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아름다운 인생 우리시대의 ‘고집불통’들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siren52@hanmail.net 곽대중 < 자유기고가 > bitdori@kebi.com

    입력2004-09-06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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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알아주든 말든, 돈을 벌든 못 벌든, 몸이 축나든 말든 오직 한길만 줄기차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고집스레 ‘현장’을 지키고 있기에 세상은 또 그만큼 앞으로 굴러간다. 집념과 의지로 뭉친 6인의 옹고집 인생 이야기.
    곤충을 쫓아 20년 세월을 바쳐온 곤충연구가 김정환(金丁煥·54)씨. 지난해 연말에야 비로소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아 한국곤충학회 이사 자리에 올랐지만, 그에겐 여전히 ‘재야곤충학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독학해서 학회 이사가 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라는 김씨가 오랫동안 학계에서 외면당하며 아웃사이더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독특한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청주고교를 졸업하고 구로동 공구상가에서 ‘고려볼트제작소’를 운영하던 기술자가 곤충학자로 인생을 전환한 계기는 단순한 취미생활 그것이었다.“사업을 10년쯤 하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좀 생겼어요. 이제는 뭔가 취미라도 하나쯤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60세에 공직에서 퇴직한 부친이 소일거리가 없어 말년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을 지켜봤던 그는 은퇴 후의 ‘진짜 인생’과 ‘좋은 마무리’를 염두에 두고 곤충채집을 취미로 삼았다. 취미로 즐길 만한 수많은 흥미거리 중에 하필이면 곤충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자라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자란 그는 수많은 곤충을 친구 혹은 ‘장난감’ 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형제들 중 정원에 물을 주는 당번을 맡았던 그는 그 바람에 신기한 곤충세계를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당시 그를 홀렸던 것 가운데 하나가 나비의 독특한 빛깔이었다.김씨는 사업하는 틈틈이 옛 취미를 되살려 나비채집에 나섰다. 하나둘씩 알게 되면 될수록 공부할 게 무척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비에 관한 논문을 찾아 섭렵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어느날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한반도 전역의 나비 분포도가 눈앞에 그려졌어요. 채집 현장을 기록해나가다 보니 실제 생태와 기존 논문과의 차이점도 눈에 띄더군요. 이를 수정해 기록하고,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저 혼자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10년 정도 나비를 쫓아다녔더니 어느새 지식이 쌓이게 된 겁니다.”

    나비채집에서 시작한 그의 연구는 나비의 분포와 그 원인을 캐는 쪽으로 발전했고, 이를 위해 다시 지질과 식물 기후 토양을 파고들었다. 이같은 연구의 결과물이 1991년 발표한 논문 ‘한국산 나비의 역사와 일본 특산종 나비의 기원’이다. 전공학자도 아닌 엔지니어 출신의 그가 10년 동안 끈질기게 매달려 추적한 끝에 나온 이 논문은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나비채집에서 나비연구로 그 깊이를 더해가면서 생업전선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도서관으로, ‘필드’로 쫓아다니는 통에 생업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고, 연구는 연구대로 생업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생업이냐, 취미냐. 그 중대한 기로에서 그에겐 강한 용기가 필요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을 값지게 사는 길’이라 자위하며 사업을 정리하기에 이른다. 그쯤에선 가족들도 그의 열정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업을 정리하면서 풍족하진 않더라도 어떻게든 최소한의 생활비는 거르지 말고 집에 갖다주자고 마음먹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어지간히 뜻대로 되더군요. 물론 집사람이야 허리띠 졸라매고 바둥거렸겠지만, 그래도 지금껏 굶지 않고 먹고 산 건 신통한 일이죠.”



    생업을 접은 뒤 곤충연구에 더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연구결과를 내놓아도 국내에서 그의 연구실적을 제대로 검증해줄 만한 학자가 없다는 게 고민거리였다.

    곤충의 생태를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질학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데, 학자들 간에 학문적 교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각각의 전공이 너무 세분화돼 있어 나무는 보되 숲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던 것. 새로운 가설을 내놓으면 그것을 정설화하기 위해 비교 연구할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답답해진 그는 잠자리 메뚜기 딱정벌레 같은 곤충은 물론, 식물학과 지질학 기후학 등 곤충 생태와 관련 있는 학문을 닥치는 대로 헤집고 다녔다. 김씨가 1년이면 여덟 달은 산과 들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새로 발견해 학계에 발표한 신종과 미기록 곤충은 수십 종에 이른다.

    그는 한국산 잠자리 연구에도 8년간 매달렸지만 학계에 기록된 것 중 16종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지역 조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 16종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잠자리 연구는 그에게 미완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데, 언젠가 나머지 종을 확인하면 나비와 잠자리의 분포를 비교 연구한 논문을 낼 계획이다.

    김정환씨가 생업을 접고 사재를 쏟아부으며 학계에서 인정해주지도 않는 연구에 몰두해온 이유는 간단하다.

    “이 땅에 사는 우리 종 곤충에 대한 연구성과를 왜 일본이나 미국 학자에게 빼앗겨야 합니까.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죠.”

    작가 이윤기씨는 출판기획자이자 북디자이너인 정병규(鄭丙圭·56)씨의 작업과정을 지켜보며 ‘시각적 시정(詩情)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가 책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시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의 작업실에선 책이 소파에서 사람을 밀어내고, 책이 책상 앞에 앉아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살 수 있다면 차라리 책더미 속에서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한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떠올랐다. 어지럽게 널린 책 사이를 비집고 간신히 한 사람이나 앉을 수 있을까한, 작업실 한 귀퉁이에서 그를 만났다.

    27년 동안 오로지 책에만 매달려 한 길만 걸어온 그에게 책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1996년 나이 50줄에 접어든 그가 국내 최초로 북디자인전을 열면서 그 속내를 살짝 내비쳤다.

    “책은 나에게 애(愛)와 증(憎)을 동시에 일으키는 대상이다. 삶의 희로애락과 등가물인 셈이다. 내가 책을 만들고 펴내고 꾸미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잘 만든 책’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책을 보고 만지고 읽으면서 교감하는 순간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행복하다. 그 짜릿한 교감 때문에 그는 지금도 ‘책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외국 여행길에 들른 서점에서 그런 책이 눈에 띄면 책이 그를 향해 “저 괜찮지 않아요”라며 속살거리는 듯하다고.

    부친이 직업군인이라 가족과 떨어져 친척집에서 자랐던 그는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책으로 달랬다. 연인처럼 책을 품에 안고 보듬으며 밤새 대화를 나눈 적도 많았다. 결국 그 버릇은 중독성으로 악화됐다.

    그는 대구 경북고등학교 재학시절 미술부장으로 교지 편집을 도맡아 하면서 책 만드는 인생의 첫 단추를 꿰었다. 그 시절을 지켜본 정씨의 경북중학교 후배 이윤기씨는 그를 “공부와 문학과 연애를 주름잡음으로써 일찍이 여러 동기생과 후배들에게 터무니없는 열등감을 안긴 전설적인 선배”로 기억한다.

    그의 꿈은 작가였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던 그는 당시 쟁쟁한 문학 대가들의 강의 수준에 실망해 고려대 불문학과로 학교와 전공을 옮겼다. 고려대에 다니면서도 대학신문 편집에 매달렸다. 그는 1975년 ‘소설문예’ 편집장으로 출판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민음사 편집장, 홍성사 설립자이자 주간을 거치며 출판기획자와 편집자, 표지 디자이너로 명성을 쌓아갔다.

    정씨의 공식적인 첫 표지 디자인 작품은 민음사에서 출간된 한수산의 소설 ‘부초(浮草)’다. 이 표지는 출판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로선 드물게 단색 톤 바탕에 ‘浮草’라는 한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는데, 단 두 자의 활자만으로도 시각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후로도 일련의 인상적인 표지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한창 잘나가던 그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네스코 편집자 트레이닝 코스에 참가한 뒤 경악했다.

    “그때까지 표지 장정 정도로만 여겨왔던 북디자인의 새로운 영역과 난생 처음 접해본 타이포그라피(typography), 일본의 북디자인 수준과 다양한 개성, 또한 무엇보다 북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단어적 의미를 떠나 실제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직접 목도했을 때의 놀라움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두 달간 새로운 책의 세계에 대해 개안(開眼)을 하고 돌아온 그는 출판협회가 운영하는 편집인대학에 북디자인 강좌를 개설했고, 대학에서 편집디자인을 강의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1983년 ‘디자인사관학교’로 불리는 프랑스 파리의 에스티엔느로 날아갔다.

    “활자는 한 나라 문화의 공기입니다. 한 문화권에서 활자매체는 그 문화의 생존과 직결되죠. 뒤늦게 프랑스 유학길에 나선 것은 알파벳 문화권의 공기를 마셔보고, ‘후진국 출판인’으로서 선진 출판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이겨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어마어마한 책의 세계에 압도당한 그는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국내 최초의 북디자인 전문회사인 ‘정병규 디자인실’을 열었다.

    정씨는 책을 시대 흐름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눈다. 구텐베르크 이후 활자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책, 디지털 요소를 가진 전자책, 그리고 디지털만으로는 불가능해 아날로그의 장점을 결합한 책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세번째의 책이다.

    “책은 살아있는 생명이며 인간화할 수 있는 상상의 논리와 감동의 공간입니다. 첨단미디어와 달리 책은 인간의 손이 닿아 그 세계를 열면서 물질의 상태를 뛰어넘기 시작합니다. 책은 저자와 독자, 편집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매체이고, 북디자이너는 바로 그 삼각지점의 중앙에서 책의 내용과 목적에 어울리는 글자꼴과 크기를 고르고, 행간, 텍스트와 여백의 균형, 사진이나 그림과 본문의 관계를 결정하고, 나아가 종이·인쇄·제책에 이르기까지 책의 모든 요소를 설계하는 다기능 작업으로 제2의 저자가 되는 것이죠.”

    그에 따르면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장점인 촉감을 전달할 수 없다. 디지털 모니터와는 또다른 종이의 촉감과 느낌, 그것을 매개로 한 인간과 책과의 교감. 이것이 바로 제3의 새로운 아날로그 책이 추구할 수 있는 ‘맛’이다.

    북디자인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그에게도 먹고사는 문제는 여전히 간단치가 않다. 북디자인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부터 돈을 받고 디자인을 해준 터라 사람들은 그가 엄청난 디자인비를 받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출판계의 영세성을 뻔히 알면서 디자인비를 무턱대고 높이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욕심껏 책을 만들어볼 요량으로 제작비를 좀더 들이자고 하면 고객의 눈꼬리가 올라가기 일쑤다. 때로는 속이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제작비를 댈 것도 아니니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다. 대학이나 문화센터 강의료도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대범한 척 하느라” 따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래저래 외화내빈이다. 그래도 보고 싶은 책을 사볼 형편은 되니 그저 안분지족할 따름이다.

    그는 요즘 고민에 빠져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진정한 세계화란 다름아닌 고유 문화의 정체성을 살려내는 것인데, ‘문화의 공기’인 북디자인에 과연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북디자인은 단순한 장식 수준의 부가적 기능에서 벗어나 격(格)과 맛이 숨쉬는 ‘책성’으로 살아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힐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북디자이너로서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는 일은 1980년대까지 우리 책들을 지배했던 표지 바로 뒷장의 장식면인 ‘도비라’(일본 출판계의 관행이었다)를 없애고 책의 정가 표시를 표지 뒷면에 드러나도록 한 것이다. 책날개에 ‘표지디자인 정병규’라는 타이틀을 넣은 것도 그가 처음으로 시도했다. 북 디자인은 있어도 북디자이너는 존재하지 않던 출판계에 그가 제대로 된 문패를 만들어준 셈이다.

    정씨는 가끔 출판협회에 나가면 쑥스러울 때가 있다고 한다. 현역 북디자이너 중에 자신만큼 나이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못한다. 이미지와 활자를 동시에 다루는 북디자인의 매력 때문이다. 만들 때마다 다른 맛이 나는 게 책이기 때문이다.

    ♣글·박은경

    마흔네 살 노총각. 사람들은 그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지만, 그는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라고 정색한다. 너무도 사랑해서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결혼이라면 그는 정말 결혼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축구, 그것도 여자축구와 말이다.

    위례정보산업고등학교 축구부 서정호(徐庭鎬·44) 감독은 여자축구와 함께 사는 사람이다. 학교 축구부실이 그의 신혼집이고, 가득 찬 트로피와 상장, 메달이 그동안 마련한 신접살림이다. 선수들과 함께 찍은 우승기념 사진은 결혼사진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는 몰래 축구를 배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는데, 부모의 반대가 심해 유니폼은 학교에 두고 다녔다. 연습이 끝나면 땀냄새를 없애려 말끔히 씻고 집에 들어갔다. 나중에 부모가 알게 되자 “축구는 하더라도 성적은 안 떨어지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야 계속할 수 있었다.

    경기도 광주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광주중을 거쳐 광주종합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축구부에 대한 지원이 넉넉할 리 없는 시골 학교에서 축구를 배우려니 답답했다. 결국 고2가 돼서야 “공부와 운동 사이에서 어영부영하다간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운동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당시 축구명문이었던 서울 중동고 축구부에 지원, 고등학교 1학년으로 다시 입학했다. 축구를 제대로 배우겠다고 고등학교를 5년 다닌 사람, 그가 바로 서정호 감독이다. 고교 졸업 후에는 성균관대 축구부로 가게 됐으나, 그때 막 창단한 광운대 축구부에서 “주전으로 뛰어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자 솔깃해서 학교를 옮겼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러워요. 선배가 없는 팀에서 주장 노릇을 하다보니 멋대로 행동하게 되고, 결국 운동에도 소홀해지더군요. 축구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조직이 하는 운동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서감독은 대학을 졸업한 뒤 현대 아마추어 축구팀에 소속되어 뛰다가 왠지 회의가 느껴져 1년 동안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방황하기도 했다. 재기하기 위해 현대 프로축구팀 테스트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결국 선수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본의 아니게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1985년 성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성남중앙초등학교, 풍생중학교, 광주초등학교가 그간 서감독이 지도자 생활을 거친 학교들이다. 그러던 1991년, 위례정보산업고 축구부 코치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처음부터 여자축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여자축구 지도자의 길을 택한 건 아닙니다. 축구지도자를 계속할 생각이면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주위의 권고 때문에 옮겨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다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사실 당시만 해도 ‘여자축구’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습니다. 누구도 한국 여자축구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뭔가 한번 만들어보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여자축구에서 선구자 역할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겁없이 뛰어들었습니다.”

    여자축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9년 미국에서 열린 제3회 여자월드컵부터다. 당시 중국과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골을 집어넣은 브랜디 체스테인이 웃통을 벗어제치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광경은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열린 타이거풀스 토토컵 국제여자축구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이 세계 최강 중국을 3대1로 누르고 우승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서감독이 위례정보산업고 여자축구팀으로 간 1991년만 해도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내다본 사람은 없었다. 당시 여자축구는 그저 좀 신기한 볼거리나 남자축구 옆에 끼워넣는 구색 맞추기 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국내에 여자축구대표팀이 구성된 것은 1990년. 1992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하키, 핸드볼, 역도, 태권도 선수까지 불러모아 급조한 팀이었다. 그처럼 무리하게 팀을 만든 것은 여자축구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려는 중국의 의도에 호응하고, 전종목 출전이라는 기록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만하면 1990년대 초반 우리 여자축구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국제대회에 처녀 출전한 한국 여자대표팀은 북한과 대만에 7점차, 일본과 중국에 8점차로 참패했다. 네 게임에서 단 한 골을 넣고 30골을 허용하는 치욕을 맛봤다. 서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여곡절이 많았죠. 1991년에 대표팀이 창단되자마자 해체설이 나돌더군요. 여자배구, 남자축구, 핸드볼, 농구, 권투, 태권도 등 쟁쟁한 종목의 운동부들도 예산부족 등으로 해체되는 마당에 여자축구가 얼마가 오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어요. 저도 괜히 이곳에 온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이상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으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여자 축구선수를 모집한다고 해서 선발한 학생들이었지만 처음에는 오합지졸이었다. 25명의 창단멤버 중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부터 축구를 해본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대개 육상선수 아니면 태권도 선수였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운동부를 택한 학생들이었다.

    “처음으로 여자선수들을 가르치려니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여학생들이라 성격이 예민한데다 조금만 힘들어도 못하겠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저앉고…. 그렇다고 남자선수들처럼 혹독하게 내몰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결국 ‘이기는 방법’을 깨우쳐 자신감을 심어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초창기엔 연습시합 상대가 없어 애를 먹었다. 남자중학교 축구팀 감독에게 통사정해서 1학년으로만 구성한 팀과 경기를 갖게 했는데, 골을 하도 많이 먹어서 나중엔 스코어를 기억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달을 연습했더니 두자리였던 스코어 차가 한자리로 줄어들었고, 차차 3대1, 2대0 정도로 해볼 만한 경기가 됐다. 나중에는 어쩌다 한두 골 차로 이기는 경우도 있었다.

    창단 4개월 만에 첫 대회에 나갔다. 여자축구 추계연맹전이었는데, 내심으론 망신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처음 출전한 그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다른 팀들은 창단한 지 최소한 6개월이 넘어 동계훈련까지 마치고 출전했는데, 그 틈에서 준우승을 하니 다들 놀라워했다. 큰 점수차로 지더라도 실전을 통해 무조건 부딪치면서 쌓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학교에서도 그후로는 팀을 해체하라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창단 이후 위례정보산업고 여자축구팀은 각종 대회를 휩쓸며 자타가 인정하는 고교 여자축구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그간 송주희, 박해정, 최윤희, 황인선 등 숱한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했고, 10여 명의 졸업생들이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서감독은 신상계초등학교 김은숙 감독, 한별고등학교 심부현 코치, 창덕여중 한미혜 코치 등이 자신이 길러낸 제자들이라면서 흐뭇해했다.

    제자들이 이제 막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앞으로 10년 후면 이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여자축구를 이끌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서감독은 “2007년 여자월드컵은 어렵겠지만, 2011년 여자월드컵에선 4강에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남자축구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자축구는 그 반의 반만 투자해도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서감독이 또 하나 아쉬워하는 것은 국내에 초·중등학교 여자축구팀은 꽤 많은데 반해 대학과 실업팀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재 초등학교와 중학교 여자축구부는 각각 20여 개, 고등학교는 17개 팀이 있지만, 대학 여자축구부는 6개 팀, 실업팀은 3개가 고작이다. 1990년 국가대표 여자축구팀이 창단되면서 이화여대와 숙명여대가 축구팀을 창단했으나, 여자축구가 인기를 끌지 못하자 “운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팀을 해체했다.

    “취미 삼아 공을 차는 수준을 벗어나 직업적으로 운동할 수 있도록 실업팀이 많이 생겨 수요를 창출해야 하는데, 국내 여자축구는 하부는 두터운 반면 상부는 지나치게 작은 피라미드형이에요. 한해에 80여 명의 여자축구선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실업팀에서 소화할 수 있는 인원은 10여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학생들에게 동기부여가 안되는거죠. 열심히 하면 될성부른 학생들이 실업팀 진출 희망이 안 보여 중간에 포기하는 것이 가장 안타까워요.”

    서감독은 “그 동안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한때는 남자팀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해오면 갈등도 많이 겪었지만, 지금은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에 대해서도 이젠 초연한 듯하다. 좋은 혼처가 생기면 지금이라도 결혼할 생각이 있냐고 묻자 “이중결혼 생활을 할 수는 없다”며 능청을 부렸다. 사실 가정과 축구,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밤낮없이 축구에만 매달리는 남자를 이해해줄 수 있는 배우자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서감독의 집은 학교 축구부 사무실 옆 작은 골방이다. 한 사람이 간신히 다리를 펴고 누울 만한 비좁은 공간에 옷장 하나, TV 한 대, 그리고 ‘총각냄새’가 전부다. 월급은 100만원 남짓 되지만, 그나마 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후딱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 담아둔, 한국 여자축구의 미래를 향한 ‘뷰티풀 마인드’는 너무도 풍요롭고 아름답다.

    ♣글·곽대중

    “사람들은 농사지을 때 농약 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만, 인류는 수만년 동안 화학비료 없이도 작물을 잘 가꿔왔습니다. 유기농업은 지금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 변화에 역행하는 일이죠.”

    제초제를 비롯한 유기합성농약, 가축사료첨가제, 화학비료 등 합성화학물질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유기물과 자연광석 미생물 등 천연비료만을 사용하는 농법이 유기농업이다. 팔당생명살림연대 정상묵(鄭相默·51) 회장은 유기농법으로 농사짓는 것은 특별한 농사법이 아니라 ‘정상적인’ 농사법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의 활동을 ‘비정상적인 현상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은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정씨는 최근 팔당상수원 유기농업본부와 생활협동조합을 통합해 발족한 팔당생명살림연대 회장직말고도 환경농업단체연합회장, (주)새농 대표이사,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 등 논밭일보다 바깥일이 더 많은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래 지난 40년 동안 우리나라는 수출위주의 경제정책을 펴왔습니다. 농업에서도 증산(增産)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 아래 무분별한 화학영농으로 일관했죠. 그러다보니 토양은 황폐해지고 생태계는 심각하게 파괴됐으며, 국민의 안전이 심각한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농정을 유기농업으로 전면 재편해야 합니다.”

    정회장은 얼마전 ‘아사히신문’에 복합오염 문제가 대서특필되면서 “값은 어떻든 안전한 농산물을 공급해달라”고 아우성쳤던 소비자 운동을 통해 유기농업이 크게 확산된 일본의 사례를 상기시켰다. 그는 “한국에서는 그와 반대로 생산자들이 먼저 자각해 유기농업을 시작했는데, 최근 몇년간 식품안전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소비자의 요구가 점차 고양되고 있는 추세라 유기농업의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정회장이 유기농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농회(正農會)를 통해서다. 1976년 창립된 정농회는 우리나라 유기농업운동의 시조라고 볼 수 있다. 그 무렵만 해도 유기농업에 대한 관심은 극히 낮았다. 편하게 농사 지으면 됐지, 왜 번거롭게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냐는 반론이 많았다. 정부의 눈길도 곱지 않아 정농회 모임이 있으면 정보기관에서 찾아와 행여 불순한 얘기가 오가는 건 아닌지 감시했을 정도였다.

    정회장은 정농회 창립 멤버는 아니다. 그의 동생인 상일(48)씨가 먼저 참가했는데, 당시 정회장은 “농약을 안 쓰고 어떻게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냐”며 시큰둥했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정회장은 군복무를 마친 후 풀무원농장 원경선 원장이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합숙 교육훈련과정에 들어갔다가 정농회 연수에 참가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정회장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농사는 잘못된 농사법이고, 유기농법이야말로 바른 농사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 정회장은 유기농법의 전도사가 되어 전국을 뛰어다녔고, 정농회 서기에서부터 시작해 총무, 부회장을 거쳐 회장까지 맡게 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애로는 판로를 개척하는 문제였다. 값은 비싸면서 겉모습은 왠지 시들해 보이는 유기농산물을 찾는 소비자는 드물었다. 몇 차례 실패 끝에 원경선 원장의 아들인 원해영 부천시장의 도움으로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에 조그만 판매처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주식회사 풀무원의 모태가 됐다.

    정농회는 1987년부터 자체적으로 판로를 뚫으면서 정농회 유통센터를 설립했고, 1990년에는 경실련과 공동으로 생활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창립 초기 30∼40명 정도였던 정농회 회원은 현재 6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또한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농민들이 정농회에서 유기농업 교육을 받고 갔다. 국내 유기농업 분야도 성장을 거듭해 유기농협회, 환경연구회 등 유기농업 관련단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정회장이 대표로 있는 환경농업단체연합회에는 34개의 생산자 및 소비자 단체들이 소속돼 있다.

    정회장은 1993년부터 팔당 상수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각종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는 그때까지 팔당호 인근의 개발을 제한했던 그린벨트와 상수원 보호구역 해제를 요구하며 구성된 ‘팔당상수원 피해주민 대책위원회’에 참가했다. 초기에 대책위원회는 환경부 수질보호국과 씨름하면서 불필요한 규제를 풀라고 요구했는데,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 낚시가 허용됐고 무동력선도 강에 띄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대책위 활동에 참여하면서 정회장은 무언가 방향이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당시 주민들의 바람은 규제가 풀려 팔당호 인근이 관광지로 개발됐으면 하는 것이었다. 정회장은 불필요한 규제는 풀려야 하지만 상수원이 오염돼선 안된다는 생각에 농업을 살리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했다. 방법은 팔당상수원 인근에서 짓는 농사를 유기농법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최병렬 서울시장과 원철희 농협중앙회장을 만나 “서울시민의 상수원인 팔당호를 지키기 위해 모두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려 하니 예산을 지원해달라”고 청했다. 서울시와 농협은 10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같은 계획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농민단체를 구성해 자발적인 유기농업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고 양평군, 남양주시, 광주군의 농민들을 모아 ‘팔당상수원 유기농업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그리고 팔당호 오염의 주원인이었던 가축분뇨, 화학비료, 생활하수 줄이기, 자연산 비료 사용하기 운동 등을 벌여나갔다. 이와 함께 주변 농민들을 하나둘 설득해 유기농업으로 전환토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판로문제에 부닥쳤다.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유기농산물 직판장을 만들어 판로를 보장하겠다던 서울시의 약속이 무산된 것. 결국 1년 동안 정성껏 가꾼 유기농 배추가 창고에서 썩어갔고, 다 자란 채소를 갈아엎기도 했다.

    기존 유통업자들의 텃세가 심한 것도 판로를 열기 어렵게 만들었다. 생각 끝에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유기농산물 전문 유통업체인 (주)새농을 만들고 밤낮 없이 뛰어다녔지만 자리를 잡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몇해 전부터 유기농산물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수입 농산물의 유해성이 널리 알려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소비자들이 건강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됐기 때문이다.

    정회장은 “수입개방의 물결을 언제까지 막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은 우리도 경쟁력 있는 상품을 내놓아야 한다”며 “한국 농업이 사는 길은 고품질의 유기농산물로 소비자의 수준 높은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기농업의 성공비결로 무엇보다 ‘근면’을 꼽았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병충해가 생기면 바로 농약을 뿌리는 데 익숙해진 사람에겐 유기농법이 답답하고 번거롭게 여겨질 겁니다. 일단 편하고 보자는 생각에 화학비료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죠. 유기농업을 하다보면 벌레도 일일이 잡아줘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갑니다. 따라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땅이 살아야 인간도 산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어야 해요.”

    그러면서 정회장은 쿠바의 예를 들었다. 쿠바는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면서 한때 심각한 경제위기에 봉착했다. 그때껏 국가가 지원했던 농기계와 비료 등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농업도 큰 타격을 받았다. 바로 그때 전체 농업을 유기농법으로 전환했다. 땅에 기름이 스미는 것을 막기 위해 논밭도 소가 갈게 하고 천연비료도 개발했다. 그 결과 놀랄 만한 농업 부흥을 이뤄냈다는 것.

    양평군은 민선군수의 주도로 ‘맑은물 사랑’과 ‘환경농업’을 중요한 군정(郡政) 목표로 설정하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많은 농민들이 유기농으로 전환하면서 토양과 수질이 예전보다 눈에 띄게 개선됐다고 한다. 정회장은 “일개 군의 농업정책을 바꾼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데, 하물며 다음 대통령이 유기농업에 대한 인식을 갖고 국가의 농업정책을 이끌면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살구꽃과 배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정회장의 집 앞에는 ‘두물머리농장’(dumul.com)이라고 쓰인 조그만 푯말이 세워져 있다.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양수리(兩水里)’의 옛말이다. 강바람이 뺨에 닿는 시원한 감촉이 그만인 이곳에서 정회장 4형제는 노모를 모시고 함께 산다.

    위층에 첫째 동생, 옆집에 둘째 동생, 뒷집에 셋째 동생이 살고 있다. 동생들도 모두 유기농업과 유통, 국산밀 생산 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정회장의 두 자녀와 동생들의 자녀까지 합치면 열댓명의 대식구가 한 울타리 안에 다정하게 모여 산다.

    정회장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 한 100억원쯤 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돈으로 환경농업단체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어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자립적으로 유기농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다는 것. 고집스럽게 한길을 걸어오면서 차근차근 뜻하는 바를 이뤄온 그의 인생행로대로라면 그런 소원도 터무니없는 바람만은 아닐 것 같다.

    ♣글·곽대중

    연구 투자에 인색한 우리 여건에선 학자들도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급급해 필드에서 곤충의 생태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더욱이 학교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개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에겐 ‘내 지식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늘 따라다녔다. 학자들이 곤충 지질 기후 등 서로 다른 분야를 나눠 맡아 연구해 공조하면 훨씬 체계적이고 방대한 연구성과가 나올 수 있을 터인데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다 보니 혼자 연구하는 발걸음은 더딜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곤충 5000종 가량을 집단분류학에 초점을 두고 정리중인데 조만간 ‘한국곤충대도감’을 펴낼 계획이다. 한국 곤충 1만여 종 중 절반에 해당하는 방대한 규모다. 그는 “곤충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한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때로는 평화스럽게 협력 공생하다가 또 치열하게 투쟁하는 생태가 영락없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

    문외한의 눈으로 이렇다할 지식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그의 연구 성과는 지금까지 5권의 저서와 3편의 논문으로 정리됐다. 최근 그 일부가 공중파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두 방송국이 잇달아 선보인 ‘곤충, 그들만의 세상’과 ‘곤충의 사생활’이 그것.

    각고의 노력 끝에 그의 파인더에 잡힌 곤충들의 삶은 하나하나가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 동안 애벌레 시절을 견뎌낸 뒤 화려한 성충으로 태어나는 곤충. 하지만 성충으로 거듭난 뒤의 삶은 너무나 짧다. 그래도 성충은 일주일을 살든 하루를 살든 짝짓기를 위해 목숨을 건다. 흙에 침을 발라 새끼 기를 집을 짓기도 한다. 이런 광경은 그가 필드에서 담아낸 생생한 기록이다.

    김씨는 동영상 외에도 10만장에 이르는 곤충 사진을 찍었다. 물론 사진 속의 곤충들은 자연상태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다. 곤충연구가의 길로 들어섰을 무렵 그는 채집과 박제 문제를 두고 갈등했다.

    “처음 나비 채집에 나섰을 때야 신이 났죠. 얼마나 잡아댔는지 몰라요. 하지만 어느날 문득 ‘번식개체인 나비가 내게 채집당해서 번식을 못하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그저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죠. 그때부터 더 이상 살아있는 곤충을 채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영상에 담는 작업으로 만족했죠.”

    곤충이 그의 눈앞으로 푸드덕 하고 날아가기만 해도 그는 ‘못 보던 종’인지 아닌지를 직감으로 알아차린다. 곤충이 눈앞에 머무는 그 짧은 순간 그의 마음은 갈등으로 요동친다. 저걸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물론 채집해서 신종이나 미기록종으로 발표하면 그의 명예야 높아지겠지만, 그것이 생명보다 가치있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채집이 불가피할 때도 있다. 간혹 논문 발표 등을 위해 ‘과학적 증거물’로 제시할 개체가 필요하면 잡힌 곤충에게 “사람이 의학발전을 위해 시신을 기증하듯 너도 고귀한 죽음으로 여겨달라”고 호소했다.

    김씨는 올해 안에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8권의 책을 낼 예정이다. 중국쪽 백두산에서 장기 체류하며 곤충생태를 살필 계획도 세웠다. 직접 북한에 들어가 북한 산하의 곤충생태도 연구하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 때문에 엄두를 못내 ‘미칠 노릇’이다.

    그는 “새삼 IMF체제 이전 시절이 그립다”고 한다. 그때는 과학지 특파원 형식으로 해외 필드도 많이 나갔다. 특집기사를 써주면 100만∼200만원은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에 몇 군데 기고하면 연구비를 웬만큼 충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밤무대 뛰는 심정’으로 받아들였던 취재청탁도 잡지사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일이 끊겼다.

    “생물학은 궁극적으로 ‘진화’의 뿌리를 쫓아가는 학문입니다. 한반도 전체의 곤충생태를 연구하지 않으면 지금껏 연구해온 곤충 종의 분화연구를 완성할 수 없어요. 저의 마지막 논문 제목은 ‘종의 진화’로 잡아놓고 있습니다. 물론 이건 북한 연구가 실현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죠.”

    그가 추진하고 있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곤충박물관이다. 실제 박물관은 꿈도 꾸기 어려워 사이버 곤충박물관을 세울 계획이지만, 2억원이나 소요되는 탓에 주춤거리고 있다.

    그는 곤충 관련 전공자들이 석·박사 학위를 따고도 극소수만이 학교 강단으로 흡수되는 실정도 안타깝게 여긴다. 나머지는 설 자리가 없다. 그는 이들을 끌어안아 연구를 계속하게 해줄 방법이 없을까 싶어서 여러모로 머리를 짜내고 있다.

    무시와 시기를 함께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한 우물을 파온 그는 “누구든 한 분야를 10년 이상 파고들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자신 같은 ‘현장학자’가 많이 나와야 학계는 물론 국가도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산등성이를 오르내린다. 그리고 기다린다. 산꼭대기에 올라 막 부화하려는 곤충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며칠을 꼼짝하지 않고 버틴 적도 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의 학문이든 학식 열정 애정 끈기 인내를 갖추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학문이란 결국 기다림이다.”

    ♣글·박은경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 종이의 수명은 1000년이고 비단의 수명은 500년이다. 종이의 우수한 내구성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처럼 장수하는 종이에 그린 서화(書畵)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어떤 재료를 사용해 쓰고 그렸냐에 따라 다르지만, 원래 상태 그대로는 수백년을 견디기 어렵다. 정성스런 장인(丈人)의 손길을 통해 좋은 틀에 놓이고, 적절한 곳에 보관했을 때 서화는 더욱 빛을 발하고 생명도 연장된다. 그래서 중국 명대(明代)의 표구사(表具師)인 주가주(周嘉胄)는 표구의 이론과 실제를 담은 책 ‘장황지(裝潢志)’에 “옛 작품을 다시 표구하는 일은 의사가 중병이 든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다”고 썼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에는 표구사가 여럿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표구사 이효우(李孝友·61·낙원표구사 대표)씨는 30년 동안 한자리에서 오로지 표구, 표장(表裝)과 고서화 복원에만 매달려온 터줏대감이다. 사람들은 그를 ‘죽은 고서화도 살리는 명의(名醫)’라고 부른다.

    “표구사라고 하면 족자나 병풍을 만드는 손놀림 좋은 기능공 정도로 생각하는데, 표구는 서화작품을 보존, 복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입니다. 표구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고 보존기간이 달라집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에요.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데, 그저 풀칠이나 하는 사람쯤으로 취급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씨가 낙원표구사를 연 때는 1973년. 하지만 그와 서화의 인연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 강진이 고향인 이씨는 대대로 서화를 아끼고 즐기던 명문가 출신. 집에 서화 작품이 많았고, 남농 허건, 소전 손재향 선생 같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작품이 많다보니 집에서 필요한 족자나 서화첩은 집안 어른들이 스스로 만들어 썼는데, 이때 작업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이 표구일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나이 스물이 되자 봇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가 해운당 안치조 선생 곁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본격적으로 표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몇 년간 안선생을 사사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작업장을 갖게 됐다.

    “얼마나 배우면 표구일을 할 수 있냐, 고서화 복원은 어느 정도 배워야 할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이 일은 학교에서처럼 수업 듣고 졸업한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작품마다 소재가 일정치 않고 변형된 정도도 다르니 정형화한 방법이 있을 수 없죠.”

    그는 “나는 지금도 고서화 일감을 접하면 ‘다시 배운다’는 심정으로 작품 앞에 선다”고 말한다.

    “고서화를 복원하는 것은 다시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난초를 그린 작품의 경우 ‘삼전기법’이라고 해서 난초 줄기가 꺾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어떻게 그려졌는가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요. 그런 부분에는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죠.

    또한 초상화에서 수염이 끊어져 잘 보이지 않는다고 중간 부분에 임의로 그려넣으면 안됩니다. 고서화 복원은 색깔이 없어진 부분, 떨어져나간 부분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보색(補色) 과정입니다. 그래서 판단이 중요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복원할 것인지, 기존의 색깔을 어떻게 배색할 것인지, 어떤 비례로 만들 것인지, 마지막 포장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 판단은 수치나 계산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표구사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작품이 들어오면 먼저 어떻게 작업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작품의 훼손 정도를 살펴보고 어느 부분을 어느 정도까지 복원할 것인가를 가늠하고, 앞으로 어떤 상태로 보존해야 작품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인지를 판단한다. 이 부분에서는 의뢰인과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한다. 작품을 소장할 당사자의 의사를 들어봐야 하고, 표구사의 계획을 의뢰인에게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표구를 단순히 작품만을 다루는 작업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은 표구사를 못 믿는 의뢰인도 만납니다. 때로는 족자만 건네주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주문하는 분도 있어요. 하지만 표구에서는 맡기는 사람과 장인과의 교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의뢰인은 표구사를 신뢰해야 하고, 표구사는 의뢰인의 취향과 작품의 가치에 맞는 표구방법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니까요.”

    계획이 세워지면 기존의 작품을 해체하고, 작품을 펴 고정한 다음 이물질이나 뒷쪽의 산화된 종이를 제거한다. 그다음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시작된다. 주된 작업은 박락(剝落)된 부분을 채워 넣는 것. 원래의 색과 똑같은 물감을 만들어 이를 덧씌우는 일이다.

    보색이 끝나면 새 종이를 배접(褙接, 겹쳐붙임)한다. 가능한 한 원래 배접됐던 것과 같은 재질로 보이기 위해 새 종이를 오래된 종이처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열화(劣化)시킨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복원한 작품을 표구하는 것이 마지막 과정이다.

    어찌 보면 간단할 것 같은 이 과정을 모두 거치는 데는 작품마다 다르긴 해도 대개 3명이 함께 작업해서 3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당장 작품의 겉모양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도록 작품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목포사람이 서울에 와서 표구 주문을 하면 목포의 기후와 환경을 고려해서 일해야 합니다. 습도가 좀 높은 곳이라면 풀을 더 많이 써야 하고, 건조한 곳이라면 또 그에 맞게 방법이 달라져야죠.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표구를 배워가서는 ‘한국의 표구 수준이 별것 아니다’고 하는데, 풀의 미세한 농도 차이까지 민감하게 반영되는 게 표구입니다. 한국에서 하는 것과 일본에서 하는 것이 같을 수 없죠. 요즘엔 일본사람들이 한국의 표구비용이 저렴하다고 해서 여행차 왔다 가는 길에 표구를 해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는 장담 못하겠어요. 지역마다 그 지방의 기후조건에 맞는 음식이 발달하듯 표구에도 정석(定石)이란 없습니다.”

    문외한에게는 그림이면 다 똑같은 그림이지, 그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세세한 변화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확한 규격을 요구하고 정리된 방식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직감과 경험, 장인의 판단을 강조하는 이씨의 말은 시대에 좀 뒤떨어진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40년 이상을 표구에만 몰두해온 그가 국가에서 부여하는 표구사 자격을 취득하지 않은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표구사 자격시험을 보러 가면 하루만에 작품 하나를 만들라고 한다는데,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죠. 아무리 짧아도 보름, 길게는 수개월이 걸리는 작업을 겨우 한나절에 해서 그것으로 실력을 평가받는다니….”

    객관적인 평가나 자격은 필요하겠지만, 빠르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세태가 그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장인정신은 고집스레 능화판(菱花板)을 사용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능화판은 책표지에 들어가는 문양을 찍는데 사용하는 나무판으로, ‘책표지틀’이라 할 수 있다. 능화판으로 책표지를 만드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먼저 박달나무 같은 단단한 재질의 나무에 문양을 새긴다. 여기에 들어가는 문양이 주로 마름모꼴이라 해서 ‘마름모 능(菱)자’가 들어간다. 판이 완성되면 판과 종이 위에 벌집에서 뽑은 밀랍 덩어리를 고루 문지른다. 그후 판 위에 종이를 얹고 고운 돌로 문지르면 새겨진 무늬가 종이에 그대로 도드라져 나온다.

    이런 과정을 거친 종이는 표면에 윤기가 흐르면서 은은한 느낌을 주고 방수까지 된다. 이것을 책표지로 삼는 것이다. 이씨는 능화판으로 작업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며 “이렇게 만들어진 책표지는 요즘 코팅한 책표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능화판으로 만든 책표지는 만드는 데 들어간 정성도 정성이거니와 자극적이지 않은 한지의 색깔 때문에 눈도 피로하지 않고, 손을 다칠 염려도 없으며, 비닐코팅 재질이 아니니 환경오염의 걱정도 없다. 능화판으로 만든 표지를 씌우고 손수 실을 꿰어 만든 한지공책을 보면 누구라도 손이 간다.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냐는 물음에 이씨는 “힘 닿는 데까지 하겠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걸레질하는 것부터 시켜도 표구 기술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요새는 아예 없다”고 아쉬워했다.

    “요즘은 표구 물량이 많이 줄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을 안하려는 게 더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고서화를 보존 처리하는 일은 숙련된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데, 그런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갈수록 줄고 있어요.”

    작업실에서 일하는 광경을 보여준 후 이씨는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한방 가득 모아둔 책과 그림을 보여주면서 흐뭇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고향에 돌아가 조그만 책방을 낼 생각입니다. ‘시서화(詩書畵)가 있는 강진’이라는 이름을 붙여봤는데, 고향 땅에 둥지를 튼 뒤 지인들과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며 남은 생을 조용히 보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와 악수를 나누는 순간, 수천 점의 서화를 어루만지며 거칠대로 거칠어진 그의 손바닥이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글·곽대중

    박교수(朴敎秀·66)씨는 유실수 육종(育種) 연구에 40년 세월을 바친 끝에 ‘멀티게놈’ 육종에 성공, 다기능 식물 ‘유토피아’를 개발해낸 주인공이다.

    지난해 동국대 산림자원학과 교수에서 정년 퇴임한 그는 요즘 수원시 곡반정동에 있는 1만8000여 평의 농장과 한국유실수과학연구원(Eden Park Utopia Academy Center)을 이끌고 있다. 연구원의 영어 명칭에는 40년에 걸친 꿈이 그대로 녹아 있다. 지구 곳곳에 ‘유토피아(Utopia)’ 나무를 심어 ‘에덴동산(Eden Park)’을 만들겠다는 희망이 이제 비로소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는 인구과잉으로 포화상태고, 식량·에너지·환경이 지구를 위협하는 3대 위기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장차 이를 극복하고 청정한 물과 공기를 제공할 뿐 아니라 가뭄과 흉작, 폭우와 홍수, 태풍 등 이상기후에 의한 재해를 방지하며, 푸르고 쾌적한 숲을 가꿔낼 수 있는 꿈의 나무가 바로 유토피아입니다.”

    박씨가 유실수 육종에 혼신의 정열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12세 때 죽음과 조우(遭遇)하면서 비롯됐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미군 트럭에 빨려 들어가면서 의식을 잃었다가 일주일 뒤에야 깨어났다. 열 개의 트럭 바퀴가 짓누르고 간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왼쪽 대퇴부는 탈골됐고 뼈가 으스러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가족과 의사, 간호사가 침대를 에워싼 채 마치 시체를 대하듯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썩어들어가는 다리를 절단하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자 그는 죽기를 작정하고 단식했다. 며칠을 굶었을까, 의식을 잃고 다시 병원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게 페니실린이라는 거다. 이 약 한 방울이면 다리를 안 잘라도 된다. 미군부대에서 어렵게 구해왔다. 너를 위해 이 한 병을 다 쓰겠다”는 의사의 말이 그에겐 천상의 복음처럼 들렸던 것이다.

    죽음에서 구원된 순간 그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살려낸 의사처럼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인가. 아니면 가난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들을 위해 우장춘 박사 같은 학자가 되어 그들을 기아에서 구해낼 것인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2만평의 농지를 소유했던 우리 집안이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하루 아침에 몰락했어요. 그때 닥쳐온 지독한 가난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랬지만, 주변에 영양실조로 부황이 들어 누렇게 뜬 얼굴로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죠.”

    부지런하고 벼락 같은 성미로 야생마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열두 살 소년의 가슴에 평생 뿌리내릴 꿈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 즈음이다.

    당시 산에는 밤나무와 호두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또한 집집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그 열매로 거둬들이는 돈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사람들이 산을 통째로 사서 입도선매하는 바람에 돈은 전부 그들 몫이었다.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에 아름드리 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수확하면 적어도 굶어죽는 가난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기왕이면 고추나무처럼 나무의 키를 작게 하고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게 해서 누구라도 쉽게 배불리 따먹게 할 수는 없을까.

    옥천농업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그런 꿈을 실험할 기회를 우연하게 잡을 수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원예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그가 전쟁통에 살던 동네로 피난을 와있었는데, 그로부터 접목법을 배웠던 것이다. 그후 친구네 복숭아 과수원 2000평을 연구소 삼아 접붙이기에 나선 그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감나무 한 그루에 여러 종류의 감이 열리게 하는 ‘아접’에도 성공하자 그는 고향마을에서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유실수뿐 아니라 미국산 닭과 돼지, 토끼 등 수천 마리의 가축을 기르며 중·고등학교를 다닌 그에겐 ‘대학생’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새벽같이 일어나 풀을 베고, 과수원과 가축 돌보는 일을 혼자 힘으로 해야 했기에 학교엔 번번이 지각을 했기 때문이다.

    큰아버지가 대목(大木)이라 집에 이런저런 연장들이 굴러다니곤 했는데, 그는 이것을 이용해 곧잘 쟁기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쓰곤 했다. 거름을 나르는 리어카도 직접 나무로 만들었다. 박씨는 그 시절에 갈고 닦은 솜씨를 바탕으로 연구원에서 쓰는 6종의 농기계를 설계하고 개발했다. 그중 2개는 특허출원중이다. 농장 일꾼들은 나무 가꾸는 일은 물론, 기계 다루는 솜씨도 ‘빠꼼이’인 그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했다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쉴새없이 사람을 몰아붙이기 때문에 농장 직원들은 두 달을 못 넘기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인간이 1000년을 산다면 모를까, 겨우 한 순간인 인생에서 쉬어갈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린 시절 죽음 직전까지 다가섰다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인생관이다. 얼마전 지독한 몸살을 앓았던 것도 무리한 작업 때문이었다. 철공소 사람을 불러 고장난 기계를 손보다가 하도 답답해서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게 화근이었다.

    충북대 농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온기도 없는 자취방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공부에 매달렸다. 이루고자 하는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었기에 그 시절도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죽음’과 ‘성공’ 외에는 관심을 끊고 살겠다고 작심한 터라 욕도 많이 먹었다. 연구비로 몇십억원을 날리고, 가족은 제쳐둔 채 얼마 남지 않은 땅까지 팔아치우고 연구에 몰두할 때는 “염치없다” “냉혹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졸업 후 농촌진흥청 임목육종연구소에 근무할 때도 극심한 견제와 시기를 견뎌내야 했다. 기능성이 있는 특용수와 유실수를 연구하겠다고 연구팀장으로 들어갔는데, 수십 개 연구팀 거의 전부를 특정 명문대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텃세와 따돌림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연구비를 타는 방법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2년쯤 지나서야 연구소의 생리를 터득했고, 어릴 때부터 꿈꿔온 ‘고추나무 키만한 유실수’에 버금가는 ‘난쟁이나무’를 개발했다. 이를 필두로 수많은 연구실적을 쏟아내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집념과 끈기로 일궈낸 연구성과를 국내외에 발표한 논문 40여 편과 저서 20여 권에 담았다. 과학기술분야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그가 개발한 호두나무와 밤나무 등의 유실수 재배법을 보급하기 위해 7편의 기술영화를 제작했다.

    농촌진흥청 연구소에 근무하던 1965년 한국유실수과학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이곳에서 ‘유토피아’ 육종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그 결과 2000년, 영하 40℃의 극한지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생명력의 한국형 품종 유토피아가 탄생했다. 유토피아는 첫 열매를 맺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여느 나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유토피아의 근간은 ‘크리아일리노엔시스(Cryillinoensis)’란 학명을 가진 나무다. 박씨가 이 나무를 처음 접한 곳은 미국 미시시피강 하류였다. 2만년 전 지구가 빙하기에서 벗어나면서 육지의 판(板)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때 이 지역에 열대 및 난대성 식물이 착근됐다. 그는 원래 열대성이던 이 식물이 지구 북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을 처음 알아내고 변이품종의 개발 가능성을 점쳤다.

    그후 40년에 걸친 연구 끝에 복합다기능 신품종으로 육종된 것이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은 그가 ‘지상낙원’을 그리며 직접 붙인 것이다.

    “밤나무에는 밤만 열립니다. 감나무엔 감만 열리죠. 하지만 유토피아는 50종의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유용성이 여느 나무의 50배에 달한다는 의미죠. 가령 의약품으로 활용할 목적이면 의약품 성분이 함유된 열매를, 화장품이나 식품 원료로 쓸 목적이라면 화장품과 식품 성분이 들어 있는 열매를 마음먹은 대로 열리게 할 수 있어요.”

    현재 그의 연구원 농장에는 5만여 그루의 유토피아 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이 가운데 다 자란 성목 400여 그루를 토대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조만간 학계에 발표할 예정이다. 아울러 2005년까지 기후대별로 신품종 유토피아 개발기지 완성을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중국과학기술대학 석좌교수로, 중국과 연계한 동북아생명과학한림원 원장을 맡고 있는 박씨는 기지 물색을 위해 중국측과 협의중이다.

    서울 구기동에 있는 그의 집 지하 30평 공간은 약리학, 분자학, 유전공학, 생물공학 등 신품종 나무를 개발하기 위해 섭렵한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 가득하다.

    “관련 학문을 통합해서 연구하지 않으면 자신의 전공분야를 개척할 수 없습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죠. 저는 지금도 제자나 후배 같은 젊은 학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는 오늘날엔 자만은 곧 낙오를 의미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배우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죠.”

    ♣글·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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