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동아그룹은 회생할 것인가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23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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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건설 문화홍보실 T과장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정기적으로 인근 서점을 찾는 일이다. 매주, 그리고 매월 발행되는 각종 시사잡지들을 모니터링하기 위해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무실로 배달되는 잡지들을 편하게 받아보며 기사를 챙겼다. 그러나 자금난에 허덕이던 회사가 마침내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뼈를 깎는 원가절감 한파가 불어닥쳤고, 그 와중에 정기구독하던 잡지를 모두 끊어야 했다.

    서점 주인의 떨떠름한 눈총을 받으며 기사를 베껴쓰다 보면 명색이 대한민국 재계랭킹 11위 그룹 홍보실 사원의 자존심은 볼썽사납게 구겨진다. 하지만 회사의 명줄을 쥔 채권단으로부터 피 같은 돈을 꾸어다 쓰고 있는 형편에 자존심이 무슨 호사인가 싶어 이내 마음을 추스른다. ‘산소 마스크’ 신세를 지고 있는 회사부터 살려놓고 볼 일 아닌가.

    “바가지로 물을 달라”

    동아그룹은 한국 최초의 워크아웃 기업. 방만한 사업 확장과 차입 경영으로 부채가 4조원대를 넘어선 97년 말 IMF사태를 맞으면서 부도위기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모기업이자 주력계열사인 동아건설이 도급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사업을 벌인 게 화근이었다.

    다른 그룹 계열 건설회사들이 아파트 건축과 그룹 자체 공사로 상당한 양의 일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리비아 대수로와 발전소 등 해외 토목공사에 주력했던 동아건설은 국내 공사실적을 올리기 위해 재개발과 재건축 공사를 따내는 데 급급했다. 이 때문에 이주비 등을 지급하느라 종금사 등 제2금융권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단기 자금을 차입할 수밖에 없었고, 외환위기로 국내외 금융사정이 악화되면서 금리가 폭등하고 만기 연장이 어려워지자 회사는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동아는 98년 초 5개 은행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3600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았으나, 이 돈으로는 유동성 회복은커녕 단기 차입금을 상환하기에도 모자랐다. 최원석(崔元碩) 회장이 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직후인 그해 5월, 53개 금융기관이 다시 6000억원의 3차 협조융자를 해주기로 결정했다. 재계 7위의 기아에 이어 10위권의 동아마저 무너지면 한국 경제의 신인도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추락할 수 있다는 정책적 배려가 작용했다.

    하지만 이 돈은 한꺼번에 지급되지 않고 매일 금융기관에 어음이 돌아오는 대로 조금씩 내주는 형태여서 경영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단비가 되진 못했다.

    6월 금융감독위원회는 각 금융기관에 기업 구조조정 업무를 전담하는 조직을 설치,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대해 워크아웃을 실시하도록 했는데, 이를 계기로 동아그룹의 워크아웃 계획이 가시화했다. 경제관료와 기업인을 지낸 고병우씨(高炳佑·67)가 채권은행단 추천으로 6월5일 동아그룹 경영총괄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은행장들을 찾아다니며 3차 협조융자금을 한꺼번에 달라고 사정했다. “바싹 물이 마른 펌프에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야 다시 물을 뿜어올리지, 주전자로 졸졸 부어서야 물이 올라오겠느냐”고 설득해 은행장과 금감위의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7월에는 새로운 경영진이 구성됐다. 97년 말 129명이던 임원진은 42명으로 축소됐다. 이들이 제출한 자구계획을 검토한 채권단은 8월31일 동아그룹을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최종 확정했다. ‘동아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매각해 경영을 정상화하라’는 조건이었다. 이로써 동아그룹은 금감위의 ‘기업 구조조정 촉진을 위한 금융기관 협약’ 지침에 따른 국내 1호 워크아웃 기업이 됐다.

    그 후 동아의 자구 노력이 시작된 지 1년 반. 중간성적표는 어떤 내용일까. 구조조정, 부채 축소, 영업수익 증대를 통해 내실 있는 건설전문그룹으로 거듭나겠다고 한 그들의 약속은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을까.

    99년 상반기 흑자 전환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엇갈린다. 99년 4월 청와대는 당시 워크아웃이 진행중이던 89개 업체 가운데 동아건설 등 8개사 대표를 ‘격려 오찬’에 초청했다. 동아건설은 금감위와 기업구조조정위원회로부터 ‘전문경영인체제로 경영지배구조를 바꾼 후 각종 자구 노력을 통해 성공적인 기업개선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초청기업에 선정됐다.

    동아건설은 워크아웃 10개월 만인 99년 상반기 결산에서 2500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고 흑자로 돌아섰다. 인천 매립지 등 자산 매각을 통한 특별이익을 제외하면 여전히 적자였지만, 당시 건설경기가 침체돼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당기 영업이익이 250억원 적자에서 440억원 흑자로 전환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반기엔 경상부문에서도 흑자로 돌아서리라는 게 동아측의 전망이다.

    그러나 금감위는 6월 말 기준으로 동아의 자구계획 이행률이 21%밖에 되지 않았다고 상반된 평가를 내리며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촉구했다.

    워크아웃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니만큼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아직 이른 듯하다. 분명한 것은 동아가 건설 하나만은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 상당한 대가를 치렀으며,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경영혁신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아는 21개 계열사 가운데 동아증권 동아TV 공영토건 서원레저 등 13개사를 매각하거나 정리·합병했다. 동아건설을 제외하면 남은 회사는 대한통운 계열 3개사를 비롯, 대전축구팀과 대둔산레저(골프장), 동아주택할부금융 등 가격조건이 맞지 않거나 원매자가 나서지 않아 매각이 쉽지 않은 업체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문제는 대한통운이다.

    금감위가 동아의 자구계획 이행실적이 부진하다고 지적한 것은 대한통운을 아직 매각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워크아웃 계획에서 채권은행단이 99년 3월까지로 시한까지 못박아가며 대한통운의 매각을 조건으로 달았기 때문. 동아는 이 조건을 지키지 않은 탓에 신규 융자금에 대해 페널티 금리(16%)를 적용받아야 했다.

    팔 만한 건 다 팔았다

    이에 대해 동아측은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며 대한통운을 사겠다고 나선 곳이 없어 못 팔고 있을 뿐이다. 흑자를 내고 있는 대한통운을 1조원 아래의 가격으로 팔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고병우 회장은 “잘 되는 회사를 제값 받고 팔아서 빚을 갚고 주력기업(동아건설) 살리자는 게 워크아웃인데, 알토란 같은 회사를 헐값에 팔아서 어떻게 부채를 줄이라는 말이냐”고 반문한다.

    동아가 이처럼 대한통운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자구계획에 따라 계열사와 자산을 매각하는 과정에 워크아웃 기업의 설움을 톡톡히 당했기 때문이다. 채권단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빚 갚을 돈을 마련하느라 급급했던데다 경기침체로 원매자를 확보하기가 어려워 매각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팔다 보니 매각가격이 장부가격보다 훨씬 낮아 계열사와 자산을 매각할수록 오히려 적자 규모가 더 커졌다.

    예컨대 아파트를 지으려다 자금 부족으로 공사를 포기한 땅을 IMF체제 이전에 매입한 가격의 절반 값에 팔게 되니 기업결손은 그만큼 더 늘었고, 매각대금은 땅을 담보자산으로 갖고 있는 은행으로 고스란히 들어갔으며, 매각에 따른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 했다. 그렇다고 밑천 생각에 마냥 떠안고 있을 수도 없었다. 각종 경비와 세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증권거래소 이사장 출신인 고병우 회장은 특히 동아증권 지분을 98년 7월 주당 1500원의 헐값에 팔아치운 데 대해 아쉬움이 컸다. 증권인으로서 ‘전공과목’을 팔아치운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동아건설을 살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동아증권은 매각된 지 불과 몇 달 후에 기업가치가 열 배 이상 뛰어올랐다. 이런 뼈아픈 경험 때문에 대한통운만은 값을 제대로 받고 팔겠다는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

    이렇게 형제들이 팔려나가는 마당에 동아건설이라고 구조조정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노동조합의 워크아웃 동의서에는 인원 감축과 임금 삭감을 포함한 비용절감 방안이 명문화돼 있었다. 혹독한 군살빼기가 시작됐다. 97년 말 6500여명이던 직원은 99년 9월 3900명으로 40%나 줄었다. 당장 퇴직금으로 줄 돈이 없어 퇴사 후 직장을 구한 사람에게는 6개월 후, 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3개월 후에 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살아남은 자’들도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민주노총에서도 강성 노조로 분류되던 동아건설 노조는 2000년 말까지 상여금 800% 중 600%를 반납하기로 하는 등 임금과 각종 복리후생비 반납을 통해 2400억원의 경비를 절감하기로 결의했다. 장원윤 노조위원장은 “조합원들간에는 ‘그렇게 다 내줄 바에야 차라리 부도 내고 법정관리로 가자’는 반발도 있었지만, ‘부실 경영을 방관한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설득해 어렵사리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말한다. 회사측은 이와 같은 고통 분담에 대한 반대급부로 전 임직원에게 1인당 평균 1200주씩의 스톡옵션을 주기로 했다.

    고병우 회장 또한 상여금과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않는 대신 10만주의 스톡옵션을 받기로 채권금융단과 계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고회장이 스톡옵션을 받으려면 3가지 경영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즉 계약기간(3년) 안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고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며 ▲주가가 액면가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부채비율을 200%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목표는 지난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고회장이 취임하기 전에 채권금융단이 넘겨준 자료에는 동아의 부채비율이 373%로 나와 있었다. 고회장은 당시 10대 재벌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이 500%를 넘었으니만큼 자금사정만 좀 풀리면 이를 200% 이하로 낮추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사정은 딴판이었다.

    “재무상태를 실사했더니 숨겨진 빚이 1조6000억원이나 됐다. 실제 부채비율이 1000%를 넘었던 것이다. 이런 부채율을 가진 회사라면 없어지는 게 당연했다. 주변에서는 ‘분식결산한 사실이 밝혀졌으니 스톡옵션 계약서 내용을 바꿔야 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내가 373%를 200%로 만들겠다고 했는지, 1000%를 200%로 만들겠다고 했는지 누가 기억해 주겠는가.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하면 ‘저 사람, 이제 와서 자신 없으니 저런다’고 하지 않겠나. 그러니 스톡옵션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계약조건을 바꾸진 않겠다. 경영혁신을 통해 임기 안에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동아건설이 수익을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은 공사 원가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었다. 97년까지만 해도 평균 공사 원가가 공사 수주가격과 같은 수준이었다. 이익을 내려면 원가가 수주가격보다 한 푼이라도 적어야 하는 게 상식이건만, 원가율이 100%였다는 것은 결국 그때껏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먹고 살았다는 얘기였다.

    높은 원가의 주원인은 부실한 외주 관리에 있었다. 하도급 공사를 맡는 협력업체가 600여개나 난립해 있었는데, 회장실에서 넣으라면 넣고 빼라면 빼라는 식이어서 업체들의 기술수준이나 공사 실적이 제각각이었다. 더욱이 업체 선정과 도급 가격은 현장 소장이 알아서 정하는 게 관행이어서 원가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무원칙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업체 선정과 도급 가격 결정권을 외주관리부로 일원화했다. 외주관리부가 결정한 내용은 토목 플랜트 건축 등 공사관련 부서는 물론, 노조와 감사실까지 거쳐 이의가 없어야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또한 기존 협력업체들 가운데 현장 소장들의 의견을 물어 실적과 재무구조가 우수한 150개사를 추려내고 나머지 회사들은 탈락시켰다. 그러나 이들에게만 공사를 맡길 경우 자칫 담합할 가능성이 있어 그간 동아와 함께 일한 적이 없는 회사 150개를 협력업체로 추가 선정했다. ‘신참 반, 고참 반’의 경쟁체제를 유도한 것.

    공사가 있을 경우 이들 가운데 분야별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5개사를 공개입찰에 참여시켜 시공사를 선정한다. 입찰장에도 공사 관련부서들과 노조 대표 등이 참가해 공정을 기한다. 외주관리부 김한회 과장은 “건설회사는 전통적으로 반(半) 군대조직이다. 그러나 이제는 입찰과 관련된 어떤 절차에도 회장의 입김이 미치지 못한다. 회장의 친인척이 운영하는 업체라도 예외없이 자료를 제출하고 담당자와 마주앉아야 한다”고 변화상을 전한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평균 원가율이 98년에 94%, 99년에는 88% 수준으로 낮아졌다. 앞으로는 원가율을 80%까지 떨어뜨릴 계획이다. “마진이 20%는 돼야 우리도 빚 안 지고 먹고 살 수 있을 것 아니냐”며 뒤늦게 장삿속을 차리고 나선 것이다.

    ‘톱다운’에서 ‘바텀업’으로

    이와 같은 시스템 정비는 경영진이 독단으로 추진하는 게 아니다. 과거 오너지배체제에서는 주요 의사결정권이 회장의 몫이었다. 바깥에서 공사를 수주해 오는 사람도 회장이었다. 임직원들은 그저 회장이 따온 공사만 받아다 일하면 그만이었다. 철저한 상명하달 계통에 임직원들의 능동적·자발적인 참여의식이 발휘될 여지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이른바 ‘바텀업(Bottom-up)’ 경영이다. 기존의 ‘톱다운(Top-down)’ 경영과는 반대로 직원들의 의견을 아래로부터 적극 수렴하고 경영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그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 ‘TOP(any Time, any Occasion, any Place) 미팅’이다. 전 조직원은 대리, 과장급 가운데서 선출된 ‘TCA(Team Change Agent)’들의 주도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TOP 미팅을 갖는다. 이를 통해 직원 각자가 당면한 문제를 ‘TOP’, 즉 최고경영자가 돼 주도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이 수준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전산망을 통해 회장과 임원에게 건의하게 한다. 임원들은 이들의 건의사항을 처리한 후 회장에게 결과를 보고하게 돼 있어 직원이 임원에게 직접 문제 해결을 건의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TOP 미팅을 통해 수렴된 아이디어 중에는 비용 절감과 직결된 것도 많다. 임금을 깎고, 복지제도를 없애고, 사무용품 지급을 중단하는 식으로 ‘몸을 팔아’ 하는 비용 절감에는 한계가 있다. 문제는 독창적·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도입해 낭비 요인을 근원적으로 없애는 것이다.

    99년 여름 서해안의 한 공사 현장에서는 지역주민들의 민원(民願)을 줄이는 방안을 찾기 위해 직원들의 요구로 TOP미팅이 열렸다. 주민들이 공사장에서 발생하는 비산 먼지나 소음을 이유로 관청에 민원을 내거나 현장에 몰려와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며칠씩 공사를 못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 이럴 경우 값비싼 임대 장비 등을 놀리게 돼 하루에도 수억원의 낭비요인이 생긴다.

    이 미팅에서는 직원들이 아침마다 돌아가며 마을을 청소하고, 주머니를 털어 결식아동 돕기운동을 벌이며, 주민들과 카풀을 하는 방안들이 제기돼 실천에 옮겨졌다. 그 결과 주민들이 동아 직원들에게 친밀감을 갖게 됐고, 덕분에 민원 걱정 없이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에는 동대문에서 상가 건축공사를 하고 있던 동아 직원들이 TOP 미팅을 통해 준공기일을 앞당기라고 건의했다. 당초에는 추석 이후에 준공될 예정이었지만, 상인들을 추석 이전에 입주시켜 대목을 챙기게 해줌으로써 동아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할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이것도 그대로 수용됐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근무했던 한 직원은 “과거에는 본사가 현장 위에 군림하는 ‘상전’이었다. 그저 잘못을 찾아내 깨기만 하는 곳이어서 현장 직원들이 본사에다 대고 공사일정을 당기라 말라 요구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사외이사제 활성화

    경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사회도 강화했다. 17명의 이사 중 6명을 금융 법률 세무 분야 전문가인 사외이사로 구성했다.

    황창기 전 은행감독원장, 장철훈 전 조흥은행장, 김현철 변호사(전 서울고검 검사장), 김상수 세무사(전 국세청 부이사관), 홍성주 서울투자신탁 사장, 정광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 등이 그 면면. 공인회계사협회장을 지낸 김두황 회계사는 사외감사로 초빙됐다.

    “누구 하나 대충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다”는 게 동아 관계자의 설명. 이들은 월 1회 정기 이사회를 갖고, 현안이 있을 경우 정기 이사회와 관계없이 수시로 이사회를 갖는다. 고병우 회장은 “조만간 본격화할 한국 사외이사제의 전범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들이 이사회에서 토론하는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할 만큼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동아건설이 99년 상반기 결산에서 흑자로 돌아선 데는 물론 이와 같은 경영혁신도 한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인천 매립지 매각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인천 매립지는 70년대 후반 정부가 현대그룹의 서산 간척지와 함께 당시 중동에서 돌아온 건설인력과 장비를 식량 증산에 활용하기 위해 동아건설에 매립을 맡긴 373만평의 땅. 동아는 91년 준공허가를 받았으나, 농업용 도수로를 낼 방법이 없자 준공 직후부터 줄기차게 용도 변경을 요구해왔다.

    지루한 논쟁이 계속되던 끝에 고회장이 취임 후 김성훈(金成勳) 농림부 장관을 만나 “더 이상 용도 변경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정부가 인천 매립지를 매입해 용도를 결정하라”고 제의했다. 매각대금은 전액 은행 부채 상환에 쓰겠다고 했다. 또 향후 이 매립지와 관련된 공사는 동아에 맡겨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99년 3월, 정부는 이 제의를 수락했다. 당시 동아의 주채권은행인 서울은행을 영국의 HSBC에 매각하는 논의가 진행중이었던 터라 정부의 매입 결정은 서울은행의 부채 정리를 겨냥한 조치라는 분석도 나왔다.

    매립지 매각대금은 6350억원으로 결정됐다. 공시지가(96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었지만, 동아가 이 매립지를 조성하는 데 들인 비용(장부가격)은 1000억원 남짓했기 때문에 부채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층 긍정적인 조짐은 해외에서 감지됐다. 해외 공사 수주가 줄을 이은 것. 99년 6월 동아는 국내 건설업체 가운데 최초로 일본의 공공 건설시장에 진출, 후쿠오카 고속철도 등 6건, 3480만달러 규모의 토목공사를 수주했다. 당시 일본 건설시장에 참여하고 있던 외국 건설업체 중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결과였다.

    7월에는 캐나다 최대의 건설업체인 SNC와 새만금 지역 환경설비 및 수도권 매립지 가수발전소를 함께 건설하기로 하고 SNC로부터 1억50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어 8월에는 말레이시아 재무성이 발주한 바쿤 수력발전소 유로전환 공사를 따냈고, 9월에는 유럽시장에서 6000만달러 규모의 전환사채(CB)를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리비아 대수로 3차 공사를 따낸 것은 해외 건설시장에서 동아건설이 건재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기적의 생명수를 뿜어올린 리비아 대수로는 동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 동아는 1차 공사를 92년에 끝마친 데 이어 2001년 2차 공사를 완료할 예정이었다. 3차 공사도 당연히 자신들에게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상황에 회사 자금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돼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97년 11월 리비아 정부는 3차 공사를 국제 입찰에 부쳤다. 동아건설과 현대건설, 그리고 프랑스 건설회사가 참여했다. 입찰 결과는 98년 6월30일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돌연 리비아측이 “입찰 결과와 상관없이 정부가 시공사를 직접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아는 입찰가를 11억6700만달러로 써냈는데, 이는 프랑스 회사(7억6000만달러)와 현대(11억4500만달러)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속이 바짝 탄 고병우 회장은 7월 신복영 서울은행장과 함께 급히 리비아로 날아갔다. 알 가우드 대수로청(GMRA) 장관을 만나 공사를 달라고 했더니 첫 질문이 “동아건설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였다. 고회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물론 살아남는다. 재계 7위의 기아가 부도 나면서 IMF체제가 왔는데, 10위권의 동아까지 부도 나면 한국경제는 또 한번 위기를 맞는다. 더구나 건설회사가 무너지면 자동차회사가 무너진 것보다 영향이 더 크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동아를 살릴 것이다. 또한 동아는 자산이 많은 회사다. 단기 차입금 때문에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지만, 은행들이 지원을 계속할 것이므로 반드시 살아난다.”

    동석했던 주 리비아 대사가 “한국정부가 건설부 장관을 지낸 고회장에게 경영을 맡긴 것을 보면 동아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확인되지 않느냐”고 거들었다. 신복영 행장도 “우리(채권은행단)는 자산이 건실하고 기술력이 높은 동아를 확고하게 지원할 것”이라며 분위기를 잡았다.

    다음날 열린 회의에서 가우드 장관과 고회장 일행은 3차 공사를 동아와 리비아의 합작회사인 알라르에 맡기는 데 합의했다. 리비아측은 ‘동아 이외의 어떤 회사에도 공사를 주지 않을 것이며, 동아 이외의 회사와는 합작회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줬다.

    그 후에 들은 얘기로는, 동아의 기술력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리비아는 처음부터 3차 공사를 동아에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입찰에 부친 것은 공사가격을 깎으려는 속셈이었다는 것. 카다피 대통령은 미국이 리비아를 폭격할 때도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던 동아 근로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기대와 우려

    동아 직원들은 고회장이 도입한 경영혁신 방안을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장원윤 노조위원장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여 회생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고 평가했다.

    “조직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대화가 활성화했고, 경영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에 노사 간부들이 함께 참석해 견제와 균형을 기할 수 있게 된 점 등은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해 이사 감사 주주총회 등 상법상 기구들이 제 기능을 다하게 되면 투명경영이 뿌리를 내리리라 본다.”

    하지만 우려 섞인 시각도 있다. 바텀업 경영이 지고지선의 개혁방안으로 강요돼선 안 된다는 게 그 하나. 건설은 수주와 설계 단계에서 계획을 세운 대로 차질없이 시행돼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확고한 톱다운 계통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텀업은 투명경영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그것 자체가 목표가 돼선 안 된다는 얘기다.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바텀업을 하라며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 그러다 안 되면 너희 책임이다’는 식으로 몰아가면 곤란하다. 바텀업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도출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현실에 어느 조직, 어떤 사안을 불문하고 획일적으로 바텀업을 적용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없는 문제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다가는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볼 우려가 있다.

    바텀업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회장-사장-본부장-팀장으로 이어지는 정조직이 죽어 있다. 정조직 구성원들이 손을 놓고 위만 바라보고 있다. 우선 정조직을 살려 톱다운부터 제대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고회장이 제시하는 개념들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아이디어는 수습하기 어려울 만큼 많이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 기업 현실과 동떨어진 게 많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동아의 경영은 ‘연습’이 아니라 ‘실전’이어야 한다”는 불안감이 담겨 있다.

    또 다른 직원은 현 경영진이 코 앞의 워크아웃 계획에 급급해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부채율 200%니 뭐니 하는 수치가 아니다. 회장이나 임원은 워크아웃 기간 3년만 일할 사람들이지만, 우리야 10년, 20년씩 동아에 몸담아야 하지 않는가. 먼 안목의, 그러나 공허하지 않은 우리 나름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동아는 회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그 발판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향곡선이던 사세(社勢)가 바닥을 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남은 것은 도약이다. 안정된 도약은 ‘톱’과 ‘바텀’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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