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 총리 집권과 덩케르크 철수작전 다뤄
인간 처칠의 영웅적 면모와 내면 갈등 집중
군사적 패배를 국민적 승리로 바꾸는 언변
그 뒤에는 한 나라의 운명 짊어진 인간의 고뇌
위기 순간에 필요한 지도자란 ‘결단력 있는 개인’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장면들. 네이버 영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진짜 위기관리 능력과 통합의 비전을 갖춘 지도자를 기다린다.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1940년 전시 영국을 구해낸 윈스턴 처칠의 행보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 다시금 깊은 울림을 준다. 2018년 1월 개봉한 영화 ‘다키스트 아워’ 이야기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총리
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시대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이 작품은 위기 속에서 지도자가 어떤 태도와 결단력을 보여야 하는지, 그리고 한 사회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파고든다.1940년 5월, 나치 독일의 침공이 현실로 다가오던 시기, 처칠(게리 올드만)이 총리에 취임해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성공시키기까지의 28일간을 영화는 숨 쉴 틈 없이 그려낸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포위된 연합군을 배로 철수시킨 작전이다. 1940년 5월 27일~6월 4일 9일간 33만8226명의 병력이 철수했다. 문헌으로 남은 전쟁사 최대 규모의 철수작전이다. 전쟁 초반 연일 독일군에 무너지며 절망에 빠졌던 유럽 연합군은 이 작전을 계기로 전의를 끌어올려 반격의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다키스트 아워’는 한 인간이자 지도자로서 처칠이 겪는 내적 갈등과 외부의 압박, 그리고 고뇌와 결단의 순간들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다. 조 라이트(53)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위기의 시대에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한 사회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영화는 네빌 체임벌린(로널드 픽업) 총리의 퇴진으로 시작한다. 보수당 내부에서는 핼리팩스 경(스티븐 딜레인)이 차기 총리로 유력했지만, 노동당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처칠이 총리가 된다. 총리 처칠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처칠은 왕실, 내각, 심지어 자신의 당내에서도 신뢰받지 못하는 외톨이로 그려진다.
실제로 당시 영국의 국왕 조지 6세는 초반에는 처칠을 경계했지만, 전쟁 내내 그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영화적 각색이 더해졌다. 이런 정치적 고립은 영화 내내 처칠의 불안과 외로움을 강조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어두운 회의실, 책장으로 빼곡한 서재, 지하 벙커의 밀폐된 공간은 카메라의 고대비 조명과 어우러진다. 이를 통해 빛과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처칠의 모습을 극대화한다.
총리로 임명된 직후, 처칠은 곧바로 내각의 분열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핼리팩스 경과 체임벌린은 독일과 평화 협상을 하라고 주장하며, 처칠의 강경 노선을 비판한다. 특히 핼리팩스 경은 이탈리아를 통해 독일과의 협상을 추진하자고 설득하지만, 처칠은 단호히 거부한다.
영화는 이들의 대립을 극적으로 각색하지만, 실제 논의는 비교적 단순했다. 역사학자 존 루카치에 따르면 처칠은 내각 회의에서 단 세 번만 협상 논의를 허용했다고 한다.
허구의 진실, 그리고 오늘의 교훈
영화의 중반부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시작된다. 1940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기습 진격에 밀린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이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됐다. 독일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가운데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가 일시적으로 진격을 멈추는 결정을 내리면서 연합군에게는 대규모 철수를 할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영국군 지도부는 “33만 병력 중 5%만 구출 가능”이라며 비관적으로 전망하지만, 처칠은 민간 선박 860척을 동원해 병력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처칠은 덩케르크에서 병력이 빠져나가는 동안 4000명의 칼레 주둔군을 독일군과 맞붙게 하고, 주둔군이 싸우는 동안 영국군을 철수시키자고 제안한다. 칼레 주둔군이 희생양이 된 셈이다. 체임벌린이 “4000명의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모느냐”며 처칠에게 따지는 장면은 잔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실제로 칼레 방어전에서 4000명의 영국군이 전멸했지만, 이 희생 덕분에 33만8226명의 병력이 구출될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지도자가 때로는 냉혹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이 한 사회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처칠의 결단은 단순한 군사적 후퇴가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영국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 이른바 ‘덩케르크의 기적’은 전쟁 패배를 국민적 승리로 바꿔낸 순간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눈에 남은 장면 중 하나는 지하철에서 처칠과 시민들이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영화 속 처칠은 지하철에 올라탄 시민들에게 “독일군이 런던에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묻는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지만, 영화 속에선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부각한다. 시민이 처칠의 질문에 답하며 외치는 “끝까지 싸우겠다!”라는 함성은 영화 속에서 처칠의 결단을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지도자가 국민의 용기와 신념에서 힘을 얻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결단을 내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 총리 시절 윈스턴 처칠의 모습, 위키피디아
감독은 어두운 색감과 침울한 조명, 저공비행 촬영 등 시각적 언어로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실제 기록 화면을 삽입해 리얼리티를 더한다. 나치 군대의 행진, 런던 시민들의 불안, 내각의 갈등이 교차 편집되며, 한 나라의 운명이 한 인간의 결단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처칠의 연설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행동계획을 담아 실질적 희망을 제공한다. 그는 BBC 라디오를 통해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이 연설은 영국 국민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게리 올드만은 3kg에 달하는 특수분장을 하고 2주간 리허설을 거쳐 처칠의 목소리와 몸짓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처칠의 이중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정치 무대에서는 과장된 몸짓과 중후한 목소리로 상대를 논파한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울먹이며 나약한 인간적 면모도 드러낸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처칠이 나약한 마음과 끝없이 싸워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칠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다르다. ‘다키스트 아워’와 같은 해 개봉한 영화 ‘처칠(Churchill)’에서는 또 다른 측면의 처칠이 그려진다. 브라이언 콕스가 연기한 이 영화 속 처칠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고뇌에 빠진 늙은 정치인이다. 그는 판단력을 잃어가며, 과거의 영광을 되풀이하려는 듯한 고집을 보인다.
반면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은 전성기의 지도자로, 모든 압박 속에서 결단을 내리는 인물로 묘사된다. 두 영화는 마치 하나의 인물 전반기와 후반기를 나눠 그린 듯하며, 이를 통해 지도자의 흥망과 변화가 어떻게 다르게 펼쳐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1’(2016)에서는 존 리스고가 처칠을 연기한다. 이 작품의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장 나중의 모습이다. 드라마에서 처칠은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회한 정치인으로, 젊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권위적이고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다.
밤이 깊을수록 가까워지는 새벽
이처럼 다양한 작품 속 처칠은 저마다 다른 지도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다키스트 아워’는 가장 ‘결정적 순간’에 집중한 작품이다. 28일의 짧은 시간 안에 한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설정은 지도자의 역량이란 시간의 문제이기보다 순간의 결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1940년 5월 26일 프랑스 덩케르크 해변에 집결한 연합군 병사들 모습. 위키피디아
‘다키스트 아워’가 125분 동안 전하는 메시지는 “영웅은 신이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칠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그의 완벽함이 아니라 ‘33만 명을 구하기 위해 4000명을 희생시킨’ 냉철한 선택, 우울증을 앓았지만 포기하지 않은 인내, 국민에게서 읽어낸 희망의 직관이다. 이처럼 ‘다키스트 아워’는 한 시대의 영웅을 신화적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고뇌하는 인간, 실수와 한계를 가진 지도자로 그려낸다.
가장 어두운 시간을 의미하는 ‘다키스트 아워’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이야기다. 영국이 그랬듯, 지금의 한국도 어쩌면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긴 회랑을 지나가는 처칠의 그림자는 단지 한 사람의 발걸음이 아니라 역사와 책임, 그리고 미래를 향한 무거운 발걸음으로 보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영웅이 아니다. 처칠이 그러했듯,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끝내 물러서지 않을 결단이 필요하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교훈은 남는다. 영화는 말한다. “패배는 일시적이지만, 굴복은 영원한 상처를 남긴다. 가장 어두운 밤이 가장 찬란한 새벽을 부른다.” 2025년 대한민국, 이 암흑의 시간을 넘어설 빛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