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방부 내에는 ‘포로 및 실종군인 담당국(DPMO)’이라는 부서가 있어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됐거나 실종된 모든 장병 문제를 관장하고 있다. 목적은 간단하다. 우리의 군인들이 고국으로 모두 안전하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 만약 외국 땅에서 전사했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 유골 일부라도 가족 품에 안기게 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유골을 찾지 못하면 그의 유품 한 조각, 또는 마지막 순간의 흔적이라도 찾아야 한다.
미국정부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군포로와 실종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억류당한 포로나 실종자들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을 ‘국가의 최우선정책’으로 삼고 있다. 예산도 아낌없이 사용한다. 1달러의 예산도 시퍼런 눈으로 따지는 미 국회의원들도 포로와 실종자 수색작전을 위한 예산에는 관대하다. 그래서 미국은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냉전 시대에 발생한 분쟁지역에서의 미군포로와 실종자에 대한 수색과 유해송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올해 6·25전쟁 50주년을 맞이해 미국정부는 수년 전부터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군포로와 실종자들에 대한 생사확인과 유해송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5월9일에도 미국방부는 북한측과 미군유해 공동발굴을 위한 회담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갖고 6·25전쟁 발발 50주년이 되는 6월25일부터 발굴 작업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르면 미국은 5차례에 걸쳐 진행될 발굴 작업의 경비로 북한에 각 작업당 40만달러를 지급하게 되며 각 작업 때마다 25일간 20명으로 구성된 발굴단을 현지에 파견하는 것으로 돼있다.
미 국방부 ‘포로 및 실종자 담당국’(Defense POW/ MIA Personnal Office)의 알란 라이오타 부국장은 “약 1,500명 미군 유해가 북한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중 몇구의 유해가 발굴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며 “6·25 당시 미 제8기갑연대와 중공군과의 교전이 치열했던 운산과 구장동 지역에서만 약 500구의 시신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측은 지난해 12월에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 없이 끝났다. 당시 북한이 미국측에 어린이용 의복생산 공장 건설 등 인도주의적 추가 원조를 요구한 데 대해 미 국방부가 난색을 표하면서 회담이 중단됐다.
미국 대통령의 진두지휘
미국은 1996∼99년에 실시된 12차례의 공동 유해발굴작업에서 실종 미군으로 추정되는 42구의 유해를 회수했으며 그중 3명의 신원이 확인됐고 또 다른 10여구는 신원확인 과정에 있다. 94년 미국은 북한과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합의서’ 서명을 계기로 대북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북한 땅에 묻힌 미군들의 유해발굴 등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펴왔다.
외교적 노력의 선봉장은 빌 클린턴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은 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갈 때 ‘미군 유해발굴과 송환’을 특별히 당부했다. 나중에 카터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김 주석이 협력을 약속했다”고 보고했다.
미 국방부 ‘포로 및 실종자 담당국(DPMO)’을 이끌고 있는 앨런 라이오타 부국장은 96년 5월1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처음으로 미군 유해 공동발굴에 대한 협력의사를 카터 전 대통령에게 밝혔다”고 공개했다. 이날 회견에서 라이오타 국장은 “이때부터 북한측은 과거와 달리 유해발굴에 성의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사항이 있다.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94년 7월8일 갑자기 사망하자 클린턴 대통령과 카터 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했다. 이에 북한측은 7월10일자 노동신문과 평양방송을 통해 미 대통령의 조문을 크게 보도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조의 표명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미군 유해송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당시 미 국방부측의 배경설명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미군 유해송환에 노력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96년 5월26일 오랜 친구이며 에너지부 장관인 빌 리처드슨 당시 연방하원의원의 방북 때 ‘미군 유해송환’에 관한 그의 관심을 친서에 담아 북한 최고위층에 전달토록 당부했다. 이 결과로 북한땅에서의 미군 유해발굴에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졌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6·25전쟁이 휴전된 이래 최초로 미국의 군인이 공식적으로 평양에 입국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해 6월10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미 국방부 DPMO 대표단과 북한측의 회담도 열렸다.
대표단에는 미국 군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군복을 입지 않고 민간인 복장으로 들어갔다.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이 처음으로 합의한 사항들이 많았는데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을 소개해본다. 첫째, 미국과 북한이 합동으로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에 합의했다. 둘째로 북한이 보존하고 있는 6·25전쟁 자료의 열람과 수집을 허가했다. 셋째로 미국정부가 유해송환과 관련해 북한에 현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평양에서의 회담은 지난 반세기 동안 지지부진했던 6·25전쟁 미군포로 및 실종자 문제에 큰 돌파구를 마련했다. 북한땅에서 미국의 유해발굴 조사팀이 직접 땅을 파게 됐으며, 북한땅에 억류된 미군 생존포로와 실종자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당시 회담에서 더 중요한 진전도 있었다. 특별한 사항이 없는 한 2000년까지 계속될 공동발굴작업 일정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 회담에서 양측은 우선 96년 7월10일부터 30일까지 중국 국경 근처 운산 지역에서 미군조종사 유해발굴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으며 9월에도 20일 동안 남포 근처에서 격추된 B-29 폭격기 승무원들의 유해와 기체 잔해를 발굴키로 결정했다.
200만달러짜리 유해(遺骸)
최근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미 국방부 공군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이 B-29 폭격기는 53년 1월 남포 근처에서 격추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폭격기에는 당시 13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는데 4명이 낙하산으로 탈출해 포로가 됐으며 그중 3명은 포로송환 때 미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한 명은 돌아오지 않아 실종자로 처리됐다. 한편 이들 승무원 중 5명이 휴전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 발굴 조사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기를 미측은 기대하고 있다.
미국측은 96년 2개 지역의 발굴을 위해 처음으로 21만1000달러를 북한측에 제공했다. 지급 방법은 유해발굴 전에 반을 내고 작업이 끝난 후 잔금을 치르는 것이었다. 돈은 수표로 줄 수가 없어 미화 100달러짜리를 가방에 넣어 판문점에서 북측 인민군 장교에게 전달했다. 선금을 줄 때 가방 하나에 5만2250달러를 넣었다. 나중에 앨런 라이오타 부국장은 “내 생전 5만달러 현찰이 든 가방을 들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비용이 ‘미군 유골값’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생각은 다르다. 미 국방부 DPMO의 총책임자인 로버트 존스 부차관보는 “미국 법은 유해를 돈을 주고 살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라이오타 부국장은, 유해 1구당 10만달러라는 비용은 유해발굴에 종사하는 북한 주민들의 임금을 포함해 유해발굴지였던 논과 밭의 대지사용료 등이라고 설명했다. 유해를 발굴하려면 논이나 밭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당시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한 근처 주민 등을 불러와 증언을 듣기 위해서도 비용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또 미국측 발굴 조사팀의 숙식비, 차량 및 장비 대여비로도 쓰였다는 것이다.
북한측도 발굴 작업을 도왔다. 조사단이 현장에 가는 데 헬기를 제공했으며 평양에 있는 미국 연락책과 발굴 현장 간 교신을 위해 안테나도 설치해 주었다. 북측은 미국팀들간의 교신을 위해서 오직 HF Radio 시스템만 허용했다. HF Radio 시스템으로는 교신이 원활치 않아 미국은 위성시스템을 요청했는데 북측은 한사코 이를 막았다. 그 대신 안테나를 이동식으로 설치해 교신이 원활하도록 해주었다.
유해발굴과 관련해 일부 한국 언론에 “미국은 유해 1구당 200만달러를 지불키로 했다”는 보도가 나간 적이 있다. 당시 기사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국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미군 유해 송환작업을 벌여왔다. 북한과 88년부터 미군 유해송환문제를 협의해온 미국은 90년부터 94년까지 모두 211구의 미군 유해를 인도받았다. 또 96년 7월에는 자국민 송환이라는 차원에서 12명의 유해발굴팀이 단 1구를 찾기 위해 200만달러를 투여하는 노력도 보였다’는 것.
이 보도에 대해 96년 북한과 유해송환회담을 벌였던 제임스 왈드 당시 미국방부 DPMO 부차관보는 사실과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96년 1월10일부터 12일까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열린 유해송환 회담에서 북한측이 처음 4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 비용은 미국측이 90년 이후 인수받은 211구의 미군 유해발굴과 관련해 북한이 산출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유해=돈’이라는 관계를 인정치 않아 당시 회담이 난항을 겪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회담은 96년 5월 뉴욕으로 옮겨졌다. 5월6일에 합의된 뉴욕회담에서 미국은 93∼94년에 북한이 송환했던 162구의 미군 유해분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200만달러를 지불키로 양측이 합의했다. 당시 뉴욕회담에서 북한측은 미국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공동유해발굴에 동의했다. 이에 미국도 북한이 162구의 유해를 발굴한 것에 대해 인도적 차원의 보상금조로 지불키로 했다고 라이오타 국장은 설명했다. 이때 인수받은 유해들을 중앙신원확인소에서 조사했으나 지금까지 불과 6구의 유해만 신원이 확인됐을 뿐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공동 유해발굴을 줄곧 주장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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