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호

총과 바이올린, 전쟁과 음악의 역사를 바꾸다

[음악으로 보는 세상] 어깨에 고정해 쓰는 작은 기구의 힘

  • 김원 KBS PD·KBS 클래식 FM 전 ‘명연주 명음반’ 담당

    입력2025-03-10 09:00:03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총과 바이올린은 작은 기구이지만, 세계 각국의 정치권력이 등장하면서 전쟁과 음악의 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지휘자의 전술에 따라 병사와 연주자가 근육과 호흡의 힘을 배제하고, 추상적이며 보편적 규칙에 맞춰 방아쇠와 활을 제어하면서 전쟁과 음악은 변화했다.
    [Gettyimage]

    [Gettyimage]

    서양 음악에서 바이올린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때는 16세기 무렵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바로크 시대로 접어들 즈음인데, 이때부터 바이올린이 코넷(Cornett)이나 색벗(Sackbut) 같은 관악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바이올린을 잘 사용한 대표적 작곡가가 1567년 이탈리아의 크레모나(Cremona)에서 태어난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다. 그의 고향 크레모나는 바이올린을 잘 만드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아마티,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같은 최고의 바이올린 장인들이 모두 이 고장 출신이다.

    유럽의 전쟁에서 총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바이올린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우연히도 겹친다. 16세기 머스킷(Musket)이라고 부르는 화승총이 등장하면서, 중세로부터 이어진 ‘기사(騎士)’ 중심의 전쟁은 화기를 장착한 ‘보병(步兵)’ 중심의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같은 시대에 등장한 총과 바이올린은 사람의 어깨에 고정해 사용하는 물건이었고, 서거나 앉은 자세에서 손과 팔을 사용해서 누구나 쓰기 편리하게 고안된 기구들이었다.

    총과 바이올린, 기사와 성가대 대체

    16세기 이탈리아에선 목관악기지만 관악기의 마우스피스를 사용해서 금관악기 같은 소리를 내던 코넷이란 악기를 바이올린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나무에 뚫린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아서 음정을 조절하는 목관악기는 한번 만들어진 후에는 음정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종종 한 지역에서 사용하던 악기를 들고 다른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의 악기들과 음정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첼로처럼 저음을 내는 비올라다감바. [위키피디아]

    첼로처럼 저음을 내는 비올라다감바. [위키피디아]

    ‌그에 비해 현의 장력을 조절해 음정을 바꿀 수 있는 현악기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또한 높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이나 오늘날의 첼로에 해당하는 저음 악기인 비올라다감바(Viola da gamba)가 같은 원리로 만들어지고 연주법도 유사했기 때문에 현악기 연주자를 훈련하는 것은 목관악기 연주자를 육성하는 것보다 쉬웠다. 더욱이 현악기 연주엔 강한 폐활량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재주와 리듬과 음정에 대한 감각만 있으면 누구나 현악기 연주자가 될 수 있었다.

    훈련이 쉬운 것은 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석궁이나 장궁이 강한 근력을 요구하는 데 비해, 화약의 힘을 사용하는 총은 신체 조건의 제약을 덜 받았다. 또한 적과의 거리나 바람 같은 전장의 상황에도 영향을 덜 받았기에 활을 쏘는 궁병을 양성하는 것보다 총을 든 보병을 육성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1503년 체리뇰라 전투를 그린 무명 화가의 그림. [위키피디아]

    1503년 체리뇰라 전투를 그린 무명 화가의 그림. [위키피디아]

    ‌1494년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격돌하면서 종국엔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참전한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8차 전쟁까지 이어지며 1559년 끝났다. 1503년 이탈리아 남부 체리뇰라에서 전투를 벌이던 도중 프랑스 지휘관이던 루이 다르마냑 공작이 사망한다. 다르마냑 공작은 전투 중 총에 맞아 전사한 최초의 유럽 지휘관이다.

    총병들이 일제 사격으로 적군의 지휘관을 사살할 수 있게 되자, 유럽 군대의 편제가 이탈리아 전쟁 중에 바뀌었다. 총을 든 보병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여러 병종을 혼합해 부대를 편성하게 됐다. 이 변화를 ‘군사혁명’이라 하는 학자가 많다. 귀족과 기사 중심의 군대가 아니라, 징집된 보병이 중심이 되는 현대적 의미의 군대가 만들어지고, 용병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가 직접 군대를 통제하고 상시 유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군대의 규모가 커졌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제와 행정조직도 강화됐다.

    1567년 바이올린의 고향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에서부터 전해진 다성음악을 숨 쉬듯 잘 다루는 작곡가였고, 바이올린도 능숙하게 다루는 명인이었다. 그는 만토바를 거쳐 베네치아에 정착했는데 이 시기 베네치아에서는 여러 성당이 뛰어난 음악가와 연주자를 영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한 베네치아는 세계 각국에서 방문하는 유명 인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베네치아의 성당들과 연주 공간에선 화려한 다성음악과 오페라, 기악음악이 연일 경쟁하듯 연주됐다. 이런 극심한 경쟁 상황에서 재능 있고 훈련이 잘된 성악가들과 성가대가 필요한 다성음악은 점차 연주자를 육성하기 쉬운 기악음악으로 대체됐다.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은 1~3명 정도의 성악가와 바이올린, 코넷, 색벗, 발현악기인 류트(Lute)와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Harpsichord 또는 오르간)를 적절히 혼합해서 사용하는 양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 양식이 바로크의 대표적 기악 양식인 트리오 소나타로 발전했다.

    총과 바이올린 중심으로 군대와 오케스트라 체계화

    1674년 장 밥티스트 륄리의 오페라 ‘알세스트(Alceste)’가 베르사유 궁전 대리석 안뜰에서 공연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석판화. [Gettyimage]

    1674년 장 밥티스트 륄리의 오페라 ‘알세스트(Alceste)’가 베르사유 궁전 대리석 안뜰에서 공연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석판화. [Gettyimage]

    17세기 유럽의 군대와 기악음악에서 총과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다양한 병종과 악기를 혼합해 사용하는 체제가 완성됐다. 이전에는 상비군이 아닌 용병을 중심으로 그때그때 병력을 수급하는 체제였고, 음악에서도 연주되는 도시의 사정에 따라 사용되는 악기와 편성이 달랐다. 음악가 집단과 군대의 표준화를 선도한 곳은 프랑스였다.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 때부터 프랑스 궁정의 음악가들은 음악을 세 종류로 나눠 관리했다. △교회를 위한 음악, △왕의 식사 등 사적 시간을 위한 음악, △마구간을 위한 음악이 그것이다. 이 시스템은 베르사유 궁전이 건축된 이후 프랑스 대혁명 전까지 엄격히 유지됐다.

    교회음악을 위해선 한 명의 마스터와 2명의 부마스터, 칸토르(성가대 선창자)와 시종들, 교양교육과 음악교육을 받은 8세에서 15세 사이의 아이들이 한 집단을 이뤘다. 왕의 식사 시간과 무도회, 오페라와 발레 음악을 담당한 또 다른 집단은 24명으로 이뤄진 바이올린 연주자가 중심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가수와 하프시코드 연주자, 테오르보(Theorbo·류트의 한 종류) 연주자 같은 악사들이 포함됐다. 마구간을 위한 음악 집단은 트럼펫과 드럼, 색벗과 코넷 외에도 바이올린과 오보 같은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로 구성됐다. 군대의 행사나 사냥 같은 야외 활동을 위한 악단이었고, 대규모의 오페라나 무도회에도 동원됐다.



    바이올린 제작 명인 스트라디바리가 악기를 살피는 모습을 담은 판화. 빅토르 보브로프의 작품. [위키피디아]

    바이올린 제작 명인 스트라디바리가 악기를 살피는 모습을 담은 판화. 빅토르 보브로프의 작품. [위키피디아]

    ‌루이 13세는 스트라디바리와 과리네리의 스승이던 니콜로 아마티에게 프랑스 궁정에서 사용할 24개의 바이올린을 만들게 했다. 오늘날 최고의 바이올린으로 평가되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만든 바이올린 제작의 명인인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1633~1737)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고 그의 궁정을 음악으로 채우던 시기에 수많은 명작을 제작했다. 루이 14세는 춤을 추는 왕이었다. 서양 최초로 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인 왕립 발레 아카데미를 세우고 궁정발레를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 학교를 통해 루이 14세는 춤의 안무(Choreography)를 표준화했다. 당시 유럽 대부분의 궁정에서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표준 안무에 따라 프랑스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당시 프랑스의 음악뿐 아니라 군대 역시 체계화되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군대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상비군이었고, 총을 들고 제식에 맞춰 움직이는 보병이 중심이 되는 군대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춤과 군대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공통점을 갖게 됐다.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몸을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법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권력이 강력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전 시대에도 춤과 싸움은 몸을 움직이는 법을 다뤘지만 개인적이거나 소규모 집단 내에서의 전승이었을 뿐이다.

    아일랜드 화가 휴 하워드가 그린 아르칸젤로 코렐리 초상화. [위키피디아]

    아일랜드 화가 휴 하워드가 그린 아르칸젤로 코렐리 초상화. [위키피디아]

    ‌바로크 시대에 바이올린을 다루는 기술은 로마에서 활동한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1653~1713)를 거쳐 베네치아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1678~1741)에 이르면서 무르익었다. 이 두 작곡가는 바흐와 헨델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각각 트리오 소나타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바로크 바이올린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을 완성했다. 우리에게 흔히 ‘사계(四季)’로 알려진 비발디의 작품이 대표적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바이올린의 화려한 독주를 강조하는 낭만주의 시대 바이올린 협주곡에 익숙한 음악 애호가들은 종종 이 작품이 바이올린 협주곡이란 사실을 잊곤 한다.

    안토니오 비발디 초상화. 작가 미상. [위키피디아]

    안토니오 비발디 초상화. 작가 미상. [위키피디아]

    ‌코렐리와 비발디의 작품은 당시 음악 출판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 선풍적 화제를 모았고, 두 작곡가는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누렸다. 이탈리아에서도 잠시 활동한 헨델은 로마에서 코렐리와 교류했고, 비발디의 오페라에 영향을 받았다. 본격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기지 않은 헨델에 비해 바흐는 뛰어난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남겼다. 바흐가 1730년쯤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번과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는 비발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고, 바로크 바이올린 협주곡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후 바흐의 아들들이 일부 아름다운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남겼으나,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이르러도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바이올린 협주곡은 등장하지 않았다. 하이든은 교향곡과 현악4중주 작품을 많이 남기고, 모차르트는 초기 잘츠부르크 시절 몇 편의 작품을 남겼을 뿐 피아노 협주곡에 집중했다.

    고전 낭만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 작품부터

    1805년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사진처럼 표현한 그림. [Gettyimage]

    1805년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사진처럼 표현한 그림. [Gettyimage]

    오늘날 우리가 대형 콘서트홀에서 만나는 대규모의 고전 낭만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 작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작곡가들이 대규모 바이올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베토벤과 멘델스존, 브람스, 막스 브루흐의 협주곡이 자주 연주됐다. 프랑스 작곡가 중에서는 랄로와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러시아에선 차이콥스키, 글라주노프, 하차투랸 등이 뛰어난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다. 이외에도 체코의 드보르자크,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등이 현대에 자주 연주되는 표준 바이올린 협주곡 레퍼토리를 구성한다.

    고전 낭만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바이올린 협주곡이 만들어졌다. 그 규모에 비해 오늘날 연주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베토벤 이후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많이 작곡했지만, 바이올린의 기교에 치중한 나머지 앞에서 언급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와 그 영향권 아래에 있던 체코와 핀란드는 모두 국가를 넘어 제국을 이뤘거나 국가 수준이 제국적 높이에 이르렀다는 점이 가장 결정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 명의 연주자가 자기 몸통보다 작은 바이올린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수천 명의 청중 앞에서, 교향악단의 연주를 배경으로 시간과 공간을 장악해 나가는 작품을 보유하는 것은 제국을 일구는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총과 바이올린의 역사를 동시에 살펴보고 있는데, 제국 수준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만들어질 무렵 제국이 되려는 유럽 열강의 군대가 사용하는 총에도 변화가 있었다. 일부 부유한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강선(腔線·총포의 내부에 나사 모양으로 판 홈)이 군대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총신의 내부에서 발사되는 탄환이 회전하게 만드는 강선의 사용은 총의 사거리와 관통력, 정확성을 높였다. 강선 총은 1775~1783년 일어난 미국 독립전쟁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됐고, 이후 나폴레옹이 이끄는 유럽의 전쟁에서 사용됐다. 강선 총이 사용되면서 적의 지휘관을 노리는 저격수가 본격적으로 전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총 한 자루를 어깨에 걸친 한 명의 저격수가 적군의 지휘관을 사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선이 장착된 총을 사용해서 나폴레옹이 유럽을 한창 정복하고 있을 시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활에도 획기적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의 활 제작자인 프랑수아 투르트(François Tourte·1747~1835)가 활의 무게 균형을 조절하고 탄성을 강화한 후, 활 끝에 활 털의 장력을 조절할 수 있는 나사를 장착한 것이다. 이 변화는 마치 머스킷 총에 강선을 장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았는데, 연주자가 표현할 수 있는 음량의 범위가 커졌고 활 털의 탄성을 이용하는 스피카토(Spiccato)나 스타카토, 소리의 긴장을 오래 유지하는 데타셰(Detache) 같은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총과 바이올린은 크기가 작고, 어깨에 기대어 쓰며, 인류가 발명한 것 중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개의 나라에서 총은 국가가 관리하고, 명품이라 인정되는 바이올린의 경우에는 그것을 사용한 연주자의 이력까지 관리한다. 뇌에서 가까우면서도 가장 견고한 신체 부위인 어깨에 총이나 바이올린을 고정하면 사람이 가진 가장 민감한 기관인 눈과 귀가 이 도구들에 집중된다. 그래서 국가적 전략기관이나 세계적 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 뛰어난 지휘자의 지시가 총과 바이올린을 든 수많은 사람의 활과 방아쇠까지 예민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인간의 몸 바깥에 있는 도구를 택해 사람의 호흡이나 근력의 영향을 배제하고 최대한 추상적이고 보편적 방법으로 인간의 감각을 제어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인류가 국가를 만들고, 그 국가 중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제국이 탄생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총과 바이올린의 역사는 발전해 왔다.

    김원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