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라면 시장 개척한 삼양식품
박정희 전 대통령 “라면에 고춧가루 넣는 게 어떤가”
우지파동, 횡령 등 악재, 업계 3위로 몰락했으나
효자상품 ‘불닭’ 시리즈로 글로벌 인기 모아
해외 수출 증가로 농심 제치고 영업이익 1위
13년 전 주당 2만7000원→ 30배 이상 올라 90만 원
라면 시장 주류 ‘국물라면’ 시장서 경쟁력 갖춰야

외국인들이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과 불닭볶음면 소스를 들고 있다. 삼양식품
날이 갈수록 수출 증가세가 가팔라지면서 K-라면은 2015년부터 10년 연속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하게 됐다. 2014년 당시 라면 수출은 2억1000만 달러(3089억 원)에 불과했다. 국가별로 살펴보면 미국의 신장세가 특히 눈에 띈다. 미국 수출액은 2억1561만 달러(약 3140억 원)로 전년 대비 70.3% 급증했다. 네덜란드와 중국도 각각 50.1%, 20.9% 늘었다.
올해도 한국 라면의 수출은 성장을 멈추지 않고 새로운 기록 경신을 예고하고 있다. 3월 6일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2025년 1분기 K-푸드 플러스(K-Food+) 수출액 잠정치’에 따르면 농식품 분야는 1분기 24억 8000만 달러의 수출 성과를 올리며 전년 동기 대비 9.6% 증가했다. 특히 라면의 성장이 돋보였다. 라면은 전년도 1분기 대비 27.3% 증가한 3억4400만 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1억 달러 이상의 수출 실적을 보인 가공식품 가운데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라면은 전 세계적으로 매운맛 유행이 확산하면서 중국, 미국 등 주요 시장뿐만 아니라 아세안, 유럽연합(EU), 독립국가연합(CIS), 걸프협력이사회(GCC) 등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수출이 늘었다.
불닭볶음면으로 시작된 K-라면 인기
K-라면의 세계화는 2019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와 맞물린 K-콘텐츠 확산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바뀐 식문화가 시너지 효과를 낸 덕분이다. K-팝과 함께 한국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자연스레 우리나라 라면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 속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대표적이다. BTS의 정국이 소개한 불닭볶음면 레시피 역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몇 년 전만 해도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한국 음식은 불고기나 비빔밥이었다. 요즘 가장 핫한 K-푸드는 단연 라면이다. 10년 연속 수출액 기록을 경신하며 글로벌 1위 K-푸드로 성장했다. K-팝 아이돌과 한국 드라마 등 대중문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인 라면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쏟아졌다. 라면은 식품 중에는 온·오프라인 유통체계가 안정적이다. 그만큼 늘어난 수요에 대응하는 것도 쉽다.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홍보도 효과적이다. 특히 라면 수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의 파급력은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강한 매운맛으로 유명한 이 라면은 ‘먹방(먹는 방송)’ 콘텐츠로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유행은 2014년 2월 구독자 585만 명의 유튜브 채널 ‘영국 남자’에 올라온 유튜버와 가족, 친구들이 ‘불닭볶음면 먹기’에 도전하는 영상에서 시작됐다.
세계 곳곳에서 ‘파이어 누들 챌린지(Fire Noodle Challenge)’가 유행처럼 번졌다. 외국인들이 용기면 하나를 미처 다 비우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로 우유를 찾는 모습은 수많은 글로벌 유튜버의 호기심과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매운맛에 씩씩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장면이 유튜브를 통해 인기를 끌었다.

삼양식품 서울 공장을 방문한 오쿠이 기요즈미(奥井清澄) 묘조식품 창업주(왼쪽 첫 번째)와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왼쪽 두 번째). 삼양식품
불닭볶음면 돌풍은 삼양식품을 글로벌 기업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삼양식품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이른다. 삼양식품도 불닭볶음면의 인기가 짧은 유행에 그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도록 ‘불닭 아이덴티티’를 적극 활용했다. 국가별 소비자의 입맛을 반영한 현지 맞춤형 제품을 꾸준히 내놓은 것이다. 불닭볶음면은 2014년 수출 초기부터 한국이슬람교중앙회(KMF) 할랄(이슬람 율법에 따라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제품) 인증을 획득해 무슬림 인구가 많은 동남아 지역에도 쉽게 불닭 시리즈의 인기가 스며들 수 있는 여건을 준비했다.
아시아 라면, 조리 쉽고 저렴해 美에서 인기
K-라면의 유행은 시기를 잘 탄 측면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간편식이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코로나19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식당이 문을 닫고 단체 급식이 중단됐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식사하는 가정이 크게 늘었다. 갑자기 요리를 하게 됐으니 비교적 조리가 간편한 음식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았다. 물에 면과 수프를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라면은 이렇게 미국 식탁에 자리 잡았다.편리함을 추구하는 경향은 팬데믹이 끝난 뒤에도 지속됐다. 라면을 포함한 간편식 수요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23년 미국 라면 시장 규모는 26억8960만 달러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14억1460만 달러보다 2배 가까이 커졌다. 라면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측면에서 매력적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라면 한 봉지 가격은 1달러 내외다. 뉴욕 등 미국 주요 대도시에서 외식을 한다면 1인분에 10∼15달러 이상을 내야 한다.
라면 중에서도 아시아 라면에 대한 수요가 두드러진다. 2018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 라면 시장점유율 상위 5개 제조사는 일본 4곳, 한국 1곳이다. 이들의 점유율은 전체 시장의 90% 이상이다. 한국의 라면 가격은 일본 라면의 3배 이상이지만 특유의 맛으로 시장을 확대해 가고 있다.
일찍부터 미국에 한국의 매운맛을 알려온 농심도 미국에서 존재감을 계속 키우고 있다. 2024년 기준 농심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21.5%를 기록했다. 일본의 도요스이산과 점유율 1위를 다투고 있다. 농심은 2030년까지 미국 내 매출을 15억 달러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다. 오뚜기도 2005년 미국 현지 판매 법인을 설립한 후 라면을 수출하고 있다. ‘보들보들 치즈면’ 등 미국 시장에 특화된 제품 개발과 현지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사업 강화를 위해 글로벌사업부를 본부로 격상하는 등 글로벌 시장 확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삼양식품도 올해 불닭볶음면을 앞세워 미국 라면 시장점유율 12%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트럼프 2기 정부의 관세장벽이 높아진 상황에서 삼양식품은 미국 현지 공장이 없어 고민이 크다.
불닭볶음면으로 미국 시장점유율을 빠르게 높이고 있는 삼양식품은 미국 수출 물량을 전량 국내에서 생산한다. 오뚜기의 상황도 비슷하다. 오뚜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부지를 매입하고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 현지 정부의 인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다. 신라면으로 미국 시장에 일찌감치 뛰어든 농심은 미국에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다. 농심 미국 제1공장과 제2공장에서 매년 10억 개가 넘는 라면을 생산한다.
1963년 9월 한국 최초의 라면 탄생
지금의 라면은 1958년 일본 닛신(日淸)식품의 창업주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가 개발했다. 안도는 음식이 기름에 튀겨지는 광경을 보고 라면 개발을 시작했다. 음식을 기름에 튀기면 수분이 날아간다. 밀가루로 만든 면을 튀겨도 수분을 제거할 수 있다. 수분이 없다면 면을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여기에 추후 뜨거운 물로 수분을 보충하면 다시 탱글탱글한 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1958년 인스턴트 라면이 세상의 빛을 봤다.한국에 라면이 소개된 것은 1963년 삼양식품을 통해서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104달러였다. 서울 남대문시장에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길게서던 때였다. 그 가난의 행렬에서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는 일본 출장길에 먹어본 인스턴트 라면을 떠올렸다.
전 창업주는 광복 후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이란 상호로 생명보험 사업을 하다가 6·25전쟁 뒤인 1953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회사를 매각하고 ‘제일생명’을 인수했다. 제일생명을 운영하던 전 창업주는 1961년 8월 서울 하월곡동에서 국내 최초 라면 회사 창업에 나섰다. 일본에서 팔리는 10원짜리 라면을 보고 라면 회사를 차려 식량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콩기름을 만들어 팔던 삼양제유의 이름을 ‘삼양식품’으로 바꾸고 라면 개발에 나섰다.
재료인 밀가루는 충분했다. 전 창업주는 2013년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이 ‘PL480(미국 농산물 교역발전 지원법)’으로 명명된 원조를 해줘 밀가루는 확보돼 있으니까 (라면 사업을) 해볼 만하다고 봤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 삼양식품
1963년 4월 전 창업주는 라면 기술을 배우러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난한 나라의 기업인은 일본 라면 기업을 찾아갔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일본의 라면 업체인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갔다. 묘조식품 측은 정보가 유출될까 봐 공장조차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계속 배우겠다고 부탁하니까 마지못해 도쿄에서 좀 떨어진 공장에 보내줬다.
오쿠이 기요즈미(奥井清澄) 묘조 창업주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일어섰으니 그 빚을 갚아주겠다”며 기술 전수를 허락했다. 전 창업주는 전 생산 라인을 20차례 넘게 돌아다니며 라면 제조법을 눈과 몸에 익혔다. 오쿠이 창업주는 전 창업주를 믿을 만한 파트너로 생각하며 생산설비를 값싸게 팔아넘겼다. 전 창업주는 1개 라인에 6만 달러인 라면 생산설비 2개 라인을 2만7000달러에 구입했다.
설비 다음은 기술이 문제였다. 묘조식품 측은 오쿠이 창업주의 약속을 깼다. 라면의 핵심인 배합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전 창업주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난 뒤에야 오쿠이 창업주의 비서가 몰래 쫓아와 봉투를 건넸다. 봉투 속 종이에 수프와 면 배합 같은 핵심 기술이 적혀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63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탄생했다. 삼양식품은 1961년에 문을 열었지만 현재 삼양식품의 창사일은 삼양라면을 첫 출하하는 날로 정해져 있다. 처음 생산된 삼양라면 한 개(100g)의 가격은 10원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100원이었고, 자장면 한 그릇이 20∼30원, 김치찌개가 30원 하던 시절이었다. 전 창업주는 “배곯던 국민에게 꿀꿀이죽이 인기였던 건 5원이란 싼 가격 덕분이었다. 삼양라면도 가격을 낮게 매겨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쌀과 보리가 주식이던 당시 일반 소비자들은 라면을 낯설어했다. 전 창업주는 1년 동안 공원, 극장 등에서 무료 시식회를 열어 라면을 홍보했다. 이런 노력과 1965년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라면 사업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차차 라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라면은 곧 ‘제2의 쌀’이 됐다. 삼양은 생산 3년 만인 1966년 당시 충청남북도의 쌀 생산량과 맞먹는 양의 라면을 출고했다. 1969년부터는 베트남을 비롯한 해외에 수출을 시작했다.
K-라면, 맛의 차별화 시작
한국 라면은 일본 라면을 모방하며 시작했지만 3년 후인 1966년부터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 라면과 맛이 달라졌다. 첫 번째는 매운맛의 시작이었고, 두 번째는 쇠고기 맛이었다. 초기 라면은 일본처럼 닭 육수 기반의 흰 국물이었다. 삼양식품 사사(社史)에 따르면 1966년 가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전 창업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은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에 공헌하는 삼양라면을 치하한 뒤, 예상 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한국 사람들은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니 라면에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해장을 라면으로 하곤 하던 박 전 대통령의 조언으로 얼큰한 라면이 탄생했다.라면에 쇠고기 맛이 추가된 것도 박 전 대통령의 영향이었다. 1960년대 후반 박 전 대통령이 호주를 순방한 뒤 “잘사는 나라의 기준은 국민 수만큼 소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시 삼성·코오롱·삼양 등 10대 기업 대표들을 불러 “목장을 하나씩 하라”고 권했다.

라면 시장을 선점한 삼양식품은 ‘최초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렸다. 1970년대 삼양식품의 라면 시장점유율이 60%대에 달했을 정도다. 국내 최초로 ‘컵라면’(용기면·1972)을 선보인 것도 삼양식품이었다. 이후 한국야쿠르트(1983)와 빙그레(1986), 오뚜기(1987)가 잇달아 라면 사업을 시작해 시장이 팽창했고 1988년 삼양라면은 시장점유율 60%를 차지하는 1위 기업이 됐다.
한국 라면 맛의 차별화를 위해 쇠고기 맛을 낸 것은 뜻밖의 악재로 돌아왔다. 1989년 11월 3일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삼양식품 등 대형 식품업체 관계자들을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식품위생법’ 혐의로 입건했다. 이른바 ‘우지 파동’의 시작이다.
삼양식품을 비롯한 식품 관련 5개사 대표 등이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우지 파동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여론은 싸늘해졌고, 소비자단체들은 잇따라 성명을 내고 식품업체들의 사과를 요구했다.

불닭볶음면 개발을 주도한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이 불닭볶음면 캐릭터인 ‘호치’인형과 나란히 서 있다.삼양식품
8년 뒤인 1997년 8월 26일 삼양식품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시점이 나빴다. 뒤이어 찾아온 외환위기로 회사는 또 위기에 놓였다. 1998년에는 삼양식품의 4개 계열사가 부도 위기를 맞기도 했다. 삼양식품은 우지 파동 16년 뒤인 2005년에야 경영을 정상화했다.
전 창업주는 2009년 언론 인터뷰에서 “팜유보다 더 비싼 우지를 쓴 것은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서였다”며 “국민들이 우지라도 먹고 건강해져 왕성하게 일하고 경제를 살리라는 취지였다”며 우지 사용의 이유를 역설했다.
2대째 들어서며 악화 일로 걷던 삼양
삼양이 1963년 삼양라면을 내놓은 이후 농심을 비롯한 후발주자들이 대거 시장에 뛰어들었다. ‘닭라면’을 앞세운 신한제분, ‘해표라면’을 내세운 동방유량, 풍년식품의 ‘뉴라면’까지 7~8개 업체가 난립했지만 결국 삼양과 농심의 2파전 양상으로 굳어졌다. 1969년까지만 해도 삼양의 시장점유율이 83.3%, 농심은 16.7%였다.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한국야쿠르트(현 팔도)와 빙그레가 라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식품업체 청보도 라면을 내놨다. 이후 오뚜기가 청보의 라면 사업을 인수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삼양, 농심, 오뚜기, 팔도의 4강 구도가 틀을 갖추었다. 우지 파동이 있기 전인 1985년 라면 시장점유율 1위는 농심이었다. 1985년 말 라면 시장점유율은 농심 42.2% 대 삼양 40.9%를 기록했다.
삼양식품은 경영진이 바뀌며 또다시 위기에 놓인다. 전 창업주는 2010년 3월 장남인 전인장 삼양식품 전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다. 전 창업주는 이계순 여사와의 슬하에 2남5녀의 자녀를 뒀는데, 전 전 회장은 이 중 장남으로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돼 있었다. 전 전 회장은 2010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삼양식품을 종합식품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신사업 진출과 신제품 개발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고 밝힌 뒤 외식 브랜드 호면당 인수, 제주우유 인수, 시리얼 시장 진출 등 사업 확장에 주력했다.
그동안 삼양식품의 라면 시장점유율은 더 떨어졌다. 시장점유율 2위 자리도 오뚜기에 내줬다. 삼양식품의 추락이었다. 영업이익도 전 전 회장 체제에서 크게 떨어졌다. 2009년 250억 원에서 2013년 101억 원으로 하락했다. 그의 부인인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 합류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김 부회장은 1998년부터 회사 경영에 참여했다. 라면 포장지를 디자인하고 제품 이름 짓는 것을 돕다가 2000년 삼양식품 영업본부장으로 정식 입사했다.
전 전 회장 부부는 법적 문제에도 연루됐다. 이들은 2017년까지 삼양식품이 계열사로부터 납품받은 포장 박스와 식재료 중 일부를 자신들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유령 회사)로부터 납품받은 것처럼 꾸며 49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2018년 기소됐다.
전 전 회장 부부는 이 돈을 자택 수리비, 개인 신용카드 대금, 전 전 회장의 자동차 리스 비용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 전 회장은 2019년 초 징역 3년의 유죄판결이 내려져 수감됐다. 김 부회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확정받았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 2월 대법원은 전 전 회장의 혐의 중 무죄판결을 받았던 부분을 파기 환송했다.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수백억 원대 허위 세금계산서를 꾸민 혐의에 대해 2심에서 일부 무죄로 판단한 부분을 다시 심리하라는 취지다.
후발 주자의 공격과 오너리스크로 이중고를 겪는 삼양식품을 살린 것은 불닭볶음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닭볶음면을 탄생시킨 주역은 김 부회장이었다. 김 부회장은 2010년경 딸과 함께 주말을 맞아 서울 도심을 산책하다 자극적인 맛으로 유명한 한 볶음밥 집에 긴 줄이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궁금증이 일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손님들이 깨끗이 비운 그릇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볶음밥을 주문해 먹어봤지만 김 부회장의 입에는 너무 매웠다.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김 부회장은 매운맛에 대한 수요를 확인했다. 이날 김 부회장은 매운맛을 라면에 입히겠다고 마음먹었다.
불닭볶음면 대히트로 주가 29배 올라
이후 그는 마케팅 부서,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전국의 유명한 매운 음식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불닭, 불곱창, 매운 닭발 맛집을 찾아가 최적의 맛을 찾아냈다. 제품 개발의 핵심은 소스에 있었다. 삼양식품은 세계 각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매운 고추를 연구해 ‘맛있게 매운 소스’를 개발했다. 불닭볶음면은 매운 소스 2t, 닭 1200마리를 사용해 1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2012년 4월 시장에 나왔다.2012년 출시 후 국내에서 인기를 끌다가 이 인기가 해외로 번졌다. 해외 유튜버들이 먹방에 나서고 K-팝 스타 BTS와 블랙핑크가 소개하면서 인기가 치솟아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했다. 삼양식품은 소비자들의 아이디어도 제품 개발에 적용하였다. 일부 소비자 사이에서 불닭볶음면을 다른 라면과 섞어 먹는 다양한 레시피가 유행했다. 삼양식품은 이 새로운 레시피에 착안해 다양한 추가 제품을 만들었다.
1985년 농심이 삼양식품의 라면의 시장점유율 1위를 탈환한 비결은 다양한 제품군이었다. 우동라면인 너구리, 짜장라면인 짜파게티 등이 안착하며 시장점유율 1위가 된 것이다.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의 변주로 시장점유율 1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불닭볶음면에 치즈를 섞어 먹는 레시피를 반영해 치즈 불닭볶음면을, 짜장라면을 섞어 먹는 레시피를 반영해 짜장 불닭볶음면을 출시했다. 크림 맛을 섞은 까르보 불닭볶음면, 매운맛을 2배 강화한 핵불닭볶음면, 쫄면 느낌을 담은 쫄볶이 불닭볶음면, 미트 스파게티 느낌을 담은 미트스파게티 불닭볶음면, 건면 제품을 활용한 라이트 불닭볶음면 등 셀 수 없이 다양한 자매품이 쏟아져나왔다.
현재 불닭볶음면 관련 국내 상시 판매 제품은 6종, 해외시장에서만 판매되는 제품이 9종이다. 여기에 지금까지 내놓은 10종의 한정판 제품과 단종된 7종의 제품을 더하면 지금까지 32가지 버전의 불닭볶음면이 나온 셈이다. ‘불닭 시리즈’라 할 정도다.

불닭볶음면 한 제품의 대히트로 기업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삼양식품의 주가도 많이 올랐는데, 불닭볶음면이 출시된 2012년 4월 당시 삼양식품의 주가는 주당 2만7000원이었는데, 올해 4월 11일 기준 29배가량 올라 주당 90만 원이 넘는다.
한껏 높아진 불닭 시리즈 ‘의존도’가 되레 독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 시장에서 불닭 시리즈 성장세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수출 국가를 다변화한다고 해도 불닭 시리즈 매출 비중이 전체의 40~50%에 달할 만큼 높다는 점은 해소해야 할 변수다. 호재를 이어가려면 다음 히트작이 필요하다. 라면 시장의 주류인 ‘국물라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삼양식품의 당면 과제다. 당장 국내와 미국 시장점유율에서 농심에 밀리는 이유도 확실한 국물라면 히트작이 없어서다. 삼양식품도 2023년 국물 라면 ‘맵탱’을 출시하는 등 국물라면 신제품을 내놓고는 있지만, 자사 제품인 삼양라면의 아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삼양식품은 음식점에서 매운맛의 수요를 찾고, 소비자들의 레시피를 참고하며 불닭 시리즈를 성공시켰다. 국물라면도 같은 방식으로 개발·발전시킨다면 다시 삼양식품이 국내 라면 시장점유율 1위는 물론 세계 라면 시장점유율 1위도 노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