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5대째 화가 배출한 한국최고의 예맥(藝脈)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입력2005-04-19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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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유행어의 근원지인 운림산방. 내리 5대째 유명화가를 배출한 이 산방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5대째 화가 배출한 한국최고의 예맥(藝脈)
    당대발복(當代發福)에 끝나지 않고 그 발복의 가업을 대를 이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부대에 하던 일을 손자대에서까지 계속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한국의 근세 100년처럼 자신들의 전통과 민속이 총체적으로 단절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야 했던 나라에서 선대에 하던 일을 손자대가 계승하는 경우는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 희귀한 사례가 이번에 찾아가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전남 진도에 자리잡은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하여 5대째 내리 화가를 배출한 집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도에 사는 양천 허씨(陽川 許氏) 집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마 5대째 계속해서 예술가를 배출하는 집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1대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8∼1893), 2대는 미산 허형(米山 許瀅:1861∼1938), 3대는 남농 허건(南農 許楗:1908∼1987)과 그 동생인 임인 허림(林人 許林:1917∼1942), 4대는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林田 許文:1941∼현재), 5대는 남농의 손자인 허진(許塡:1962∼현재)으로 이어지고 있다. 허진 이외에도 같은 5대 항렬로는 허재, 허청규, 허은이 화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등산 춘설헌(春雪軒)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도 진도에서 태어난 양천 허씨로 같은 집안이다.

    30여 명의 화가 배출

    허씨들은 원래 경기도에서 살다가 진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진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입도조(入島祖) 허대(許垈)는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이 역모로 몰리면서 임해군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진도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허대의 장남 득생은 용,순,방 세 아들을 두었는데 순의 후손이 소치, 미산, 남농이고 막내 방의 후손이 의재 허백련이다. 의재는 혈연으로 따지면 소치의 종고손(從高孫)이 되고 법연으로 보면 소치의 아들인 미산으로부터 직접 그림수업을 받은 제자다.

    의재 집안에서도 화가가 상당수 배출되었다. 의재의 넷째 동생인 목재 허행면(木齋 許行冕:1906∼1966)은 근대 회화사에 비중이 큰 화가였고, 목재의 아들인 허대득(작고), 목재의 조카인 허의득(작고), 의재의 장손자인 직헌 허달재(直軒 許達哉:1952∼현재), 목재의 손자인 허달용(36세), 허의득의 아들인 허달종(35세)이 모두 화가다.

    이외에도 미대를 졸업하고 미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예비화가까지 포함하면 허씨 집안에서 배출된 화가는 30명을 넘나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 집안의 가계도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이처럼 많은 화가가 나올 수 있었나, 어떻게 5대를 계속해서 예술가가 배출될 수 있는가,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의문은 바둑으로 따지면 좌하귀라고나 할 한반도의 서남쪽 구석 척박한 섬에서 어떻게 이러한 예술 명문이 형성될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예술가는 미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인간이고, 돈과 권력이 아닌 자유를 갈망할 정도의 인식 수준에 도달하려면 먼저 돈과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충분히 향유한 다음에나 가능하다는 설이 있다.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작품에 ‘붓덴부르그 일가(一家)’라는 소설이 있는데, 3대에 걸친 가족 변천사가 주제다. 할아버지대는 소위 ‘개같이 돈을 번’ 세대이며, 아버지대는 이 돈을 밑천으로 삼아 권력 집단에 진입한다. 국회의원, 시장과 같이 사진액자에 들어갈 만큼 출세한 인물들이 배출된다. 그런 다음 손자대에 가서야 비로소 예술가가 나타난다는 줄거리다.

    돈도 벌어보고 권력도 잡아보았는데 그것이 결코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손자대에서야 깨닫고는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는 예술가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씨 집안도 이러한 공식을 대입시켜 설명할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한반도 좌하귀의 구석진 곳, 그것도 돈·권력과는 거리가 먼 진도라는 섬에서 예술혼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에서 5대째 예맥(藝脈)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먼저 허씨 집안의 본향인 진도가 어떤 배경을 지닌 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배(流配)라는 형벌이 있었으며, 유배지로는 서울로부터 거리상 멀리 떨어진 곳이 선택됐다. 한반도의 좌하귀라 할 수 있는 진도도 이러한 유배지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육지와 격리된 섬이어서 유배지로 적합했던 것이다.

    문인들의 유배지, 진도

    전라남도에서 유배지로 유명한 섬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가 진도이고 다른 하나는 완도라고 한다. 진도는 주로 붓을 다루던 문인(文人)들의 유배지였고, 완도는 칼을 다루던 무인(武人)들의 유배지였다. 진도는 완도에 비해 농토가 많기 때문에 책만 읽던 문인들이 유배 와서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게 했고, 완도는 산과 바다뿐인 척박한 지형이라서 상대적으로 힘 센 무인들을 보내서 개척하게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유배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일반 잡범이 아닌 정치범이 많다. 정치범은 정치적 소신 때문에 형을 받은 사람이니, 그러한 소신을 가질 정도의 철학과 고집 그리고 인문적 교양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진도는 지리적으로는 비록 외딴 섬이었지만, 그곳에는 단순히 섬사람들이 아니라 나름의 식견을 가진 문사들이 우글거렸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능력과 자질이 있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출세할 길이 막혔을 때 선택하는 탈출구는 통상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는 예술가의 길이고, 둘째는 종교인의 길이다. 두 길 가운데 진도 사람들은 예술 쪽으로 많이 간 것 같다. 이 부분은 토마스 만이 제기한 예술가의 길을 가는 수순과는 다르다.

    현재 진도 출신 화가는 160여 명이라고 한다. 이 수는 국전이나 도전에 입상한 경력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입상하지 않고 활동하는 화가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고 한다. 아무튼 인구 5만 명도 안 되는 섬에서 이 정도의 화가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허씨 집안과 운림산방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진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진도에서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 ‘진도에 가서 글씨, 그림, 노래 자랑하지 말라’ ‘허씨들은 빗자락 몽뎅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오고, 문씨들은 짜구만 들어도 목수가 나온다’ 등등이다.

    그렇다보니 진도 남자들은 대체로 노래나 그림을 잘 그리는 한량이 많고, 여자들은 한량 대신에 생계를 책임지느라 생활력이 특히 강하다는 정평이 있다. 진도 여자 치고 외지에 나가서 못 사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허씨 집안이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1대 화가인 소치의 특출한 능력과 명성 때문이다. 소치의 일생을 간단히 살펴보자.

    소치 허련은 순조 8년(1808) 진도 향반(鄕班)이던 허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향반이니만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서화에 취미가 있어서 틈이 나는 대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어느 집에 좋은 화첩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베껴 그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해남 연동의 녹우당(綠雨堂)에 고화가 많이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소치는 급류가 휘돌아치는 울돌목을 건너 녹우당을 찾아갔다.

    녹우당은 어떤 곳인가?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 윤선도의 집이자, ‘자화상’을 남긴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1668∼1715)의 장원이고,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젖줄이면서 실제 외가이고, ‘동국진체’라는 필법을 창시한 옥동 이서(玉洞 李:1662∼1723)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와 시인 묵객이 찾아와 놀던 곳 아니던가.

    그런가 하면 수천 권의 진귀한 장서와 함께 화첩을 소장한 호남의 고급 살롱이자 사신사(四神砂)가 완비된 대장원 아니던가. 이 집의 사랑채에 걸려 있는 ‘예업(藝業)’이라는 두 글자의 편액이 말해주듯이 녹우당은 호남 남인의 학문과 예술을 낳은 요람이자 동시에 집산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치는 연동 윤진사댁(녹우당)에 출입하면서 공재 윤두서, 그리고 공재의 아들인 연옹 윤덕희(蓮翁 尹德熙:1685∼1766), 손자인 청고 윤용(靑皐 尹溶:1708∼1740)으로 이어지는 윤씨 집안 3대 화가의 필적과 그림들을 눈으로 접할 수 있었다. 녹우당에 가전(家傳)되는 화풍을 직접 감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소치는 이 집에 있던 중국의 유명한 화보집인 ‘고씨화보’를 보고 크게 감흥을 받아 이를 연마하기도 하였다. 이 화보는 명나라 신종(神宗)대에 활약한 화가 고병(顧炳)이 제작한 것으로 남종화 화보집이다. 그 서문을 유명한 중국의 문인 주지번(朱之蕃)이 썼는데, 주지번이 1606년에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간 적이 있으므로 대략 그 무렵에 이 화보집이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 시기는 중국의 남종화라는 화풍이 조선에 처음 소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소치는 공재 이후로 녹우당에 가전되는 윤씨들의 화풍과 ‘고씨화보’의 남종화풍을 접하면서 그림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이때 소치의 나이가 대략 20대 중반이었다. 그러니까 소치 그림의 연원은 녹우당에서 비롯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의선사와 추사를 스승으로

    소치는 녹우당을 출입하면서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에 대한 소문을 접한다. 초의선사가 주석하던 대둔사(大屯寺)는 녹우당에서 걸어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사향의 향기는 가만히 있어도 10리를 간다고 하듯이, 향기나는 사람끼리는 때가 되면 만날 수밖에 없는 법. 마침내 소치의 나이 27세에 이르러 초의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초의선사는 승려였으나 그 학식과 인품으로 인해 사대부들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일찍이 정다산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고,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위당 신관호 등 당대의 거물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릴 만큼 차에도 조예가 깊어서 ‘다삼매(茶三昧)’의 경지에 든 인물로 전해진다.

    인연은 인연을 낳는 법. 초의를 통해서 소치는 추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번은 초의선사가 추사를 만나러 서울에 갔을 때 소치가 모사한 윤공재 화첩과 시구를 보여주었더니 추사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 후 초의선사가 해남에 돌아올 때 추사의 답신을 가지고 왔다. 소치더러 서울로 올라오라는 전갈이었다. 이 전갈을 받고 소치가 추사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간 때 소치의 나이 32세였다.

    추사는 소치가 그린 윤공재의 화첩을 처음 보고 소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운 것은 과연 윤공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신운(神韻)의 경지에 이르는 것에는 좀 모자랐다. 정겸재, 심현재는 모두 이름을 널리 날려서 권첩이 전해지고 있으나 한갓 안목을 어지럽혀서 일체 보아서는 안 될 것이고, 그대(소치)가 화가 삼매의 경지에 들어서기 위해서 만일 천리의 여행을 한다면 비로소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이 말에서 추사는 소치가 공재, 겸재, 현재에 버금가는 재질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 후기의 이들 삼재(三齋)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여행을 많이 하라고 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소치에게 화가삼매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천리가 넘는 여행을 하여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다.

    추사가 말한 화가삼매라는 표현에서 다분히 불가적인 뉘앙스가 전달된다. 한국 불가에서는 수행의 단계로, 처음에 독서(경전공부) 10년, 그것이 끝나면 참선 10년, 그 다음에는 여행 10년이라는 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여행을 가리켜 ‘만행(萬行)’이라고 부르는데, 불가수행에서 만행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여행하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가지가지의 인간 삶과 명산대천이 지닌 아름다운 풍광을 접하면서 인간은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이 충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로 소치는 많은 여행을 하게 된다.

    소치는 서울 추사 집에서 머물면서 지도를 받는다. 추사의 둘째 형인 김명희, 막내인 김상희를 비롯하여 추사와 안면이 있는 당시의 명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했음은 물론이다.

    소치(小痴)라는 호는 이 시기에 추사에게 받은 호다.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황공망(黃公望:1269∼1358)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의 호가 대치(大痴)였다. 추사는 평소에 대치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대치에 비할 만한 인물이 되라는 의미에서 소치라는 호를 주었던 것이다.

    소치 역시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운림 예찬(雲林 倪瓚:1301∼1374)을 좋아하여 예찬의 호인 ‘운림’을 따다가 후일 자신의 거처인 ‘운림산방’을 지을 때 그 당호로 사용하였다. 추사는 후일 제자인 소치를 평가하면서 ‘압록강 이동(以東)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찬사한 바 있다.

    임금이 후원자가 되다

    소치는 서울 추사 집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더 머무를 수 없었던 이유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소치는 유배중인 스승을 찾아 뵙기 위하여 당시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바닷길인 제주도에 세 번이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치의 일생을 보면 그는 참으로 인연복(因緣福)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복 중에 가장 좋은 복이 인연복이라고 하는데, 소치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연을 만나는 운이 있었다. 호남의 대장원인 녹우당에서 서화와 인연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당대의 명선(名禪) 초의선사와 만남, 추사와 맺은 사제 인연이 그렇다.

    즉 당대의 최고수들을 스승으로 만나는 인연복이 있었기 때문에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치의 인연복은 스승 잘 만나는 인연에서 끝나지 않고 좋은 패트런(patron; 후원자)을 만나는 데까지 이어진다. 아무리 실력 있는 예술가라도 좋은 패트런을 만나지 못하면 고생만 하다 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닌가. 소치의 패트런 중 하나가 당시 임금이던 헌종(憲宗)이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벼슬하지 않는 서민은 임금이 있는 왕궁에 출입할 수 없었다. 소치는 헌종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고 왕궁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소치는 42세에 헌종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헌종이 친히 그림책을 소치에게 보여주면서 그림에 대해 묻기도 하고, 소치가 그림 그릴 때 직접 화폭을 잡아주는가 하면, 제주도에 추사를 만나러 세 번 갔다올 때 파도가 어떠했느냐, 초의는 어떤 인물이냐 등등의 문답이 있었다. 어떤 때는 왕으로부터 과객비로 300금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며, 어느 날 입궁했을 때는 ‘필홍(筆紅)’ ‘어장(御章)’ ‘시법입문(詩法入門)’과 같은 서적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오동나무 상자에 헌종이 직접 시법입문이라는 글씨를 쓰고, 그 상자 안에 전체 4권이 담긴 ‘시법입문’은 현재 허씨문중에서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헌종 이외에도 소치의 패트런은 많았다. 당대의 고관, 명사가 대부분이었음은 물론이다.

    소치는 전남 해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 그러니까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 일대를 비롯한 호남대로를 통하여 많은 여행을 하였다. 이 길을 따라 여행하며 패트런들을 만나서 대접을 받고, 시를 주고받고,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옛날에 황대치가 있었다면 지금은 허소치가 있다(古有大痴 今有小痴)’는 찬사를 받으면서 말이다.

    보통 사람은 여행하기도 어렵고, 여행을 하더라도 고생을 감수해야 했던 조선시대에 이처럼 환대를 받으며 화려하게 여행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한 환대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예술가로서 소치의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고, 역으로 이러한 지방 명사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소치의 작품이 널리 유통되기도 했을 것이다.

    남종화. 소치가 일생 동안 그린 그림의 화풍이다. 남종화는 북종화와 대척점에 서는 화풍을 일컫는다. 정치의 중심지인 북경과 경제의 중심지인 상해로 나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는 몇 가지 남과 북이 있다.

    불교를 보면 남종선과 북종선이 있다. 남종선이 한방에 깨치는 ‘돈오(頓悟)’를 강조한다면, 북종선은 착실한 수행을 통한 점차적인 깨달음의 노선, 즉 ‘점오(漸悟)’를 중시한다. 중국불교사에서는 육조혜능 이후로 남종선이 주류로 자리잡는다.

    도교에도 역시 남파와 북파가 있다. 남파는 주로 명공(命功), 즉 육체적인 수련을 중시한다. 육체가 먼저 바뀌어야 마음이 바뀔 수 있다는 노선이다. 반대로 북파에서는 성공(性功), 즉 마음수련을 더 중시한다. 마음을 먼저 비운 다음에 명공에 들어가야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리지 않는다고 본다. 남파가 선명후성(先命後性)의 노선이라면, 북파는 선성후명(先性後命)을 강조한다.

    남북은 차(茶)의 성향도 다르다. 북쪽 지역에서 생산되는 북차는 잎이 작은 소엽종(小葉種)이 많고, 남쪽 지역에서 나는 남차는 잎이 큰 대엽종(大葉種)이 많다. 소엽종은 주로 녹차를 만들고 대엽종은 발효차를 많이 만든다.

    그림에서 남종화는 문인적인 화풍이라면 북종화는 다분히 무인적인 화풍이 아닌가 싶다. 남종화가 부드럽고 추상적이라면 북종화는 직선적이고 현실적이다. 단적으로 남종화에서는 바위를 그릴 때 피마준(披麻:마 여러 개를 죽 벌여놓은 부드러운 준법)을 쓴다면 북종화는 부벽준(斧劈:도끼로 중간을 탁탁 끊어놓은 듯한 준법)을 많이 쓴다고 한다.

    북종화도 그렇겠지만 남종화에서 강조하는 일관된 주제는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인 자연의 합일(orgasm)이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자기가 떠나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데 있다.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귀하는 데 행복이 있다. 이때 회귀의 대상은 대자연이다.

    대자연이란 바로 산과 물을 일컫는다. 그래서 동양화는 대부분 산수화일 수밖에 없다. 산, 절벽, 안개, 바위, 소나무, 흐르는 계곡물로 돌아가자는 것이 남종화의 주제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운 산수로 돌아갔을 때 에고(ego)의 감옥을 벗어나 ‘거듭날 수 있다’고 보는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미를 통해서 선(善)으로 돌아가고 거기서 다시 진(眞)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진선미 가운데 선과 진보다는 미를 통해서 깨달음과 구원에 도달하는 쪽이 더 쉽고 보편적인 노선 아닐까. 그러므로 남종화가에게는 아름다운 산수가 갖춰진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녹우당과 비슷한 운림산방

    운림산방은 바로 이러한 남종화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지은 집이다. 보통 주택처럼 실용이 목적이 아니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려는 용도로 지은 남종화가의 거처라는 데 다른 명택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운림산방은 소치가 50세 때인 1857년에 고향인 진도에 돌아와서 지은 집이다. 이 해는 스승인 추사가 타계한 다음해로 소치가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해다. 일찍이 추사를 만나 ‘천리를 여행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야말로 붓 하나 들고 산하를 유람한 뒤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 안착한 때가 소치 나이 50세쯤 아니었을까. 그 후 1893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잠시 잠깐의 출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던 운림산방은 소치의 예술정혼이 뭉쳐 있는 곳이다.

    이곳의 풍수를 한번 살펴보자. 좌향은 간좌(艮坐)를 놓았으니, 서남향이다. 나는 운림산방 입구에 들어서면서 그 전체적인 분위기가 해남의 녹우당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풍수에서는 총론과 각론을 모두 살펴야 한다. 총론이란 전체적인 분위기, 즉 숲을 보는 안목이고 각론이란 세부적인 부분, 즉 나무를 보는 안목이다.

    아무튼 운림산방에 들어서는 순간의 총론적 느낌은 녹우당에 들어설 때 와 닿았던 느낌과 비슷한 무엇이었다. 장중하고 호방하면서도 평화롭다고나 할까.

    왜 그런 느낌이 들까 곰곰이 생각하다 운림산방의 뒷산이 녹우당의 뒷산과 비슷함을 발견했다. 운림산방의 내룡이 되는 뒷산인 첨찰산(尖察山)은 해발 485m로 진도에서는 가장 높은 중심산이다.

    산 모양은 동쪽에서 볼 때 다르고 서쪽에서 볼 때 다르다.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미치는 영향력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운림산방 쪽에서 본 첨찰산은 장중하면서도 단정하다. 오행으로 따지면 살이 많이 붙은 토체산에 약간의 금기(金氣)를 섞어 놓은 형태다. 진도 전체에서 보자면 이 산이 높아서 섬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 같기 때문에 첨찰(尖察)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지만, 운림산방 쪽에서 보면 뾰족하다는 느낌은 없고 육중하고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특히 일반 집터의 뒷산에 비해서 운림산방의 뒷산은 그 높이와 넓이가 크기 때문에 더욱 장중한 인상을 준다.

    보통 집터의 뒷산이 이렇게 장중한 경우는 드물다. 장중하기는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이나 날카로움은 주지 않는다는 데에 또한 묘용이 있다. 기암괴석이나 바위가 별로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한 느낌을 준다.

    이 점이 녹우당의 뒷산인 덕음산 분위기와 아주 흡사한 부분이다. 덕음산도 이와 같이 중후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준다. 내룡인 뒷산이 경륜을 쌓은 50대 장년이 풍기는 이미지처럼 두텁고 중후하면, 여기서 배출되는 사람의 성품도 중후하고 두텁다고 본다. 그리고 그 터는 오랫동안 발복이 유지되는 터라고 여긴다.

    또 한 가지 운림산방의 풍수조건이 녹우당과 비슷한 점은 사신사(四神砂), 즉 청룡·백호·주작·현무가 분명하고, 그 내부 면적이 일반 집터의 국세(局勢)에 비해서 훨씬 넓다는 점이다. 보통의 터에는 사신사가 완비된 곳이 적고, 완비된 경우에는 국세가 좁아지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운림산방은 녹우당과 마찬가지로 사신사가 완비되어 있으면서도 국세도 넓은 장점이 있는 것이다. 국세가 넓다 보니 이 터에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하고 호방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인공으로 조성된 운림지

    필자는 운림산방과 녹우당의 풍수형국이 여러 가지로 흡사한 부분을 보면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생각하였다. 소치가 이곳을 잡을 때 녹우당을 모델로 하였음에 틀림없다. 소치의 예술세계가 녹우당으로부터 영향받았음을 고려해볼 때 입지선정부터 녹우당과 비슷한 곳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남의 녹우당이 대장원이라면 진도의 운림산방은 그보다 약간 규모가 작은 소장원에 해당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운림산방과 녹우당이 서로 다른 점은 없는가. 다른 점도 있다. 우선 오른쪽의 백호자락이 다르다. 녹우당은 백호자락에 돌출된 바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운림산방에는 돌출된 바위들이 보인다. 이 바위들은 운림산방에 살기로 작용한다. 백호날에 보이는 살기가 운림산방의 흠이라면 흠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100% 완벽한 자리는 이 세상에 없고, 약간의 흠은 어느 터나 있기 마련이다.

    운림산방의 백호날에 살기가 약간 비치자 이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쪽에 동백나무를 심어 놓았다. 살기 방어용 비보를 한 것이다. 또 하나 운림산방이 녹우당과 다른 점은 혈구에 있다. 녹우당은 터 넓이에 비해서 혈구가 좀 작은 감이 있다. 터는 헤비급 주먹인 데 글러브에 해당하는 혈구는 미들급 정도라고 할까.

    그러나 운림산방은 혈구가 적당하다. 현재 운림지(雲林池)라고 불리는 연못이 바로 그 혈구다. 원래 이 자리에는 연못이 없었다. 이 연못은 소치가 첨찰산을 타고 흐르는 시냇물을 끌어모아 조성한 연못이다. 이 터는 이 연못이 있어야 명당으로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림지가 있기에 운림산방 자리는 풍수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풍수가에서 회자되는 말 가운데 ‘고산(高山)은 장풍(藏風:바람을 막는 곳)이요 평지(平地)는 득수(得水:물을 얻는 곳)’라고 해서 평지의 터는 물이 있는가 없는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본다. 물론 인공으로 조성된 운림지는 오직 풍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정신수양과 조경적인 관점에서도 필요한 연못이었다.

    ‘고사관수(高士觀水:도가 높은 선비가 물을 관조한다)’라는 제목의 그림도 있듯이 물을 관조함으로써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그래야만 지혜가 자연스럽게 솟아나온다는 것이 선비들의 생각이었다.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소치 이래로 허씨 집안에서 5대째 화가를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운림산방이 첨찰산 아래 존재한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운림지 한가운데는 조그마한 섬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백일홍을 심어두었다. 소치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하니 줄잡아 150년은 된 백일홍이다. 그냥 백일홍이 아니고 토종 백일홍이란다.

    남도 지역의 사찰에는 백일홍이 유난히 많다. 기후도 맞는 탓이겠지만 보통 꽃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데 비해 백일홍은 100일이나 핀다는 지조가 있기 때문에 많이 심어놓은 성 싶다.

    운림산방은 백일홍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에 소치가 직접 심은 꽃과 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이곳이 정녕 별천지의 산방(山房)임을 실감케 한다. 예술가가 어찌 꽃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마침 필자에게 운림산방을 안내해준 허경옥씨(65세)에게 각종 나무와 꽃 이름을 물어보았다. 진도 산림조합장인 허경옥씨는 그 이름과 특성을 소상하게 꿰고 있었다. 백동백, 동백, 오죽, 화살나무(참빗살나무: 항암효과가 있다고 함), 은행나무, 심산해당화(일본사람들이 분재로 가장 좋아하는 나무), 자목련, 백목련, 백매화, 호랑가시나무, 후박나무(껍질은 위장약), 팽나무, 수양버들, 맥문동(여름에 땀 많이 흘릴 때 달여먹음), 단풍나무가 운림산방에 널려 있었다. 사시사철 꽃이 피게 안배를 해놓은 것이다.

    허경옥씨를 따라서 산방 뒷산인 첨찰산에 올랐다. 산 전체가 온통 동백나무로 빽빽하다. 대강 100만 그루는 된다고 하는데, 국내 최대의 동백나무 밀식 지역인 셈이다. 새빨갛게 핀 동백꽃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광분케 한다. 이날 답사에 동행한 소설가 박철화씨는 첨찰산을 함께 오르면서 “꽃 중에 동백꽃처럼 관능적인 꽃이 없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언젠가 운림산방과 첨찰산의 동백나무가 지닌 관능을 한번 다루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만큼 남도만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소치의 뒤를 이은 2대 화가는 넷째 아들인 미산 허형이다. 원래 미산은 소치의 장남인 허은의 호였으나, 재질이 뛰어났던 장남이 19세로 죽자 넷째인 허형이 형의 호인 미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미산은 구한말을 지나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역사적 격동기를 살아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만큼 활동하지는 못하였다. 제2회 선전에 63세의 나이로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늦게나마 작품세계를 인정받았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화필을 들고 이곳저곳 부잣집 사랑에 기거하면서 그림이나 병풍을 그려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어와야 했으니,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개척할 여유는 없었다. 필자가 보기에 미산은 아버지 소치와 같이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인연복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손과 제자에 대한 인연복은 달랐다. 남농 허건과 의재 허백련이 미산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남농은 미산의 넷째 아들이고 의재는 유년시절에 미산의 그림지도를 받은 제자다. 후일 아들인 남농은 목포 유달산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고, 의재는 광주 무등산에 터를 잡고 활동하면서 전남지역이 ‘예향’으로 자리 잡는 데 실질적인 영향을 주었다. 무등산과 유달산에 젖줄을 대고 있는 화가들은 대부분 의재와 남농의 제자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덕음산 녹우당에서 첨찰산 운림산방까지 오는 길은 소치가 맡았지만, 운림산방에서 다시 무등산과 유달산의 양대 맥으로 확산되는 중간 연결고리를 미산이 담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산 자신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 혈손인 남농과 법손인 의재를 통해 크게 빛을 본 셈이다.

    불우한 천재, 남농 허건

    남농은 조부 소치의 예술혼이 뭉쳐 있는 운림산방에서 태어나서 강진 병영을 거쳐 목포 유달산 밑의 죽동에 정착하여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남농 기념관에서 지냈다.

    남농은 37세 때인 1944년 ‘목포의 일우’로 선전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려던 무렵, 골습병에 걸려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신세가 되었다. 화가로서 한창 기세가 오를 만할 시점에 어이없게도 불구가 돼버린 것이다. 남농은 43세에 ‘남종회화사’를 집필하면서 그 말미에 당시의 괴로웠던 심정과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인생 칠십 고래희라 하였는데 내가 70세를 산다 하면 반세는 빈고에 시달렸고 반세는 불구자의 신세가 되겠는데, 예술가는 자극이 있어야 한다지만 나와 같이 기쁨과 슬픔, 고통과 가난의 기구한 숙명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자극제에 시달려야만 삶의 진수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만일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낙오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예술은 사람을 고무하고 감동과 기쁨을 주어야 하는 것인즉, 그렇지 않으면 예술의 진가가 없는 것이다. 예술은 자연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고 진실한 감동에서 우러나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남화의 표현양식도 이와 같다. 또 예술은 민족성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나라의 고유성을 버리고 어느 나라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외도이고 그것은 허위의 예술이고 가장의 예술이다. 남화는 조선 남화를 그릴 것이며, 유화는 조선의 유화를 그려야 한다.”

    남농은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지니는 특유의 인정과 소탈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찾아와 그림을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한 데서 그러한 인정과 소탈함을 엿볼 수 있다.

    7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한번은 남농 작업실에 어떤 할머니가 찾아와서 초면인 남농에게 그림을 부탁하였다. 아들이 포항제철에 취직하였는데 아들 상사에게 선물을 하고 싶으니 그림을 하나 그려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심값 정도나 되는 금액이 들어 있는 꼬깃꼬깃한 봉투를 건넨다. 이 장면을 물끄러미 보던 남농은 그 자리에서 소나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소품을 하나 더 그려주었다. 소나무 그림은 직장상사에게 갖다주고 소품은 할머니 갖고 가서 쌀 파는데 보태시라고. 봉투에 들어 있던 돈은 다시 할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집에 가는 데 차비하시라고. 남농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다작을 했다는 비판도 들었다. 남에게 베풀 수 있는 한 베풀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런 비판을 피할 수 없지 않았나 싶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넉넉히 받고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그려주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작업실을 찾아오는 외판원들에게도 박절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무등산 춘설헌의 허백련

    이러한 인품이니 목포 사람들은 남농을 목포의 어른으로 생각하였다. 남농으로부터 나오는 그림을 가지고 줄잡아 200명이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남농이 죽은 후 목포시내 화랑경기가 현저하게 위축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남농은 그 자신이 평생 수집한 수석 2000점을 향토문화회관에 기증하였고, 자신의 그림은 남농미술문화재단에, 그리고 쇠락한 운림산방을 복원한 다음에 진도군에 기증하였다. 죽기 전에 모두 사회에 주고 간 것이다.

    남농에게는 그림에 재질이 뛰어난 막내 동생이 있었다. 바로 임인 허림(林人 許林)이다. 허림은 1941년 ‘가전’(家田), 1942년 ‘6월 무렵’으로 일본 문전에 연속으로 입선하였다. 조선인 화가로 연속 입선한 사람은 이당 김은호와 임인 허림뿐이었으니 그의 천부적 재질을 알 만하다.

    현재 남농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하나 전시되어 있는데, 촌로가 시장에 내다팔기 위하여 가지고 온 닭들이 닭장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닭장 안 닭들 표정이 각기 달라 주목을 끄는 그림이다. 애석하게도 임인은 25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더 이상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임인은 아들을 하나 남기고 갔다. 임전 허문이다. 7세 때부터 백부 남농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홍익대 미대를 나왔다. 가문에 내려오는 갈필법에 자기 특유의 안목을 접합시켜 ‘운무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였다. 수묵의 농담을 절묘하게 구성하여 화면 전체를 동적으로 전개하는 화풍이 운무산수화인데, 구름과 안개의 작가로 불린다. 이 사람이 운림산방의 제4대다.

    5대는 전남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허진 교수다. 29세에 이미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미술전문지에서 분류하는 주목받는 소장작가군에 빠지지 않는 화가다. 체격이 당당하고 선이 굵어서 압인지상(壓人之相)의 분위기를 풍기는 게 영락없이 조부 남농이다.

    허진은 허씨 가문에 내려오는 동양화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온 화가다. 낭만적인 산수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탐욕, 혼란을 그림에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가 몸담은 광주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다.

    마지막으로 의재 허백련을 이야기할 차례다. 혈연으로는 진도의 양천 허씨로 소치의 방손이자, 소치와 미산의 운림산방으로부터 학문과 그림을 계승한 법손이다. 의재는 전통적인 남종화의 문기(文氣) 어린 화풍을 고수한 인물이다.

    그는 운림산방의 미산 문하에서 처음 그림을 접했으며, 20대에는 6년 동안 일본에 머물며 우에노 공원 아래 있는 일본남화의 대가 고무로(小室翠雲)의 화숙에서 남화를 연마하였다. 귀국하여 무등산 마루턱에 ‘춘설헌(春雪軒)’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시·서·화 삼절에 모두 능한 전통적인 문사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진로를 걱정하는 지사(志士)이기도 하였다.

    그가 무등산 춘설헌에 살면서 추진했던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농업기술학교를 세워서 농업인재를 양성한 일이다. 덴마크처럼 농업을 부흥시켜야 나라의 기반이 잡힌다고 보았다. 의재에게 그림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화가 지망생들은 반드시 농사일을 해야 했다. 땀 흘린 뒤에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 의재의 사상이었다.

    둘째는 차를 널리 보급한 일이다. 무등산 춘설차가 그것이다. 그는 ‘고춧가루를 많이 먹으면 국민들의 성질이 급해져서 나라가 망하고 차를 많이 마시면 정신이 차분해져 나라가 흥한다’고 강조하였다.

    일찍부터 차를 중시하였던 의재의 생각은 어디에 그 맥을 두고 있을까? 이는 다산에서 초의선사로, 초의에서 소치, 그리고 미산으로 이어진 다맥(茶脈)을 계승한 것이다. 광복 이후 그가 보급해온 춘설차를, 필자는 그러한 전통 다맥의 산물로 보고 싶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첨찰산 운림산방에서 무등산 춘설헌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온 정신의 맥(脈)임에 틀림없다.

    셋째는 단군사상이다.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갈라진 남북이 화합해서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한 일이다. 이 때문에 빨갱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어야 하였다.

    춘설헌에는 많은 명사들이 의재를 만나러 왔다. 광주에 온 사람들은 의재를 만나는 것이 정석일 정도였다. 육당 최남선, 효당 최범술, 노산 이은상, 미당 서정주도 춘설헌의 단골 방문객이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는 함석헌이 자주 찾아와 며칠씩 춘설헌에 머물면서 의재와 이야기를 했다. 의재는 함석헌에게 ‘젊은 애들 너무 흥분시키지 말라’는 충고도 하였다.

    의재와 특히 친했던 사람은 지운 김철수다. 그는 고려공산당 초대 당수를 지낸 인물로 일본 유학 시절부터 중국 공산당 창립멤버인 진독수와 교류가 있었고, 진독수의 제자뻘인 모택동과도 서신 교류를 하던 인물이며, 북한의 김일성도 지운을 선배로 생각했던 좌익의 거물이었다. 그는 광복 이후 일체의 정치활동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에 은거했는데 유일하게 의재와는 흉금을 터놓는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남농미술관과 의재미술관

    한때 지운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국화가 무척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면회 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살벌한 시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재는 친구를 위해서 국화를 그려 감옥에 보냈다. 춘설헌 앞의 화초들은 모두 지운이 와서 심어 놓은 것이다.

    둘 사이에 이런 일화도 있다. 한번은 부안에서 지운이 의재에게 엽서를 보냈다. 받는 사람 주소를 ‘광주시 무등산 신선님께’라고만 썼다고 한다. 지운이 며칠 있다가 춘설헌에 와서 ‘내가 보낸 엽서가 제대로 도착했는가’ 하고 의재에게 확인하니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의재는 광주의 우체부도 아는 ‘무등산 신선’이었던 것이다.

    무등산 신선을 만나기 위해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한국에 올 때마다 춘설헌을 방문하였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처럼 산소가 부족한 것을 제일 먼저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 게오르규의 주장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는 서구 합리주의 문명에서 결핍된 그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서 무등산의 춘설헌을 찾아왔던 것 아닐까. 그 무엇이란 혹시 인간과 대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는 남종화의 정신 아니었을까.

    의재의 유업을 계승한 사람은 장손자인 직헌 허달재다. 홍익대 미대를 나온 동양화가로, 뉴욕 주립대에서 객원교수로 있다가 현재는 의재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허씨들은 모두 인물이 좋은가 보다. 허달재씨 역시 호남형 미남이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조부인 의재의 훈도를 받았다. 허달재씨는 그 훈도를 이렇게 표현한다.

    “조부님은 항상 강조하셨어요, ‘내 그림이 최고로 보일 때는 손이 앞서간 것이고, 내 그림이 적게 보일 때는 눈이 앞서간 것이라고’.

    조부님은 서울의 유명인사가 춘설헌은 방문했을 때는 당신의 제자들이 손님 시중을 들도록 하였고, 시골 무명인사가 방문했을 때는 손자인 저를 불러 시중을 들도록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조부님의 이러한 차별이 불만이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왔을 때 손자를 불러서 시중을 들게 하면 저도 그 사람과 인연을 맺을 기회가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꼭 유명한 사람만 오면 손자인 저는 빼고 제자들을 부르는 겁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제가 50대가 되니 이제야 조부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조부님은 일생을 공인으로서 사시다 간 겁니다.”

    춘설헌 앞 옛날 농업학교 자리에 신축중인 의재미술관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허달재씨는 의재미술관을 단순한 미술관이 아닌 학교 개념으로 운영하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 차 교육의 중심지로, 그리고 전통문화와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멀리 운림산방에 시작된 맥이 하나는 목포 유달산으로 벋어 남농미술관으로 결국(結局)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광주 무등산으로 벋어 의재미술관으로 결국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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