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도쿄 공중화장실에서 비롯된 뜻밖의 장편영화
빔 벤더스와 야쿠쇼 고지가 완성한 고요한 품위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일상의 아름다움
별일 없는 하루가 실상은 가장 단단한 삶의 바탕

거울 앞에 선 히라야마의 고요한 눈빛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하루를 정성껏 살아내는 사람의 품위를 보여준다. 네온 영화배급사 웹사이트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는 말과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삶은 대개 기념할 만한 순간보다 훨씬 많은 일상의 반복으로 이뤄진다. 사람을 끝내 버티게 하는 것도 대부분 눈에 잘 띄지 않는 리듬에서 온다.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로 잘 알려진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한 ‘퍼펙트 데이즈’는 별일 없는 하루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고, 몸을 씻고, 화분을 돌보고, 일을 하러 나간다.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나무 사진을 찍는 그의 일상은 언뜻 단조로워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그 조용한 반복 속에도 저마다 다른 빛과 결이 있다는 것을 천천히 보여준다. 공식 소개처럼, 히라야마는 규칙적인 삶 속에서 음악과 책, 나무를 아끼며 살아가고, 뜻밖의 만남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새삼 돌아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삶을 뒤흔드는 사건보다 삶을 다시 느끼게 하는 순간에 더 오래 머문다.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면, 우리도 모르게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오늘을 얼마나 소중히 지나고 있었던가. 더 특별한 날을 기다리느라 이미 내 곁에 와 있던 작은 기쁨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복되는 하루는 정말 텅 빈 시간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 안에 스며 있는 사소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었기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일까. 영화는 섣불리 정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고요한 하루를 따라가면서 평범한 시간도 끝내는 우리를 버티게 하고 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조용히 건넨다.
도쿄의 공중화장실, 영화가 시작된 자리
‘퍼펙트 데이즈’는 뜻밖에도 공중화장실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시부야의 공중화장실을 새롭게 설계한 ‘더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 프로젝트에서 비롯됐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낡은 화장실을 새로 꾸미는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공중화장실에 따라붙어 온 ‘어둡고, 더럽고, 무섭다’는 인식을 바꾸고 성별과 나이,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편안하고 존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였다.2020 도쿄 하계올림픽 및 패럴림픽이 상징한 포용성과 접근성의 가치 역시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17곳을 세계적인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다시 설계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가장 평범하고 사소해 보이는 공공공간을 통해 한 도시의 품위와 배려를 다시 묻는 일이었던 셈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빔 벤더스의 작업이 결국 영화 ‘퍼펙트 데이즈’로 이어졌다는 점은 더욱 흥미롭다. 그의 시선은 건축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그 공간을 매일 돌보는 한 사람의 삶으로 향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도시 디자인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공중화장실을 정성껏 닦고, 다음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리를 돌보는 한 사람의 일상을 오래 바라보는 영화가 된다. 더 높고 화려한 것을 보여주기보다 이 영화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도시를 떠받치고 있는 한 사람의 손길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그래서 시작부터 그 시선이 깊고도 따뜻하게 다가온다.
칸영화제는 ‘퍼펙트 데이즈’를 2023년 경쟁 부문 출품작으로 소개하며, 도쿄에서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장소와 기억, 고독과 이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출해 온 빔 벤더스 감독이 공중화장실이라는 공간을 택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했다. 그에게 장소는 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한 사람이 지닌 삶의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퍼펙트 데이즈’에서도 가장 평범하고 낮은 자리가 오히려 인간의 품위와 고독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무대가 됐다.

하루의 끝, 책과 침묵 곁에 머무는 시간은 별일 없는 일상이 오히려 가장 깊은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전한다. IMDB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올려다보는 이 장면은 평범한 하루에 스며드는 따뜻한 만남의 순간을 담아낸다. IMDB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하루의 깊이
주인공 히라야마를 연기한 배우는 야쿠쇼 고지다. 그는 이 작품으로 2023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야쿠쇼 고지는 감정을 크게 터뜨리기보다 아주 작은 표정의 떨림과 시선의 변화만으로 인물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길게 설명하지도 않고, 슬픔을 쉽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관객은 그의 얼굴에서 평온과 상처, 체념과 다정함이 함께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히라야마는 그저 말 없는 사람이 아니라 긴 시간을 건너며 조용해진 사람처럼 느껴진다. 비어 있지 않은 침묵과 과장되지 않은 고독이야말로 이 영화를 더 깊고 뭉클하게 만드는 힘이다.영화의 줄거리는 얼핏 단순해 보인다. 히라야마는 새벽에 눈을 뜨고, 몸을 씻고, 작업복을 챙겨 입는다. 그의 집은 소박하지만 흐트러짐이 없고, 작은 화분들에도 정성껏 돌본 흔적이 배어 있다. 집을 나서면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고, 차 안에서는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를 튼다. 음악은 그에게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하루를 여는 마음의 순서 같은 것이다. 그렇게 그는 도쿄의 아침과 천천히 보폭을 맞춘다.
시부야 곳곳의 공중화장실에 도착하면 그는 묵묵히 일을 시작한다. 누군가 스쳐 지나간 자리를 꼼꼼히 정리하고, 거울과 세면대를 닦고, 작은 이상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그의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단순한 노동이라기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지만, 반복될수록 히라야마라는 사람은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점심시간이면 그는 늘 비슷한 자리에서 나무를 올려다본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사진으로 남기는 장면도 여러 번 이어진다. 하지만 그 빛은 한 번도 똑같지 않다. 어떤 날은 더 맑고, 어떤 날은 더 쓸쓸하다. 같은 나무 아래 앉아 있어도 하루는 결코 완전히 같지 않다는 사실을 영화는 조용히 보여준다.
퇴근 후의 시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요란한 위로나 떠들썩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목욕탕에 들르고, 익숙한 식당이나 술집에 잠시 머물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는다. 카세트테이프와 책, 침묵과 휴식이 그의 하루를 천천히 닫아준다. 영화는 이런 생활을 결핍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꼭 필요한 것만 남긴 삶의 리듬처럼 보여준다. 그래서 히라야마의 삶은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다.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는 단정한 일상에 뜻밖의 균열을 들이며 조금씩 깊어진다. 제멋대로인 동료는 히라야마의 고요한 리듬을 흔들고, 예상치 못한 방문은 잊고 지낸 불편한 과거를 다시 떠오르게 한다. 큰 사건은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영화는 모든 사연을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말해지지 않은 공백을 남기고, 관객은 그 틈에서 히라야마의 평온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된다. 지금의 조용한 일상 뒤엔 멀어진 관계와 지나온 시간이, 그리고 많이 잃어본 사람만이 겨우 익힐 수 있는 체념과 품위가 숨어 있다.
고요한 균열과 드러나는 과거
이 영화가 좋은 점은 그런 만남들을 억지 감동이나 극적인 반전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등이 생겨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상처가 드러나도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잠시 멈춘 시선과 길어진 침묵, 눌러 담은 표정으로 한 사람의 흔들림을 보여준다. 야쿠쇼 고지는 그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히라야마의 깊이를 표현해 낸다.후반으로 갈수록 우리는 알게 된다. 히라야마가 붙들고 있는 것은 단순한 루틴이 아니라, 삶이 다시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을. 아침의 세면, 출근길의 음악, 점심시간의 나무, 퇴근 후의 책과 침묵은 취향이 아니라 하루를 지탱하는 작은 의식이다. 사람을 끝내 지켜주는 것은 대단한 결심보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하루 쪽으로 데려오는 작은 습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별일 없는 하루’라는 말도 다르게 들린다. 별일이 없었다는 것은 텅 비었다는 뜻이 아니라, 큰 소란 없이 내 삶을 제자리에서 돌봤다는 뜻일 수 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그런 나날이 생각보다 훨씬 귀하고 단단하다고 조용히 일러 준다.
이 영화를 보며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제목 속 ‘완벽’의 의미다. 우리는 흔히 완벽한 하루를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는 날이라고 여긴다. 지각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날 말이다. 그러나 ‘퍼펙트 데이즈’가 보여주는 완벽은 전혀 다르다. 문제없는 하루가 아니라 흔들리는 순간에도 끝내 자기 리듬을 잃지 않는 하루에 가깝다. 예기치 않은 방해가 찾아오고, 과거의 흔적이 마음을 건드려도 빛과 음악과 침묵을 놓치지 않는 것. 바로 그런 태도가 히라야마의 하루를 조용히 빛나게 만든다.
오늘을 어제와 다르게 바라보는 감각
그래서 “행복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을 견디는 태도에서 온다”라는 말도 이 영화에서는 추상이 아니다. 히라야마는 반복을 미화하지 않지만, 결코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보지 않아도 제 일을 끝까지 해내고, 짧은 점심시간에도 나무를 올려다보고, 하루의 끝엔 음악과 책을 곁에 둔다. 어쩌면 완벽한 하루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하루가 아니라, 내가 내 하루를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은 날에서.이 영화가 유난히 따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히라야마는 누구에게 인생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하루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정리된다. 더 빨리 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고, 조금 덜 조급해도 될 것 같고, 이미 내 곁에 와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고 싶어진다. 좋은 영화는 때로 삶을 바꾸기보다 삶의 속도를 바꿔준다. ‘퍼펙트 데이즈’는 바로 그런 영화다.
유난히 천천히 걷고 싶은 5월,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겠다. 오래 미뤄둔 노래를 한 곡 끝까지 듣고, 창가의 빛을 잠시 바라보고,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달라질 수 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삶을 완전히 뒤집는 기적 대신 오늘을 다르게 바라보는 감각이 우리를 살게 한다고 조용히 일러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것을 놓치지 않았던 날. 완벽한 하루는 어쩌면 그런 하루일지 모른다.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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