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과 ‘과잉 동일시’가 만들어낸 쌍둥이 감정
정치적 의견 차이 넘어 억압된 욕망과 공포의 반영
南北 ‘보호받고 싶으면서도 지배당하기 싫은 심리’ 공유
디지털 알고리즘, ‘혐중’과 ‘혐미’ 브로커로 작용
중국과 미국, 한국의 무의식이 비추는 두 개 거울
혐중·혐미, 결국 상처 입은 자아 결핍에서 시작
‘성숙한 주체’로 거듭나는 것, ‘혐오의 시대’ 건너는 유일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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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은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이 국제질서를 안정시킨다고 여길까.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2021년 10~12월 45개국 성인 4만2060명을 대상으로 이를 조사한 결과가 흥미롭다. 미국이 ‘안정시키고 있다’는 응답(이하 ‘안정’)이 39%, ‘불안정하게 한다’는 응답(이하 ‘불안정’)이 41%였다. 중국은 ‘안정’이 29%, ‘불안정’이 47%였다. G2 모두 세계인에게 ‘불안’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 중 한국인의 응답만 따로 보면 미국은 ‘안정’이 57%에 ‘불안정’ 34%고, 중국은 ‘안정’ 4%에 ‘불안정’이 88%로 조사됐다.
이 결과를 여러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한국에서 혐중 정서가 아주 심하고, 한국의 혐중·혐미 정서는 단순한 외국 혐오 정서이기보다 생존과 직결된 지정학적 요인과 역사적 경험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두 감정은 모두 ‘대한민국 주체성의 결핍’에서 비롯된 양가적 감정인 것이다. 중국에 대한 혐오는 과거 사대주의에 대한 반동이요, 미국에 대한 혐오는 의존과 자율 사이의 갈등이다. 혐중과 혐미는 단지 서로 대립하는 감정만이 아니라, ‘열등감과 과잉 동일시’가 만들어낸 동일한 뿌리를 가진 쌍둥이 감정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격렬한 감정적 충돌의 두 기둥인 ‘혐중(嫌中)’과 ‘혐미(嫌美)’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고찰해 보고 처방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정학적 불안이 ‘피해 불안’ ‘거세 불안’ 야기
미국 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인류 문명의 격차를 지리적·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극단적으로 불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맞닿는 경계이자, 문명 충돌의 실험장이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이라는 네 강대국의 힘이 교차하는 곳에서 한국은 ‘균형의 기술’로 생존해 왔다. 척박한 자원과 좁은 영토는 오히려 ‘지적 진화’를 자극했지만, 동시에 외세의 침략과 내적 분열의 원인도 됐다. 한국의 근대화는 외부의 압력 속에서 빠르게 이뤄졌지만, 그 속도만큼 자율적 정체성의 형성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관점에서 한국은 ‘지리의 제약을 극복한 문명’이지만, 여전히 ‘지정학적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문명인 것이다.이러한 대한민국의 지정학은 거대한 힘에 둘러싸인 ‘반도(peninsula)’의 심리로 대변되며,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는 끊임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가장 큰 불안은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피해 불안(Persecutory Anxiety)’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경우 외부 세계를 ‘나를 지켜줄 절대적 좋은 대상(미국)’과 ‘나를 파괴할 나쁜 대상(중국, 일본, 북한)’으로 엄격히 분리해 바라본다. 국제관계도 합리적으로 실리를 추구하는 관계가 아닌, ‘좋은 대상’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는 불안과 ‘나쁜 대상’에게 굴복하지 않으려는 분노의 감정적 투쟁으로 몰아가려 한다. 두 번째 불안은 ‘지정학적 거세 불안(Geopolitical Castration Anxiety)’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우리의 주권이나 자율성이 언제든 침해당할 수 있다는 무력감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는 ‘경계의 섬’이다. 북으로는 대륙적 권위, 남으로는 해양적 자유가 맞닿는다. 이중적 욕망은 국민의 심리 구조에도 반영된다. 한국 사회는 늘 ‘중심에 있고 싶지만 중심이 아닌’ 불안을 경험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는, 개인 심리로 치면 이혼 위기에 처한 부모 사이에서 하는 중재자 역할과 유사하다. 양쪽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동시에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위치는 현실적 생존에는 유리하지만, 정체성의 안정에는 불리하다.

10월 3일 서울 종로구 동대문역 인근에서 열린 청년 보수단체 자유대학의 정부 규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이러한 감정 구조는 가족적 은유로 보면 ‘아버지와의 동일시와 반항’의 이중구조에 가깝다. 남북분단 체제는 외세 의존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 의존을 혐오하는 모순적 체계다. 결국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과 ‘인정 욕망’의 도돌이표를 반복하며 혐중·혐미 정서를 키운 셈이다. 혐중·혐미는 남북 모두의 자주적 주체성 부재가 낳은 심리적 그림자로 볼 수 있다.
‘혐오’ 작동시키는 투사, 집단적 자기애와 분열
혐중과 혐미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처 입은 자아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이 현상을 분석하는 핵심 정신분석학적 기제는 투사(Projection), 집단적 자기애(Collective Narcissism), 그리고 분열(Splitting)이다.‘투사’는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면의 충동이나 결함을 외부 대상에게 전가하는 기본적 방어기제다. 혐중 감정의 기저에는, 우리가 중국을 비난하는 속성(천민자본주의적 배금주의, 속물근성, 이기적 민족주의)이 우리 내면에 잠재하거나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투사돼 있는 것이다. 혐미는 종종 미국의 ‘제국주의적 오만함’과 ‘폭력성’을 향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비롯된 ‘의존성’과 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한 기제일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힘에 의존하면서도 미국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모순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집단적 자기애’는 식민 지배, 전쟁, 분단, 압축 성장의 트라우마 위에서 위태롭게 구축된 ‘극도로 취약한’ 자기애다. 이 ‘상처받은 자기애’는 타자의 인정을 갈구하며, 사소한 무시에도 격렬하게 반응한다. 혐중 현상 이면에는 과거 우리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던 중국이 G2로 부상하며 심각한 위협을 느끼는 ‘한국의 집단적 자기애’가 자리한다. 한한령이나 동북공정 같은 사건은 자기애적 상처를 정면으로 건드리며, 타자를 비하함으로써 상처받은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자기애적 방어(narcissistic defense)’ 형태를 취한다. 9월 29일부터 내년 6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중국 단체 관광객 무비자 입국 허용’과 ‘중국인 영주권자에 대한 지방선거 투표권 부여’는 한국의 집단적 자기애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대상관계 이론에 따르면 ‘분열’은 상대를 ‘전적으로 좋은 대상(all-good object)’과 ‘전적으로 나쁜 대상(all-bad object)’으로 나눠 인식하는 미성숙한 심리 상태다. 한국 사회가 미국과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 분열의 극단을 오간다. 미국은 ‘우리를 구원한 혈맹’이거나 ‘민족 분단의 원흉이자 주권 침해자’이며, 중국은 ‘기회의 땅’이거나 ‘안보를 위협하는 패권국’이다. 이러한 분열적 사고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지만, 양가감정을 견디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동일한 심리적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는 ‘의존성’이라는 핵심 문제와 ‘주체적이고 싶다’는 열망 사이에서 찢어진다. 결국 미국을 이상화하거나(맹목적 친미) 악마화(혐미)하는 방식으로 불안을 회피하는 것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도체 등에 대한 한미 관세 협상을 두고 벌어진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 VS ‘미국은 약탈자!”라는 이분법적 논쟁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증폭하는 음모론
혐오 감정은 현대사회에서 정치적 동력으로 활용되고, 디지털 환경을 통해 증폭된다. 현대 한국 사회 내부의 불평등, 경쟁, 양극화에서 비롯된 막대한 좌절감과 무력감은 거대한 무차별적 공격의 에너지원이다. 혐중과 혐미는 이러한 무차별적 공격을 해소하고 불안을 줄여주는 안전한 배출구가 될 수 있다. 내부 갈등의 모순에서 비롯된 에너지를 외부의 적에게 돌림으로써 일시적으로 심리적 위안과 쾌감을 얻는 메커니즘이다.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무의식이 실시간으로 표출되는 거대한 ‘디지털 무의식의 장’이다. 혐오 콘텐츠는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고 일시적 쾌감을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감정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 이는 ‘정보’의 문제가 아닌 ‘감정의 중독성’ 문제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 현상이 음모론의 범람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음모론은 ‘불안한 자아가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다. 세계가 너무 복잡하고 우연(偶然)이 많을 때, 인간의 무의식은 그 혼돈을 견디지 못하고 원인을 특정 인물이나 세력에 투사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한 ‘투사’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중국 단체 관광객의 무비자 입국이 시작된 9월 29일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이 인파로 붐비고 있다. 뉴시스
음모론은 단순한 정보의 오류가 아니라, 뇌의 보상회로가 만들어내는 쾌락의 서사이기도 하다. 사람은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통제감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은 계획된 것’이라는 서사를 믿는다. 이 믿음이 강해질 때 도파민이 분비된다. 예측 불가능한 자극이 주는 쾌감은 도박과 유사한 중독 구조를 형성한다. 음모론자는 진실보다 ‘발견의 쾌감’을 중시하며, 그 확신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한다. SNS 알고리즘은 이 도파민 회로를 증폭시켜 음모의 퍼즐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신체적 쾌락과 정신적 확신이 결합된 이 구조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결국 음모론은 뇌가 만든 ‘의심의 마약’이다. 음모론이 디지털 공간에서 범람할 때, 도파민은 진실을 밝혀주는 신경전달 물질이 아니게 된다. 도파민은 거짓이라도 어엿한 신념을 갖게 해주는, ‘혐중’과 ‘혐미’의 브로커로서 기능하게 된다.

10월 29일 경북 경주시 동천동 구황교 인근에서 ‘2025 APEC 반대 국제민중행동조직위원회’ 관계자들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규탄 기자회견에서 ‘노 트럼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영화 ‘대부’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라는 격언은 고전적 지혜로 여겨진다. 이 말은 단순한 전략적 조언을 넘어, 인간 무의식의 욕망 구조를 드러내는 정신분석적 상징이기도 하다. 친구를 가까이 두는 것은 애착과 안정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만 적을 더 가까이 두는 행위는 무의식적 공격성과 억압된 적대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적을 친구보다 더 가까이하라는 말이 모순처럼 들릴 수 있지만, 현재 한국에 범람하는 ‘혐중’과 ‘혐미’ 두 기둥을 해체하는 데 필요한 정신분석학적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적을 가까이 둔다는 것은, 그 파괴적 에너지를 외부의 구체적 대상에 배치함으로써 내면의 불안을 관리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보이는 적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혐중과 혐미는 외교 영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적 자아 형성의 미완에서 비롯된 심리 구조이며, 한국의 집단 무의식 속 상처를 드러내는 증상이다. 정신분석학은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욕망 구조를 성찰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가 중국을 미워하고 미국을 불신하는 밑바닥에는 ‘존중받고 싶은 욕망’과 ‘스스로 주체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타자에게 분노를 투사할수록 내부의 상처는 더 깊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혐중과 혐미를 떨쳐내는 진정한 해법은 집단적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 단단한 중심을 세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국 사회가 타자의 시선을 넘어 자신의 거울을 만들어낼 때, 혐오의 에너지는 창조적 비판의 힘으로 승화할 수 있다.
혐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집단적 자기 성찰을 시작할 것을 권한다. 첫째, 언론과 교육 현장에서 우리 내부의 천민자본주의나 이기주의를 성찰하는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한다. 둘째, 미국과 중국을 ‘선악’의 잣대가 아닌 ‘파트너 겸 경쟁자’로 보는 균형 잡힌 정책 담론이 필요하며, 정치권이 혐오를 선거에 이용하는 행태를 중단해야 한다. 셋째, 한국 사회가 가진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대화와 성찰을 통해 공생의 기술을 키워야 한다.
결국 혐오는 타자를 ‘사랑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라’는 정신분석적 성찰을 요구한다. 중국과 미국은 한국의 무의식이 비추는 두 개의 거울일 뿐이며, 결국 그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은 대한민국 ‘우리 자신’이다. 혐오의 대상 없이는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는 ‘반응적 자아’에서 벗어나, 내면의 갈등과 결핍을 통합하고 감내하는 ‘성숙한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혐오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울대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정신과학 석·박사
● 前 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 및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통증연구학회, 한국정신신체의학회 정회원
●저서: ‘감정시계:몸의 리듬이 감정을 만든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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