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일본은 아시아 해방을 부르짖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증오를 받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양의 맹주를 자처하기엔 일본인들에게 德과 仁이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은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독도 영유권 주장이 그것이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천황이 ‘사과’한 뜻을 되새겨야 한다.
역사재검토가 한창인 일본
이러한 뉴스는 과거 여러 차례 있었던 일왕의 사죄 또는 사과문은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천황과 내각 총리들의 ‘사과’라는 말은 그때그때의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했던가? 그들이 “깊이 반성하겠노라”고 했던 말은 어떤 뜻을 품고 있었나? 과연 그들은 무엇을 반성하겠노라고 했던 것인가?
필자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사과문을 낭독한 위인들의 진의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일본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에 대해 통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정치인들은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일본제국은 메이지(明治)유신 이래로 동양 모든 나라에 혜택을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아시아 민족의 해방전쟁이었다는 주장이 이러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패전 50년을 기(期)해서 일본 중의원이 사과문 채택을 부결시킨 것도 이를 보여주는 증거다.
추측건대 일본의 일반 시민들은 ‘과오론’과 ‘혜택론’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명)가 일본 영토라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수긍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왜 태평양전쟁이,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난 러·일전쟁이 황색인종의 해방전쟁이 될 수 없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릴 필요가 있다. 또 독도에 대한 주장도 해방전쟁론처럼 ‘반성’의 대상이라는 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는 시마네 현이 1905년 2월, 무인도였던 다케시마를 편입하였고, 이에 대해서 조선 정부가 항의를 제출하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과 ‘반성의 부족’이 낳은 소치(所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 태평양전쟁이 아시아인종, 즉 황색인종의 해방전쟁이었다는 주장을 검토해보자. 필자는 이 주장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볼 때 ‘아시아의 해방’이란 구호는 참으로 매혹적이고 뜻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을 케이크 조각처럼 나눠 삼켜버린 서구열강의 야욕에는 끝이 없는 듯했다. 아프리카 다음으로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를 삼켜버린 서구열강은 말레야(지금의 말레이 반도)를 삼키고, 인도네시아를 삼키고, 인도지나(지금의 베트남 라오스 등)와 필리핀을 정복하고, 계속 북상하여 중국을 할거하고 있었다.
서구열강은 황인종을 미개인종으로 취급하고 그 위에 군림하였다. 여운형(呂運亨)은 1920년대에 중국 학생운동팀을 인솔하고 마닐라에 가서 동양인의 해방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다가, 미국 통치하에 있던 필리핀 관헌(官憲)에 체포된 적이 있다. 당시 동양 지성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시아 해방전쟁론의 허구
제국주의 서구열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절실한 문제였다. 당시 일본은 동양의 여러 민족을 대표해, 아시아 해방의 선도자가 되고 아시아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왕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 군주가 ‘설마병’에 걸려서 (설마 누가 우리를… 하는 병)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일본은 개혁을 단행했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서 막강한 국력을 육성했다. 따라서 19세기 말엽부터 일본은 조선을 포함한 동양 여러 나라 지성인들 동경하는 대상이 됐다. 일본이 스스로 서양 못잖은 개혁을 이룩한 것은 인류 역사상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끝내 동양의 맹주가 되지 못했다. 될 수 없었다. 맹주가 되지 못한 것뿐만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돼버렸다. 왜 일본제국은 동양의 맹주가 되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가. 이 문제는 실로 일본의 정치인들이 반성해야 할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린다면, 일본은 다시 독도문제를 거론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한 해답을 1904년 6월4일자의 주한미국공사 호레스 앨런(Horace Allen)의 보고서에서 발견했다. 그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국의) 외무장관은 (일본 공사관의) 하기와라 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즉 지난 2월에는 (한국사람들) 10명 중 9명이 일본을 선호했지만 지금은 일본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10명 중 1명 이상 찾는 것이 불가능하고, 다른 9명은 러시아의 성공을 기원(祈願)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과 중국 뤼순(旅順)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침했고 막강한 병력을 상륙시켜서 조선반도를 점령했으며 만주 각지에서 러시아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들은 일본을 지지했고, 조선 정부도 그랬다.
19세기 말 국제정세가 복잡해지고, 구한말(舊韓末)의 국내 정세도 유동적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당시의 조선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한국 사람이 많고 학자들도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
러·일전쟁 때 많은 조선인이 일본측에 동조했고, 일본군을 도왔다(조선 정부가 자발적으로 일본을 도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상륙한 지 얼마 안 돼서 조선의 여론은 일본을 배척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러시아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선 여론이 돌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왜 일본이 동양의 맹주가 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를 푸는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태평양전쟁이 해방전쟁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이해하면 독도 문제는 자연스럽게풀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1904년 한국여론의 변화 이유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19세기 말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태도에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1876년 개항 후에 한국의 진보세력 또는 개혁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극구 찬양했다. 일본의 개혁과정을 배워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1894~1895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다. 그에 따라 서양문명을 배척하던 수구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전 직후 3국간섭으로 일본은 중국에 랴오둥(遼東)반도를 반환하는 등 러시아의 압력에 밀리게 됐다. 그런 와중에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조선에서는 반일 사조가 강해졌다.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 만주와 조선반도를 에워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조선은 두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진보세력은 당연히 일본을 지지했고, 조선 정부도 그랬다. 많은 지식인이 전쟁이 끝난 후에 조선은 승자에게 굴(屈)하고 주권을 상실할 것이라 예측했음에도, 러시아보다는 ‘동족(同族)’인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러시아는 타민족을 정복한 후 야만적으로 압제한다고 알려진 것도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일본 사람들이 1890년대부터 부르짖어온 ‘대동연합론(大東聯合論)’에 기대를 건 사람이 많았던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1904년 3월, 전권대사 자격으로 고종을 만나 “동양 나라들은 형제같이 뭉쳐야 한다. 아니면 서양 나라들에게 먹혀버릴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이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자진해서 일본군을 도왔다.
그랬는데도 한국사람들이 돌변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들의 행동이 너무나 무도하고 야만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앨런의 보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04년 4월14일. 일본은 조선반도 전역에서 거의 무제한적인 어업권을 요구했다.
(2) 6월28일. 그들은 지금 조선 내 모든 황무지를 점거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차이
(3) 많은 수의 일본인 불량배 노동자들이 조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일본 당국은 최근 조선으로 몰려드는 일본인 불량배들이 범하는 무도한 행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 조선 관리들은 여인들, 심지어 가마에 탄 귀부인까지도 서울 근교의 경의선(京義線) 철도공사 작업 현장을 희롱 당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을 정도고, 많은 여인이 철도 부설 작업을 하는 노무자들에게 겁탈당했다고 본인에게 전했습니다. 조선 남자들, 심지어 양반들도 그곳을 지나다가 잡혀서 노동을 강요당하는데, 이들이 일을 하는 동안 일본인 노무자들은 손을 놓고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4) 8월27일. 선교사들에 의하면 일본 군대가 노역을 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을 붙잡아가고 있다고 한다.
‘본인은 만주에서 군수품을 수송할 노무자를 강제로 징용함으로써 야기된 조선 토착주민들의 고통과 관련된, 평양에 사는 장로교 선교사 모펫 목사(Rev. Dr. S. A. Moffett)의 이달 15일자 서신 사본을 동봉합니다. … 일본 당국은 조선 정부에 약 8000명의 노무자를 제공하라고 요청했으며, 높은 임금을 약속했으나 토착민들이 겁을 내 전쟁터에 가는 것을 거절하자, 노무자를 강제로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원한은 커지게 되었고 내륙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5) 10월11일. 일본군은 절도를 했다는 죄목으로 조선인들을 무도하게 처형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달 21일 있었던 계엄령하에서의 조선인 세 명을 총살한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이 군용철도를 설치하는 바람에 빼앗긴 자기 땅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는 의도에서 다소의 철도자재를 훔쳤습니다. (이러한 범죄에 대해) 어느 정도 교훈이 필요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농부들이 배상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일을 저지르면 무참하게 죽이는 한편, (일본의) 군인이나 헌병들이 이유 없이 (조선) 사람들을 살상한 것을 고발하면 무시해버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6) 러시아 지휘관들은 군기를 엄중하게 준수하고 접근하기 쉬우나 일본군은 비행을 고발하려는 조선인들을 접근시키지 않고, 그들을 학대하고 있다.
‘러시아 지휘관들은 접근하기가 쉽고, 토착민에게 자행된 어떠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그들의 군인을 처벌하는 데 가장 엄중하다고 합니다. 북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로부터 본인이 들은 바입니다. 반면 조선 사람이 일본군 본부에 고발하러 가면 쫓아내버린다고 합니다. 이 두 군대로부터 받는 대접의 차이는 한국사람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인들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와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왜 조선사람들이 일본에 가졌던 환상에서 벗어나 일본을 증오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사람들은 째임새 있게, 그리고 능률적으로 모든 일을 했고, 혁혁한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그들이 점령한 조선반도의 민심은 급격히 이반해갔다.
10분의 9가 일본을 선호하다가 불과 3, 4개월 만에 딱 그만큼이 일본을 싫어하게 됐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우월한 자리에 선 일본사람들이 너무나 오만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다. 조선사람들에겐 러·일전쟁이 해방전쟁이 아니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도 그랬고, 동남아를 점거하는 과정에도 그랬다. 그래서 일본을 동경했던 동양인들은 일본제국을 증오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리로 있으며, 날마다 조선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걱정하고 노력했다는 일본 인사들은 소수 일본사람들의 비행을 가지고 일본제국이 이룩해 놓은 성과를 평가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당시 조선 여론이 급변하고, 태평양전쟁 때 동양 각국의 여론이 일본을 배척한 것은 일부 일본인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일본사람들의 체질이랄까, 일본사람들에게 고질화된 행동 패턴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일본은행이 발행하고 있는 지폐 1만엔권에 크게 찍혀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명확히 설명해준 바 있었다. 그는 ‘학문의 권유(學問の勸め)’라는 책에서 일본인들의 행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소직(小職)에 있는 관리가 평민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매우 막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관리가 서열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그가 평민에게 행했던 것보다 더 심한 핍박을 받는다. 하직(下職)의 지방관리가 마을 촌장을 소환했을 때 그의 거만한 태도는 정말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관리가 그의 상급자와 만나는 광경은 우리의 동정심을 자아내게 한다. 촌장이 관리로부터 당할 때 그는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가 돌아가 그의 아랫사람들에게 똑같이 할 때는 증오심이 일어난다.
갑은 을의 압제를 받고, 대신 을은 병의 통제를 받는다. 이러한 식으로 압박과 지배가 끊임없이 순환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랄 만한 현상 아닌가.’
후쿠자와의 말을 빌린다면 일본사람들은 상하 개념이 너무 강해서 윗사람 앞에서는 절절매지만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태는 일본제국이 동양의 맹주가 되는 길을 가로막았고 결국에는 종말을 가져오고 말았다.
일본의 상하간 행동 패턴은 점령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점령지에서 그들은 오만하고 잔인했다. 그래서 동양사람들은 두려워하던 러시아를, 그리고 일본제국이 ‘미영귀축(米英鬼畜)’이라고 부르던 미국과 영국을 선호하게 되었다. 일본에 의한 ‘해방’을 배척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일본의 원로들은 ‘군인칙유(軍人勅諭)’ ‘교육칙어(敎育勅語) 등을 통해서 충효사상을 주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논어’와 ‘맹자’, 그리고 인(仁)과 덕(德)에 대한 이퇴계(李退溪)의 교훈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일왕의 ‘사과’는 무엇이었나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쇼와(昭和)시대 일본사람들은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덕(德)과 인(仁)이 없는 사람이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공포체제는, 힘 (power)이 무너지는 그날로 전복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20세기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봤다.
러·일전쟁 시기 조선의 여론 변화를 논하면서 왜 독도 문제를 연결시키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텐데, 대답은 간단하다. 1904년 2월 조선반도에 상륙한 일본군과 일본 정부는 조선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그 해에 체결된 이른바 의정서(議定書)를 통해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미국공사 앨런이 그 해 9월6일에 보고한 바와 같이 조선왕 고종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알현요청을 거절할 권한마저 상실했다. 그 해 2월 체결된 의정서는 일본군이 조선의 모든 것을 자의대로 점유하고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8월에 체결된 한일협약(韓日協約)은 조선왕국이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財政) 고문관과 외교 고문관을 채용하고, 또 모든 외교관계에 일본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돼 있다.
2월 의정서는 한국이 자발적으로 조인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8월 의정서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의 민심은 이미D일본을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의정서는 일본의 강압 아래 조인된 것이다. 모든 권한을 이양하라는 요구를 고종이 달갑게 여겼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고종은 그때쯤 이승만(李承晩)을 미국에 밀사로 보내려고 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다. 이승만은 그 해 8월7일에 한성감옥에서 풀려 나왔는데 자기를 5년 7개월 동안 가두어둔 고종에 대한 울분 때문에 고종이 보낸 궁녀를 용건도 묻지 않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고종황제가 궁녀를 보낸 것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으나 문제의 한일협약이 조인된 것은 이승만이 출옥하고 2주일 후인 8월22일이다.
여하튼 1904년도 아닌 다음해 2월 일본 시마네 현이 독도를 편입한 것을 근거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일왕과 일본 총리들이 밝힌 모든 사과문을 백지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904년 2월 이전에 취한 조치라면 모르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감언을 믿었던 조선 정부의 손발을 묶고, 입을 막고 난 후 시마네 현이 독도를 편입한 사실은 마땅히 사과의 대상이 돼야 한다.
‘학문의 권유’를 복습하라
그런데 오늘 2001년에,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은 묵인을 의미한다”는 ‘국제법상의 이치’를 들고 나와 독도의 일본 영토설을 주장하는 것은 마치 1910년에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었으니 한반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일본은 1904년 2월 이후에 조선반도에서 취한 모든 행동에 대해서 분명한 ‘반성’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독도 문제는 일본의 ‘반성’ 여부를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일본이 이 문제를 통해 참다운 ‘반성’의 태도를 보이면, 아시아 전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일본을 새롭게 인식할 것이다. 외교 면에서도 많은 이득이 있을 것이다.
근대역사는 재검토돼야 하고 청산돼야 한다. 진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19세기의 우리의 조상들, 특히 정조 이후의 집권자들은 너무나 무지몽매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나라를 너무나 허약하게 만들어버렸다.
오늘의 정치인들이 구태의연하게 옛 정치인들의 길을 따르는 것을 볼 때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19세기의 한국 통치자들과 일본의 통치자들은 인과 덕이 너무나 결여돼 있었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승자의 오만에 도취해 맹주가 될 자격을 상실했다. 너무 여러 곳에서 무수한 희생자를 만들어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 뜻에서 일본과 한국, 그리고 주변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논어’ ‘맹자’를 다시 읽고, 이퇴계를 배워야 하며 ‘학문의 권유(學問の勸め)’를 복습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