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정부의 의료 개혁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을 연상시킨다. 보험은 수지를 맞추는 것이 우선이라는 교과서적인 논리를 무시하고, 보험은 소득 재분배를 우선으로 한다는 논리로 통합을 추진한 것이 의료보험 재정 붕괴를 가져왔다. 정부는 의보 개혁 실패를 의약 분업이라는 새로운 개혁으로 덮으려 하다 더 큰 위기를 초래했다. 의료 개악을 초래한 장본인은 누구인가. 주역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새천년 민주당이고 조역은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한나라당이다. 의보통합과 의약분업 법안을 추진해 의료 개악을 초래한 관련자를 샅샅이 밝힌다.
“이번 사건은 1주일쯤 갈 것 같아. 그 정도면 언론도 더 이상 쓸 말이 없을 걸. 한국인은 냄비 체질이라 언론이 1주일만 떠들어도 ‘아이고 지겨워’ 하며 다른 기사를 찾아. 그래서 우리도 ‘1주일만 소나기를 맞자.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날이 온다’ 하고 견디는 거야. 이러니 한국은 개선(改善)이 안 돼. 개혁(改革)을 하겠다며 들어선 정권도 그 분위기에 젖어, 개혁은커녕 개선도 못하고 물러나버리지. 섣부르게 개혁을 시도했다가 그것이 개악(改惡)으로 귀결되는 현실이 바로 한국병(韓國病)의 첫째 원인이야. 이런 것을 잘 알면서도 냄비 체질의 독자들에게 영합하느라, 문제점을 제대로 파헤치지 않는 언론과 정치권도 문제야. 실패한 개혁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없기 때문에 한국은 연일 개혁을 시도하는데도 형편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는 거야.”
과연 한국은 실패한 개혁에 대한 분석이 없는 사회다. 개혁 주체들은 개혁이 실패하면 또 다른 개혁으로 실패를 덮으려 한다. 그래서 ‘개혁, 개혁!’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개혁이 개악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개혁이 개악으로 귀결된 대표적인 사례가 작금의 의료 사태다. 실정을 거듭한 김영삼(金泳三) 정권이 IMF 구제금융을 초래했듯이, 김대중(金大中) 정부도 의보 재정 파탄을 시작으로 위기로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의료 개혁이 실패한 원인과 대책을 제대로 내놓지 않는다면, 한국은 더 큰 위기로 몰릴 가능성도 있다.
개혁실패에 분석이 없는 사회
의료 개혁이 실패한 첫째 원인은 ‘도덕 해이(moral hazard)’에 있다. 의보가 건실하게 운영되려면 국민들이 의보 조합에 내는 보험료와, 의보 조합이 병의원에 지불하는 수가가 일치해야 한다. 77년 도입된 의보는 상당기간 ‘감기 의보’로 불렸다. 감기처럼 치료비가 싼 병에 대해서만 보험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고가의 치료비가 요구되는 병도 의보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국민들로부터 오는 ‘표’를 의식한 정치인과 의보를 ‘공짜’로 생각한 국민들 사이에 묵시적인 ‘야합’이 이뤄진 것이다.
의보를 유지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곳간(財政)을 지키며, 의보료를 100% 걷으러 다니는 ‘사천왕(四天王)’이 있어야 한다. 입법권을 쥔 정치인들은 이러한 사천왕을 지켜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이기심이 강한 국민에 ‘영합’해, 사천왕을 저주했다. 그렇다면 사천왕 뒤에 있는 ‘부처님(대통령과 복지부장관)’이라도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들 또한 사천왕을 배척했다. 이로 인해 곳간이 눈에 띄게 비어가자 정치인들은 다른 곳간도 열도록 요구해, 그곳마저 텅 비게 했다. 의보 재정을 파탄낸 주범은 도덕심이 붕괴된 국민과 그들에게 야합한 정치인이다.
한국 의보는 크게 지역의보와 직장의보로 나뉜다. 지역의보에는 농어민을 대상으로 한 ‘농어민의보’와 도시의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도시의보’가 있다(농어민의보와 도시의보는 의보 초창기에 쓰던 말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한다).
직장의보에는 공무원의보와 사립학교 교직원의보, 그리고 기업체를 상대로 한 139개 기업체의보가 있다(기업체의보는 여러 개의 직장을 대상으로 한 의보라 직장의보로 불리지만, 이 글에서는 혼동을 줄이기 위해 기업체의보로 표기한다. 이 글에서 쓰이는 직장의보는 기업체의보와 공무원의보·사립학교 교직원의보를 총괄한 것이다. 그리고 사립학교 교직원의보는 ‘교원의보’로 줄여서 표기한다).
의보의 효시인 기업체 의보는 1977년 1월1일 직원이 500명 이상인 기업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됐다. 이때 정부는 기업주와 근로자가 의보료를 반반씩 부담케 했는데, 기업주들은 “의보료를 왜 우리가 부담해야 하느냐”고 반발했다. 정부는 이러한 반발을 막느라 의보요율을 아주 낮게 잡았다. EU의 의보요율은 소득액의 15%, 일본은 11%, 대만은 9.6%인 데 비해 한국은 지금도 3.4%에 머물고 있다. 초기 의보가 ‘감기 보험’으로 불린 이유는 낮은 요율 때문이다.
1979년 1월1일에는 공무원의보와 교원의보가 출범해 직장의보가 완성됐다. 직장의보는 워낙 ‘짜게’ 운영됐기 때문에 지난 20여 년 동안 단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직장의보가 건실하게 운영된 이유로는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째는 월급쟁이들은 소득이 완전 공개되는 ‘유리지갑’을 가졌으므로, 의보측은 공정하게 보험료를 징수할 수 있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원천징수 방식으로 보험료를 떼니,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징수율은 언제나 100%다. 이러니 직장의보는 재정이 튼튼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의보는 직장의보보다 10여 년 늦게 시작됐다. 지역의보가 늦어진 이유는 의보료의 공정한 징수와 100% 징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료 사각 지대에 있는 국민을 외면할 수도 없어, 정부는 88년 1월 농어민의보를 시작하고, 89년 7월1일에는 도시의보를 시행했다. 지역의보는 시행 초기부터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의보료 징수율이 70%대, 심지어 60%대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의 지역의보와 비슷한 90%대로 올라갔다. 그러나 98년 통합 후의 지역의보 징수율은 다시 70∼80%대로 떨어졌다.
이로써 모든 국민이 의보에 가입한 ‘국민 개(皆)보험제’가 시행되자, 의료수준을 높이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러한 ‘울림’을 무시할 수가 없어 정치인들은 고급 의료행위를 의보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하려면 국민들로부터 걷는 보험료도 올려야 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의보료 인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이유로 100%징수와 공정한 징수가 불가능한 지역의보 쪽의 재정이 부실해져갔다.
‘의보료를 올리지 않고 부실한 지역의보의 재정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민을 거듭한 일부 학자와 관료들은 상대적으로 재정이 튼튼한 직장의보를 넘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직장의보와 지역의보를 통합하면 국고를 부담하지 않고도 지역의보의 재정부실을 해결할 수 있다’며 의보 통합론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사천왕’ 구실을 하던 관료들은, “무슨 소리냐. 통합하면 지역의보뿐만 아니라 직장의보도 죽는다. 의보는 자치조직이지 시혜를 베푸는 국가 기관이 아니다. 주민들이 지역의보를 자치조직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수지를 맞추려고 해야지 건실한 운영을 기대할 수 있다”며 통합에 반대했다.
이렇게 해서 통합파와 분리파의 대립이 시작됐는데,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통합파가 이겨 통합이 단행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보는 것처럼 의보 재정의 파탄이다. 의보 재정 파탄이 드러난 후인 지난 3월21일, 김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그러나 뒤에서 밝히겠지만, 실패를 초래한 의료개혁은 김대통령이 내건 대통령 공약사업이다. 파탄이 난 근본원인은 김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다.
의보 재정 파탄이 드러나자, 한나라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꼬나들고 나섰다. 제220회 국회가 열린 지난 4월3일 한나라당의 이회창(李會昌) 총재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국민 여러분! 준비 안된 의약분업과 의료보험통합 때문에 보험 재정은 파산이 예고된 상태입니다. 올 한 해만 해도 6조원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모르는 엄청난 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건강을 위한다는 의약분업이 국민에게 고통만 주고 국민을 더 가난하게,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도대체 의약분업이 무엇이기에 이 정권은 의약분업에서 단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의보 재정 파탄에 관한 한 이총재는 김대통령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는 김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의보 재정이 파탄난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 신한국당은 97년 대선에서 의보 통합을 대통령 공약사항으로 발표했다. 1997년 12월31일에는 국민회의와 함께 의보 통합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국회에서 한 비난은 고스란히 그에게 쏟아졌을 것이다.
의보 재정이 파탄난 둘째 이유로는 NGO들의 선동을 꼽을 수 있다. 뒤에 밝히겠지만,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은 의보 통합을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하고, 정치권을 향해 줄기차게 의보 통합을 요구했다. 셋째로는 무리한 의약분업의 강행이다. 정부는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달래려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의사들에게 지불하는 수가(酬價)를 인상했다. 수입(의보료)은 그대로 두고 지출(수가)만 높인다면, 제갈공명의 지혜를 빌려도 재정 파탄을 막을 수 없다.
넷째로는 계속된 노사갈등으로 ‘콩가루 집안’이 돼야 했던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내부사정, 의약 분업을 핑계로 과다하게 급여를 신청한 일부 의사들의 ‘도덕심 붕괴’, 그리고 이러한 의사들의 과당 청구를 가려내지 못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무능을 꼽을 수 있다. 애송이 연주자들이 지휘자도 없이 연주를 하면 시끄러운 불협화음만 난다. 그와 똑같이 확실한 방향감각을 가진 지도자 없이 비전문가들이 마구 추진한 개혁은 의보 재정 파탄이라는 ‘악성(惡聲)’만 내지르게 되었다.
브레이크 없는 벤츠
의보 재정이 파탄나기 전 이를 막으려고 애쓴 사람도 있었다. 과거부터 사천왕을 맡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이들을 ‘개혁의 걸림돌’로 판단하고 제거해버렸다. 이로써 정부는 ‘국고 지원 없이도 지역의보의 재정 부실을 해결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는 효과까지 얻는다’는 명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브레이크’는 없고 개혁이라는 ‘엑셀러레이터’만 있는 자동차를 만든 것이다. 개혁세력이 브레이크 없는 벤츠를 타고 질주한 결과가 의보 재정 파탄이다.
의료 개혁 실패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다시 지역의보를 도입하게 된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통합파와 분리파가 처음으로 맞붙은 것은 지역의보가 출범하기 전인 1980년이었다. 당시 도시와 농촌의 인구 수는 비슷했다. 그러나 의사의 87.2%, 병원의 80.5%가 도시에 몰려 있어, 농어촌은 의료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는 농어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줘야 한다는 당위성과 과연 농어민들이 보험료를 제대로 내주겠느냐는 현실론 위에서 고민에 들어갔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보건사회부는 1980년부터 1987년 사이 경북 군위군과 전북 옥구군, 강원 홍천군과 전남 목포시 등 6개 시·군을 선정해, 지역의보 시범사업에 들어갔다. 시범사업의 목적은 전국적으로 지역의보를 펼쳤을 때 발생할 문제점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사전에 찾는 것이었다. 시범사업과는 별도로 1980년 정부에서는 농어민의보를 직장의보와 통합해 출범시키자는 ‘통합파’와 분리해서 출범시키자는 ‘분리파’ 사이의 대립이 있었다.
보건사회부에서는 이두호(李斗頀) 기획관리실장과 차흥봉(車興奉) 보험제도과장 등이 “농어민의보를 재정이 튼튼한 직장의보와 통합해서 출범시키자. 이렇게 하면 농어민들은 적은 보험료를 내고 의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사회보장의 원리다”라는 논리 위에서 통합을 주장했다. 천명기(千命基) 보건사회부 장관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1980년 10월15일 농어민의보를 직장의보에 통합해 출범하자는 의보통합 안(案)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분리파의 핵심은 1999년 6월19일 대통령 명에 의해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1급)에서 해임된 김종대(金鍾大)씨다. 이때 김씨는 차흥봉씨에게 보험제도과장 자리를 넘겨주고 청와대 비서관으로 가 있었다. 보고서를 받은 전대통령은 김비서관에게 통합의보가 가능한지 검토케 했다. 김비서관은 ‘사람은 내 돈이다 싶을 때 절약한다. 직장의보는 근로자들이 공정하게 의료비를 부담하기 때문에, 재정을 절약하며 자율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농어민의보를 붙이면,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의식이 생겨, 직장의보의 재정마저 무너진다. 의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험을 분산시켜 재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소득재분배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는 것을 요지로 한 통합 반대 보고서를 올렸다.
통합 반대 보고서를 읽어본 전대통령은 1980년 11월17일 천장관이 올린 의보통합 안에 서명하지 않고, ‘신중 연구검토’라는 글귀를 써 반려했다. 이로써 제1차전은 분리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분리파와 통합파 간 오랜 싸움의 서막에 불과했다. 1981년 7월 천명기 장관은 국회 보사위원회에 출석해 단계적인 의보 통합 방안을 거론했는데, 이를 계기로 통합론이 국회로 번져갔다. 보사부뿐만 아니라 정치권에도 통합의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1982년 1월 여당인 민정당은 농어민의보를 직장의보에 통합해 출범시킨다는 것을 골자로 한 ‘의료보험 일원화법’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얼마 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김정례(金正禮)씨로 교체됐다. 김장관도 통합을 지지해 10월11일 통합의보에 관한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렸다. 그리고 11월2일 김장관과 민정당의 이종찬(李鍾贊) 원내총무, 최영철(崔永喆) 국회 보사위원장이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하러 청와대에 들어갔다.
전대통령은 김종대 비서관의 상급자인 김태호(金泰鎬) 정무2수석비서관과 윤성태(尹成泰) 비서관을 배석시킨 가운데 이들을 맞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당대의 실세’ 이종찬 총무였다. 이총무는 “지역의보를 재정이 탄탄한 직장의보와 합치는 형식으로 출범시키면, 국고 부담 전혀 없이도 의료보험을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윤성태 비서관은 “의보를 통합하면, 직장의보료의 절반을 부담해온 기업주들이 더 이상 의보료를 부담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는 등의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좌천된 통합반대파 김종대씨
양쪽 주장을 들은 전대통령은, “구구절절이 비서실 말이 옳구먼. 당(黨)에서는 공부좀 더 해요”라고 일갈했다. 사천왕들이 또 이긴 것이다.
이 대결을 계기로 농어민의보는 직장의보와 통합하지 않고 단독으로 재정을 꾸리는 쪽으로 방향이 결정됐다. 6개 시·군에서 펼치는 시범사업도 농어민의보가 단독으로 재정을 맞출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합론은 ‘불사신’이어서 야당과 시민단체로 옮겨가 뿌리를 내렸다. 시간이 지나자 학계에도 뿌리를 벋어, 범야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통합론은 선거가 예정된 ‘정치의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하나둘 “전문가들도 합치면 재정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왜 통합을 하지 않는가” 하며 분리파를 비판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1987년이 밝아오자 민정당에서 다시 의보 통합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때 김종대씨는 의보 주무부서인 보건사회부 사회보험국장이었다. 민정당으로 달려간 김국장은 통합시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 간신히 통합론을 가라앉혔다. 그 덕분에 민정당의 노태우(盧泰愚) 후보는 의보통합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태우씨가 당선자 시절이던 1988년 1월1일 전두환 대통령은 시범사업을 끝내고, 시·군을 단위로 한 지역의보인 농어민의보를 출범시켰다.
1988년 2월25일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마지막 남은 도시의보 실시를 전향적으로 검토했다. 이때 보사부장관은 권이혁(權彛爀)씨고, 차관은 이두호씨, 의보 업무를 총괄하는 사회보험국장은 김종대씨였다. 공교롭게도 80년에 대립했던 이두호씨와 김종대씨가 상하 관계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때의 이슈는 도시의보를 특별시와 직할시·도 같은 광역 단위로 실시할 것이냐, 시·군·구 같은 기초 단위로 실시할 것이냐였다. 88년 3월12일 이두호 차관실에서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시의보 설립 검토 회의가 열렸다.
이차관은 “도시의보는 광역 단위로 실시해야 관리운영비가 적게 들고 계층간의 소득재분배도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종대 국장과 송재성(宋在聖) 보험제도과장은 “매년 의보 조합이 의사들에게 지불하는 급여비(수가)가 15% 이상 증가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니 도시의보는 주민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작게 만들어야 한다”고 반대했다. 김국장은 쐐기를 박기 위해 “주무 국장으로서 나는, 광역 단위로는 할 자신이 없고, 광역 단위로 했다가 재정이 파탄나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광역 단위로 실시하려면, 내 보직을 바꿔달라”고 덧붙였다.
말이 씨가 됐다. 3월31일 김국장은 산하 기관인 국립보건원 사무국장으로 좌천됐다. 그러나 송과장을 비롯한 실무자들의 계속된 반대로 1989년 1월1일 출범키로 한 도시의보는 4월1일로 연기됐다가, 7월1일에야 시·군·구 기초 단위를 무대로 실시하게 되었다. 사천왕들이 또 이긴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이보다 훨씬 더 큰 싸움이 정치권에서 터졌다. 도시의보 출범 1년 전인 88년 4월26일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주-평민-공화로 이어지는 야3당이 민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與小野大).
야3당은 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지역의보를 직장의보와 통합해서 출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야3당은 여소야대를 이용해 ‘모든 지역의보를 직장의보에 통합시켜 국민건강보험공단을 만든다’는 법안(국민의료보험법)을 제출했다. 89년은 노대통령이 공약한 중간평가를 실시할 것이라는 ‘묵시적인 합의’가 있던 해다. 그런 상황에 여당인 민정당이 야당이 낸 법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때 보사부 장관은 의사협회장을 지냈던 문태준(文太俊)씨였다. 문장관은 분리파인지라, 김종대씨를 보사부 공보관으로 불러들여 놓고 있었다.
민정당이 통합에 찬성하자 문장관은 김윤환(金潤煥) 민정당 원내총무를 찾아갔다. 그러나 김총무는 “여소야대에서는 야당이 낸 법안을 막을 재간이 없다. 올해는 중간평가를 하기로 했으니, 중간평가에서 이긴 다음, 이 법안을 뒤집자”라고 설득해, 문장관은 소득 없이 돌아왔다. 그리하여 1989년 3월9일 통합의보법안은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보사부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통합 반대였다. 주무 부서인 사회보험국에서는 ‘통합의보가 실시되면 봉급생활자들의 부담이 2.8배 정도 늘어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만들었다. 김공보관은 기자들에게 이 자료를 배포하며, ‘통합의보에서 봉급쟁이들의 부담이 증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로부터 1주일간 도하 언론은 통합의보가 실시될 때의 문제점을 집중 보도했다.
통합의보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3월15일 노대통령은 국회에, 헌법 제53조 2항에 따라 통합의보 법안 재의(再議)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일명 거부권 행사). 3월16일 국무회의는 문태준 장관이 제출한 ‘통합의보법 재의 요구안’을 가결했다. 3월22일 노대통령은 이의서(異議書)를 붙여 이 법안을 국회로 환부(還付)했다. 환부된 법안이 다시 국회를 통과하려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여소야대 국회일지라도 3분의 2 찬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 이 법안은 자동 폐기됐다. 화가 난 야당은 ‘분풀이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공연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냐, 공보관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냐”며 김종대 공보관에게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89년 5월 국회 보사위원회는 김종대 공보관을 불러들였다.
의보 통합을 주장해온 평민당의 박영숙(朴英淑)·이철용(李喆鎔) 의원 등은 보사부가 배포했던 보도자료를 흔들며 “봉급생활자의 부담이 2.8배나 증가한다는 근거나 뭐냐? 당신은 허위 자료를 배포해 기자들을 선동했다”고 따졌다. 김공보관은 “도시 자영업자는 소득을 낮게 신고해 보험료도 적게 납부한다. 때문에 지금처럼 보험 재정을 유지하려면, 봉급생활자들이 2.8배 더 부담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허위자료가 아니다”고 강변했다.
싸움은 이런 식으로 자정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러자 민정당 간사인 김인영(金仁泳) 의원이 김공보관에게 “시간이 늦었으니 적당히 사과하고 끝내자”며 사과 문안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김공보관은 “사과라는 말은 넣을 수 없다”고 한 후, ‘제가 배포한 자료로 인해 물의가 있었다면 유감입니다’라는 글귀를 써서 발표했다. 그러자 평민당 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뭐! 물의가 있었다면 유감이라고? 물의가 없었다면 유감이 아니란 얘기지? 언론에서 이 난리를 친 게 물의가 아니면 뭐야!” 하고 고함을 쳤다.
김공보관은 ‘공무원 안 하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에 정면으로 맞섰다. “기자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공보관이 해달라는대로 써주느냐. 당신들도 기자를 상대해봐서 알겠지만 그들이 써달라고 하는 대로 써주던가? 기자들도 그 위에 부장·국장이 있어 자기 마음대로 못 쓴다. 언론도 자기 판단이 있어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말이 옳다 싶을 때 쓰는 것 아니냐?”
이 싸움은 신상우(辛相佑) 위원장이 요령껏 방망이를 두들겨 결론 없이 마무리됐다. 이로써 사천왕들은 또 한 번 승리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씨는 특히 평민당 의원들과 결정적으로 사이가 멀어졌다. 상처뿐인 승리인 것이다.
정치의 계절과 의료보험
1992년은 3월24일 제14대 총선, 12월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정치의 계절’이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라는 극약 처방을 맞고 사그라든 통합론이 부활할 시기가 온 것이다. 통합론은 92년 내내 이 당 저 당으로 “붕붕” 날아다녔으나,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합의보를 공약에 포함시키지 않은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집권 초기 김영삼 정권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곧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적 성격을 드러냈다. 대북문제와 경제 등에서 실정(失政)을 거듭해 인기가 급락하더니, 95년 6월27일 열린 지방 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했다. 김대중씨가 정치에 복귀한 것은 이때였다. 95년 9월5일 김대중씨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자, 민주당에 있던 동교동계 의원들이 옮겨와 하루아침에 국민회의는 제1야당이 되었다. 야당다운 야당의 부활은 통합론의 부활과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와중에 노태우 비자금 사건(95년 10월19일)이 터져 양김씨 모두 정치자금 의혹을 받게 됐다. 김대통령은 민자당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기도 하고(95년 12월6일), 5·18 특별법을 만들어(95년 12월19일)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전-노씨를 다시 법정에 세우기도 하며, 반전을 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96년은 5·18 특별법에 따라 전-노씨를 재판하느라 계속 시끄러웠다. 97년 1월23일 한보철강이 부도나면서 김영삼 정부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97년 5월17일에는 김현철(金賢哲)씨가 구속되더니,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1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그해 연말에는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정치 과잉’을 낳고, 정치 과잉 시대에는 어김없이 의보 통합론이 부활한다. 민주화를 이유로 시민단체에서 의보 통합 주장을 내놓자, 정부는 이를 달래려고 재정은 생각지도 않고 의보 혜택 범위를 확대했다. 과거에는 의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날짜가 1년에 180일이었으나 96년부터는 매년 30일씩 늘어 최근에는 365일이 되었다. 과거에는 의보 혜택에서 제외돼 있던 컴퓨터단층촬영(C/T) 같은 고가장비 검사도 의보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의보 혜택을 늘렸다면 보험료도 따라서 올려야 하는데,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의보료 인상을 막았다. 도덕해이(moral hazard)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의보의 재정이 특히 나빠졌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지역의보를 직장의보에 통합시켜라”고 요구했다. 건강연대와 경실련이 대표적인 단체였다. 이러한 주장에 동조한 양모·김모 등의 학자(의사)들은, “통합하면 5조원 절감효과가 있다”고 떠들었다. 1996년 11월30일 이성재(李聖宰) 의원 등을 대표로 국민회의가 이를 받아들여 의보통합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쪽에서 적극적으로 신한국당을 설득했기 때문에, 이 법안은 국회 본회의로 올라오지 못했다.
15대 대선이 예정된 97년에 들어서자, 신한국당에서는 김영삼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이 대선에서 이기는 방안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로 인해 껄끄럽던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와 김대통령 사이가 더욱 멀어졌다. 이런 가운데 신한국당에서 의사 출신인 황성균(黃性均) 의원이 의보 통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보건복지부 장관은 경제학자 출신인 최광(崔洸)씨였고, 김종대씨는 기획관리실장을 하다 신설된 식품의약품안전본부장으로 밀려나 있었다.
97년 10월30일 황성균 의원은 동료 의원 30명의 서명을 받아 의보통합 법안(국민의료보험법)을 발의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1월7일 김영삼 대통령이 돌연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김대통령의 탈당은 여당이 없는 상황, 즉 당·정회의가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 신한국당의 의보통합법안은 1년 전에 제출된 국민회의의 의보통합법안과 합쳐졌다. 12월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다음인 12월31일, 제15대 국회는 여야 만장일치로 다시 한번 통합의보법(정식 명칭은 ‘국민건강보험법’)을 통과시켰다.
국민회의가 구성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의보통합을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선정했다. 98년 1월 출범한 노사정위원회도 의보통합에 합의했다. 의보통합은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DJ노믹스’의 상징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당선자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진언(進言)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1998년 2월 말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자민련 몫으로 분류된 보건복지부 장관에는, 의사 출신의 주양자(朱良子)씨가 임명됐다. 주장관은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시절에 의보 통합을 지지한 바 있다.
이때 식품의약품안전본부는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 승격했으며, 청장에는 박종세(朴鍾世)씨가 임명되었다. 김종대씨는 복지부 차관으로 갈 것이라는 하마평을 들으며, ‘붕’ 뜬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쪽에서 의보통합에 반대해온 김씨를 차관에 임명하는 데 반대해, 더욱 오래 떠 있게 되었다. 김씨가 자신의 거취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주장관이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해달라”며 잡아끌었다. 기획관리실장은 식품의약품안전본부장이 되기 전에 거친 곳이라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했다.
또 보건복지부로 가서 의보 통합에 일조하는 것도 마땅치 않아 미적거리고 있는데, 주장관은 한밤중에도 전화를 걸어와 “같이 일하자”고 설득했다. 여걸(女傑)이란 소리를 듣는 주장관은 “당신이 의보 통합을 반대한 원칙주의자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나는 비록 통합에 찬성했지만, 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처럼 의보 통합 문제점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은 것이다. 의보를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통합과정에 생기는 문제점을 줄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말 때문에 김씨는 또다시 기획관리실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주장관은 취임 두 달도 안 돼 재산파동으로 물러나고, 5월1일 김모임(金慕妊)씨가 후임 장관이 되었다. 김장관 시절인 98년 10월1일, 통합의보법에 따라 227개 시지역의보와 공무원·교원의보 조합이 통합해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이 되었다(1차통합). 관리공단 이사장에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의 비서였던 조용직(趙容直)씨가 취임했다. 그러나 지역의보와 공무원·교원 의보는 조직만 통합하고, 재정은 2001년 1월1일 합치기로 하였다.
통합하기 전 전체 의료보험의 당기 징수율은 92%였다. 그런데 통합 이후 전산장애, 행정력 이완 등으로 인해 3개월간의 당기 징수율이 70%대로 떨어졌다. 98년 말이 되자 지역의보는 1600억 원, 공무원·교원의보는 3000억 원의 적자를 냈다. 반면 국민들이 내는 의보료는 대폭 올라갔다. 통합 전의 지역의보 평균 보험료는 2만5437원이었으나, 통합 후인 99년 5월 말에는 25%가 인상된 3만1705원이 되었다. 월급쟁이인 공무원·교원의보 쪽의 의보료는 57%가 인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보험요율을 올렸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차흥봉 對 김종대
여기서 우리나라 지역의보의 ‘웃기는 현실’을 하나 밝힌다. 국세청은 의사·변호사·장사꾼 등 소득 파악이 어려운 자영업자들에게는 나름대로 만든 ‘과세표준액’을 근거로 세금을 부과한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국민연금표준소득을 근거로 연금액을 부과한다. 그렇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도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정관 47~51조에서 따라 지역주민이 보유한 자동차 배기량 등을 기준으로 엉성하게 의보료를 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98년 10월 통합된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은 지역의보에 속해 있던 주민들의 소득을 임의로 높게 잡아, 25% 인상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통합 이전 월급쟁이들로 구성된 공무원과 교직원의보는, 보너스와 수당을 뺀 월급을 기준으로 3.4%의 요율을 적용해 보험료를 책정했었다. 그런데 통합 후에는 기본급과 보너스 각종 수당을 더한 연봉을 12로 나눈 후, 3.4% 요율을 적용, 매월 보험료를 책정했다. 통합 후 공무원·교원의보 쪽 의보료가 지역의보의 인상률보다 2.3배나 많은, 57%나 인상된 것은 이 때문이다.
89년 여야 합의로 통합의보법안이 가결된 후 김종대씨가, “통합의보가 실시되면 봉급생활자들의 부담은 2.8배 정도 늘어날 것”이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란 것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보험료가 인상됐는데도 통합의보는 적자를 냈다.
지역의보의 재정은 96년 이후 나빠지긴 했지만 적자로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통합하자 적자로 반전됐으니, “통합하면 우리 보험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무너져 의보가 무너진다”고 한 분리파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자 당황한 정부는 99년도 추경예산을 편성해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에 1000억 원을 지원해 위기를 넘기게 했다. 실패로 드러난 개혁을 감추기 위한 정부의 이러한 지원은, 부실 기업에 대해 공적 자금을 남발하는 것과 유사한 행태다.
1999년 5월23일 국민연금 사태(이것도 통합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로 김모임 장관이 퇴임하고 차흥봉씨가 장관이 됐다. 차장관은 ‘원조 통합파’로, ‘원조 분리파’인 김종대 실장과는 영원한 앙숙이다. 학교(서울대)로 따지면 차장관이 4년 선배지만, 보건사회부의 보험제도과장은 김실장이 먼저 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배가 가려면 누군가는 내려야 한다. 내리는 사람은 ‘칼날’을 쥔 김실장일 수밖에 없다. 기획관리실장은 1급(관리관)이기 때문에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다. 장관과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다.
이미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다. ‘의료보험 통합일원화와 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와 ‘건강사회를 위한 보건의료단체 대표자 회의’ 등 시민단체는 차흥봉씨의 장관 취임을 환영하는 문건을 뿌렸다. 6월15일 복지부 실·국장 회의에 참석한 김실장은 “통합은 형평성 있는 보험료 부과를 어렵게 한다. 또 부과된 보험료를 완전 징수할 수도 없다. 의보 통합은 지방화·자치화를 지향하는 현 추세에 맞지 않는 대표적인 반(反)규제개혁이 될 것이다”며 정면으로 차장관을 공격했다. 언론이 이러한 김실장의 항명(抗命)을 알았다면, 당연히 1면 톱으로 보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에서 한국 함정은 무사했으나 북한은 경비정 1척이 격침되고 1척 완파, 4척 반파된 상태로 간신히 북으로 돌아갔다. 항명사건 직후 복지부는 김실장에게 “명예퇴직 수당 8300만원을 더 줄 테니 사직하라”고 회유했다. 김실장은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뀔 때마다, 공무원들이 소신을 버리고 변신해서는 안 된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다 해임됐다는 기록을 남기겠다’는 의지로, 이를 뿌리쳤다. 6월19일 기다리던 해임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그 길로 김실장은 ‘의보 통합 문제점을 공론화시킬’ 생각으로, 기자실을 찾아가 건의문을 돌리며 의보를 통합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김실장의 ‘살신(殺身)’은 불행히도 연평해전 후속 보도에 밀려 크게 보도되지 못했다. 공론화에 실패한 것이다.
이 시기 복지부는 김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자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선정한 100대 과제 중 하나인 의약분업 실시 문제로 시끄러웠다. 약사법에 따라 의약분업 실시 시기는 1999년 7월1일로 잡혀 있었다. 이를 위해 복지부는 최선정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의사·약사·소비자단체 대표를 위원으로 한 ‘의약분업추진협의회(분추협)’를 만들어 5월까지 40여 차례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98년 11월부터 의료계와 약계는 분업 연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이 반발했다. 12월3일 김대중 대통령은 시민단체의 주장을 수렴해 “여당이 의약분업을 주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의장은 김상현(金相賢)의원을 위원장, 통합의보안을 발의했던 이성재 의원과 서울대 김용익(金容益) 교수를 부위원장으로 한 ‘보건의료 효율화와 선진화를 위한 정책기획단’을 발족시켰다. 5월10일 양모 교수 등은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의사·약사 대표를 모아놓고 의약분업에 관한 합의서를 만들어 서명을 받은 다음, 복지부를 찾아가 “이것대로 분업을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시민단체와 국민회의 정책기획단이 복지부의 분추협을 떼미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김유배(金有培) 복지노동수석이 이 분업안을 지원했고 김성재(金聖在) 정책기획수석은 옆에서 거들었다.
이 과정에 분추협은 뒷전으로 밀리고, 국민회의 정책기획단이 분업을 주도하게 됐으나, 분업은 2000년 7월1일로 다시 연기되었다. 이유는 의사들의 파업과 16대 총선 때문이었다. 99년 7월 복지부는 ‘분업실행위원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분업 작업에 들어갔는데 11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의약품 실거래 상환제’를 실시하며 평균 30%에 이르는 약값 거품을 걷어버린 것.
약값 거품을 걷어 버리면 의사들의 지갑이 얇아진다. 분업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던 의사들은 장충체육관(99년 11월) 집회를 시작으로 행동에 나서 2000년 5월부터 휴진과 파업을 거듭했다.
사천왕을 맡아온 전문 관료 대신 ‘개혁’을 주장해온 정치인과 시민단체가 전면에 나서 분업을 추진했는데 의료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가운데 2000년 1월1일로 예정됐던 기업체의보와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의 통합(2차 통합)도 2001년 7월1일로 연기됐다. 1차 통합 이후 적자가 누적된 것도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4월13일로 예정된 16대 총선이 더 큰 요인이었다. 여당(새천년민주당)은 의료대란 와중에 2차 통합을 강행했다가 또다시 적자가 발생하면, 선거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해진다고 판단해 2차 통합을 연기한 것이다.
의사 파업으로 분업을 못하게 될 조짐이 보이자, 2000년 4월1일 차장관은 의사들에게 돌아가는 수가를 6% 인상하는 ‘당근책’을 사용했다. 그래도 파업이 반복되자 2차 의보 통합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출범한 2000년 7월1일 다시 9.2%를 올려주었다. 이때 민주당의 이해찬(李海瓚) 의원은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개혁이 불가능하다”며 분업을 추진하는 차장관을 측면지원했다.
그러나 2000년 8월6일 차장관은 의료대란으로 물러나고 최선정 차관이 장관이 되었다. 사흘 후인 8월9일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는 의사 파업 사태를 논의하기 위한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열고, 세 번째 수가 인상을 결정했다. 8월10일 최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발표하고, 9월1일 수가를 6.5%를 인상했다. 그러나 이 인상은 97년에 제정된 통합의보법(국민의료보험법)을 위반한 ‘불법 인상’이다.
정부가 저지른 不法 수가 인상
이 법 42조 1항에 ‘의보 수가(급여비용)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과 대통령이 정하는 의약계 대표자 사이의 계약으로 결정한다’고 돼 있다. 그리고 부칙 제1조는 ‘이 법은 2000년 7월1일부터 시행한다’고 돼 있고, 부칙 제11조는 ‘이 법 시행일부터 6개월까지는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 이사장과 의약계 대표자 사이에 의보 수가가 계약된 것으로 본다’고 돼 있다(注: 인용된 법조문은 독자들의 이해가 쉽도록 일부 수정했다). 따라서 2000년 7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는 이미 의보 수가가 계약된 상태이므로, 정부가 임의로 올릴 수 없다.
그런데도 이총리는 대책회의를 열어 인상을 결정하고, 최장관은 이를 발표했다. 국회는 법을 어긴 국무위원을 탄핵할 수 있지만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01년 1월 수가는 또다시 7% 정도 인상됐는데, 이는 공단 이사장과 의약계 대표의 계약에 따른 인상이므로 합법인 셈이다.
이처럼 의약분업을 실시하기 위해 8개월 사이에 네 차례나 수가를 올려주었으니, 통합의보 재정은 ‘바닥’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2001년 3월12일 박태영 이사장이 “올해 적자가 4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밝혀야 했던 이유다.
이제부터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내부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98년 10월1일 지역의보와 공무원·교직원의보가 통합(1차통합)해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이 탄생하기 전, 227개 지역의보의 내부 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서울 강남구 지역의보는 적립금이 많지만, 농촌 지역의 의보는 적립금이 거의 고갈돼 있는 등 지역별 재정이 천차만별이었다. 지역의보 노조가 227개 지역별로 만들어졌다면 문제가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역의보노조는 전국을 무대로 한 단일 노조로 편성됐다. 반면 227개 지역의보의 조합장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람들이다.
조합장은 지역주민을 대표해 지역의보측의 사용자가 돼야 하는데, 낙하산을 타고 온 월급쟁이 조합장이 무슨 힘이 있는가? 이들은 대부분 월급만 타먹고 임기가 끝나면 교체되곤 했다. 그 바람에 지역의보 노조는 강성이 되어 갔다. 이러한 지역의보가 공무원·교직원의보(이하 공·교의보)와 통합해, 86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공단이 되었다. 이중 7800여 명은 지역의보에서 왔고 공·교의보에서는 800여 명이 왔다.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지역의보 노조였다. 지역의보 출신의 일부 노조원들은 심각한 도덕해이(moral hazard) 현상을 보였다.
지역의보 노조 출신들은 공·교 출신과 비노조원들을 ‘공비’라고 부를 정도로 배타적으로 대했다. 조용직 이사장을 비롯한 공단 간부를 압박하기 위해 장기 파업도 불사했다. 2000년 7월1일 공단은 139개 기업체의보와 통합(2차통합)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되고, 이사장에 박태영씨가 취임했다. 취임 직후 박이사장은 지역의보 출신 노조원들에게 붙잡혀 화장실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 일을 계기로 박이사장은 “내가 더 바랄 게 뭐 있다고 자리에 연연할 것이냐. 쫓겨나더라도 젊은 사람들의 버릇을 고쳐 놓아야겠다”며 노조원들과 정면 대결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노조는 장기파업에 들어갔지만, 의보는 제대로 운영되었다. 절대 다수의 노조원이 파업중인데도 의보가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인력이 남아돈다는 증거다. 박이사장은 불법파업에 대해 “복귀하지 않으면 관계 법과 회사 내규에 따라 해임한다”고 밝히고 실행에 옮겼다. 박이사장의 원칙론이 ‘10년 불패(不敗)’를 자랑해온 지역의보 노조를 꺾었다.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들이 하나둘 복귀한 것이다. 박이사장이 공단의 기율을 잡아가는 동안, 공단의 재정은 정부의 거듭된 수가 인상(그중 한번은 불법 인상)으로 거덜나버린 것이다.
의보 재정이 바닥난 데는 의사와 약사들의 진료비 과잉 청구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1차적으로 의사들의 과잉 진료비 청구를 걸러내는 곳은 서재희(徐載喜)씨가 이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다. 미국과 대만 심평원의 삭감률은 10%대이나 2000년 7월 이후 우리 심평원의 삭감률은 0.74%에 불과했다.
서원장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사람이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사별한 부인 차용애씨 여동생의 남편이다. 김대통령에게는 ‘전(前) 동서’고 김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서원장은 서울 송파에서 개업했던 의사인데, 김대통령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가 심평원 원장에 임명된 이유는, 의료대란을 일으킨 의사협회가 “서재희씨를 원장에 앉혀라”고 요구해서다. 전통적으로 심평원은 간호사 출신이 다수를 차지해왔다. 병·의원의 진료비 책정 사정에 정통한 이들은, 의사들이 청구한 진료비를 비교적 엄격히 심사해왔다.
일반적으로 간호사들은 의사의 지시를 받는 하급자로 인식된다. 때문에 의사들은 심평원의 진료비 삭감을 못마땅히 여겨왔는데, 의료 대란을 계기로 정부를 압박할 수 있게 되자, 심평원 원장으로 서재희씨를 추천해 이를 관철시킨 것이다. 의사들도 ‘도덕해이’ 현상을 보인 것이다.
徐載喜씨와 심평원
의사는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지역의보에 가입해 의보료를 납부하여야 한다. 그러나 심평원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서원장은 의보료를 단 한푼도 납부하지 않았다. 국회에서 그는 그 이유를 “직장에 다니는 큰아들의 의료보험 카드에 이름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고 답변했다.
큰아들 의보에 이름을 올려 놓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소득이 많은 의사와 변호사가 아들 의보에 이름을 올려놓는 방법으로 보험료를 내지 않은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뿔이 요상하게 굽은 황소가 있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황소는 그 뿔로 필요한 일들을 그런대로 해왔다. 그런데 한 수의사가 뿔을 바로잡아줘야 한다며, 황소를 묶어 놓고 무리하게 힘을 쓰다 뿔 하나를 뽑아버렸다. 뿔이 뽑힌 구멍에서 피가 ‘철철’ 쏟아지자, 수의사는 그 구멍에 뽑은 뿔을 도로 꽂으며 “이제 바로 고쳤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래도 주위 사람이 ‘돌팔이’로 보는 것 같자, 수의사는 하나 남은 뿔마저 바로잡아주겠다고 용을 쓰다가 그마저 뽑아버렸다. 두 뿔이 뽑힌 황소는 너무 괴로워 숨을 헐떡이다 숨을 거둔다.
이러한 우화에서 나온 4자성어가 ‘교각살우(矯角殺牛)’다. 황소가 한국의 의료 체제라면 수의사가 처음 뽑은 뿔은 의보 통합이고, 두 번째 뽑은 뿔은 의약 분업일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의료 개혁은 교각살우의 우(愚)를 연상시킨다.
돌이켜보면 실패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너무도 많았고 위험 신호는 여러 차례 울렸었다. 그러나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또 다른 개혁으로 위험신호를 덮어버리려고만 했다. 정도(正道)로만 개혁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의료 수가의 불법 인상이라는 ‘편법’까지 사용하며, ‘개혁 지상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의료 개악을 초래한 것이다.
개혁 지상주의가 초래한 최대의 실패작은 모택동(毛澤東) 시절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혁명일 것이다. 정부의 무리한 의료 개혁 추진은 문화대혁명과 흡사한 면이 많다. 사천왕인 전문관료를 ‘개혁 반대 세력’으로 몰아 들어내고, 시민단체와 학계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수용해 개혁이라는 허상을 만들었다. 여기에 임기말을 맞아 국정을 포기해버린 김영삼 대통령과 통합의보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준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가 조연을 맡았다. 그리고 정부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거듭하다 큰 사고를 냈다. 김종대씨는 이렇게 경고했다.
“의보 재정은 그래도 돈이라는 수치로 구성되기 때문에, 바닥난 사실이 공개된다. 재정이 바닥남으로써 개혁이 실패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 지상주의자들은 돈이 새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분야에서는 자신의 길이 옳다며 꾸역꾸역 끝까지 갈 수 있다. 국민들은 의료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잘못된 개혁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矯角殺牛하는 文革?
기자는 의료 개혁 실패를 취재하기 위해 여러 기관의 관계자를 만났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누가 의료 개혁을 주장했고 누가 반대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몇몇 정보 기관에서 일찌감치 ‘지금처럼 의료 개혁을 추진하면 올 연말이면 의보적자가 2조원에 이를 것이다’라고 보고한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적자 폭은 예상 밖으로 커져 4조원이 될지 6조원이 될지 종잡지도 못하는 상태다.
실무자들도 반대하고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정보기관에서도 잘못됐다고 보고하는데, 정치인들로 구성된 개혁 지상주의자들은 개혁을 추진했다. 모 정보기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김원길씨는 절대로 1년 이상 장관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의보공단의 관리비를 줄여서 적자를 없애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쉽게 줄일 관리비라면 전임 장관이 못했을 리가 없다. 박태영씨가 노조원과 외롭게 싸울 때 정치인 김원길 의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김장관은 목적세를 부과해 의보 적자를 메우는 방안을 말했다가 철회했는데, 목적세를 부과하면 정말로 민심 이반이 일어난다. 김원길 장관은 하도 답답해 남몰래 김종대씨를 찾아가 현재 상태에서 의보 사태를 해결하는 방안이 무엇이냐고까지 상의했다고 한다. 개혁 방해 세력이라고 내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보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다. 의료 개악의 종범이긴 하지만 국회는, 국정감사를 열어 의료 개악을 초래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국민들에게는 전후 사정을 솔직히 밝히고 과감히 의보료를 100% 이상 인상해야 한다. 100% 인상해도 의보 요율은 6.8%밖에 되지 않는다. 이중에서 국민은 절반인 3.4%만 부담하니(나머지는 정부와 사용자가 부담), 월 100만원 소득자라면 1만7천원을 내다가 3만4천원을 내는 셈이 된다. %는 높아도 총액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가죽(革)을 뒤집어엎는(改)’것이 개혁이다. 그만큼 개혁은 어렵다. 때문에 개혁은, 정직한 정부가 정직하게 추진할 때 성공한다. 그래서 개혁을 할 때는 전문가가 필요하고 프로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