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순직 전의원이 회고록을 펴냈다. 제목은 ‘大義는 권력을 이긴다’ 3선개헌을 강행하는 박정희와의 대립, 분노의 정치인 JP의 처세술, 머리좋은 정치인 DJ의 계산, 권력과 재력을 한손에 넣으려 했던 정주영의 야망 등 회고록에는 생생한 현대사 비화가 가득하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김종필은 이미 공주중학 시절에도 특별한 소년이었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리더십도 있어서 스트라이크를 주도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홀로 해군정군운동을 벌이던 어느 날 지금의 무교동 서린호텔 옆을 지나가는데 눈에 익은 얼굴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김종필 중령이었다.
그는 시청 방면으로 걸어가다가 나를 발견하곤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당시 그가 중심이 되어 벌인 정군운동에 대해서 신문을 보고 대략은 알고 있었다. 후배를 서울 거리에서 만난 것 외에도 정군운동에 대한 일치감 때문에 그가 더욱 반가웠다. 김중령이 먼저 내 소매를 끌었다.
다방에서 마주한 후 김종필 중령이 내게 근황을 물었다.
“요즘 나는 썩은 해군을 바로잡기 위해 혼자 투쟁하고 있지.”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해군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양선배, 우리 육군도 8기생을 중심으로 정군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종필 중령은 정군 대상이 되어야 할 장성들의 이름을 줄줄이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어서 더 놀라운 말이 나왔다.
“정군운동, 숙군운동은 일종의 양동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 알려진 것은 숙군형식이지만, 저희가 정말 하려는 것은 혁명입니다. 사실 저는 4·19혁명 전에도 혁명에 대해서 고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후 시국이 흘러가는 걸 보니 혁명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구한 날 시위가 일어나고 대학생들이 판문점에 가 통일을 외치고 있는 현실은 선배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이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젊은 장교들이 나서서 혁명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리더는 존경하는 박정희 소장입니다.”
그날 김종필 중령은 참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혁명이 성공하면 중앙정보부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혁명과 개혁의 전위조직으로 삼겠다는 거였다. 자기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 일을 꼭 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언제가 D데이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혁명이 끝나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만나서 다시 이야기하지요.”
1961년 5월16일 새벽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 나는 해군 장교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세운 조그마한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육군본부와 이태원 사이에 있었다.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은 총소리였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였다. 당장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혁명이 성공할 것을 예감하였다.
혁명이 일어난 지 약 2개월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JP는 중앙정보부를 만들려고 하는데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JP는 나에게 언론 및 사회, 교육 담당 고문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미련 없이 해군을 떠나 혁명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일선 정치현장을 둘러보았다. 주로 JP와 함께 정치인들을 만났는데,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그의 설득력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야당의 중진들도 그와 30분 정도 대화하고 나면 그의 논리와 생각에 설득되었다.
요즘도 다른 사람들에게 6대 국회 시절의 박대통령을 거론할 때 나는 ‘박통’이라는 말 대신에 ‘그분’이라는 표현을 쓴다. 당시의 박대통령은 존경할 만한 행적과 자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변한 것은 7대 국회 초반을 지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초창기에 매우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였다. 6대국회 후반기 내가 재경위원장을 할 때의 일화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였다. 당시 나는 정회장과 같이 당을 새로 만든다면 참신한 인물들을 끌어들일 자신은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일단 정회장의 순수한 의지를 믿어보기로 하고 당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당시 5공 청문회를 통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김광일 의원에게도 입당을 권유하였고, 그는 나를 통해 정회장을 만나 국민당에 합류하게 되었다.
1992년 1월 정주영 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누적된 정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한 새 정치를 구상하고 있다면서 신당창당을 공식화하였다. 참여인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윤곽을 밝혔는데 나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주영 회장도 매우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자리까지도 나에게 양보하였다. 나는 창당대회 당일 새벽까지도 참여를 망설이던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회장이 내게 위원장 자리를 양보한 사실을 알리고, 합류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정회장의 약속은 대회 당일 번복되었다. 주변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위원장은 부득이 자신이 해야겠다는 거였다. 연설문까지 만들어놓았던 나로서는 매우 불쾌한 상황이었다.
정회장은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창당 후 당권 등에는 욕심이 없었는데도 내가 당을 좌지우지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 일을 겪고, 국민당을 그만두는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을 그런 일 하나로 되돌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였고, 또 나를 믿고 당에 참여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가볍게 처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수모를 참아냈다.
1992년 1월10일 통일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가 열린 후에도 정회장은 나에 대해서는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연히 우리 둘 사이에는 불필요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1992년 3월 실시된 14대 총선에서 나는 국민당 전국구 2번으로 출마하였다. 선거에서 국민당은 나름대로 선전하였다. 전국구를 포함하여 32석을 당선시킨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정회장이 앞에 나서지 않고 2선에서 지원만 했더라면 40~50석도 가능했을 거라고 평가하였다.
나는 입당 전 결심했던 대로 참신한 인물을 대선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당내에서 고군분투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국민들이 정치를 불신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양김이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정주영 대표가 그 대안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국민당을 혁신하는 일도 절실하였다. 의석수를 떠나 국민당이 말 그대로 국민의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변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당시 국민당은 총선을 앞두고 속전속결로 만들어진 당이고, 정대표가 기업가 출신이어서 정당이라기보다는 기업 같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그가 사업가 기질을 벗고 정치인으로 환골탈태하도록 나 나름대로 노력하였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그해 11월16일 국민당은 새한국당과 통합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정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그것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가능성도 있었고 자신도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당내 역학 구도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당은 당대로 1992년 10월, 대선을 2개월 앞두고 주춤거리기 시작하였다. 소속 의원 7~8명의 탈당설이 불거져 나왔고, 정대표 후보사퇴설도 흘러나왔다. 언론에서는 그 소문의 진원지가 내가 아니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최소한 뒤에서 사람을 쏘는 위인은 아니다.
몇 차례 갈등을 겪기도 하였으나 정대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나를 좋아하였다. 내가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한번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하였다.
“양선생은 너무 강직한 게 탈입니다.”
“아니 강직하면 강직한 거지 너무 강직하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니까 그도 소탈하게 웃기만 하였다. 그는 자신이 대선 후보로 결정이 된 다음에는 행사 때마다 늘 나를 대동하려고 하였다.
12월18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예상한대로 정주영 후보는 낙선하였고 민자당의 YS는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의 꿈을 이루었다.
정주영 회장은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와 함께 대선유세를 했던 일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대선 유세도 하루에 무려 12~13군데 일정을 잡아놓고 강행하였다. 이동시에 주로 헬리콥터를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나에게 동행하기를 청했다. 한번은 눈보라가 치는 악천후로 헬기 조종사가 도저히 이륙하지 못한다고 하자 정후보가 억지를 부려 헬기를 이륙시킨 적이 있었다. 결국 헬기는 악천후를 견디지 못해 어느 농촌마을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정후보는 놀라기는커녕 유세에 늦는 것만 걱정하였다. 결국 그 날은 자동차도 구하기 힘들어 오토바이를 빌려 정후보가 뒤에 타고 유세장으로 달려갔다.
서울지역 유세를 위해 정후보와 함께 쏘나타 승용차에 동승하여 롯데호텔에서 시청 쪽으로 가다가 큰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다. 버스가 쏘나타 승용차를 들이받은 큰 사고였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호들갑을 떨거나 병원부터 가자고 했을 상황인데도, 정후보는 아무 표정변화도 없이 갈길 바쁘다는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참 대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 패배 후 서산 현대농장에 내려가 있던 정주영 회장이 어느날 나에게 당을 맡기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나와 당내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나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당 대표 선출을 앞두고 최고위원이던 P와 당사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그가 불현듯 “당을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양선생님말고는 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평소 나와 가깝지 않았던 그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놀라왔다.
“아니 김동길 교수가 대표를 굉장히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정치를 제대로 할 사람이 못됩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당 대표는 월요일 아침에 당헌에 따라 최고회의에서 투표로 뽑기로 되어 있었다. 당 대표가 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월요일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김동길씨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과를 들어보니 다수결로 당 대표를 결정하였는데 김동길씨가 4표, 내가 3표를 얻어 김동길 씨가 당선되었다 했다. 김용환, 한영수, 이자헌은 나를 밀었고 김복동, 유수호, 박영록, P가 김동길을 찍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하지도 않던 대표였기 때문에 나는 별로 섭섭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그 결과를 보고 P가 이틀 전에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내 면전에서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가 없고 우스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왜 그가 이틀 사이에 마음을 바꾸었을까를 추측해보았다. 그도 처음에는 나를 대표로 밀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는 과거의 악연 때문에 자신이 YS에게 정치보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내가 당 대표가 되면 자기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김동길 체제는 얼마 안가 지도력 빈곤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때 자기가 당을 장악하면 YS도 자기를 함부로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였던 것 같았다.
나는 2월27일 국민당에서 탈당하였다.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을 규합해서 교섭단체 결성을 추진하였는데 그 또한 마땅하지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동길씨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는 정주영 회장의 권유로 나보다 뒤에 국민당에 들어왔는데 그렇다고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국민당 입당 전 전국정당을 추진하다가 흐지부지 마무리했던 점, 대선 패배 후 정주영 회장에게 당 발전기금 2000억원을 내놓으라고 공박할 때 느꼈던 인간적인 야박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흠결은 있기 마련이므로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국민당을 잘 끌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탈당한 후 김동길씨는 내게 당으로 복귀해줄 것을 적극적으로 부탁하였다. 기억하건대 여섯 번 정도 그런 이야기를 하였던 것 같다. 이 상황에서는 국민당을 나간 사람도 힘들고 국민당도 힘드니까 무소속 의원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국민당으로 돌아가는 것은, 탈당할 무렵 내가 보았던 여러가지 문제들이 상기되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국민당에서 제의한 대로, 김동길씨를 대통령 후보로 밀고 내가 당 대표를 맡는다는 합의도 좀더 분명하게 해둘 필요를 느꼈다.
1994년 3월8일 63빌딩에서 그와 회동하였다. 그 자리에는 한영수, 임춘원 의원도 배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으로 돌아갈 뜻을 밝힌 후 당명(黨名)을 신민당으로 개칭할 것을 제의하였다. 아울러 좀더 명확한 약속을 위해 6월30일 전당대회에서 15대 대선후보는 김동길, 대표는 내가 하는 걸로 합의한다는 각서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참석자들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결국 합의각서를 쓰고 열람한 후 네 명이 서명하였다. 결국 나는 국민당 사람들의 말을 믿기로 하고 1994년 6월 국민당에 재입당하였다. 나를 따라 세 명이 함께 입당하였고 국민당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당무위원회에 참여해보니 63빌딩에서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 일언반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더니 하루는 당무위원회에서 김동길씨가 그 합의사항에 대해서 “이런 얘길 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라는 것이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민주당과 신민당이 합친다는 이야기가 새 나왔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며칠후 당 밖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신문을 보니까 민주당과 신민당이 합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면서 다시 얼버무렸다. 그러나 민주당의 신민당 흡수통합 풍문은 계속 신문에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나는 김동길 측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신민당을 이끌고 입당한 후 민주당의 이기택 대표와 공동대표를 하겠다는 구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는 참으로 화가 났다. 내가 속은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토록 정치를 신의 없이 하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안되겠다 싶어 나는 내 속마음을 의원 간담회에서 털어놓았다.
“불행한 일이지만 나를 위해서도, 당을 위해서도 할말은 해야겠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냐? 어떻게 민주당에 흡수되어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느냐? 당 안에서는 비밀로 하고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법이 또 어디 있느냐? 더구나 각서까지 쓴 마당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나나 다른 몇몇 의원들은 생명이 있는 새로운 당을 만들기 위해 세상의 오해를 감수하고서 당에 다시 들어온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공인으로서 또 자연인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가?”
내가 김동길씨 쪽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자 그는 특별히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김동길씨는 그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고 일주일간 외부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결국 그 일은 1994년 10월에 소위 ‘합의각서 파동’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김동길씨가 텔레비전에서 애당초 각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결국 합의각서 원본을 공개했다. 그러자 김씨 측은 다시 엉뚱한 소리를 했다. 각서에 있는 사인은 모자이크 방식을 통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계속 부인하면 자신의 정치생명이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한데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답답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인은 신문칼럼 등에 소개되어 익히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결국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서 필적 감정까지 받았는데, 담당자가 육안으로 보더니 ‘이건 조사할 가치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자 김동길씨는 미국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고 주장하였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부 기자들도 진실을 너무나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각서 파동을 두고 나를 비난하는 투의 가십기사조차 쓰지 않았다. 1994년 11월5일 모든 진실은 밝혀졌다. 대검찰청이 대권과 당권을 서로 나눠 갖는다는 두 사람간의 합의각서는 진본이라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당시 국회의 각 위원회에 내려오는 정부 법안 중에는 별도의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이 있었다. 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박대통령의 명이 내려진 안건임을 의미했다. JP도 그런 경우에는 감히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야당과 타협을 해야 하는 경우 대통령에게 직접 가서 원안 수정을 부탁하곤 했다.
국회 재경위원장 시절 처리한,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청구권 자금에 관한 법안도 그 중 하나였다. 청구권 자금의 경우 정부는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하는 입장이고, 야당은 정치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였다. 그래서 야당은 업체까지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야당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아무리 해도 타협이 안 되어서 ‘그럼 산업별로 승인받는 것은 상관없지 않느냐’는 의견을 냈다. 이 안으로 협상을 하니까 야당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결국 나는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새벽 1시에 청와대로 가 대통령을 깨웠다. 나는 2시간 동안 대통령을 설득하였다. 파자마바람으로 나온 대통령은 끝까지 안된다고 하였다. 야당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야당이 그것을 빌미로 기업체에서 정치자금을 뜯을 가능성을 우려해서였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위원장이 알아서 하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의 면면이었다. 당시 초선으로는 이충환, 이중재, 김대중, 고흥문 같은 걸출한 논객과 꼬장꼬장한 이론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에 비한다면 여당은 인적 구성에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여당 의원들의 리더는 6대국회 전반기 재경위원장을 맡아보았던 김성곤 의원이었다. 그는 노련한 정치가여서 내가 보기엔 원만하게 재경위원회를 운영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야간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점심이나 묵고하자’는 식의,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 조크로 어려운 국면을 넘기는 수완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재경위원회에 있으면서 한국에서 국회의원이란 참으로 모순된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재력가가 아니면 대부분의 의원들은 선거에서 당선되더라도 빚을 지게 마련인데,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그 빚을 벌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도덕성이 마비되어 이권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오전에는 회의석상에서 정부를 공박하다가 오후에는 장관에게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를 부탁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고회의 의장 시절에는 자신이 행여 대통령이 되더라도 장기집권을 하겠다는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6대국회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은 내면이 혼란스럽지 않았다. 인간적인 소박함도 여전하였다. 그는 자주 측근들이나 좋아하는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대하여 불고기 파티를 열곤 하였다. 이때 소주나 정종을 곁들여 화기애애하게 시국 문제를 이야기하였는데, 특별히 민감한 사안이 아니면 의원들도 격의 없이 대통령에게 진언을 할 수 있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난 직후까지도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의원들이 대통령 면전에서 ‘지금부터는 2인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말도 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임자, 걱정 마시오.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어요. 나도 대통령 하는 게 불편할 때가 많아요. 오히려 당신들이 부러울 때가 많소. 술도 마음대로 먹으러 다닐 수 있고 말이요. 그에 비하면 나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지.”
내가 박대통령의 변화된 마음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것은 1966년 12월 대통령과 함께 한 회식자리에서였다. 그날은 당시 재경위원회 간사였던 오상직 의원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다. 며칠 밤을 새우며 국회에서 예산심의를 끝낸 것을 격려하는 자리였고 장기영 부총리, 장경순 국회부의장, 김성곤 당 재정위원장, 신상철 주월남 대사도 참석하였다.
“이번에 예산 처리하느라고 고생하셨소.”
그렇게 말을 꺼내는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그날 화제는 주로 월남 이야기와 다음해에 치르게 될 선거 이야기였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경제개발 공적을 인정하는 분위기여서 승리가 예상되는 상황인지라 화제는 즐겁게 이어졌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평소 말이 별로 없던 오의원이 입을 열었다.
“각하, 지금까지는 참 잘해주셨습니다. 민주적인 룰도 잘 지켜내셨습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는 15만표 차이로 신승하셨습니다만 그동안 경제개발을 잘 하셔서 내년 선거는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재선되면 세 번 연이어 하실 생각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 경제문제는 현재 70% 정도는 해결된 셈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나머지 30%는 달성한다 해도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다른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3선 생각은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박대통령의 안색이 달라졌다. 곁에 있던 내가 깜짝 놀랄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니 장내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흥이 깨진 자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오.”
청와대를 나오면서 나는 오의원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오의원, 자네 다음 공천 받기는 틀렸네.”
훗날 그는 특별한 하자가 없는데도 7대 선거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재선에 성공한 이후 박대통령은 어투, 표현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집과 독선의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대통령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자리야”는 말을 했다는 소리도 듣게 되었다. 이런 말도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유진오? 학자가 뭘 알아. 왜 국회에서 자꾸 떠드는 거야?” 또 법원에서 정치범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새파란 법관들이…” 하는 식이었다. 언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비판적인 기사가 나오면 신문사 기자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참으로 불안한 징조였다. 아부하는 사람보다 당당하게 직언하는 사람을 더 좋아했던 박대통령의 스타일도 차츰 변하기 시작하였다.
1968년에서 69년에 이르는 개헌 정국에서 JP는 가장 중요한 방향타였다. 개헌 추진 측에서는 그의 존재가 가장 큰 장애 요소였고, 개헌 반대파에게는 개헌추진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JP는 두 차례의 외유를 거치면서 군사혁명 시절의 기개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1967년 6월8일 실시된 7대 국회의원 선거도 또 다른 개헌추진 징후였다.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기 위해 벌인 무리수는 그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짐작케 하였다. 정보부장, 내무장관 뿐만 아니라 중앙 부처의 고위 공직자들이 대거 지방으로 내려가 선거운동에 동원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이 살포되었음은 물론이다. 또 각 지방마다 경찰서장, 세무서장, 군수 등 지역 기관장은 물론 교직원들까지 선거운동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결국 7대 총선에서 관권선거를 방치한 것은 대통령 자신이 가졌던 소신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경제개발의 성과 등으로 정상적인 선거 하에서도 능히 야당을 이길 수 있는데도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의도를 점점 의심하게 되었다. 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공화당 131석, 신민당 41석으로 개헌선인 117석을 10석 이상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선거결과에 국민도, 야당도 놀랐지만 여당 사람들도 놀라고 말았다.
당 주류 세력의 JP에 대한 혹독한 견제도 개헌추진의 정황이었다. 1967년 5월, 대통령선거 유세과정에서 박대통령의 측근들, 즉 이후락 비서실장, 엄민영 내무장관, 길재호 당사무총장 등은 유세계획을 짜면서 청중들에게 JP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도록 노심초사했다. JP의 연설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는데 측근들은 그것을 차단한답시고 JP의 연설 순서를 항상 장내가 산만한 처음에 할당했고 시간도 10분으로 제한하였다.
1969년에 접어들면서 공화당 내에서도 3선개헌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설되기 시작하였다. 1월 초 한남동의 한 음식점에서 나는 JP, 김택수, 박종태 의원 등과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나는 JP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두 가지를 약속해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당의장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반대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JP는 “양선배, 내가 죽으면 죽었지, 개헌은 절대 못합니다. 끝까지 반대할 겁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반대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JP는 분을 못이겨 손바닥으로 식탁을 내리치기도 하였다. 그동안 이후락, 김형욱과 당 4인체제에게 당했던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말도 하였다.
“4인방 그리고 이후락과 김형욱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자들은 대통령에 달라붙어 개헌 같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데 천년만년 권세를 누리려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가 그자들한테 당한 것은 책 한권으로도 모자랄 겁니다.”
그날 밤 그 순간만큼은 JP는 확고부동하게 개헌에 반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매우 격앙되어 있었고 개헌반대 의지도 남달라 보였다.
1969년 새해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공화당 내에서 개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의원이 돼 있었다. 이후락, 김형욱 등 개헌추진세력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를 감시하는 눈초리도 사방에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대통령이 나를 독대 형식으로 만나려 한다는 것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기 전 아내와 마주하였다.
“지금이 마지막일지 모르니, 유언처럼 듣게나. 만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놀라지 말고 아이들을 잘 키우시오.”
아내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저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는 걸 믿으니 집안일은 염려하지 마세요.”
아내에게 유언을 한 것은 정치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내 소신 때문이었다. 정치인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결부되는 경우라면, 목숨을 내놓고 싸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날 대통령 직무실에서 배석자 없이 대통령과 마주앉았다.
“각하! 그동안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5대 대통령 임기 중에는 독재라는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 각하의 집념과 철학으로 이 만큼 나라의 터를 닦았습니다. 또 개헌을 하려면 무리가 수반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가서 국민들은 각하가 잘한 것은 평가하지 않고 잘못한 것만 기억하게 됩니다.”
그때 나는 개헌에 대한 생각을 내 스스로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참느라고 그러는지 줄담배를 피우다가 나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곤 했다. 그때 박대통령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이런 말도 하였다.
“각하! 제가 김종필과 동향이고 선후배 사이라서 개헌에 반대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각하 다음에 반드시 김종필이 대통령 직을 계승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종필 외의 사람도 그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 국가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71년 선거까지 2년이 남았으니 그런 사람을 골라서 키우십시오. 각하!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혁명을 일으킬 때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나라를 위한 마음 외에 일절 사심이 없었던 그때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지도자는 나아갈 때보다 물러설 때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각하! 대통령직을 떠나면 일요일 한가할 때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 산책하시고 시민들의 인사를 받으십시오. 그런 아름다운 정경을 남겨주십시오.”
그때 대통령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김종필이는 적이 없단 말이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좀 느닷없기도 했겠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심금의 밑바닥을 쳐오는 듯했다. 나는 비록 당 내에서 친JP계인 구주류로 분류되었지만, 내가 개헌에 반대한 것은 JP에 대한 개인적인 의리 때문이 아니라 대의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나는 박대통령으로부터 유달리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의 그 말에 더욱 심경이 복잡해졌다.
결국 나는 “각하께서 그렇게 저의 얘기를 들으셨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보람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청와대를 나왔다.
그 무렵 권오병 문교부장관에 대한 해임안이 야당인 신민당에 의해 국회에 제출되었다. 검사 출신인 권장관은 학원사태에 대한 강경한 태도, 지나치게 권력지향적인 태도 때문에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다. 박대통령이 권오병을 문교장관에 임명한 것도 3선개헌을 하게 되면 학원이 시끄러울 것이고 그를 위한 포석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던 시점이었다.
해임안이 나온 직접적인 계기는 한창 문제시되던 사립대학의 감사와 관련한 야당 질의에서, 자기 감정을 못이긴 권장관이 감사장을 박차고 나간 일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해 4월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신민당은 곧장 문교부장관 해임안을 제출한 것이다.
4월8일 본회의 표결 직전 의원총회가 다시 열렸다. 개헌반대파는 해임안 가결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권장관 해임안은 국회 재적 152석 중 가 87표, 부 57표, 기권 3표로 통과되었다.
‘4·8 항명’을 보고받고 박대통령은 격노하였다. 항명 사건 이틀 뒤인 4월 10일 오후, 청와대에서 총재 상담역, 당무위원, 상임위원회 위원장, 시·도지부 위원장 등 당 간부 42명을 초치한 공화당 확대간부회의가 열렸다. 나는 청와대로 가면서 회의분위기가 어떠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부터 하였다. 만약 내게 얘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심중의 생각도 다 얘기하리라 결심하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박대통령이 그렇게 격노한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번 권 문교 해임안 표결에서 보인 반란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반당행위로서, 당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당 지도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당의 운명을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내 중간보스는 절대 인정할 수가 없다. 당내 일부 불평분자들이 음성적으로 집단행동을 취한 흔적이 보인다. 1주일 내에 반당 분자를 철저히 색출해서 숫자가 몇십명이 되더라도 가차 없이 처단하라. 만일 당기위원 중에 반당행위에 관련됐거나 반당행위자들에게 동조하여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총재직을 걸고서라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박대통령은 20여 분간 노기 어린 질책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
“먼저 반란표의 주도자인 양위원장부터 얘기해 봐요.”
그 순간 지금까지 박대통령의 총애를 받아온 몸이지만, 이제는 그 관계를 끝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하, 지금은 공화당 창당이념이 퇴색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릇된 방향으로 당의 진로가 바뀌면 이 겨레에 불행이 닥쳐올 것입니다. 권장관 해임 건의안에 찬성한 것은 창당이념을 되살리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를 한번 쏘아보았을 뿐 박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상공위원장인 예춘호 의원에게 말해보라고 하였다. 그 역시 찬성표를 던졌었다. 예춘호 의원은, 자기는 ‘가’표를 찍었지만 상공위원들에게는 ‘부’표를 던지라고 하였다는 말만 하였다. 이 말은 나중에 기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자신이 가표를 던진 것을 시인한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였다.
대통령의 확고한 뜻을 거듭 확인하는 것으로 회의는 끝나고 말았다. 후속조치는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애초에 당이 반당행위자로 확정한 사람은 11명이었다. 대통령은 당의 보고를 받은 후 11명 중 나 그리고 박종태, 정태성, 예춘호, 김달수 의원을 제명처분 하도록 하였다. 나는 그 사실을 14일 국회본회의장에서 당기위원장으로부터 통보받았다.
3선개헌을 앞두고 나는 김영삼 신민당 총무를 자주 만났다.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여러 차례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국회에서 개헌안 통과를 저지할 수 있다면서, 터무니없이 자신하고 있었다. 개헌안을 표결하기 며칠 전 국회에서 만난 그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원장, 개헌안은 충분히 저지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저희가 전해들은 CIA 정보를 두고 봐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공화당내 사정은 제가 더 잘 압니다. 지금 생명을 걸고 개헌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데 CIA 자료에 의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안이한 생각을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야당 의원 중에서도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는 의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YS는 당시 공화당 주류들이 흘린 매터도에 속고 있었던 것이다.
1979년 4월17일, 야당 의원이 된 예춘호가 다리를 놓아서 청와대에서 차지철을 만나게 되었다. 그 무렵 차지철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난마처럼 얽혀있는 정국을 풀기 위해 예춘호가 의원 자격으로 청와대에 연락을 취하자, 차실장이 나와 박종태도 보고 싶다 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공화당 의원 시절에도 차지철과는 특별한 유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제의에 응하였다.
모처럼 만난 자리인지라 우리는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정국에 대한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차실장, 지금 정국이 흘러가는 것이,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제대로 될 수가 없어요. 국민들도 이런 상황에서 예전같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금년 말이나 내년 봄 경에는 나라 형편이 불행해질 조짐까지 보이고 있어요. 이 태풍의 눈이 계속 커져 국민의 큰 힘이 폭발하면 그때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막는 게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는 역사적 전환을 가져와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대통령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뿐이지 않소. 그러니 책임감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꼭 각하에게 해주었으면 합니다.”
묵묵히 얘기를 듣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내 얘기가 끝나자 큰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굳은 얼굴로 말하였다.
“누가 반대한다 해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좀더 톤을 높여서 그에게 말하였다.
“차실장,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내가 1969년에 3선개헌 반대운동을 할 때 개헌을 하게 되면 시간이 문제일 뿐 나라와 대통령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아주 안 좋다 이 말이오. 전 국민이 유신체제에 대해서 분노하며 저항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대통령께서도 물러나시는 것을 생각할 때인 것 같은데, 그 준비를 지금부터라도 차질 없게 하는 것이 어때요?”
대통령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차지철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고함을 질렀다.
“정신 나간 것 아닙니까? 내가 우리나라를 보위하는 제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데, 퇴진을 생각해보라뇨?…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들이나 재야는 한꺼번에 쓸어버리면 아무 문제도 안됩니다. 요즘 사회가 다소 어수선한 것은 유신체제 때문이 아니라,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고 때문이에요.… 유신정권은 약한 정권이 아닙니다. 청와대에 수소폭탄을 직격탄으로 투하한다 해도 우리는 끄떡없어요.”
그 순간에 얘기가 도저히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우리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지철은 우리에게 “옛날 공화당 때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단, 각하에게 양의원 말씀을 전하기는 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차지철이 그 이야기를 박대통령에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10·26 후 박준규 전의장을 통해 알게 된 일이지만 차지철은 박대통령과 유신 핵심멤버들이 참석한 청와대 만찬석상에서 내가 한 이야기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말했다고 한다.
차지철 경호실장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박대통령은 일언반구 없이 듣기만 했다고 한다. 정작 흥분한 것은 만찬에 참석한 공화당 소속 S의원, 육군대장 출신인 M의원이었다. 그들은 나 같은 자는 당장 잡아들여서 혼쭐을 내야 한다고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했다. M의원의 경우는 3선개헌 반대운동을 벌일 때 야심한 시각에 술을 들고 우리집에 와서 개헌의 부당성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던 사람이었는데 유신시대를 거치며 그렇게 변하고 만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보고를 받고, 또 측근들이 나에 대해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건의했음에도 아무런 제재가 없었던 것은 박대통령의 심기와 정서를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당시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면 어떤 권력자라도 제재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특별한 잘못이 없는 경우에도 그럴 수 있었다. 실제 유신시대를 지나오면서 수많은 당대의 권력자들이 중정 등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야당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공화당 4인방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유신시대 내내 박대통령은 한번도 내게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공화당 3선 반대 그리고 탈당 후 내가 재야에서 유신반대운동을 벌일 때도 손끝 하나 나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평소에 아끼던 사람이 자기에게 대항할 경우 그 사람에 대해서 큰 미움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박대통령에게 있어 내가 그런 존재였다.
1980년 11월, 국회기능을 대신하던 국보위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통해 7066명의 정치활동 규제대상자를 선정하였는데 나도 거기에 이름이 들어가고 말았다.
어디에서도 정치적인 희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언도까지 받았던 DJ는 석방되어 미국에 가버린 상황이었고, 민주화를 이끌 주요 정치지도자들도 규제에 묶여 있었다. 재야의 경우도 기세등등한 군사정권에 눌려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83년 말에 이르러서는 정치권과 재야 공히 이대로 가서는 안된다는 논의들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재야 사람들과 민주헌정연구회를 만들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DJ와 가까운 사람들을 주로 접촉하는 가운데 나는 여론에 의해 동교동계로 분류되었다. DJ가 미국에서 귀국하지 못했을 때도 나는 예춘호, 김종완, 김상현, 박영록, 최영근, 박종태 등과 함께 수시로 시국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DJ가 미국에서 귀국하였다. 나도 공항에 마중나갔는데 DJ는 동교동 가신들의 손을 잡기 앞서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동교동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와 마주한 DJ는 정치 재개의사를 밝힌 후 같이 정당활동을 할 것을 제의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DJ도 민추협 참여를 통한 정치 복귀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그가 군사정권에 의해 지독한 탄압을 받은 데 대해서 인간적인 연민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나의 도움이 필요함을 간곡히 요청하였고 결국 나는 다시 정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5년 2·12 총선 결과 신민당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67명의 당선자를 낳았다. 전두환 정권이 짜놓은 정치판이 국민의 심판에 의해서 깨지고 만 것이다. 이후 신민당은 민한당, 국민당 의원들이 합세함에 따라 의석을 103석으로 늘림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야권을 통합하게 되었다. 그러한 선거 결과가 나오자 나도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당에 들어가 재야의 신선한 목소리를 전하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 옳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총선이 끝난 후에 신민당에 입당했다.
이때부터 언론은 나를 DJ의 측근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동교동계로 분류되자 아는 사람 중에는 내가 DJ와 밀접해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1985년 8월1일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800명이 넘는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나는 부총재에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평민당에서 탈당하기 전까지 나는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DJ가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되었다.
당시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나는 40대부터 머리카락이 반백이었는데 어느날 DJ가 나에게 말했다.
“양부총재 이제는 염색 좀 하시지요. 머리가 백발이시니 내가 양부총재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도 웃으며 그의 권고를 받아들였고 DJ와 헤어진 지금도 꼬박 염색을 하고 있다.
신민당에서 최측근 참모로 활동하면서 지켜본 DJ는 장점이 많았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 정치지도자였고 지식도 풍부하였다. 물론 아쉬운 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정치적인 이해 판단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이 그것이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나는 양김 중 누가 먼저 되든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군사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YS가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YS가 양보하고 DJ가 후보가 된다 해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권력의 속성이 아무리 냉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1987년 대선에서 양보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다음 대선에서는 반드시 추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 외에도 이중재, 유제연 의원 등이 동교동계에서 가장 열심히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좀체 먹혀들지 않았고 그 사이에 양김 간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가고 있었다.
1987년 9월 말 어느날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나와 이중재, 유제연 의원 등은 ‘오늘 아예 결론을 보자’는 각오를 하고 저녁을 함께한 후 동교동으로 몰려갔다. 밤 9시가 지나서 DJ가 지하로 내려왔다. 그 모임에는 권노갑 등 동교동 가신도 참석하였다.
“오늘 이 자리는 김후보에게 대통령출마에 대해 저의 의견을 기탄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고문께서는 자유당 독재시대부터 수십년 동안 야당생활을 해왔는데, 그동안 언론 조작 등으로 고문의 성격과 사상에 대해서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대통령 임기가 5년인데 수십년 동안의 독재정권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단일화한 야권 후보가 집권하더라도 5년 동안 독재정권의 모든 것을 청산하다보면 많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과도기가 지난 뒤에는 남북통일 등 많은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 상황에서는 각서를 통해 분명한 약속을 하고 YS가 먼저 디딤돌 역을 하게 해줍시다. 대신 고문께서는 그 5년 동안에 국민들의 지지와 여망을 그대로 유지만 하면 다음 대선에서 당선되는 것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즉 차기 대통령 자리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굴러들어온다는 겁니다. 이번에 양보하면 참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며,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그 모임은 끝이 나고 말았다. 동교동을 나서는데, 훗날 국민의 정부 들어서 실세가 된 한 가신이 불만스런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부총재님, 네 사람이(후보로) 나오면 선생님이 반드시 되는데 왜 부총재님은 반대하십니까?”
나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생각을 하시오?”
그러자 너무나 많이 들어온 ‘4자 필승론’이 나왔다. 한마디로 아집과 망상에 빠진 논리였다. 그들은 권력의 과정보다 권력의 결과에 눈먼 나머지 현실을 철저히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주영 회장이 스케일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하고 마는 성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91년 당시 내가 추진하려던 국민계몽사업도 그가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서면 적극적으로 후원해줄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1991년 말 정주영과 대면한 자리에서 내 생각과 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저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 공감합니다. 서영훈 선생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하려면 1~2년 가지고는 안됩니다. 장기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 그보다 더 급한 건 정치를 새롭게 해서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고 봅니다.”
당시까지 나는 그가 대통령에 입후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가 정치 이야기를 꺼내자 당혹스럽기도 하였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에도 일리가 있는 대목이 많았다. 그는 이런 말도 하였다.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정치가 제대로 돼야 경제가 잘 돌아갑니다. 또 경제를 알아야 정치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정치를 해볼 생각입니다. 좋은 사람들을 모아서 당을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양 선생을 자주 만나뵙고 이 문제를 의논했으면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상 그를 만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금 지원은 받을 수 있겠지만 내가 처음에 계획했던 일이 왜곡될 것 같아서였다. 나는 확답을 하지 않고 첫 만남을 끝냈다. 그런 가운데 정회장은 거듭 나에게 협조를 부탁해왔다.
당시 그는 의욕과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정당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경제적 이상을 실현하고 싶다고도 하였으며 심지어 ‘현대’라는 기업은 없앨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미 정계에 입문하는 문제에 대해서 가족들의 동의도 얻어둔 터라고 하였고, 나에 대해서는 공화당 때부터 소신을 지킨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도 과거의 나처럼 고생할 각오를 하고 있으니 같이 고생해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였다.
나는 많이 고민했다. 정회장의 말에서 양김을 극복하는 정치세력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정회장을 세번째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정치를 하신다니 반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정회장님보다 더 적격인 인물이 있으면 뒤에서 그를 후원해서 훌륭한 정치지도자로 키우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정회장은 쉽게 동의하지 못하였다.
잠시 후 “정 그렇다면 양선생 말씀대로 좋은 사람부터 찾아봅시다. 당을 만들고 좋은 인물을 영입하려고 하니 일단 그때까지 같이 상의라도 했으면 합니다. 다만 창당을 하려면 시간도 없고 정부에서도 사사건건 견제할 수 있으니까 창당할 때까지는 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습니다. 아까 그 문제는 이후에 좀더 구체적으로 의논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