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미디 황제 이주일씨의 연예계 복귀가 화제다. 지난 11월29일~12월1일 세종문화 회관에서 공연한 그는 앞으로 1년동안 지방순회공연에 나설 계획이다. 그를 만나 한편의 코미디 같은 그의 인생비사와 ‘얼굴 철학’을 들어봤다. 》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하루 2회 공연인데 매회 꽉꽉 들어찼다.
기자가 공연장을 찾은 것은 공연 둘째날인 11월30일. 공연(오후 4시30분)시간이 임박했는데도 공연장 안팎은 매우 어수선했다. 매표구 앞에선 암표상들이 현장에서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표 다 팔렸다”고 친절히 안내하고 있었다. 출입문 앞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었다. 전화 예매를 했던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담당 직원과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자리가 제때 제대로 안 나자 고성이 오가고 때로 욕지거리까지 터져 나왔다.
공연은 제목(‘이주일 울고 웃긴 30년’)에 걸맞게 파란만장했던 이씨의 삶을 축약해 극화시킨 것이었다. 첫 장면은 이씨의 무명 시절 일화. ‘남진 쇼’에 보조 사회자로 출연하기로 돼 있다가 못 생겼다는 이유로 단장으로부터 퇴짜를 맞는 장면이다.
이씨는 2시간 동안 녹슬지 않은 춤과 노래 솜씨, 그리고 폭소를 자아내는 즉석 개그를 선보였다. 그러나 마냥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관객들은 그의 무명시절 설움과 아들을 잃은 슬픔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씨 인터뷰는 12월4일 경기도 성남에 있는 그의 농장에서 진행됐다. 수많은 바위와 소나무들이 자리잡은 널따란 정원,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밭, 그리고 축사가 눈에 들어왔다. 약 1500평 크기라고 한다. 그는 공연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몸살이 났다며 훌쩍거렸다. 무대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의 나이가 비 갠 후 풍경처럼 또렷해졌다.
이씨는 공연 얘기부터 꺼냈다.
“원래 그 대목은 안 집어넣으려 했는데 제작진이 넣자고 해 할 수 없이…. 우리 아이 말입니다. 집사람에게는 속였습니다. 공연 보러 오겠다는 걸 말렸는데, 보고 싶다고 기어이 와서 그 장면을 보다 쓰러졌어요. 바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당신만 생각하고 내 생각은 안 하냐며 울부짖더라고요.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는데 그 일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이씨의 부인은 정신적 충격이 심했던지 퇴원한 후에도 집에서 누워지낸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그 대목’이란 7대 독자인 아들의 죽음을 극화한 장면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그의 아들은 91년 유학중이던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때부터 그는 수염을 길렀다. “깨끗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언론 보도를 보니 6회 공연 모두 매진이었다고 하던데, 관객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2만4000명쯤 됐을 겁니다. 3층까지 좌석이 약 4000석인데 하루 2회 공연이니. 개관 이래 신기록이라고 해요. 첫날 공연장 밖에서 난리가 났어요. 전산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표가 중복된 겁니다. 600여 만원을 물어줬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돈 받고도 안 가는 겁니다. 환불받으러 온 게 아니고 공연 보러 왔다며. 사무실 의자를 다 동원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단에 앉아 봤다니까요.”
그가 무대에 오른 것은 80년대 초 대한극장 공연 이후 20년 만이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초조하고 긴장했다고 한다. 세종문화회관이 주는 중압감도 컸지만 더 큰 이유는 역시 나이였다.
세종문화회관 정복(?)
“힘들어요. 예전엔 여건도 좋지 않았잖아요. 기차 버스로 이동하며 하루에 3∼4회 공연을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는데 요즘은 여건도 좋은데 힘들더라고요.”
그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그는 80년대부터 꾸준히 세종문화회관의 문을 두드렸다. 대여섯 차례 공연 신청을 했는데 매번 허가가 나지 않았다. “회관의 격이 떨어진다” “좋은 시설물 버린다” 따위의 이유로 심의위원회가 그의 공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페라를 공연하면 중산층 이상이 오기 때문에 (무대가) 안 버리고, 우리가 공연하면 서민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다 버린다는 거예요. 시민이 갈 수 있는 데가 세종문화회관 아닙니까. 시민 누구나 갈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대학교수라는 녀석들이 그런 결정을 해요. 내가 그래서 이번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씨 공연을 기획한 ‘르네상스 21’에 따르면 제작비로 6억원이 들었기 때문에 매회 매진이긴 했지만 크게 남지는 않았다고 한다. 공연 수익금은 전체 제작 경비를 약간 넘은 정도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공연 중엔 ‘이주일에게 영향을 끼친 100인’의 얼굴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순서가 있었다. 그중 전·현직 대통령들의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이씨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과는 80년대 후반 인연을 맺었다. 소년소녀가장돕기 자선공연을 힐튼호텔에서 했는데 그때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김대통령이 공연장에 들러 격려를 해준 일이 인연이 됐다는 것이다.
전두환 전대통령과는 축구로 인연을 맺었다. 이씨와 절친한 박종환 전 감독이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를 이룬 일이 계기였다. 그 인연으로 훗날 전씨가 백담사에 유배됐을 때 이씨가 위로차 방문했고 전씨는 이씨가 아들을 잃었을 때 상가에 찾아와 위로하는가 하면 그의 두 딸 결혼식 때도 참석했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군 장성으로 있을 때 알게 됐다. 노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지낼 때 이씨가 그의 부대에 위문공연을 갔다고 한다.
─ 말이 난 김에 묻겠는데요. 5공 시절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출연정지 당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잘못 알려진 거예요. 대학생들이 만든 말이에요. 그때 몇 개월 방송에 못 나간 건 그것 때문이 아니고 ‘헤이’ 때문에….”
─ ‘헤이’요?
“그거 있잖아요. 제가 추던 이상한 춤요. 그 춤 때문에 전국적으로 문제가 많이 생겼어요. 전국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애들이 전부 그 짓 하고 다녔으니까. 수업시간에 선생이 불러도 그 짓 하면서 앞으로 나가고, 하교길에서도 전부 그 짓 하면서 걸어가고, 부모님이 심부름 시켜도 그 짓 하면서 가고…”
어린 시절 그의 코미디에 배를 잡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억할 것이다. 이씨 특유의 오리 궁둥이 춤인 ‘헤이’ 춤을.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길거리에서 ‘헤이’를 외치며 이씨의 몸짓을 흉내냈던가.
“애들이 말투까지 그대로 따라했지요. 그것 때문에 전국에서 교장단 회의가 열렸다는 것 아닙니까. 교장단이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고, 방송국에도 넣었어요. 애들 다 버린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요즘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때 초등학교 아이들이 지금 30대인데 내 춤 때문에 버린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요. 내가 책임져줄 테니.”
─ 공연 때 김대통령을 소재로 성적인 농담을 하던데요. 말리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말릴 이유가 없는 거죠. 이것 못하고 저것 못하면 할 게 뭐 있습니까. 만약 그걸 문제삼는다면 앞으로 더 진한 것을 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걱정하는 사람들은 있더라고요. 아, 괜찮지요. 나이 많은 대통령이란 걸 세상이 다 아는데. 그분이 그런 것(발기)과 관계없다는 게 뭐가 나쁜 얘기냐 말입니다.”
박근형은 안 때리고…
이씨는 무대에서 소개한 ‘100인’ 중 특별히 박근형 박종환 하춘화 세 사람의 사진을 크게 내걸어 남다른 인연을 강조했다. 탤런트 박근형씨는 이씨가 무명 시절 따뜻한 마음을 건넸던 사람이고 축구 감독 박종환씨는 이씨의 고교 시절 축구부 동기였다. 가수 하씨는 이리역 폭발 사고 때 이씨 등에 업혀 살아난 사람이다.
박근형씨와 관련된 일화 한 가지. 어느 지방 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씨가 사회자고 박씨는 초대 손님이었다. 공연 시작 전에 시간이 남아 두 사람은 박씨의 친구와 함께 낮술을 했다. 간단하게 한다고 시작한 술자리가 한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돼 무대에 오른 이씨는 취기를 가누지 못해 비틀거렸다. 관객들은 연기인 줄 알고 폭소를 터뜨렸다. 이어 이씨의 소개로 박씨가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박씨 또한 심하게 비틀거렸다. 급기야 두 사람이 서로 붙잡고 엎어지는 추태가 벌어졌다. 그제야 눈치를 챈 관객들이 야유와 욕설을 보냈다. 극장엔 일대 소란이 일었고 공연은 중단됐다. 흥분한 일부 관객들이 무대로 몰려들었다.
“박근형씨 친구가 자꾸 ‘한잔 더’ 하는 바람에 그리됐어요. 그런데 관객들이 박근형씨는 안 때리고 나만 때리더라고요.”
이씨의 친구 가운데 빼놓으면 섭섭한 사람이 바로 박종환 축구감독이다. 두 사람은 춘천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함께 뛰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고교 졸업 후에도 이어졌다. 박씨는 이씨가 유랑극단을 떠돌던 무명 시절 평생 잊지 못할 우정을 보여줬다.
“어려울 때 쌀 몇 말, 미역 몇 줄기가 얼마나 큽니까. 집사람 출산을 앞두고 공연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었어요. 어렵던 때라 집에 쌀도 없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가 쌀과 미역을 보내준 겁니다. 집사람은 그 덕분에 산후조리를 잘 했습니다.”
─ 축구부 시절 포지션은?
“라이트윙이었어요. 박종환씨는 풀백이고.”
─ 잘 하는 선수들은 특차로 진학하지 않았어요?
“박종환씨는 경희대 특차로 뽑혀갔고 나는 특차 자격 없이 그냥 올라갔는데 등록금을 안 내는 바람에 입학을 못했습니다.”
─ 운명의 갈림길이었군요. 그때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들어가 축구를 계속했더라면….
“지금도 축구를 했겠죠.”
─ 집이 어려워 등록을 못했습니까.
“그게 아니고, 아버지가 마련해 줬는데 하숙집에서 노름하다 날려버렸어요. 네 명이 ‘섰다’를 했는데 하룻밤에 다 날렸어요. 그길로 군에 입대해버렸어요. 아버지한테 매 맞을 것 같아….”
─ ‘섰다’ 때문에 군에 입대했다?
“예.”
─ 아버지한테 엄청 맞을 일이었군요.
“그럼요. 군에 가 2년 동안은 휴가 나와도 집에 들르지도 못했어요.”
─ 아버지가 엄하셨나요.
“예. 공무원이었는데 아주 엄하셨어요.”
─ 군에서 문선대 활동을 했죠?
“그게 연예 활동의 계기가 된 것이죠. 61년인데 강원도 화천 최전방으로 배치됐어요. 하도 힘들어 좀 편한 데 없냐고 주변에 물어보니 문선대가 있다는 겁니다. 문선대는 민가에 있었는데, 시내를 돌아다니며 머리도 맘대로 기르고 사복도 입을 수 있었어요. 거기를 찾아가 거짓말을 했지. ‘서영춘 쇼’ 사회를 보다 왔다고. 해볼 수 있는 게 뭐냐고 묻기에 서영춘 흉내를 냈어요. 그랬더니 엉터리라고 ‘빠따’를 쳐요. 그때 문선대에서 연출을 맡았던 친구가 지금 한국화장품 회장으로 있는 사람입니다. 고대 재학 중 군에 들어왔어요. 상병이었는데 그 친구가 날 잘본 모양인지 부대장에게 얘기한 거라. 엊그제 왔던 놈 다시 불러내자고, 코미디 소질 있는 놈이라고. 그게 시작입니다. 그 친구는 한 달에 한두 번 서울 출장을 갔는데 서울 갈 때마다 당시 시민회관에서 하던 ‘서영춘 쇼’ ‘배삼룡 쇼’를 녹음해와 내게 테이프를 건네줬어요. 그걸로 연습하고 1년에 두세 번 하던 전방 위문공연 때 그대로 재연해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남 흉내로 출발한 이씨는 뒷날 자신의 코미디 세계를 창조했다. ‘헤이’ 춤과 더불어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일단 한 번 와 보시라니까요’ ‘따지냐’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등 숱한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그중 대표작은 아무래도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일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과 경쟁의식을 무장해제시키는 그 어눌한 고백 한마디가 단숨에 그를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단점으로 여길 만한 것을 오히려 성공 비결로 활용한 셈이다.
─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됐는데 얼굴 철학 같은 것이 있다면….
“사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얼굴에 국한시켜 한 얘기가 아닙니다.”
─ 하나의 상징이라는 얘기인가요?
“예. 잘 생긴 사람들만 으스대며 사는 세상을 꼬집은 겁니다. 잘 생긴 사람만 살아갈 수 있는 걸로 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기가 죽어 있고 뭔가 보여주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그런 현실을 표현한 거죠. 그 표현이 평소 기가 죽어 있던 사람들에게 다가간 거예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와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까요’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따지냐’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윗사람이 말할 때 아랫사람이 대꾸하면 ‘너 따지냐’ 하고 눌러버리잖아요. 그런 권위의식을 뒤틀어 말한 거죠.”
─ 상당한 풍자인데요.
“예. 풍자입니다, 풍자. 내가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내 얘기를 한 거예요. 외모만 두고 얘기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추남으로 보입니까.”
─ 어쨌든 스캔들은 한번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웃자고 한 얘기인데 이씨는 예상치 못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한때 성형수술도 생각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리역 폭발사고 때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수술비를 대준다고 해 공짜로 좀 고쳐볼까 하고 의사를 찾아갔더니 ‘당신은 그냥 이걸로 살아’ 하더군요.”
─ 얼굴과 관련된 일화가 많지요?
“그땐 다들 못 생겼다고 외면했지요. TBC가 서울과 부산에만 나왔을 때입니다. 방송에선 못 봐도 잡지나 신문에서 워낙 크게 다루니까 ‘초원의 집(이씨가 고정 출연해 인기를 끈 야간업소)’에 지방 사람들이 관광버스로 올라오는 거라. 버스로 몇 대씩 해서. 방송에 안 나오니 더 오는 거라. 도대체 얼마나 못 생겼기에, 한번 보자, 하고. 한번은 광주에서 버스가 5대 올라왔어요. 전부 주부들이었지요. 그런데 쇼가 끝났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해요. 분명히 난 출연했는데. 극장측에서 ‘이제 다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하자 관객들이 ‘이주일이 왜 안 나오냐’ 이래요. ‘조금 전에 나왔다’니까 ‘무슨 소리냐. (얼굴이) 엉망진창이라는데. 도대체 얼마나 못 생겼는지 한번 보러 왔다’ 이러는 거예요. 날 괴물쯤으로 생각한 겁니다.”
─ 그게 언제 일이죠.
“80년대 초였죠.”
─ 간첩으로 오인돼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죠.
“옛날 얘기예요. 유랑극단 시절.”
‘간첩 오인’ 사건은 이씨가 무명 시절 겪은 고생과 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우습지만 서글픈 일화다. 유랑극단의 지방 공연에서 보조 사회자를 맡았을 때 일이다. 대표 사회자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이씨가 초대손님인 유명가수를 소개했다. 그런데 이 가수는 무대에 나오지 않았다. 못 생기고 인기도 없는 사회자의 소개로는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이유였다. 관객들이 항의를 하고 소동이 벌어졌다. 단장에게 불려간 이씨는 엄청 두들겨 맞고 극단에서 쫓겨났다. 그길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재수 옴 붙었는지, 때마침 벌어지고 있던 대간첩작전 검문에 걸렸다. 못 생긴 얼굴에 특이한 복장이 죄였다. 간첩으로 몰린 그는 경북 김천경찰서로 끌려가 모진 매를 맞고 풀려났다.
그런 설움이 한으로 맺힌 걸까. 그래서 한 번 ‘잘 난 사람들의 세계’에서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이씨는 한때 ‘외도’를 했다. 정치 입문이 그것이다. 92년 그는 숱한 화제를 뿌리며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것은 그해 대선 때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 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일 못지 않은 빅 뉴스였다.
─ 정치는 언제부터 생각했습니까.
“원래는 생각도 안 했죠. 다 정주영 회장 때문에…. 사실 처음엔 연예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참여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더 가질 것 아니냐,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날 유도한 것 같아요. 정치를 하라고 말이죠. 난 그런 생각 없다고 했는데, ‘너 정치하면 가만 안 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야릇한 반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아주 희한한 일이 돼버렸어요.”
─ 총선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홍콩으로 출국한 일을 두고 온나라가 시끄러웠죠. 외압이니 자작극이니 말들이 많았는데요. 이 기회에 진상을 밝히시죠.
“‘홍콩 안 가면 너 죽인다’ 이런 건 아니었어요.”
─ 당시 워낙 자주 말을 바꿔 사람들이 헷갈릴 만도 했지요.
“그쪽에 있던 분들, 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입니다. 안기부에서 날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겁니다. ‘나오면(출마하면) 죽여’ 이런 건 아니었고. 좋은 뜻에서 그분들과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기관 쪽이나 정부 쪽 사람들이 ‘당신한테는 이게(코미디) 더 나은데 왜 정치를 하려고 그러냐’ 그래요. ‘나도 안 하려는데 자꾸만 일이 이렇게 된다’ ‘그러면 홍콩에 가 쉬었다 와라’.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쪽에서 비행기표를 사준 걸 두고 정치권에서 그런 시각으로 본 거지요.”
─ 자작극은 아니었다는 거죠.
“아니지요, 그건. 가족들도 ‘빨리 나갑시다’ 그랬어요. 그때 시끌시끌했으니까. 홍콩에 가 있는데 난리가 난 것 아닙니까. 외압이 어떻고 하면서.”
─ 민자당 소속으로 나갔다면 그런 소동은 없었겠지요.
“물론이죠. 그때 국민당이 돌풍을 일으킨데다 나까지 가세하니 막 떠버렸잖아요. 홍콩에서 ‘안 나간다’고 밝히고 들어왔잖아요. 도망가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죠. 봉두완씨가 홍콩까지 찾아왔잖아요, 특사 자격으로. 봉두완씨에게 분명히 ‘안 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봉두완씨가 국내에 들어와선 ‘할 마음을 갖고 있다’ 이렇게 얘기해버린 겁니다.”
─ 이주일씨 의사와 상관없이 말이죠.
“그렇죠.”
─ 홍콩 갈 때 정회장에게 얘기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국민당 쪽 모르게 나갔죠. 그러니 국민당 쪽에선 압력 받고 나갔다고….”
─ 당시 ‘안 나간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까.
“그랬죠. 서울방송 생방송에까지 나가 얘기했잖아요.”
─ 얼마 만에 뒤집힌 거죠.
“그러고 나서 이덕화 집에 숨어 있다가 제주도로 도망갔어요. 그런데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지요. 그때 서울에 있었으니까. 우리 가족이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지금 제주도 어디에 가 있다’고 말해버린 겁니다. 정회장이 사람들 데리고 거기로 온 것 아닙니까. 너 무슨 소리냐. 나가야 한다. 니가 날 도와주는 길이 뭐냐. 너 임마, 사내 자식이 배짱도 없냐. 이렇게 나온 겁니다.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하다가 결국 붙들려 올라왔지요. 그후 청운동에 있는 정회장 안가에서 3일 동안 숨어 지냈어요.”
─ 기관 쪽에서 찾느라 난리가 났겠어요.
“신문은 맨날 떠들고. 정부 여당 쪽이 곤경에 빠졌어요. 납치했느니 감금했느니. 그 탓에 선거운동도 이 주일밖에 못 했지요. 난 이 주일만에 당선됐어요.”
─ 이주일?
“예. 2주일.”
당시 이씨의 유세현장은 나라 안팎에서 화제가 됐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등 외국 언론들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코미디언이 국회의원이 된 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유세장엔 그야말로 ‘구경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서울에서 많이들 왔습니다. 구경하러. 그 사람들은 유세 보러 온 게 아니고 저 자식이 얼마나 웃길까, 그런 생각으로 온 거예요.”
─ 그때 유세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유세를 하는데 기차가 지나가요. 그 친구들(상대 후보들)은 늘 기차와 관계없이 그냥 떠들어요. 내가 올라갔을 때도 기차가 지나갔어요. 연단에서 물 먹고 준비운동을 했지요, 기차 지나가는 동안(이씨는 이 말을 하며 실제 팔 동작을 했다). 준비운동하는 게 낫지, 얘기해야 들리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곤 말했죠. 현역 의원이면 여기서 유세 한두 번씩 다 해봤을 거다. 그전에 출마했을 때 여기서 이런 소리 들었을 거다. 이거 돈 얼마 안 드는 거다. 이런 게 바로 국회의원이 할 일이다. 애들이 지금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이 소리를 수없이 듣고 공부가 귀에 들어가겠냐, 시끄러워서. 이런 일 하나 개선해주지 못하면서 뭐 다리를 놔주고 도로를 확장하고 그러냐. 그러자 ‘옳소’ 하고 박수가 쏟아지는 거라.”
─ 연예인 특히 코미디언 출신 의원으로서 말못할 고민이나 고통이 컸을 것 같은데요.
“들어가선 ‘아, 이거 역부족이다’ 이런 걸 느꼈습니다. 의원으로 활동할 기회는 별로 없고 해야 할 일이 전부 생소한 분야예요. 정부를 상대로 일하는 것이 참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 전문지식이 없는 상태였지요?
“전무했지요. 정부에서 쓰는 용어부터 전부 처음 대하는 거예요. 게다가 당 차원의 행사나 의원들 개별 행사에 마스코트로만 불려다니는 거야. 그래서 딱 1년 지나고, ‘이거 안 되겠구나’ 반성했죠. 세비를 받아 1년 동안 코미디만 했으니. 날 국회의원으로 대하지 않고 그냥 코미디언으로만 대하는 거야. 동료들마저. 안 되겠다, 전문 분야에서 정상을 달리는 사람이 의원 활동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그래서 10명으로 구성된 정책팀을 만들었어요. 그 다음부터 공부를 했어요. 평소엔 의원회관에서 공부하고, 국정감사 땐 맨해튼호텔에 투숙해 공부하고. 이렇게 1년이 지난 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교육위와 문체위에서 활동했는데 한때 한 일간지가 선정한 국감 우수의원 평가순위에서 7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대학입시 채점오류를 밝혀내는가 하면 전국 각지에 있는 폐교지의 무단용도변경 사례를 적발하고 정부기관 건설공사의 담합비리도 고발했다.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들이다.
─ 공부를 하니까 자신감이 생기던가요.
“그럼요. 공부하면 되니까. 참 못할 건 지역구 관리였어요. 의원으로 뽑아놓고는 의원으로 생각지 않고 코미디언으로만 생각하는지 지역구에서 자꾸 전화가 와요. 국회에서 활동하지 말고 내려오라고. 심지어 ‘왜 거기 가 있냐’ 이러는 사람들도 있어요. 내려가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놀자’, 이거예요.”
─ 지역구 행사를 말하는 겁니까.
“애 돌잔치에까지 참석해야 했으니까. 모든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거예요. 상가에 가면 다른 사람은 절이나 하고 조화나 바치면 끝인데 나한텐 ‘왜 밤 안 새우고 가냐’고 그래요. 같이 소주 먹으며 밤새우자는 거죠. 거의 매일 밤 12시, 한 시에 파김치가 돼 집에 들어갔어요. 그 짓을 4년 하니….”
─ 당사자는 생각 안 하고 말이죠.
“우리가 뽑아줬으니 같이 놀아달라는 겁니다. 나 일 못한다고 그러면 ‘괜찮다. 우리하고 놀자’그래요. 그땐 정말 고통스럽더라고요.”
국민당 소속이었던 그는 정주영씨가 손을 뗀 뒤 박찬종 김동길씨의 알력으로 당이 깨지자 무소속으로 있다가 신한국당으로 옮겨갔다. “무소속으론 지역에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라는 게 당을 옮긴 이유다. 어쨌든 여당에 들어간 그는 실내 체육관과 구리여고 강당, 노인정, 여성복지시설 등을 짓는 데 의원으로서 할 바를 다했다.
─ 옆에서 지켜보니까 의원들, 언론 많이 의식하지요?
“그럼요.”
─ TV병 걸린 사람도 많죠?
“많죠. 어떤 사람은 당대표끼리 서서 악수하는 그 사이에 살짝 끼여들어 사진을 찍어요. 요렇게 하고(이씨는 말하면서 그 흉내를 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바싹 치켜드는 모습이다). 또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카메라만 오면 그냥 떠들어대고.”
이씨는 그간 말을 자주 바꾼다는 이유로 몇 차례 비난을 받았다. 그 뿌리는 물론 92년 총선 당시 사퇴소동이다. 95년엔 서울시장 출마 소동이 있었고 98년엔 지자체 출마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이씨에 따르면 하나같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변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와전돼 터무니없는 소문으로 불거졌다는 것이다.
“금년 말쯤 돼 봐요. 뭔가 또 나올 겁니다,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뭐 마음을 굳혔다느니… 재미있잖아요. 언론은 흥밋거리로 다루지요. 사람 망가지는 건 생각 않고. 당사자에겐 확인도 안하고 일단 쓰고 봐요. 벌써 이번 공연을 두고도 내년 총선을 겨냥한 것 아니냐고 떠드는 사람이 있어요. ‘어느 시기가 되면 선거법에 걸리니까 사전에 장난한 거다. 저놈이 코미디언이지만 머리가 비상한 놈이다. 옛날 총선 때도 봐라. 홍콩 출국 소동으로 언론 플레이 잔뜩 하고 2주일 만에 딱 당선되지 않았냐. 남들은 수십 년 해도 안 되는데. 저게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걸 보면 수상하다’. 그런 시각으로 자꾸 보는 거라. 한번 몸담았기 때문에, 그런 전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게 재미가 있기 때문에.”
─ 내년엔 공연 일정이 꽉 차 있다면서요.
“1년 내내 잡혀 있어요. 지방순회 공연입니다. 지방은 평일은 안 되고 주말만 되니까. 22개 시·도를 다 돌 생각입니다.”
─ 공연 내용은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한 것과 같습니까.
“예. 그대로 합니다. 이걸 계기로 지방 팬들에게 인사도 하고 슬슬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데. 미국에선 아흔 넘은 밥 호프가 나오면 기립박수를 칩니다. 우리는 일흔 넘은 사람이 가요무대에 서면 ‘저 사람 아직도 해?’ 이럽니다.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흔이 돼도 무대에 서서 ‘아, 저 양반 아직도 좋다’ 그런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멋있는 마무리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지방순회 공연을 하는 겁니다.”
─ 이번 공연을 계기로 연예계에 복귀한다는 건가요.
“네, 용기를 얻었어요. 이렇게 많이 호응해주고 격려해줄 줄 몰랐어요. 좌석이 다 채워진 것은 내가 유명해서도, 극장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다른 면이 있어요. 내가 고생한 걸 인정해주고 용기를 주는 걸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무리를 멋있게 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대로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고 싶습니다.”
96년 이씨는 4년 동안의 ‘외도’를 끝내고 연예계로 돌아왔다. SBS의 ‘이주일의 투나잇 쇼’를 맡았다. 시사토크쇼에 대한 강한 의욕으로 출발한 프로그램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소재에 제약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정치 경력을 살려 ‘뭔가 보여주려고’ 했던 그로선 불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00회를 채우고 그만뒀다.
아들의 죽음
─ 어릴 때부터 웃기는 데 소질이 있었습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 고향이 이북입니다. 정주영 회장과 같아요. 금강산 입구 통천인데 학교 소풍 같은 데 가면 그렇게 잘 놀았다고 그래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놀기 좋아하고 싸움질도 하고… 끼는 좀 타고난 것 같아요.”
─ 남을 웃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타고난 끼와 후천적 노력 다 필요하겠지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코미디입니다. 끼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그 코미디에서 페이소스가 나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코미디언이라 안 하고 개그맨이라고 부르죠. 개그맨이란 그냥 조크만 하는 사람이에요. 연기는 안 하고. 내 경우 예전에 고생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정상에 올랐을 때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하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난 항상 올챙이 시절을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의 올챙이 시절.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열정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62년 동갑인 제화자씨와 결혼한 그는 세 아이를 낳았다. 아들 하나에 딸 둘. 20년 가까운 무명 시절을 보내는 동안 가정은 엉망이 됐다. 부인 제씨는 남편을 원망했다. 아이들은 아빠를 부끄럽게 여겼다.
─ 공연을 보니 유랑극단 시절 가정을 거의 돌보지 않았던데요.
“그때 유랑극단 종사자는 다 그랬어요. 그걸 직업으로 생각한 게 아니고 그냥 따라다닌 거예요.”
─ 정말 좋아서 쫓아다닌 건가요.
“그럼요.”
─ 앞날에 대해선….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배우 되는 건 꿈도 못 꾸었어요. 그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로 화장실도 안 가는 줄 알았다니까.”
─ 집에 한 달에 한 번은 들어갔습니까.
“대중 없었어요. 지방공연 일정에 따라 몇 개월씩 못 들어가기도 하고.”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은 TBC의 ‘전원 출발’. 79년 일이다. TV 출연은 그의 오랜 무명시절을 끝내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실은 그보다 1년 전 방송에 나올 뻔하다가 좌절된 일이 있다. 그 일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자신이 TV에 나온다며 온 가족과 함께 TV 앞에 앉아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을 때의 그 황당함과 수치스러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78년에 MBC에 처음 출연했죠. 녹화 끝나고 가족은 물론 아는 사람에게 다 전화해 내가 나온다고 알렸는데, 방송에 안 나온 것 아닙니까. 나중에 들으니 위에서 ‘잘라라’ 그랬대요. 혐오감을 준다나.”
─ 그땐 무척 가슴이 아팠겠습니다.
“그렇지요…. 조그만 유랑극단을 따라다닐 때 일입니다. 포스터에 하춘화 남진 등 스타들 사진과 이름만 크게 들어가고 내 사진은 끼여들 틈도 없을 때지요. 이름도 안 붙고. 포스터 아래 한 귀퉁이에 요만큼 사진이 붙었어요. 우리 집이 금호동에 있을 때였는데 그 포스터가 금호동에까지 나붙었어요. 우리 큰 아이가 그걸 보고, 애들이 놀리니까 지 동생 데리고 다니며 동네에 붙은 포스터들을 다 찢어버린 것 아닙니까. 난 몰랐어요. 나중에야 그 얘기를 들었어요. 나는 그만큼이라도 나온 걸 다행으로 여겼는데 걔들은 그게 부끄러웠던 거라.”
─ 그 큰아이가 91년에 사고를 당한….
“예.”
다시 아픈 얘기가 나온다. 아들의 죽음은 그의 삶에 닥친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에 비하면 무명 시절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삶은 그런 것이었다. 오랜 고생 끝에 찾아온 화려한 성공.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 올라, 이제 가정도 챙기고 자식들에게도 ‘떳떳한’ 아버지가 됐다고 흐뭇하게 여기는 순간 삶은 그를 번쩍 들어올려 무대 밑으로 내동댕이쳤다.
이씨는 아들의 죽음으로 삶의 무상함을 알았다.
─ 공연을 보니까 돈을 좀 벌었는데도 유학 간 아들한테 엄청 짜게 굴었더군요.
“그렇게 해야 건강하게 크는 줄 알았습니다. 참 무섭게 했습니다. 5년 동안 미국에 가 있었는데 차 없이 전철로 다니게 하고, 걔 쓰는 카드를 서울에서 내가 결제하고, 돈을 못 쓰게 해 심지어 우표까지 카드로 샀어요. 고생 많이 했지. 꼼짝 못했지요. 게다가 걔가 다니는 학교엔 한국 학생이 한 명도 없었어요.”
코미디언의 비애
─ 자식 교육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내가 욕심을 많이 냈지요. 속옷도 남대문시장에서 사 보내고, 미국에서 청바지 하나 제대로 못 사 입게 했어요. 내가 엄청나게 무섭게 키웠지요. 그런데 지나고 나니 후회돼요.”
이씨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목소리도 차츰 잠긴다.
─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잘 만들어 보려고. 없다가 좀 있어지면 나태해지고 이상한 변화가 오잖아요. 그때 걔가 사춘기라 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조기에 잡아버리려고…. 걔는 정말 행복한 것 모르고 가버렸어요. 어릴 때도 고생했고 커서도 고생하고.”
─ 그렇게 가니까 차라리 좀 돈 좀 쓰게 할 걸 하는….
“그렇죠. 집사람이야 더 가슴이 미어지지요.”
이씨는 “앞으로 성숙한 코미디를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삶의 경륜을 살려 깊이 있는 코미디를 하겠다고 한다. 그렇다고 심각한 코미디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관객들이 부담 없이 웃도록 만드는 것, 이 점이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코미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웃음의 깊이를 생각하는 듯싶다.
─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면.
“난 부끄러울 것 없이,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겠고.”
─ 옛날 고생하신 게 밑거름이 됐지요.
“그럼요. 그런 일이 없었다면….”
공연의 마지막 장면. 그가 무대에 엎드려 절규하듯 외친다. “나는 울고 있는데 여러분은 왜 웃으십니까.” 일부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 소리는 곧 공연장을 압도하는 적막한 침묵에 묻혀버렸다. 이어 훌쩍이는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던데요.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내가 생각한 거예요. 그건 나밖에 모르는 거라. 웃으려 왔다가 그것 때문에 다들 울고 나갔다고 해요.”
─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의 비애를 나타낸다고 할까요.
“내가 우리 아이 사고 난 다음날 방송 녹화한 놈이에요.”
─ 그건 참 못할 짓인데요.
“그 얘기라. 난 울고 있는데 넌 왜 웃냐.”
─ 직업적 책임감 때문에 나간 겁니까.
“그렇죠. 방송이 나간 뒤 방송국에 항의전화가 무지하게 왔다는 것 아닙니까. 너네 참 잔인한 놈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