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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세습의 나라에도 인터넷 바람은 불고

북한과 닮은꼴 시리아의 독재문화

우상과 세습의 나라에도 인터넷 바람은 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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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주의 체제, 낙후된 경제, 분단된 국토, 철권통치, 세습체제, 독재자 우상화…. 시리아는 여러모로 북한과 흡사한 나라다. 그래서 이 나라를 들여다보면 북한이 보인다. 》
한반도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이제껏 베일에 가려 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간적인’ 모습과 북한권력 내부의 면면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드러나기 시작한 지난 6월 중순, 중동의 시리아에선 지난 30년 간 이 나라를 철권 통치하며 마치 김일성 같은 존재로 비쳐졌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이 사망하고, 그의 둘째아들인 바샤르(34)가 권력을 승계했다.

우리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과 쿠바 등 지구상에 몇 안 되는 미수교국의 하나인 시리아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 나라의 권력이양이 앞으로 중동의 국제정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미리 점쳐보자는 의도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시리아라는 나라를 살펴봄으로써 향후 우리의 정치는 물론,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게 될 북한이라는 대상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했고, 곧 남북한 이산가족의 만남이 예정돼 있고, 남북 경제교류도 활발해질 텐데 굳이 머나먼 시리아를 통해 북한을 바라봐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지금과 같은 권력체제를 유지하는 한 우리가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바깥 세상에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 또는 보여줘도 괜찮은 것이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나 보여줘서 안 되는 것은 앞으로도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테니까.

아사드, 김일성과 닮은꼴



시리아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1인 독재국가다. 그런 만큼 매우 폐쇄적이며,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고, 전략요충지인 골란고원을 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래 이스라엘에 내준 이후 국토의 일부가 분단된 상태다. 이런 국내외적인 환경이 안으로 철권통치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북한의 사정과 많이 닮았다.

시리아는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20세기 전반 내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독립은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얻었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더러 터키 말도 하고 프랑스 말도 알아듣곤 한다.

식민지배 시절 지하에서는 터키와 프랑스, 영국 등 식민지배자들을 몰아내려는 독립운동 혹은 아랍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으며, 그 핵심에는 아랍사회주의 운동이 자리했다. 운동의 선봉은 지금 시리아와 이라크를 장악하고 있는 바트사회당이었다. 자유·평등·아랍통합·사회주의를 지상목표로 내걸고 있는 바트당은 그런 의미에서 해방군이었기에 쉽게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트당이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국가에서 곧장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내부의 사정이 너무나 복잡했기에 얼마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하페즈 알 아사드가 바트당에 입당한 것은 아랍통합 열기가 한껏 고조됐던 해방 이듬해, 즉 1946년으로 그가 15세 때였다. 그는 55년 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시리아 혁명의 성공으로 바트당이 권력을 잡은 63년에는 이미 공군 총사령관이 돼 있었다. 70년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꿈에 그리던 권좌에 올랐고, 그 이듬해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뒤 99년까지 7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다섯 번이나 당선돼 시리아를 통치했는데, 재임 중 그가 추구한 최고의 목표는 자신의 권력 유지, 이스라엘에 빼앗긴 골란고원의 회복, 아들에의 권력 승계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능란한 외교술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을 조기에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에게 늘 ‘철권통치자’니 ‘독재자’니 하는 별명이 붙어다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82년에는 자신에게 대항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이슬람 원리주의는 ‘움마’라고 부르는 이슬람 공동체의 건설을 목표로 하기에 세속 권력과 자주 충돌한다)인 ‘무슬림 형제단’을 공격해 2만5000명을 학살했으며, 98년에는 부통령이었던 친동생 리파트가 2인자로 부상한다는 소문이 돌자 그를 부통령에서 물러나게 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또한 지난 5월에는 그 직전까지 총리로 있었던 마흐무드 알 조흐비에게 ‘권력을 이용해 부정축재를 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는 등 정적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 점 또한 몇 차례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여 권력을 유지해온 김일성과 비교할 만하다.

초상화와 동상의 나라

한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까지 세력을 펼쳤던 이슬람 대제국, 우마야드 왕조가 도읍했던 시리아는 전통적인 이슬람 국가라 우상숭배가 금지돼 있을 터인데도 아사드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와 동상은 수도 다마스쿠스 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웃 요르단은 왕국인데도 국왕 후세인의 초상화는 더러 볼 수 있을지언정 동상은 구경하기가 힘든데, 시리아에는 지배자의 동상이 너무 흔했다. 김일성의 북한과 형제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아닌게 아니라 북한과 시리아는 실제로 형제의 나라 이상으로 가까웠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내기도 했던 시리아가 우리와 아직까지 수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맹방(盟邦)인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다 보니 ‘꾸리’, 즉 코리아라고 하면 그들은 북한만을 떠올린다. 남한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며칠 머물렀던 다마스쿠스의 오리엔트 팰리스 호텔 지배인은 필자가 몇 차례 ‘꾸리 주누비아(남한)’에서 왔다고 일러줬는데도 어느 날엔가 내게 달려와 김일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신문에 당신네 나라 대통령의 사진이 나왔다”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현재 북한은 외교요원과 군사요원, 태권도 교관 등 약 200명을 시리아에 파견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변변한 기업체 지사 하나 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김일성이 북한에서 ‘위대한 수령’으로 불려졌다면 아사드는 시리아에서 ‘현대판 살라딘’으로 추앙받았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탈환하라’는 교황의 한마디에 유럽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의 이름으로 시리아에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섬멸하고 카이로에 이슬람 왕조를 새로이 세우기도 한 용장이 바로 시리아 출신의 살라딘이었다. 그것은 최고의 영웅에게만 보낼 수 있는 찬사인 것이다.

그런데 96년에 시리아를 두 번째로 찾았을 때는 아사드 대통령의 초상화 곁에 한 청년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었다. 궁금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그때까지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다가 94년 6월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사망한 아사드의 장남 바셀의 초상화였다. 아사드 대통령은 장남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그가 죽은 지 2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고는 국민들이 애도를 표하도록 했던 것이다.

아사드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 차남 바샤르가 안과의사 교육을 받던 영국에서 학위 취득을 불과 석 달 앞두고 급거 귀국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미 자신의 병세가 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사드는 마음이 다급했고, 그런 만큼 바샤르의 입지를 높이는 데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샤르 우상화

아사드는 바샤르를 곧바로 홈스에 있는 공군사관학교로 진학시켜 권력의 중추기관인 군에서 경력을 쌓도록 했다. 아사드는 바샤르가 대령으로 진급했던 지난해 국영TV를 통해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내보내게 했으며, 그의 초상화를 전국에 내걸게 하는 등 국민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바샤르 알리기’에 들어갔다. 또 시리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레바논에도 그를 보내 고위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게 했으며, 11월에는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회담을 갖게 해 국제적으로도 후계자로 인정받도록 배려했다.

조흐비 총리의 숙청에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긴 하지만 바샤르는 서유럽 문화에 익숙한 까닭에서인지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 방면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컴퓨터 처장을 맡고 있고, 98년에는 시리아 최초로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는 등 재주를 발휘했다.

조용한 성품의 바샤르는 아직 노총각 신세. 겉모습만 보면 그는 절대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사드가 사망하자 중동의 외교관측통들은 그런 그가 오직 아버지의 후광만으로 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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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삼윤 문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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