 쉽게 빨리 되도록 하려는 특별한 배려다. 죽을 쑨 찹쌀 1되에 누룩 2되를 넣고 항아리에 담아 4일 간 발효시킨다. 이때 온도는 20도 이상을 유지한다. 밑술이 완성되면 찹쌀 9되로 고두밥을 지어 식힌 뒤 물과 함께 넣는다. 물은 찹쌀 분량과 거의 같게 하여, 찹쌀 10되로 술 10되가 나오도록 한다. 덧술을 하고 나서 7일 동안 발효시킨다. 그 다음에 용수를 박고 2일이 지나면 맑은 술을 뜰 수 있다.

    남부 지방의 곡주라 빠르면 15일, 더디면 20일 만에 완성되기에 예전에는 보름술이라고도 불렀다. 따뜻한 지방이라 약간 높은 온도에서 발효시키다 보니, 술이 빨리 빚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최옥림씨의 시어머니는 맷돌에 간 밀로 누룩을 띄웠다. 처음 갈 때 나오는 밀가루는 먹고, 중간에 나오는 밀기울인 ‘조명가리’로 진양주를 빚고 나중에 나오는 밀 껍질로는 막걸리를 빚었다고 한다.

    구린내가 난다 하여 누룩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향이 강한 누룩은 좋은 술을 못 빚는다. 누룩향이 은근하게 풍겨나야 한다.

    누룩을 많이 넣으면 발효가 잘되어, 숙성 기간도 짧고 도수도 높게 나온다. 술을 망칠 염려가 적지만, 구린 누룩 냄새가 강하게 난다. 누룩을 적게 쓰면 발효가 더디고 술을 망치기 쉽다. 그만큼 숙성 기간는 길고, 숙성 온도는 낮아야 하며, 세심한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 누룩을 적게 쓰고 100일 동안 숙성시키는 소곡주가 명주인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누룩을 적게 쓰고 도수를 높인 술이라야 명주 자격이 있는 셈이다.

    진양주도 누룩을 적게 쓴다. 보통 약주들이 누룩을 전체 재료의 20% 정도 쓰는데, 진양주는 10% 정도 쓴다. 그래서 술 만들기가 까다롭다. 최옥림씨는 발효가 잘못돼 아까운 쌀을 많이 버렸다고 했다.

    정원에 나팔 모양으로 피어난 주홍색 석류꽃을 바라보며, 바깥주인과 진양주를 마실 수 있었다. 술 맛이 단 것이 감주(甘酒)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입술에 처음 닿았을 때의 그 단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는 시원한 느낌으로 변해 목이 타지는 않았다. “음료수라 생각하고 마시면, 아무리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한두 잔씩은 합니다”라는 바깥주인의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달콤하고 고소했다.

    하지만 이도 예전 최옥림씨의 시어머니가 만들던 술보다는 훨씬 덜 달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찹쌀 10되에 술을 5되밖에 빼지 않았다. 지금의 절반 정도니 훨씬 당도가 높았다. 상에 엎질러진 술이 굳어서 엿처럼 떨어졌다고 한다. 이 단맛을 지우려고 그랬는지, 예전에 집안 어른들은 반드시 놋잔에다가 술을 마셨다고 했다. 놋잔의 놋내로 단맛을 덜 나게 하려 했을 것이라고 바깥주인은 해석한다. 안주로는 생선회와 홍어가 좋다는데, 입에 딱딱 달라붙는다고 한다.

    운전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하지만, 단술에 끌려 몇 잔 더 마셨다. 한약재가 잔뜩 들어간 약주들만 맛보다가, 누룩과 찹쌀로만 빚어진 술을 마시니 반갑기 그지 없어서였다. 손수 지은 찹쌀로 술을 빚는 임씨 부부의 그을린 얼굴을 보니, 진짜 우리 조상들이 마신 술이 이와 같았으리라는 믿음도 절로 일었다.

    진양주를 맛보려면 택배 주문(061-532-5745)을 할 수 있다. 700㎖ 두 병에 1만7000원 하고 택배 비용이 5000원이다. 700㎖ 한 병에 8500원을 받는 셈이니 술값이 싼 편이다. 손수 찹쌀 농사를 지으니, 찹쌀 원가를 제대로 계산하지 않는 것도 있고, 또 인근 사람들이 사 먹는 술이라 높이 책정하지도 않았다.

    임종모씨는 이제 상표 등록한 지 1년이 되었는데 명주로 인정받은 것에 만족해야 할지, 수요를 쫓아 생산량을 늘려야 할지 아직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어느 길을 가든 조상 대대로 먹어온 술 맛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오래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도 포천군엔 2개의 국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의정부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포천읍을 거쳐 산정호수까지 올라갔다가, 백운계곡에서 47번 국도를 타고 베어스타운을 거쳐 구리시 퇴계원까지 내려오면 포천군을 일별(一瞥)하는 셈이다.

    포천군은 산과 산 사이 계곡으로 난 국도를 따라 촌락이 발달했다. 촌락이라기보다는 음식점이 발달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텐데, 47번 국도변에는 전봇대보다도 갈비집이 더 많다.

    포천군의 동쪽 경계선을 이루는 지형은 광주(廣州)산맥이다. 서울 근교 산으로 하루 안에 다녀오기 좋은 광덕산(1046m) 백운산(937m) 국망봉(1168m) 강씨봉(830m) 청계산(849m) 운악산(936m) 등이 포천군에 있는데, 모두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광주산맥의 연봉(連峰)들이다. 이 높은 산봉우리들이 깊은 계곡을 이루고, 맑은 물을 흘려보낸다. 포천 막걸리 맛이 좋은 이유도 이런 멧부리가 흘려 보낸 물 때문이다.

    “포천은 물이 많고 좋습니다. 조금만 파들어가도 포천석이라는 화강암층이 나타납니다. 암반층으로 50m만 내려가면 청정한 물을 얻을 수 있으니, 술 맛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계산 기슭에서 일동막걸리를 빚는 일동주조 대표 이동한씨의 말이다. 포도주나 배술처럼 과일즙만으로 빚는 술이 아니라면, 모든 술은 물맛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욱이 제조 방법이 비슷한 막걸리는 물맛이 품질을 좌우한다.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에 가입된 막걸리 회사는 전국에 996개가 있는데, 판매 지역이 할당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대도시의 막걸리 회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규모가 영세하다. 시쳇말로 아버지와 아들과 며느리가 하는 게 막걸리 회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내년 1월이면 지역 할당제, 곧 지역 제한이 풀려 막걸리 시장은 무한 경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극심한 도태가 이뤄지고 거대한 막걸리 회사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포천에는 막걸리 회사가 5군데 있는데, 규모들이 제법 크다. 모두들 울창한 산을 하나씩 끼고 있다. 백운산 아래 이동막걸리, 청계산 아래 일동막걸리, 수원산 아래 포천막걸리, 국망봉 아래 포천왕가막걸리, 주금산 아래 내촌막걸리 제조 회사가 있다. 대부분의 제조 회사들이 자동화 설비를 갖췄고, 다양한 약주도 개발하고 있다.

    포천 막걸리의 명성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수요가 많아 사업 규모도 큰 편이다. 이미 포천의 이동막걸리와 일동막걸리는 인천 농주와 더불어 일본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

    포천 막걸리는 포천을 찾는 관광객 덕을 크게 봤다. 산정호수나 백운계곡으로 놀러와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나서, 일동 유황온천 단지에서 온천욕 하고, 푸짐한 이동갈비를 실컷 먹고 돌아가는 여정은 관광버스를 대절한 아줌마 유람단의 완벽한 관광상품이다. 이 일정에 걸쭉한 포천 막걸리 생주 한 잔을 걸치고, 두어 병씩 사 가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막걸리에는 유통기간이 5일밖에 안 되는 생주(生酒)가 있고, 6개월인 살균주(殺菌酒)가 있다. 예부터 마셔오던 막걸리는 모두 생주였다. 유통 기간을 길게 하려고 마지막 단계에 효모를 죽이고 탄산가스를 주입하면 살균주가 된다. 생주에 비교하면 살균주는 청량감이 떨어지고 맛도 못하지만, 혹자는 술맛이 부드럽고 트림이 덜 나서 좋다고 말한다.

    요사이 대도시에서 구경할 수 있는 포천 막걸리는 살균주다. 생주는 지역할당제에 묶여 포천에서만 판매되니, 포천에 온 김에 막걸리 한 잔 걸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막걸리는 가장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술로 제조에 10일 가량 걸린다. 밀기울로 누룩을 띄우면 시간이 많이 들기에, 막걸리 회사들은 에스퍼즐러스 가와찌라는 하얀 곰팡이를, 잘 쪄낸 밀가루에 강제로 이식해서 2일 만에 만들어낸다. 이 누룩에 물을 잡고 효모균을 섞어 4일 동안 발효시키면 밑술이 된다. 밑술에 물을 붓고 멥쌀 고두밥을 넣어 4일 동안 숙성시키면 쌀막걸리가 된다. 이때 멥쌀 대신 밀을 넣으면 밀막걸리가 된다.

    숙성중인 막걸리독을 들여다보면, 마치 물이 끓고 있는 듯하다. 뜨겁지도 않은데 기포가 요란하게 솟구치는 게, 물 속에 불이라도 담긴 듯하다. 그래서 ‘수불’이란 말이 생겨 술의 어원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꼭 쌀막걸리가 고급이고 밀막걸리가 저급은 아니다. 밀이 어느 정도 들어간 막걸리라야 숙성도 잘되고 맛도 부드럽다. 그래서 쌀막걸리라고 부르는 것들도 자세히 보면, 밀가루가 20%에서 50% 가량 섞여 있다.

    포천 막걸리가 유명해진 것은 60년대 이후다. 1964년부터 군부대에 일동막걸리와 이동막걸리가 납품되었다. 탱크차에 술을 싣고 영내 PX의 항아리에 담아 주면, 그곳에서 군인들에게 한 말이나 한 주전자씩 팔았다. 고된 훈련 끝이면 싸구려 담배 한 개비도 달콤한데, 막걸리 한 사발이라니 얼마나 달콤했겠는가. 군부대가 많은 포천에서 훈련받고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나이들이, 그 시절 그 술맛을 못 잊어서 다시 찾게 된 술이 포천 막걸리라고 한다.

    10.벤처기업 배상면주가의 전통술

    전라남도 담양, 정철의 송강정이 가까운 시골 찻집에서 배상면주가의 벽보를 본 적이 있다. 그 벽보 한 장 붙이기가 얼마나 어렵고 번거로운가는 영업을 해본 사람들은 잘 안다. 창업한 지 4년밖에 안 되는 전통술 제조회사 배상면주가의 배영호 사장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는 40대 초반이고 백세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국순당 창업자 배상면씨의 아들로 아버지 이름을 걸고 술도가를 만든 사람이다. 그리고 그 술도가는 술은 물론이고 ‘전통’자가 붙은 사업장으로는 처음으로 산업은행 캐피탈과 아시아벤처금융에서 출자한 세칭 벤처기업이었다.

    그를 만난 곳은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차병원 옆에 있는 ‘배상면주가’였다. 고객과 직접 만나는 전통술 전문 음식점인데, 그는 경기도 포천에 배상면주가 술 제조장을 가지고 있다.

    전통술 전문점의 너른 앞마당엔 마루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멍석과 평상을 놓아 야외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게 했다. 솟을대문을 연상시킬 만큼 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직선을 많이 살린 실내가 단아하고 정갈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한쪽 벽면엔 배상면주가에서 만든 술과 안주가 전시되어 있었다.

    사시사철 맛볼 수 있는 산사춘, 백하주, 활인18품, 천대홍주, 흑미주가 있고 계절마다 맛볼 수 있는 냉이주, 매실주, 국화주, 도소주 등이 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술과 칵테일도 개발하여 고객들이 우리 술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계산대 위엔 손때 묻은 함지가 있고, 오지 그릇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배상면주가 사장 배영호씨는 튼실한 체격에 세련된 안경을 낀, 사업가였다. 습기가 가득해 곰팡내가 가시지 않는 술도가 사람 같아 보이질 않았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79학번인 배영호씨는 군을 제대한 뒤 곧바로 아버지가 운영하는 강릉 주조장에 들어가서 일했다. 주조장을 수원으로 옮겨 국순당이라는 새 이름을 달기까지 근 11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그리고 1996년에 자신이 소유한 국순당 주식을 모두 팔아 배상면주가를 만들었다.

    2층 조용한 곳으로 옮겨 인터뷰를 시작했다. 젊은 전통술 제조자의 포부 속에서 우리 술의 위상을 감지해보기 위해서였다.

    ―대중의 입에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오르내리게 만드는 데 따른 고민이 적잖았을 텐데요. 아버지 이름을 회사명으로 삼은 것은 누구의 판단입니까?

    “제가 결정하고 아버님께 허락을 받은 거죠.”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배수진을 친 거죠. 사기 못 칠 것이고, 실패하면 안 되고, 꼭 이긴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면 죽는다는 각오에서였죠.”

    이렇게 말하면서 배사장은 한 발 물러선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해도 제대로 실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각오가 젊은 사장답다.

    현재 국순당은 배영호씨의 형인 배중호씨가 맡고 있다. 혹시 형제간에 불편해서 뛰쳐나온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왜 잘나가는 국순당에서 나왔습니까? 그 안에서도 다른 술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요.

    “패러다임이 다른 거죠. 한 가지 술에 집중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유통 과정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없어지겠다는 우려가 들더라고요, 매취순처럼. 내가 추구하는 것은 국순당과 다른 방식입니다. 술은 곧 문화입니다. 앞으로는 결코 천편일률적인 술은 마시지 않을 것이다, 다양하게 디자인된 술을 마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옛날 집집마다 담근 술맛이 달랐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국순당 하나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도 했고요. 국순당은 그 스타일로 성공하고, 나는 내 스타일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성공 사례가 네다섯 개 생겨나야 전통술이 산업으로, 문화로 자리잡을 겁니다.”

    ―지난해 일간지에 배상면주 광고를 하시면서 ‘전통술의 상식을 깨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전통술이 영 망가졌다가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죠. 나는 전통술이기 때문에 꼭 되살려야겠다는 개념보다는 우선 좋은 술을 빚고 그것을 사업화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민속주가 할아버지 때부터 빚어서 전통을 잇는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것과 달라요. 첫째 과학화되고 그 자체가 상품성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이건 전략적인 수단인데 예컨대 아이스크림술이나 칵테일을 개발합니다. 예전에 없던 것을 왜 하느냐면 요즘 사람들은 전통술에 별다른 호감을 안 가지고 있거든요. 환상만 가지고 있지. 사 먹겠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고개를 젓죠. 그러다가 ‘몰라, 선물 주면 먹어볼까?’ 그런단 말이죠. 그런 것을 깨야겠다는 생각이죠. 전통술이 생활 속에 있게 하겠다는 게 제 두 번째 목표예요. 제품 개발 단계에서부터 마케팅 전반에 그 원칙을 적용하려고 하죠,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오래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고객만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세 번째는 과연 이게 세계적인 상품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세계적 상품이 되어야 국내에서도 경쟁력이 있어요. 그런 가능성을 두들겨보고 그런 상품성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기자는 뭐가 한국 전통술이라고 보십니까?”

    자신의 목표를 조목조목 밝히더니, 배영호씨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술을 많이 맛보지 못해서 자격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누룩 맛이 아닐까 합니다. 누룩 맛을 지우려고 약재를 넣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 냄새를 싫어한다면서요. 그런데 된장이나 청국장 냄새가 싫다고 그 냄새를 지워버리면 된장이나 청국장이 될 수 없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누룩 냄새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조상들도 그랬을 테니까요. 그 냄새에 애착을 갖도록 소비자를 길들여야 하는데, 소비자의 취향에 너무 끌려가서 약재를 넣는 게 아닌가 싶어 아쉽더라고요. 해남에서 약재를 전혀 넣지 않은 찹쌀 누룩술을 맛보고 반가웠어요. 약재 냄새가 강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먹은 맛은 아닐 텐데 하는 혐의를 두고 있었거든요.”

    “맞는 얘기예요.”

    기자의 형편을 헤아려서인지 배영호씨는 선뜻 동의한다.

    “누룩이라는 게 한국 술의 강점이자 약점이고 그래요. 강한 개성은 강점도 되고 약점도 되잖아요. 그런데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업하기로 한 사람은 철저히 공업화할 필요가 있죠. 가양주(家釀酒) 형태를 원하는 사람은 수공의 원칙을 잘 지키고요. 그래야 양쪽 다 삽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어설퍼요. 공업화하는 사람은 가공 기술을 갖추고 철저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쉽게 접근해서 실패하면 법 탓으로 돌려요. 또 가양주를 빚다가 사람들이 좋다 하면 공업화하려고 해요. 대충 키우려든단 말이죠. 나는 철저하게 사업계획을 잡고 대량 생산으로 가든가 소량 생산으로 도도하게 가든가 해야 한다고 봅니다.

    독일이나 일본은 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중국에 소흥주라는 약주가 있습니다. 누룩을 많이 넣고 오래 숙성시켜서 흙 냄새가 납니다. 거부 반응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중국 문화를 아는 인텔리들은 따뜻하게 데워서 각설탕을 술에 넣어 녹여가면서 먹어요. 소흥주는 훈련을 받아야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 술의 고유한 맛을 느끼려면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먹었다면 훈련이 필요 없는데, 한번 단절되었다가 새롭게 익숙해지려니 훈련이 필요합니다. 공부해서 대학 가는 것도 아니니 억지로 해서는 안 되고, 친근한 맛에서 시작해서 전문적인 술 맛으로 끌어올려야죠. 그것은 술 빚는 전문가 몫이지, 소비자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죠. 예를 들어 누룩 향이 강하면 한약재를 넣을 수 있고, 누룩 품질을 높여 향이 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 겁니다. 아직 그런 노력이 부족하다고 보는 거죠.”

    ―이번엔 제가 여쭤보고 싶은데요, 한국 술의 차별성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 전문가이기에 쉽게 대답을 못합니다. 굉장히 여러 가지를 생각하죠. 우선 우리 술은 아주 달고 셔요. 그것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굉장히 달면서도 지겹지 않은 술이 있어요. 1935년에 발간된 ‘조선 주조사’가 있어요. 1907년에 일본이 해군 군의관들을 풀어서 우리 술을 조사한 책이죠. 조선 술은 자기네와 다르게 새콤달콤한 게 특징이라는 말이 나와요. 우리는 오미(五味)가 가미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마도 새콤달콤하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진 것을 이상으로 삼았을 겁니다. 요즘처럼 드라이한 술은 좋은 술이 아니었죠.

    그리고 우리는 술을 음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먹는다고 표현하죠. 음식 관련 고서를 보면 제목에 주(酒)자가 들어가요. 심지어 술 빚는 법에 관한 책을 보면 절반은 음식 만드는 거고 절반은 술 빚는 거죠. 음식의 정수를 술로 보는 거죠. 술 역시 부엌에서 빚으니까요. 조선조를 통틀어 공식적 합법적으로 술을 빚어 파는 곳이 없었어요.”

    ―그럼 조선 시대까지는 주세가 없었나요?

    “합법적인 양조장이 없었으니 그랬죠. 조선 말에 와서 공덕리 소주니 해서 서울 공덕동에서 수백 호가 소주를 전문으로 팔기도 했는데, 국가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죠. 만들어 파는 상품이 아니고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이죠. 술에 대한 태도나 생각이 외국과 다른 거죠. 그것을 잊어버리니 혼선이 생겨요. 그리고 한국 술의 놀라운 특징 중 하나가 다양성입니다. 원료나 제조 방법 따위가 음식을 다루는 것과 같아요. 일본 음식은 신선도를 중요하게 여겨 간편하게 조리하죠. 중국 음식은 재료와 가짓수는 많아도 조리법은 주로 볶고 튀기는 겁니다. 우리는 나물 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조리법이 아주 다양해요. 그 복잡한 조리법을 닮아 술도 다양합니다.”

    ―배상면주가의 술은 누룩술들인데 민속주라고는 표현하지 않나요?

    “민속주, 아니지요. 우리는 전통술이라고 표현하죠. 민속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게 야나기 무네요시 영향일 텐데, 그 표현이 맘에 안 들어요. 우리 농림부에서 우리 술의 국제명을 뭐라 하신 줄 아십니까? Korea Traditional Rice Wine이라고 표기해요. 바보 같은 짓이에요. 영문으로 SUL이라고 하면 돼요. Korea Traditi- onal Rice Wine이라고 해도 감잡는 외국인은 없으니까요.”

    ―배상면주가에서 만든 흑미주가 경기명주로 지정된 적이 있는데, 무형문화재 지정이나 농림부의 명인 지정을 받으려고 한 적은 없나요?

    “에피소드가 있는데, 누가 한번 받아보라고 하더라고요. 서류 해서 냈어요. 그랬더니 관청에서 ‘이렇게 써 오면 어떡해요? 5대조 할머니부터 이렇게 이렇게 빚던 술이라고 써 오세요.’ 그래서 회장님께 말씀했더니 ‘야, 관둬라’ 그러시더라고요. 코미딥니다.”

    배영호씨의 얘기를 듣노라니 이번 취재 과정에 겪은 언짢은 일이 생각났다. 증류 소주를 내릴 때 과실을 넣는다는 한 특별한 술도가를 찾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술도가의 주인은 “그 과실이 무슨 맛을 내느냐” “어떻게 술을 빚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을 왜 묻느냐”며 대답을 피했다. 술의 내력에 대해서는 삼국시대에 먹던 술이라는 말도 나오고, 임금이 먹던 술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구전돼왔다지만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이 술도가에서 만든 술의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없던 것이었다. 다만 이 지방에서 만드니 이 지방에서 살았던 조선 사람이나 고려 사람도 비슷한 술을 먹지 않았겠느냐는 식이었다.

    자료랍시고 내놓은 것은 나라에서 받은 상장과 농림부 장관이 수여한 전통식품 명인지정서 복사본이었다. 자기 홍보에 도움될 것은 슬쩍 끌어들여 제것으로 삼고, 관청에서 내린 상장은 무슨 자격증이라도 되는 듯 앞장세우는 버릇이었다. 제법 장사를 하는 술도가인데도, 굳이 그렇게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소비자들에게 호소할 매력이 많은데도, 자신을 치장하려는 데 급급했다. 또 조금만 자세히 물으면 얼굴을 붉히며 “지금 우릴 도와주러 왔느냐 해코지하러 왔느냐”고 반문한다. 결국 더는 취재할 수 없었다.

    이런 어설픈 사기가 통하지 않도록 소비자들에게는 술 마시는 지혜가 필요하다. 폭탄주에, 폭음에, 속이 뒤집힐 정도로 마셔대고 정신을 놓아버리는 술자리가 아니라, 입안에서 온갖 맛과 향을 음미하면서 은근하게 취하고 마음을 넉넉히 풀어놓을 수 있는 술문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화학약품을 털어넣는 듯한 희석식 소주나 많이 마셔야 취기가 도는 맥주, 룸살롱에 가야 마시는 양주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누룩으로 빚어 음식과 함께 들었던 약주나 증류 소주에 입맛을 들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유유자적 술을 벗하며 풍류를 즐기던 조상들의 술문화도 회복될 것이고, 얄팍한 상혼으로 자신을 위장하려는 술도가도 맥을 못 출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깐 젖어 있는 사이 배사장이 올 여름에 담근 술이라며 매실주 한 잔을 시켜 낸다. 나는 벌써 매실주를 담갔냐고 물었다. 소주에 담아 90일 이상 숙성해야 되는 걸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상면주가에서 만든 매실주는 발효주였다. 누룩에 쌀과 매실을 넣고 7일 동안 발효시키고 한달 간 숙성시켰다.

    한 모금 마셔보니 주정으로 담근 매실주보다 훨씬 부드럽고, 매실의 신 향도 느껴져 입안에 침이 절로 괸다. 14도인데 매실 향 때문인지 도수도 약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살균하지 않은 생주(生酒)다. 그래서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술이란다. 술 맛에 끌리니, 술 빚는 사람에게도 절로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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