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꿈도 영어로 꾸는 엘리트 병사들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5-04-18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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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군 군복에 한국군 계급장을 달고 미군과 함께 일하는 병사. 세계에 유례가 없는 카투사(KATUSA)가 창설 반세기를 넘어섰다. 그들은 누구인가.
    한·미 정상회담을 몇시간 앞둔 3월7일 아침 워싱턴.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방미중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조찬을 함께 하기 위해 숙소인 영빈관으로 찾아왔다. 김대통령은 파월 장관을 반갑게 맞으며 “저서에서 카투사를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고 인사를 건넸다. 왕년의 무장(武將)답게 우방국 대통령 앞에서 깍듯한 몸가짐으로 예의를 갖추던 파월 장관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파월 장관은 육군 중령이던 1973년 9월부터 1년 동안 한국에 파견돼 동두천 미 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대대장을 지냈다. 그는 97년에 펴낸 자서전 ‘My American Journey’에서 한 장(章)을 몽땅 할애해 그 시절을 회고했는데, 그중에는 당시 이 캠프에서 미군과 함께 근무하던 카투사 병사들에 대해 기술한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우리에게는 카투사라는 군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언제까지라도 달릴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 우리 부대들은 항상 병력이 부족했다. 내 대대는 700명 정원이었는데 500명 이상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이 부족 병력을 한국군으로 채웠다… 카투사들은 내가 지휘해본 부대 중 가장 훌륭한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절대 술 취한 채 나타나지 않았고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지칠 줄 몰랐고 군기가 있었으며 무엇이든 빨리 배웠다.”

    그 무렵 미군 병사들의 수준은 ‘세계 최강 군대’라는 명성을 무색케 하는 형편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끝자락이던 당시는 미군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옮겨가던 시기여서 한국에 파견된 병사들도 대부분 징집병이었다. 상당수 병사가 읽고 쓰기가 서툴고 수학능력이 낮은 ‘범주Ⅳ’에 속했다.

    이들은 군 복무 자체가 어려운 ‘범주Ⅴ’보다는 한 단계 위였지만, 한 마디로 ‘인생의 낙오자들’이었다는 게 파월 장관의 회고다. 지원병으로만 구성된 요즘은 약 4%의 병사가 ‘범주Ⅳ’에 들지만, 당시엔 그 비율이 50%에 가까웠다고 한다. 군기 확립은 언감생심, 마약과 싸움질, 인종문제, 풍기문란, 빈번한 탈영을 단속하기에도 벅찬 노릇이었다.



    파월의 속마음

    그런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지휘관으로선 늘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카투사들에게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카투사를 시험이나 영어점수로 선발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체검사만 합격하면 카투사가 될 수 있었다. 학력만 놓고 보면 미군보다 나을 게 없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너나없이 먹고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무엇이든 풍족한 미군 부대에서 군 복무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특혜였다. 미군 부대는 당시 한국군에 만연했던 구타와 기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군에서 미군 부대로 오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고, 카투사는 그런 경쟁을 거쳐 선발된 병사들이었다. 의사소통에는 좀 어려움이 있지만 그렇게 빠릿빠릿한 병사들이 ‘미군 병사가 동두천에서 하룻밤에 맥주 마시며 써버릴 수 있는 액수보다 적은 3달러를 월급으로 받을 뿐’이었으니(그 3달러조차 한국정부에서 지급했다) 파월 중령은 그때 벌써 아웃소싱의 이점을 체험했던 셈이다.

    더욱이 미군과 카투사 간에 존재하는 문화차이는 군대의 효율을 높이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파월 중령은 한국군의 문화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가능케 하는 신속한 ‘시정(是正) 효과’ 때문에 이를 이용한 측면이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드물게 카투사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의 한국군 하사관을 찾아가면 됐다. ‘특무상사, 김이병이 명령을 잘 안 듣습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말 안 듣는 이병은 한국군으로 돌려보내졌다. 김이병이 구제될 만한 경우에는 특무상사와 김이병이 막사 뒤로 사라졌다. 그곳에서 김이병은 그의 잘못을 깨닫게 돼 있었다. 만일 미군 병사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그는 변호사나 국회의원에게 편지를 썼을지도 모른다. 자유와 질서, 개인의 권리와 단체행동 사이의 갈등에서 서로 다른 거래조건을 제시하는 상이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훨씬 덜 깔끔하고 상관에게 불편하긴 해도 나는 우리 방식을 택하겠다.”

    그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주한미군은 지금도 변함없는 ‘현실’로 남아 있다. 2001년 4월 현재 3만7000여 명의 미군이 판문점에서 부산까지 전국에 걸쳐 산재한 90여 개 캠프에 주둔하고 있다. 동두천 시내에서 미 2사단의 상징인 ‘인디언 헤드’ 패치를 단 미군 병사들이 맥주 몇 잔을 앞에 놓고 객수를 달래는 정경도 여전하다.

    변하지 않은 게 또 하나 있다. 오늘도 이들 미군 부대에는 미군 군복을 입고 한국군 계급장과 명찰을 단 카투사들이 미군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면서도 미군 사병 봉급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10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는 것 또한 30년 전과 비슷하다.

    달라진 것은 카투사의 자질과 지원 동기. 요즘 카투사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실력을 갖춰야 선발될 수 있기에 학력도 높아졌고, 허기(虛飢)와 ‘빠따’를 피해서가 아니라 ‘영어실력 향상’ ‘여유시간 활용’ ‘미국문화 체험’ 등을 목적으로 지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카투사가 미군 지휘관의 불평 한 마디에 한국군으로 쫓겨나는 일도 없고, 한국군 하사관에게 막사 뒤로 끌려가서 ‘잘못을 깨닫는’ 일도 없다.

    ‘카투사(KATUSA)’는 ‘미 육군에 증원된 한국 육군요원(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을 뜻한다. 한국의 지리 언어 문화 등에 익숙하지 못한 주한미군이 한·미 연합방위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한국군과 미군을 연결해주는 것이 카투사 임무의 핵심이다.

    그런 임무 특성상 카투사는 미 8군과 한국군의 두 채널에 의해 조정·통제받는 이중적 위치에 있다. 카투사는 미 8군에 증원돼 미군의 지휘권 아래 있기 때문에 미군으로부터 교육·훈련에 대한 통제와 군수지원을 받지만, 카투사들에 대한 인사행정과 권익보호는 한국군 관할이다. 미 8군에 파견된 육군본부 예하의 ‘미 8군 한국군지원단’이 그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80여 개 미군 캠프에 약 5000명의 카투사들이 배치돼 있는데, 60만 한국군 중에서는 극히 소수의 병력이지만 주한미군 7∼8명에 1명꼴로 카투사가 배속된 셈이므로 주한미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카투사와 같은 성격의 병력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만 주둔지원국의 병력을 증원받아 운용하는 시스템으로는 카투사가 유일하다. 미군이 주둔지원국의 지리 언어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기는 어느 나라에서나 매한가지겠지만, 주일미군에는 ‘JATUSA’가 없고 주독미군에도 ‘GATUSA’가 없다. 그런데 왜 한국에만 이런 제도가 생겨났을까.

    처절한 피의 역사

    카투사 제도가 생겨난 계기는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전쟁이었다. 미국 정부는 서울 함락 직후인 6월30일 미 지상군 투입을 명령했으나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를 거듭했다. 미군이 그토록 무기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병력 부족에 있었다. 미군 병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는데, 그 결과 50년 6월에 미 8군 각 사단은 전시 인가원인 1만8900명에 훨씬 못 미치는 1만2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49년까지 극동사령부의 주요 목적은 일본 등지에서의 점령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어서 예하 사단들은 훈련을 게을리 했고 전투장비의 정비·보충에도 소홀했다.

    이런 상태로 전투에 뛰어들다 보니 사상자가 급증했다. 전쟁 초기 미 8군에서는 보충되는 인원보다 더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8월에 미 본토로부터 1만1115명의 병력이 증원된 데 비해 8월 말까지의 사상자 수는 1만9165명에 달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형국이었다.

    카투사 제도가 본격 논의된 것은 7월 말. 당시 존 무초 주한 미 대사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의 교감을 거쳐 일부 한국군을 미군 측에 배속시킬 것을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제안했다. 한국 지형에 어두운데다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는 능력도 낮고 피란민과의 언어장벽 때문에 부대 이동에도 애를 먹던 미군으로선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아이디어였다. 더욱이 맥아더 장군은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계획이었으므로 병력 증원이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8월15일을 기해 카투사 제도가 실시됐다.

    최초의 카투사들은 8월15일을 전후해 주로 피란민이 많이 모여 있던 대구와 부산 등지의 거리에서 강제 징집됐다. 이렇다 할 징집기준도 없었다. 소총을 매게 한 뒤 총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장정이면 집결지로 보냈다. 이렇게 징집된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8월16일 부산항에서 일본 요코하마를 향해 출발했다. 이런 이동은 8월말까지 매일 계속됐다. 이들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에 배치돼 5일 정도 훈련을 받은 뒤 8월20일부터 한국 주둔 미군 사단에 보충돼 전선으로 투입됐다.

    카투사들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것은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9월15일경이었으며, 당시 카투사의 수는 1만8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 7사단과 해병 5연대,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부대에 배치돼 소총수, 운반 및 보급병, 검문소 위병, 통신병, 탄약 운반병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강제 징집된데다 교육수준이 낮아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훈련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미 본토 증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총알받이’로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카투사들은 피아 식별에 능했고, 민간인과 포로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냈으며, 험준한 산지에서 위장을 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데도 뛰어나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혜산진 점령, 장진호 전투, 펀치볼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6·25전쟁 중 4만3660명의 카투사가 미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1만136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카투사는 이렇듯 처절한 피의 역사를 갖고 있다.

    카투사 제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유지됐지만, 제도 자체가 이처럼 전쟁 중 병력 충원을 위해 급조된 것이라 그 설립과 지속 근거, 목적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없이 운영됐다. 카투사를 설립하기 위해 한·미 양국 간에 공식 체결된 협정은 없다. 다만 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작전통제권 이양 서한을 카투사 제도의 설립 근거로 간주해 제도를 존속시켜 왔다. 전쟁 후에도 두 나라 정부는 이 제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쟁 후에 카투사 제도가 지속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유는 주한미군 병력 보강. 전후 미 정부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6개 사단 중 4개 사단을 철수했으며, 남은 2개 사단에 대한 인원 배정도 정규 사단급 전투력을 채울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은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카투사 제도를 계속 활용하기를 바랐다.

    둘째 이유는 한국군에 있었다. 한국군은 현대화된 군대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전문가를 필요로 했다. 한국군의 현대화를 주도한 것은 미 군사고문단이었는데, 카투사들이 군사고문단에 배속돼 운전, 무전기 조작, 자동차 정비, 전화 가설 등의 기술훈련을 받은 뒤 한국군으로 복귀해 기술을 전수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카투사는 법적 근거가 없으면서도 관행적으로 유지돼왔다.

    미 8군 한국군지원단장 박희만 대령은 “카투사 제도에 대한 법적 근거는 없지만, 주한 미 8군 규정 600-2와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부터 시행된 대한민국 육군규정 302가 카투사의 업무, 근무환경, 복지, 권익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어 제도를 운용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고 밝혔다.

    전쟁 이후에는 한국군 기간병과 신병 중에서 카투사를 선발했는데, 82년 이후에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선발시험을 치러 공개모집했다. 그러다 87년부터는 공개모집과 육군훈련소 차출의 두 가지 선발방식을 혼용하다가 99년부터는 다시 100% 공개모집 방식으로 전환, 토익 600점 이상의 지원자 중에서 컴퓨터 추첨을 통해 선발하고 있다.

    시험을 치러 카투사를 뽑을 때는 경쟁률이 20∼30대 1에 달할 만큼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카투사 선발시험이 사법·행정·외무고시와 함께 ‘4대 고시’로 불렸을 정도. 판·검사 되기보다 ‘카투士’ 되기가 더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이 보기엔 카투사 복무의 메리트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우선 카투사는 미군들과 함께 일하고 같은 막사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생생한 미국 현지 영어와 접할 기회가 많다. 미군 부대의 생활여건은 한국군 부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20명 안팎의 병사가 한 내무반을 쓰는 한국군 부대와 달리 미군 막사에서는 2∼3명이 방 하나를 사용하는데, 침대 책상 옷장 냉장고 같은 편의시설은 물론 에어컨과 히터까지 완비돼 있다. 샤워실에선 24시간 온수가 나오며, 식당에서는 다채로운 육류와 생선요리, 샐러드, 패스트푸드, 각종 음료를 식성에 따라 먹을 수 있다. 도서관, 체육관, 수영장, 볼링장, 영화관, 레크리에이션 센터, 클럽 등 다양한 영내 편의시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카투사는 미군과 마찬가지로 업무시간(대개 오전 8시∼오후 5시) 이후에는 자유시간이며, 복귀시간을 준수하면 외출도 자유롭다. 부대 사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금요일 일과 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는 외박도 가능하다. 한국군에게 주어지는 정기휴가를 갈 수 있는 것은 물론 한국 공휴일과 미국 공휴일을 모두 쉰다. 대학생들의 카투사 지원율이 높은 것은 이처럼 여가가 상대적으로 많아 군 복무를 하면서 취업이나 복학준비를 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40%가 서울대, 연·고대 출신

    미 8군 한국군지원단이 지난해 11월 전체 카투사를 모집단으로 해서 표본 추출한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6%인 430명이 대학 재학중 휴학을 하고 입대했으며, 5%(25명)는 대학 졸업 후, 7.2%(36명)는 대학원 재학중이나 졸업 후 입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카투사의 98.2%가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소지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올해 카투사 복무를 지원한 6731명 가운데 15%인 1010명이 서울대에 재학중이거나 졸업했고, 연세대 출신은 12.7%(859명), 고려대 출신은 11.8%(798명)이었다. 지원자의 40% 정도가 서울대와 연·고대 출신이라는 얘기다.

    최근에는 미국 등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카투사가 많이 입대하고 있다. 카투사 한 기수당 20% 정도가 이런 인력이다. 카투사 교육대(KTA)에서 치르는 영어시험에서 상위 10% 이내에 든 신병들을 선발해 배치하는 한국군지원단 본부 카투사들의 경우 3분의 1 이상이 해외 거주 경험자다. 지원단의 한 장교는 “함께 근무하는 카투사 중에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해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병사나 컴퓨터 전문가 등 우수 인력이 수두룩한데, 사회에서 이런 인력 서너 명을 데리고 일하려면 한 해 연봉만도 수억 원이 들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인적구성 때문에 카투사들은 자부심도 강하다. 같이 일하는 미군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 군대의 사병(士兵) 집단보다 학력이 높고 자질이 우수한 ‘세계 최고의 엘리트 군대’라는 것이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서 근무하는 한 카투사는 “지금까지 사회로 배출된 16만여 명의 선배 카투사들이 대기업, 외국계 기업, 주요 금융기관, 언론계, 행정계, 학계 등의 전문분야로 진출해 요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이런 자부심의 근거가 된다”며 “입사 면접 때도 카투사 전역병에게는 후한 점수를 준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카투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게 사실이다. 카투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편향된 카투사상(像)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군에 비해 근무여건이 느슨해 보이고, 카투사의 70% 이상이 행정·기술직인데다 외출과 외박이 자유롭다 보니 ‘편한 군대’로 비쳐서다. 또한 일과 후에는 사복을 입고 부대를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겉보기에 군기가 서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카투사가 군인이면 지렁이도 뱀이고 파리도 새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과거 한국군 부대에서 근무태도가 좋지 않은 방위병들에게 기합을 주면서 “너희들이 카투사냐?”고 호통을 쳤다는 얘기가 전해질 만큼 카투사는 ‘빠진 군인’의 전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카투사로 전역한 사람들은 술자리 같은 데서도 좀체 군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80년대 중반에 카투사로 복무한 회사원 B씨는 “군대에서 남들보다 고생을 덜 한 것도 미안하지만, 대학가에 반미의식이 고조되던 시기에 내 개인의 편안함을 위해 미군부대 근무를 자원했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자괴감을 갖게 한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카투사로 전역한 방송국 PD L씨는 “카투사 출신들이 군대 얘기를 꺼리는 것은 군대생활 편하게 한 게 창피해서가 아니라 본의 아니게 특권의식이나 엘리트의식을 드러내 위화감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카투사 전역자가 16만여 명이나 배출됐으면서도 이들 사이에 해병전우회 같은 예비역 조직이 활성화되지 않은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카투사는 지난해 8월15일 창설 50주년 기념일을 맞았지만, 한국군도 미군도 그리고 군 바깥에서도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운데 쓸쓸히 지나갔다.

    카투사들은 ‘편한 군인’이라고 매도되는 데 대해 불만이 많다. 카투사라고 하면 호리호리한 체구에 안경을 쓴 뽀얀 얼굴의 병사가 깔끔하게 정돈된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고 있는 광경을 떠올리겠지만, 실제로는 전투 헌병 공병 정비 어학 전산 행정 통신 등 15개 병과에서 100여 개의 군사주특기를 받아 전국의 미군 캠프에서 땀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업무와 훈련에서 미군의 기술, 체력과 동등한 수준을 유지해야 하므로 영어와 체력이 뒤지는 카투사로선 미군보다 몇배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것.

    전체 카투사의 절반에 가까운 2000여 명은 전투부대인 미 2사단에 배치돼 있다. 2사단은 세계 최강의 전투력과 중화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주한미군 병력의 40%를 차지하는 주력부대. 동두천 의정부 문산 춘천 등지에 17개 캠프를 운용하고 있다. 2사단은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최전방에서 적을 막아내야 할 ‘안전장치’이기 때문에 보병사단이면서도 기갑여단까지 갖춰놓고 강도높은 훈련을 실시한다. 연중 절반 정도의 기간이 훈련일정으로 잡혀 있을 만큼 훈련과 작전이 일상화돼 있다. 최근까지 2사단 전차대대에서 탱크 탄약수로 근무했던 이상재 병장의 말.

    “탱크병은 보통 1∼2개월에 한 번꼴로 훈련을 나가는데, 포사격훈련은 3주, FTX(Field Training Exercise·야외훈련)는 1주일씩 계속된다. 포사격훈련 때는 몸도 마음대로 가누기 힘든 탱크 안에서 20kg짜리 포탄을 30발씩 쉬지 않고 장전해야 한다. 중간에 잠시 사격을 쉴 때도 탱크를 정비하고 탱크 창고 경계를 서며, 훈련기간 내내 텐트에서 먹고 잔다. 또한 FTX는 정식 훈련장이 아닌 야외에서 실시되므로 잠도 탱크 위에 침낭을 펴놓고 자고, 끼니도 MRE(전투식량)로 때운다.”

    2사단 미군들은 신참이 아니면 대개 ‘Airborne(空挺)’ 패치 하나쯤은 달고 다닐 만큼 강골들이라고 한다. 2사단에서는 훈련이 없을 때도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4∼5마일(6.4∼8km) 구보를 실시하는 등 체력 관리에도 엄격하다. 후방지역 병사들은 PT(Physical Training·체력단련) 테스트에서 종목당 60점(22∼26세 기준 팔굽혀펴기 2분에 40개, 윗몸 일으키기 2분에 50개, 2마일 달리기 16분36초) 이상 합계 180점을 받으면 되는데 2사단 병사들은 종목당 70점씩 총점 21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행정병도 예외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공중강습(Air Assault·헬기에 차량과 병력을 싣고 가서 작전지역에 함께 투하하는 것) 부대인 503·506 보병대대는 매일 아침 1시간 30분 동안 강도높은 PT를 실시하며, 매달 한 차례 이상 있는 중대 달리기에서는 6∼8마일(9.6∼12.8km)을 휴식없이 뛰어야 한다. 또한 매주 목요일 새벽이면 20kg이 넘는 군장을 메고 길게는 12마일(19.2km)에 이르는 산악행군을 한다. 혹한기 전투기술을 배양하기 위해 텐트나 난로를 사용하지 않고 빙점 이하의 기후에서 갖가지 훈련과 10km 행군을 실시하기도 한다.

    영화와 다른 JSA

    훈련 빡빡하기로는 유엔사 경비대대도 둘째 가지 않는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캠프 보니파스 경비, OP(관측소) 관리와 비무장지대(DMZ) 정찰 등. 특히 남·북한 경비병이 무장 상태로 경계근무를 하는 JSA는 24시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다. 북한 경비병들과 코 앞에서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기(氣) 싸움에서부터 눌리면 안 되고, 강인한 체력과 사격술, 기민한 상황판단 능력을 갖춰야 한다.

    ‘신장 178cm 이상, 안경 미착용, 전문대 재학 이상 학력’이 신병 선발조건인데, 자대 배치 후 1년이 지나면 70% 이상이 태권도 킥복싱 등 각종 무술 유단자로 단련된다. 일과 후에도 한 시간씩 무술훈련을 받는데, “같은 태권도 1단이라도 JSA 1단과 ‘사회 1단’은 발 올라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게 JSA 병사의 귀띔. 과거에는 신병 신고식을 고참과의 자유대련으로 대치하는 전통도 있었다. 입대 전에 ‘한 주먹’ 했던 기세등등한 신병도 펄펄 날아다니는 고참의 신기(神技)에 ‘떡’이 되고 나면 한 마리 어린 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2사단이 PT 테스트에서 총점 210점 이상을 요구하는데 비해 JSA 근무자에게는 270점 이상이 ‘의무’다. 300점 만점 기록을 가진 병사들도 허다하다. 300점 만점자는 ‘PT 마스터’라고 불리는데, 22∼26세 병사가 만점을 받으려면 팔굽혀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를 2분 안에 각각 75개, 80개 이상 해야 하고 2마일(3.2km) 달리기를 13분 이내에 주파해야 한다. 이들은 건물점거, 총격전 등 다양한 상황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실전과 다름없는 전술훈련을 하는데, 대부분의 병사가 권총 중화기 대공화기 등 7∼8종의 무기 조작에 숙달돼 있다.

    JSA 경비를 맡고 있는 이광훈 병장은 “북한 경비병을 처음 봤을 때는 신기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니까 아무런 감정 교환이 없었는데도 팽팽한 긴장감 때문인지 그들이 동포가 아닌 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보다 체격도 훨씬 크고 사격술도 뛰어나며(JSA 근무자는 전원 특등사수), 우리 무기는 최신형인데 비해 북한 경비병의 것은 소련제 구형 무기여서 한 번도 기 싸움에서 눌린 적은 없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 병장은 “영화 ‘JSA’를 보고 낭만적인 동기에서 JSA 근무를 지원하려는 이가 많다는데, 영화와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가령 영화에서처럼 경비초소에서 음악을 듣거나 북한 경비병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 또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 초소에는 도끼 만행사건 이후 경비병이 근무하지 않고 카메라만 설치돼 있기 때문에 이곳 초소 경비병들끼리 접촉하는 영화 속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카투사가 미 8군의 전투력과 행정력을 보강해줌으로써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지난해 10월 민주당 김희선(金希宣) 의원은 국방부 국감자료를 인용, “우리 정부가 주한미군에 카투사와 한국군지원단 5183명을 파견해 연간 9088만 달러(약 1200억 원)의 인건비를 간접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만일 우리 정부가 미 8군에 카투사를 증원하지 않을 경우 미 8군은 1200억 원의 주둔비용을 추가로 지출해 미군과 군무원들을 고용, 카투사들의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미 8군 작전처 카투사 프로그램 담당관 클로드 헌터씨는 “카투사들이 맡은 업무가 워낙 다양해 정확한 액수를 산출하긴 어렵지만, 계급으로 따져보면 미군 상병의 연봉이 2만4000달러쯤 되고 미 8군이 카투사 1명에게 지원하는 비용(피복, 생활용품, 식비, 주거비용 등을 의미하는 듯)이 1만1000달러쯤 되므로 미 8군은 카투사 1명으로 인해 연 1만3000달러의 예산을 절약하는 셈”이라고 추정했다.

    카투사는 한국군에도 상당한 비용절감 효과를 가져다 준다. 예컨대 미 2사단의 경우 한국군 군단 규모 이상의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 2사단이 철수할 경우 한국군이 그 공백을 메우려면 3개 보병사단, 1개 특공연대, 1개 기갑여단, 1개 방공포대 등 군단급 이상의 부대가 창설돼야 하므로 한국군 병사의 복무기간을 연장하고 예비군 동원 연령을 높여야 한다는 게 우리 군의 분석이다. 이런 현실에서 카투사는 미 8군에 증원돼 주한미군의 화력을 전시 수준으로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헌터 담당관의 설명이다.

    “가령 주한미군이 전시에 필요로 하는 병력이 500명이라면 평시에는 400명 정도를 한국에 주둔시킨다. 나머지 100명은 카투사로 채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은 평시에도 장비를 100% 운용할 수 있게 된다. 유사시 증원군이 한국에 투입되면 얼마나 신속하게 장비를 지원받느냐가 승패의 관건인데, 카투사가 평소 이들 장비를 잘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에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카투사는 미군의 전투태세 완비(combat readiness)를 가능케 하는 중요 전력이다.”

    카투사가 없다면 주한미군 평시 인원 ‘400명’만으로 운용하기 어려운 미군 장비는 한국에 배치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86년 3월 한국군이 카투사 감축계획을 입안하자 당시 미 8군 사령관 윌리엄 리브시 장군은 이를 재고해달라며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반(半) 사정, 반 위협조의 서한을 보냈다.

    “미국 의회는 주둔지원국의 지원상태를 매우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미군만으로는 최저 인원밖에 유지될 수 없는 부대의 충원은 물론, 장비 조작이 필요한 곳에 한국이 카투사 요원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미 의회로부터 주한미군에 대한 지원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본인은 카투사 병력을 감축할 경우 이를 미 의회가 알고서 한국에 대한 국방비 예산을 삭감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바입니다….”

    카투사들은 미군과 한국군 양측 지휘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군 지휘관들은 카투사들의 신속한 업무처리와 성실성을 특히 높이 산다. 주한미군 소령으로 예편하고 현재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미 8군 관계자는 “카투사는 한국에서 1년간 근무하고 떠나는 미군들과 달리 한 보직에서 2년을 근무하기 때문에 업무에 정통하며 부대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어 부대 기능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칭찬했다.

    미 8군 한국군지원단 정훈과장 안등모 대위는 “판문점에서 부산까지 뿔뿔이 흩어진 50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일석·일조점호도 없이 사실상 자율 관리에 맡기고 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업무에 복귀할 뿐 아니라 사건, 사고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며 카투사들의 자율성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카투사들은 EIB(Expert Infantry- man Badge·우수보병휘장) 시험과 PLDC (Primary Leadership Development Course·초급지휘자 양성과정)에 미군들과 함께 참가해 좋은 성적을 얻고 있다.

    EIB는 각종 화기 사격, 수류탄 투척, 첩보 수집, 통신, 독도법, 전술행군, 화생방 등 44개 측정항목 시험을 통과한 우수 병사에게 수여하는 미 육군 보병의 최고 영예. 매년 한 차례 시험을 실시하는데, 99년 6월에 열린 제 57차 EIB 시험에서는 미군들이 29.8%의 합격률을 기록한 가운데 2사단 카투사들은 20%, 유엔사 경비대대 병사들은 미군 합격률의 두 배가 넘는 62.5%의 합격률을 기록해 미군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미군이 병장 이상의 하사관으로 진급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PLDC에서는 카투사의 합격률이 미군 합격률을 상회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96년 이후에는 8명의 카투사가 PLDC 1위의 영예를 안았다.

    영어는 인격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상이한 언어와 문화가 상충하는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들은 문화충격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카투사에게 영어는 살아남기 위한 무기다. 업무를 비롯한 모든 일상에 영어를 써야 하는 그곳에서 영어가 서툴면 인격적인 대우를 기대할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이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아니라 영어실력 하나로 판단되는 것이다. 90년대 초에 카투사로 복무한 김태훈씨는 이런 글을 남겼다.

    “아침에 하루 일정과 주간 일정을 듣고 일을 시작하는데, 카투사 신병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서 선임병을 찾지만 냉정한 선임병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야 영어가 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늘 긴장의 연속이다. 한 단어라도 놓치면 엉뚱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고참이 된 후에도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군사용어와 속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영어에 대한 오해로 따르는 실수는 때로는 용납되기 힘들기에 항상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달력에는 부모님이나 여자친구의 생일보다는 근무일지가 빽빽히 적힌 경우가 더 많다.”

    영어로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불이익을 당해도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런 경우 미군과 말을 오래 할수록 불리해지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수동적, 소극적으로 변해간다.

    미군 탱크병의 경우 탱크장은 하사관이나 장교가, 사수는 병장이, 탄약수와 드라이버는 상병 이하 계급의 병사가 맡는다. 그러나 카투사는 병장을 달아도 좀체 사수를 맡기지 않아 탄약수와 드라이버에 머무르는 사례가 많다. 병장을 달고도 여전히 졸병 일을 하고 있는 고참에게 미군들이 고참대접을 제대로 해줄 리 없다. 그래서 미군측에 항의하면 “사수는 탱크장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황에 따라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하므로 영어가 서툴면 맡길 수 없다”는 답을 듣게 마련이다.

    더욱이 직업군인인 미군은 5년은 복무해야 병장 진급을 기대할 수 있는데, 의무병인 카투사는 1년 반이면 병장으로 자동 진급되기 때문에 미군들은 평소에도 카투사 병장계급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능력에 따라 진급(earn promotion)하지 않고 저절로 진급(get promotion)한, 그것도 영어도 서툰 병장의 리더십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

    다인종으로 구성된 미군은 인종간, 민족간 차별대우를 방지하기 위해 기회균등(EO·Equal Opportunity)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병사가 불평등 사례나 차별대우를 받았을 경우 지휘계통을 밟아 부대별로 설치된 EO부서로 시정을 요구하는 제도. 그러나 많은 현역·예비역 카투사들은 “EO의 원칙은 백인과 흑인 간에는 잘 적용되는지 몰라도 미군과 카투사 간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카투사 병장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엄연히 EO 원칙에 위배되지만, 이런 문제는 미군과 카투사 간에 존재하는 ‘군대문화’의 차이 때문에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의무대대 행정병으로 근무하다 지난해 7월 제대한 박정철씨(연세대 4년)는 “나름대로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업무를 자세하게 익히고 컴퓨터도 잘 다뤄 미군 지휘관으로부터 꽤 인정을 받았지만, 어느 지점까지 올라가면 카투사에겐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박씨는 자신의 업무에 정통해 중대장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참석할 수 있었지만, 대대장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별 이유 없이 참석시키지 않더라는 것이다. 미군들은 그가 행여 대대장의 말을 잘못 알아듣거나 말 실수라도 할까봐 우려하는 것 같더라는 것이다.

    합리주의 체험

    신병 시절 박씨는 따끔한 문화충격을 통해 문화차이를 실감했다고 한다.

    “영어도 안 들리고 업무도 어려워 일과 후에 직속 상관이던 중사의 방에 찾아갔다. 내 사정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자 ‘정성껏 도와줄테니 걱정마라’고 해서 굳은 악수를 나누고 방을 나왔다. 다음날부터 열심히 일을 배우며 친해졌는데, 며칠 후 오후에 너무 피곤해서 휴게실 테이블에 엎드려 잠깐 쉬었다. 그러자 그걸 본 중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중대장 방에까지 나를 끌고가 야단을 맞게 했다. 이들에겐 우리처럼 좀 친하다고 해서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않거나 마음을 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송부대에서 근무하다 99년 1월 전역한 김용민씨(삼성물산)는 “사소한 일로 미군과 시비가 붙었다가 일이 좀 커져서 미군 중대장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런데 중립적인 위치에서 시비를 가려줘야 할 중대장이 카투사들에게 ‘우리는 너희 나라를 보호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자꾸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면 재미없다’는 식으로 점령군 의식을 드러내 실망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일부 카투사들은 PT 테스트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기도 한다. 어차피 영어나 업무에선 미군을 능가하기 어렵기 때문에 몸으로 때우는 PT 테스트에서라도 미군을 이겨보겠다는 생각에서다. 대부분의 미군은 자신의 기준점수만 받으려고 설렁설렁 테스트를 받지만, 이들 카투사는 PT 마스터 휘장을 받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테스트를 받는다. 그래서 악을 쓰고 2마일 달리기를 하다 골인한 뒤 구토를 하는 경우도 있다.

    주어진 환경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림으로써 그 환경을 선용할 줄 아는 지혜는 카투사에게 특히 필요한 덕목인 듯하다.

    2사단 전차대대 이상재 병장은 “입대 전에는 주한미군 범죄 때문에 미국에 대한 인식이 무척 부정적이었다. 신병 때는 미군과의 갈등 때문에 감정이 더 나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미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일부’인 미군만 보고 미국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가령 외견상으로는 껄렁하고 군기가 빠져 보이는 미군들이 규정을 잘 지키고 훈련에 진지하게 임한다든지, 토론문화가 발달해 장교와 사병이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누며 문제를 고쳐나가는 합리적 태도는 단지 군인으로서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도 배울 만한 점이었다는 것.

    85년부터 2년여 동안 용산기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한 클라인워트 벤슨 증권 김운종 부장(미국 공인회계사)은 “정에 이끌리지 않는 성과주의, 모든 업무를 문서화해 기록하는 습관, 효율적인 파일링 시스템(filing system), 철저한 자기관리 등 요즘 우리 사회와 기업에 한창 요구되고 있는 조건들을 15년 전에 미리 경험한 것이 직장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박정철씨는 후배 카투사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카투사와 미군 간 갈등요인의 절반 정도는 미군이 제공하지만, 카투사에게도 문제가 있다. 적극적으로 업무를 익히기 보다는 ‘국방부 시계’ 돌아가기만 기다리고, 일과가 끝나면 가방 싸들고 도서관에 틀어박히고, 부대가 아무리 바빠도 한국·미국 공휴일 다 찾아먹고, 청소할 눈치면 도망가고, 미군들이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하면 영어에 자신이 없어 카투사끼리만 몽땅 빠지고, 챙길 건 다 챙기면서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카투사들을 미군들이 진정한 동료와 전우로 여길 수 있을까? 아무리 여건이 좋다 해도 군대는 군대다. 고시공부하고 과외 아르바이트 하려 오는 데가 아니다. 미군이 내 계급을 인정할 수 있도록 열심히 부대껴라. 그렇게 해서 배우는 게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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