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SKT, 40년 1등 자신감 내려놓고 신뢰 회복에 힘써야

[In-Depth Story] 수익성 악화·유심 해킹 소극 대응까지… 위기의 SKT

  •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

    입력2025-05-3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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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킹 피해 알리기보다 1위 지키려 했던 SKT

    • 1992년 제2이동통신업체 선정됐으나

    • 특혜 시비 휘말려 자진 반납

    • 1994년에야 한국이동통신 인수 성공

    • 2002~2014년 이동통신 황금기 맞았으나

    • 스마트폰 등장으로 매출 증대 폭 감소

    • 설비투자 늘려도 떨어지는 가입자당 매출액

    • 10년간 10% 넘기 힘들었던 영업이익률

    • 6G, AI 기회 살리려면 ‘1위 오만’ 내려놓아야

     5월 1일 오전 김포공항 국제선 1층 도착 층에 SK텔레콤 유심을 교체하고 해외로 출국하려는 여행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동아DB

    5월 1일 오전 김포공항 국제선 1층 도착 층에 SK텔레콤 유심을 교체하고 해외로 출국하려는 여행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동아DB

    2025년 4월 발생한 SK텔레콤(SKT) 유심(USIM) 정보 해킹 사태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유심 정보 유출 사고는 SKT의 핵심 가입자 정보·인증 관리 시스템 서버인 HSS(Home Subscriber Server) 3대가 해킹되면서 발생했다. 이 서버엔 SKT 가입자들의 유심 정보와 인증키 등 주요 정보가 저장돼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정보 유출을 넘어, 국내 통신 인프라에 대한 신뢰와 국민 안전에도 영향을 끼친다. 6·3 대통령선거 기간 직전에 사태가 발생하면서 민주주의의 근간까지 위협하는 중대한 보안 사고로 기록될 전망이다. 유심에는 휴대전화 인증과 금융서비스 접근에 필요한 핵심 인증키가 들어 있다. 유출된 유심 정보만으로는 복제폰 제작이나 금융 사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지만, 소비자들은 자신의 정보가 범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SKT는 5월 2일 신규 가입자 모집을 중단했다. SKT의 유심 정보가 유출된 4월 18일 이후 보름 만인 5월 1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SKT를 상대로 유심 부족 현상이 해결될 때까지 이동통신 신규 가입자 모집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행정지도를 했다. 과기정통부가 초강수를 둔 이유는 SKT의 태도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SKT가 유심 해킹 사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국내 이동통신업계 시장점유율 1위 지위 유지에 연연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해킹 피해에도 소극적 대응 일관

    5월 5일 서울시내 SKT 대리점에 신규 가입 중단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시스

    5월 5일 서울시내 SKT 대리점에 신규 가입 중단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시스

    SKT는 고객과 소통하는 데 일방적이었고 소극적이었다. SKT는 유심 정보를 보관한 서버 등이 해킹당한 사실을 처음 파악한 지 나흘이 지난 4월 22일에야 언론에 보도 참고 자료를 배포해 알렸다. 복제폰에 악용될 위험이 있는 유심 정보가 해킹됐음에도 심각성 대신 “주민등록번호, 결제 계좌번호 등 민감 정보는 유출되지 않았다”에 주안점을 둔 1차 발표였다. 공지하는 방식 역시 고객에게 개별적 문자 통지 대신 자사 홈페이지에 고객의 일부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공지문만 올렸다. 

    이와 관련해 5월 2일 오전 8시,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개인정보위)에서 긴급 전체 회의를 개최하고 해킹 사고 경위와 사고 이후 SKT 대응 상황을 점검한 결과, SKT가 개인정보가 유출된 소비자에게 유출 사실을 개별적으로 통지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SKT가 4월 22일 언론보도로 1차 발표를 마친 직후 온라인상에서 “중요한 안내를 홈페이지나 앱에만 한 이유가 뭐냐” “뉴스에서 내 정보가 해킹됐다는 걸 알게 됐다” 등 고객 불만이 쏟아졌다. 결국 SKT는 사과문과 유심 보호 서비스 안내를 담은 문자 전송을 다음 날인 23일부터 시작했지만, 이마저 2300만 명 전원에게 일시에 보낸 게 아니라 ‘서버 과부하’를 이유로 쪼개서 보내다가 일주일 만에 전송을 마쳤다. 그사이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첨단 기업들과 방산 기업, 그리고 정부 주요 부처는 임원진과 간부에게 유심 교체를 지시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유영상 SKT 대표는 해킹 사건이 알려진 뒤 사흘 만인 4월 25일에야 직접 언론 설명회를 열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고객의 불만은 더욱 폭주했다. 어렵사리 대리점을 방문한 고객들은 유심 재고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으며, 온라인 예약 또한 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기열을 뚫기 어려웠다. 

    M&A 퀀텀점프의 산물 SK텔레콤

    SKT는 SK그룹의 역점 사업 중 하나다. 통신업체를 갖기 위해 SK그룹은 10여 년간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이 노력의 역정을 살피려면 SK그룹의 역사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SK그룹은 창업주가 1953년 정부의 귀속재산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을 불하받아 운영하면서 시작한다. 수원 평동이 고향인 최종건 SK그룹 창업주는 신풍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1944년 수원으로 내려와 선경직물 생산부 수습 기사로 취직했다. 건장한 체구와 성실함으로 경영진의 눈에 띈 그는 입사 6개월 만에 조장이 돼 제직조 여공 100여 명을 이끌고 생산계획과 품질관리를 맡았다. 6·25전쟁 후 잿더미로 변한 공장에 돌아온 그는 정부로부터 회사를 인수하고 부품을 조립해 직기 4대를 만들고 공장을 다시 돌렸다. 

    방직기 4대로 시작한 선경직물은 1965년 1월 직기 보유 대수 1000대를 돌파하며 성장 가도를 질주했다. 이후 선경화섬과 선경합섬을 차례로 설립하고 아세테이트 원사, 폴리에스터 원사 등으로 분야를 넓혔다. 섬유산업의 수직계열화를 꿈꾼 최 창업주는 원료인 석유화학과 석유정제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선경석유를 설립한 지 4개월 반 만인 1973년 11월15일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영권을 이어받은 동생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은 두 번의 M&A로 SK그룹의 퀀텀점프를 통해 사세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먼저 1980년 12월 대한석유공사 경영권을 인수해 SK를 섬유회사에서 에너지 전문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두 번째로 1994년 3월 16일 한국이동통신을 인수, 통신사업에 진출했다.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의 전신) 인수를 지시한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 동아DB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의 전신) 인수를 지시한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 동아DB

    최 선대 회장은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기획실을 신설하면서 통신사업 구상을 시작했다. SK그룹이 통신산업 진출을 시도한 것에는 배경이 있다. 당시 국내 정보통신산업에 경쟁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SK(당시 선경)는 최종현 회장의 지시로 1984년 미국 경영기획실(SK USA)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발족했다. 

    SKT 창립 40주년 기념 사사(社史)에 따르면 이 팀에 1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직원 50명을 파견해 훈련을 시작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취임 및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결혼보다 한참 전이었다. 1989년 11월 기회가 열렸다. 미국이 한국에 통신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박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에 정보통신발전협의회가 체신부(과기정통부의 전신)에 통신사업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듬해인 1990년 7월 정부는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대외 경쟁력 제고와 서비스 향상을 위해 독점체제에서 경쟁 체제 방식으로 전환했다. 민간 협의체의 의견을 검토해 사업 구조조정 방식도 확정했다. SK는 본격적으로 통신회사 설립에 나섰다. 1989년 미국 뉴저지 현지법인 유트로닉스를 시작으로 국내에는 선경정보시스템, YC&C 등 관련 회사를 설립한 다음 1991년 4월 국내에 선경텔레콤(대한텔레콤)을 설립했다. 

    1992년 노태우 정부는 한국이동통신 이외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도 진행했다. 당시 SK를 비롯해 포항제철(현 포스코), 코오롱, 쌍용 등의 기업이 경쟁을 펼쳤다. 체신부는 SK의 대한텔레콤, 포항제철의 신세기이동통신, 코오롱의 제2이동통신 등 3개 법인을 대상으로 서울 지역 통신망 건설 능력과 연구개발 계획, 외국인 주주와 협력관계, 사업 경영 능력 등에 관한 36개 항목을 심사 평가했다. 그 결과 대한텔레콤이 1만 점 만점에 8388점을 받아 허가 대상 법인으로 확정됐다고 발표했다. 포항제철의 신세기이동통신은 7496점, 코오롱의 제2이동통신은 7099점을 받았다. 

    SK는 최고점을 받고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2차 심사 결과도 동일했다. 그러나 SK는 사업권을 따낸 지 일주일 만에 이동통신사업 추진권을 반납하는 결단을 내렸다. 최 선대 회장이 당시 대통령과 사돈이라는 이유로 특혜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4개월 남은 대선에 악재라며 선경 측에 사업자 선정 취소를 종용했고, 야당은 국민 정서를 외면한 친인척 비리라며 정부를 압박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SK는 일주일 뒤인 8월 27일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체신부는 사업자 선정을 차기 정권으로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통신사업 이익 사회에 환원하겠단 약속

     최 선대 회장은 당시의 심정을 1992년 8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지는 않았고 앞으로 이동통신 사업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회에 환원하겠다. 1, 2차 심사 결과 대한텔레콤이 모든 항목에 걸쳐 경쟁업체보다 앞선 사실이 보여주듯 사업자 선정은 대한텔레콤의 능력이 우월한 결과이며 로비나 특혜를 통해 사업자로 선정됐다는 주장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동통신의 시대가 열렸다. 당시 정부는 제1이동통신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이하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와 제2이동통신 신규 사업자 선정을 동시 추진했다. 정부는 1993년 12월 통신 경쟁 체제 도입을 위한 방안을 내놨다. 먼저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지분 약 45%를 매각하는 방식의 민영화를 진행했다. 동시에 전국경제연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주도하에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하는 방안이었다. 

    특혜 시비로 사업권을 반납했던 최 선대 회장은 누구보다도 제2이동통신 선정에 적극적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특혜 시비 차단을 위해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전경련에 위임했다. 공교롭게도 최 선대 회장이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다. SK가 선정된다면 또다시 특혜 시비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는 1994년 1월 11일 정례회장단 회의를 열어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방법 및 규제 완화 방안 등을 다각적으로 논의했다. 동아DB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는 1994년 1월 11일 정례회장단 회의를 열어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방법 및 규제 완화 방안 등을 다각적으로 논의했다. 동아DB

    최 선대 회장은 고심 끝에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했다. 대신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입찰에 참여했다. SK는 1994년 1월 24~25일 열린 ‘한국이동통신 공개 경쟁입찰’에 참여해, 289개의 경쟁자를 제치고 지분 23%를 4271억 원에 인수했다. 주당 8만 원이었던 주식을 시세의 4배인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했다. 예상 가격보다 1500억 원을 더 부담하면서 ‘승자의 저주’라는 고가 논란까지 있었다. 

    SK그룹이 하려 했던 제2이동통신사업자로는 신세기이동통신이 선정됐다. 전경련은 포항제철의 신세기이동통신을 지분 15%를 가진 주도 사업자로 최종 선정했고, 코오롱에 14%의 지분을 배정했다. 또 대표이사는 포항제철에서, 부사장은 코오롱에서 맡았다. 신세기이동통신은 1994년 5월, 정식 출범했다. 출범 당시 국내 주주는 포항제철과 코오롱 외에도 242개 기업이 포함됐다. 미국 에어터치 커뮤니케이션스와 사우스웨스턴 벨, 컬컴 등 3개의 외국 주주도 참여했다.

    이 인수로 SKT는 ‘국내 최초의 이동통신사’가 됐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이동통신 역사는 KT의 전신인 한국통신에서 시작됐다. 1984년 4월 20일 한국통신 자회사로 한국이동통신이 출범했다. 1988년 7월 1일 AMPS(Advanced Mobile Phone Service)라는 아날로그 방식 기술을 이용해 첫 휴대전화 서비스가 국내에서 시작했다. 이를 SK가 인수 후 1997년 3월 정식으로 사명을 SKT로 바꿨다. 

    인수를 통해 국내 이동통신 역사의 자산이 SKT에 넘어간 셈이다. KT가 보기에는 불편하지만, SKT는 관련 기념행사를 꾸준히 강조하며 자신들이 이동통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SKT, 신세기통신 인수로 업계 1위 도약

    정부는 1996년 민간 경쟁을 한층 더 강화하고자 본격적으로 이동통신 시장 추가 개방에 나섰다. 국제전화·무선호출(일명 삐삐)·이동전화 시장에서 신규 사업자를 선정, 경쟁을 유도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동통신 시장에 뛰어든 3개 PCS(개인휴대통신) 사업자와 인터넷 시장에 뛰어든 두루넷·하나로통신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보통신부는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과 한국통신프리텔(KTF, 현 KT), 한솔PCS 등 3개 사업자를 신규 PCS 사업자로 선정했다. 이들은 기존 한국이동통신(현 SKT), 신세기통신과 함께 ‘이동통신 5사’라는 이름으로 무한 경쟁을 펼치게 됐다. 

    하지만 정부의 경쟁정책엔 한계가 있었다. 후발 사업자는 선발 사업자이자 업계 1위인 SKT를 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도래했다. 작은 업체들은 하나둘 경영난에 빠졌다. 대대적인 통신 개방도 시작됐다. 국내 통신업체에 대한 해외 사업자의 지분 제한 규제도 이때 완화됐다. 

    영국 통신업체 보더폰(Vodafone)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보더폰은 코오롱이 가지고 있던 신세기통신 지분을 노렸다. 보더폰은 이미 신세기통신 지분 11.4%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코오롱 지분 23.7%를 추가 확보하면 포항제철(25.5%)을 넘어 신세기통신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었다. 정부가 수년간 공들여 만들었고, SK그룹이 특혜 시비를 피하고자 두 번이나 포기한 제2이동통신사가 해외 사업자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게 됐다. 

    이때 SK가 다시 나섰다 1999년 신세기통신 인수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손길승 당시 SK그룹 회장은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1위 사업자의 위치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시기 정부는 SKT의 신세기통신 합병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당시 이동통신 시장점유율은 SKT가 43.2%, 신세기통신이 14.0% 수준이었다. SKT가 신세기통신을 인수하면 점유율이 57%를 넘는 상황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시장점유율 1위인 SKT가 3위인 신세기통신을 합병하면 시장점유율이 43.2%에서 56.9%로 올라가 2위인 KTF와의 점유율 격차가 38.6%포인트나 발생, 경쟁이 제한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경쟁사도 SKT의 시장 독과점을 우려해 이를 반대했다. 정부는 SKT의 시장점유율을 가입자 또는 매출액 기준 50% 이하로 낮추는 조건 아래 기업결합을 승인했다. 신세기통신 인수는 코오롱이 신세기통신 지분 전량(23.53%)을 1조691억 원(주당 2만8500원)에 포항제철에 매각하고, 포철이 지분 전체를 SKT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또 포항제철은 지분 전량(27.66%)을 SKT에 넘겨주고, 포항제철이 SKT 지분 6.5%를 받는 형태를 취했다. 

    결국 몸집을 줄이며 합산 점유율 50% 이하를 충족한 SKT는 2002년 1월 공식적으로 신세기통신과 합병을 선언했다. 외환위기로 회사 상황이 나빠진 한솔엠닷컴(한솔PCS)은 2001년 KTF에 합병됐다. 이때부터 현재의 이동통신 3사 체계가 확립됐다. SKT의 신세기통신 합병 조건으로 인해 당시 LG텔레콤 시장점유율은 13.4%에서 15.8%로, KTF 시장점유율은 28.6%에서 34.5%로 각각 올라갔다. 

    스마트폰 등장 이전에 SK텔레콤의 인터넷 서비스 ‘네이트’의 로고. 네이트 홈페이지

    스마트폰 등장 이전에 SK텔레콤의 인터넷 서비스 ‘네이트’의 로고. 네이트 홈페이지

    통신 3사 체제의 출범과 함께 통신 시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2년 데이터통신이 본격화하면서 이동통신 시장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휴대전화가 통신기기를 넘어 멀티미디어 플랫폼으로 변화하면서 매출액은 급증했다. 그 중심에는 SKT가 있었다. SKT는 2002년 유무선 통합 인터넷 서비스 ‘네이트’의 서비스 개시로 모바일 데이터통신 시대를 열었다. △2011년 국내 최초 4G LTE 서비스 상용화 △2013년 기존 LTE 대비 두 배 빠른 ‘LTE-A’ 서비스 개시 때까지 성장을 거듭했다. SK텔레콤의 2002년 매출액은 10조2720억 원이었는데 이후 2014년 17조1637억 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10년간 성장 정체된 SKT

    성장은 여기까지였다. 2014~2024년까지 10년간 매출이 크게 늘지 않았다. 영업이익률도 감소세다. 2002년 30.2%의 영업이익률을 자랑했지만, 이후 점점 하락해 2018년 이후 10% 이하로 떨어졌다. 2023년까지만 해도 영업이익률 9.96%에 머물다가 2024년 10.16%로 올랐다. 성장세이긴 하나 전성기의 영업이익률에 비하면 다소 낮은 수치다. 

    영업이익률이 낮은 이유는 시장이 변한 데 있다. 데이터 기반의 이동통신 시장 초기는 황금기였다. 기술혁신에 따른 원가 하락이라는 공급 요인과 경쟁 도입 및 가입자 폭증이라는 수요 요인이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즉 품질은 좋아지면서도 원가는 줄어드는 디지털 기술혁신의 혜택을 누렸다. 소비자 소득 증가로 수요도 폭증했다. 

    이동통신사업자의 이윤도 덩달아 증가해 요금을 인하하고도 투자 여력이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 방정식은 2007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장의 성질을 바꾼 것은 그해 출시된 ‘아이폰’.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스마트폰 중심으로 휴대전화 시장이 재편됐다. 기술혁신은 통신사들의 수익 악화 원인이 되었다. 통신망 고도화와 트래픽 증가로 투자비가 늘었다. 

    하지만 수요는 크게 늘지 않았다. 이미 가입자가 포화 상태였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10년 전부터 5500만 명 주변에 머물고 있다. 이와 함께 이동통신사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음성 전화를 대체하는 저가 또는 무료 서비스가 일반화됐다. 무료 인터넷전화의 등장으로 매출액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카카오톡 등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이 출시되며 문자서비스는 사실상 무료화됐다.

    스마트폰 위주로 시장이 완전히 재편된 2010년 이후 통신사들의 문자 서비스 매출액은 거의 사라진 수준이다. 데이터통신에서 매출이 늘어날 여지도 크게 높지 않다. 반면 통신사들은 차세대 통신망 구축을 위한 투자는 늘려야 했다. 통신 3사는 최근 10년간(2014~2023) 74조 원의 설비투자를 단행했다. 네트워크 장비, 소프트웨어 등 관련 산업에 많은 생산·부가가치 유발효과를 일으켰다. 

    같은 기간 매출액 대비 설비투자액 비중을 보면, SK텔레콤이 17.1%로 미국 버라이즌(14.1%), 일본 NTT도코모(12.5%)보다 높게 나타났다. 물론 설비투자의 이점도 있다. 차세대 이동통신망이 구축되면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들이 높은 요금을 내면서도 더 좋은 서비스에 가입하면서 가입자당 매출액(ARPU)이 증가한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효과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 가입자가 차세대 통신으로 이동한다. 저가 요금제가 필요하다는 압박이 시작되고 결국에는 ARPU가 다시 떨어진다. 

    4G(LTE)가 대표적 사례다. 2011년 4G 통신 기술이 본격 상용화되고 2012~2015년 데이터 요금제 가입자가 늘면서 가입자당 평균 매출(ARPU)가 증가했다. 그러나 그 이후 알뜰폰과의 가격경쟁, 정부의 요금 인하 압력과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동통신사 ARPU는 하락 또는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다. 2018년 5G가 도입된 이후에도 상황은 같았다. 

    SKT의 경우 2010년 ARPU가 월 3만5308원이었는데, 2024년에는 2만7627원으로 줄었다. 실제 통신 3사의 ARPU의 추이를 살펴보면 스마트폰이 도입된 2007년 이후 급격하게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지난해인 2024년까지 하락해 KT를 제외하곤 3만 원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매출 성장의 정체와 수익성 악화가 유심 해킹 사고 같은 보안 문제의 투자에 소극적 요인이 됐을 것이다. 

    스마트폰 위주로 시장 재편되며 주도권 잃어

     정보통신(ICT)산업 생태계는 △콘텐츠(C) △플랫폼(P) △네트워크(N) △디바이스(D) 네 가지 구성 요소로 이뤄져 있다. 좋은 정보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구성 요소가 고루 발전해야 한다. 네 가지 구성 요소의 발전은 서로 연계돼 있다. 2008년 스마트폰 시대 이전까지는 ICT 생태계에서 통신사인 네트워크(N) 사업자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른 결과로 통신사가 가장 많은 몫을 챙겨갔다. 

    스마트폰의 등장 이전 노키아, 삼성 등 휴대전화 제조업체(D)는 다양한 제품을 이동통신사별 수요에 맞춰 맞춤 제공하는 ‘을’이었다. 콘텐츠(C) 기업도 이동통신사의 눈치를 봤다. 당시만 해도 이동통신사는 자신만의 무선인터넷 포털을 만들었다. 자사가 승인한 서비스나 콘텐츠만을 입점시킬 수 있어서 생태계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었다. 사실상 모바일 ICT 업계의 룰메이커(Rule Maker)였다. 

    그러나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ICT 생태계 주도권이 디바이스 기업으로 넘어갔다. 모바일 생태계가 네트워크에 연결된 PC 및 인터넷 생태계와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PC처럼 표준화된 스펙을 충족하면 상품성을 확보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소수 모델만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동통신사별 맞춤 상품을 제공할 필요도 없어졌다. 

    콘텐츠 기업도 더는 이동통신사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PC에서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WINDOWS)처럼 안드로이드, iOS 등 소수의 범용 OS(운영체제)만이 모바일 생태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서비스 플랫폼에서도 구글, 애플 등이 빠르게 모바일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콘텐츠 기업들도 기존의 이동통신사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됐다. 여러 플랫폼을 통해 고객과 직접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ICT의 콘텐츠 주도권은 OS 기업으로 넘어갔다. 

    이동통신사는 이 구도를 깨야 한다. 다가올 6G 시대와 AI(인공지능) 혁명 시대에서 통신사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정부와 이동통신사는 2028~2030년 6G 상용화를 목표로 기술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6G는 초고속, 초저지연, 초연결에 더해 초공간(지상 10km까지), 고정밀 측위(10cm 이내 오차), 초절감(에너지 효율) 통신을 달성하려는 ‘꿈의 통신망’이다. 

    AI가 인류의 삶을 통째로 바꾸리라는 조짐도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6G와 AI 시대는 이동통신사 혁신의 기회다. AI를 활용해 고객 경험, 네트워크 운용, 경영 효율화를 통해 ‘본업’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6G를 활용해 B2B 영역에서 매출액을 증대해야 한다. 6G는 상용화 단계에서 여러 비즈니스 기회가 생기겠지만 B2C 영역보다는 초기에는 초고속, 초저지연 등의 강점으로 B2B 영역에서 더 많은 사업 기회가 발생할 것이다. 이를 활용한 네트워크 이외의 다른 기반 기술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거나, 헬스케어·스마트홈·스마트팩토리 등 플랫폼 사업 진출도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업 기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1위 사업자에 안주하지 않는 SKT의 환골탈태 격 혁신이 필요하다. 이번 유심 해킹 사태가 SKT에 또 한 번 혁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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