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아우슈비츠를 반복해선 안된다”

독일교과서의 역사관

  • 강정수 < 베를린자유대 박사과정 >

    입력2005-03-23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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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과거사 교육을 이해하는 첫번째 열쇠는 죄의식의 대물림이다. 두번째는 아우슈비츠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범죄사실에 집중할 때 비로소 범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78년 서독 교육부는 이 주장을 채택해 역사교과서 뿐만 아니라 윤리·사회·종교·독일어(국어)·영어교과서 등 사실상 인문·사회교육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
    1989년 동독 시민들은 공산당 강압 통치에 반대하며 차가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의 절망적인 목소리는 “독일은 하나의 조국을 원한다”는 희망의 외침으로 바뀌었고, 자유의 상징 ‘서독’을 향한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이 물결은 마침내 30년 가까이 동서독을 굳건히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무너뜨렸다. 통일의 구호가 전 독일을 가득 메웠고, 통일 독일의 출현을 둘러싼 세계 열강들의 힘겨운 줄다리기 소식이 급전을 타고 세계 각지로 전해졌다.

    이렇게 독일 통일의 용광로가 거친 열기를 뿜어내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전후 서독의 45년을 관통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1990년 봄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현 독일연방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를 비롯한 녹색당과 사민당의 일부 정치인이 참여한 ‘반통일’ 데모가 한창이었다. 당시 사민당 당수 오스카 라퐁텐은 집권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에 비해 인기도에서 20% 앞서고 있었다.

    정권교체의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있던 그는 “서독은 그 뿌리를 ‘아우슈비츠(Auschw itz)’에도 갖고 있다. 이를 망각하는 것은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분단을 역사적 죄과의 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분단을 독일인의 ‘죄과’로 해석했다.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여겨지던 ‘통일 기류’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도 1990년 한 연설에서 “독일의 현재를 숙고하거나, ‘독일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이는, ‘아우슈비츠’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며 반통일 운동 대열에 합류했다. 이렇게 당대를 대표하는 정치인, 지식인들이 앞장서 통일을 반대할 만큼, 나치의 전쟁 범죄에 대한 ‘죄의식’은 독일인의 머리 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아우슈비츠, 모든 과목 언급

    전후 1세대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죄의식’의 뿌리는 그들의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소년기 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나치의 만행’은 말을 잊게 하는 충격 그 자체였고, 이는 다시 학교에서 가정으로 논쟁의 장소를 옮겨 이어졌다. 그들의 부모세대는 어떠한 형태로든 나치정권과 관계를 맺은 세대였다. 청년당원으로, 군인으로, 또는 방관자로 어두운 과거를 가슴속에 묻고 살아가는 부모세대에게는, 자신들의 과거를 화두로 삼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후 1세대는 마치 부모가 지하실 창고에 ‘시체’라도 숨겨둔 것처럼, 범죄 사실을 추궁하며 달려들었다.

    이런 가운데 가능하면 침묵하고자 했던 부모와, 부모의 고백을 듣고자 했던 자식 간에 ‘죄의식’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라났다. 양 세대에게 과거사에 대한 기억은 바로 죄에 대한 고백을 의미했다. 이러한 전쟁세대와 전후 1세대간의 갈등은 이후 ‘1968 사회운동’의 한 배경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독일의 과거사 교육을 이해하는 두 개의 열쇠 중 하나가 앞서 설명한 ‘죄의식’의 대물림(유산)이라면, 1969년 발간된 독일계 유대인 사회학자인 아도르노의 저서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에서 그 두 번째 열쇠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모든 정치·역사 교육은 ‘아우슈비츠’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는, 범죄 사실에 직면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이 테마에 집중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1978년 서독 교육부는 이 주장을 학교교육의 ‘규범적 요청’으로 채택한다. 이후 이 ‘재발 방지’라는 ‘규범적 요청’은, 단지 역사 교과서에 국한하지 않고 윤리, 사회, 종교, 독일어(국어), 영어 교과서 등 사실상 인문·사회교육 전반에 적용되고 있다.

    1996년에 발간된 독일 함부르크 주정부 교육청의 ‘교육지침’을 살펴보자. 초등학교 6학년 ‘종교’ 교과서는 기독교 생성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라는 장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처음으로 소개한다. 유대인이 유럽 땅에 정착하는 역사적 과정과 그들에 대한 인종차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이어지는 ‘종교’수업에서는, ‘신나치(극우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시의적절하고 폭넓은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종교’수업을 대치하여 선택할 수 있는 ‘윤리’과목의 교과서에서는, 유대인의 역사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나치 시대 ‘개인의 선택’과 이 선택이 가져온 참혹한 사회적 결과를 학생이 되돌아보게끔 한다. 전쟁 범죄에 참여했던 사람을 적극적인 범죄자와 소극적인 방관자로 나누고, 방관자도 나치 범죄의 동조자나 협력자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특히 이들 동조자 중에 오스카 쉰들러와 같이 결국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변모했던 이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다.

    중학교 1학년 독일어(국어) 교과서에는 세계적 명작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등장한다. 이어 2학년과 3학년 교과서는, ‘나는 노란 별을 달았네’, ‘당시에는 평화로웠습니다’ 같은 청소년 시각에서 당시의 참혹한 나날을 묘사한 글을 싣고 있다.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직접적 소재로 다루고 있는 중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에서도 독일인들의 과거사에 대한 식지 않는 반성의 태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자. 먼저 독일에서 역사 교과서는 일차로 주정부 교육청이 선택하는데, 민간 출판사에서 발행한 교과서 중 7~8종을 결정한다. 이 테두리 안에서 각 학교가 최종 선택권을 행사한다. 중학교 3학년 역사 교과서부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홀로코스트 교육’으로 표현되는 역사 교과과정은 크게 기초단계와 심화단계로 나뉜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기초단계에서는 ‘독일 내 유대인의 역사’라는 소제목 아래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 중세 시대, 유대인의 유랑과 억압, ▲ 근세 시대, 계몽과 해방, ▲ 독일 제국에서의 유대인, ▲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유대인 등이다. 기초단계에서는 나치 집권 이전의 과거사 중심으로 ‘사실 전달’에 집중하고 있다.

    심화단계에서는 ‘민족주의와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소제목 아래 다음의 테마를 의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 유대인 차별과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 ▲ 인종주의와 인종주의 법령과 제도들 ▲ 강제수용소와 인종청소의 체계 ▲ 죽음의 공장, 아우슈비츠 ▲ 전통적인 반(反)유대인주의와 홀로코스트: 범인들의 동기와 자기변명들 ▲ 관계 개선의 어려움과 유대인에 대한 추모 등이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두 개의 선택 주제가 제시된다. 하나는 나치의 정치 선동과 관련한 ‘선동과 현실’이라는 주제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나치주의와 현재’다. 이중 하나를 학생 스스로 선택하여 사고하게 해서 역사와 현재를 접목하고 있다. 심화단계에서는 단순한 ‘사실 전달’에 집중했던 이전 과정과 달리, 다양한 시각을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과 토론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 학습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1996년 이후 발행된 독일 및 폴란드의 역사 교과서에는, 히틀러 나치 정권의 피의 학살정책에 저항했던 ‘유대인 투쟁사’가 등장한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항일투쟁사’가 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는 1970년대 이후 계속 추진된 폴란드, 이스라엘, 독일 역사학자 및 역사교과서 저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공동 작업한 결과다. 나치 정권의 전쟁 범죄가 중심적으로 서술되던 지금까지의 교과서에서는 유대인은 피해자로서 무력하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6년 개편된 새 교과서에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동유럽 지역에 광범위한 유대인 저항조직이 있었으며, 그중 군사 저항조직은 이미 1939년부터 존재했음이 기술되었다. 또한 ‘반격, 불타는 바르샤바의 게토’ 등 유대인 저항시가 짤막하게나마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폴란드, 독일 양국은 전후 이스라엘 역사가들의 노력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중략)… 우리 유대인들이 들판에서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었던 야훼여, 그리고 당신 독일인의 하느님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우리가 독일인과 벌이는 피의 투쟁을 도우소서…(중략)”.

    교과서에 담긴 이름모를 한 유대인의 절규가, 지금까지 역사의 증언대로 보존되고 있는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과 화장터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오늘의 독일 청소년들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다.

    독일 연방 각 주(州)정부 교육청은 ‘홀로코스트 교육’을 위해, 생존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강제 수용소 방문과 학생 자치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각 주정부마다 각각 ‘홀로코스트 교육 자료 도서관’도 운영하고 있다. 함부르크 자료 도서관의 경우 2000년 한 해 동안 총 3319회 대출되었다. 구체적인 대출 내역을 보면 홀로코스트 기록영화 134회, 강제 수용소 기록영화 41회, 아우슈비츠 기록영화 20회, 영화 ‘쉰들러 리스트’ 71회다.

    폴란드·독일·이스라엘 학생 상호 교환 방문

    독일 서북부에 있는 한 주의 경우, 이제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강제수용소 생존자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만남이 생존자 노령화로 교육효과가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하여, 폴란드·독일·이스라엘 학생들의 상호교환과 현장학습에 대한 지원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폴란드 학생을 독일로 초청, 나치가 불태운 유대교 성소를 보여주기도 하고, 독일 학생들을 폴란드에 보내 나치의 강제 수용소를 둘러보게 한다. 또 학생들을 방문지역 폴란드 가정에 묵게 하는 등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현장학습과 교류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직접 기록영화를 만들기도 하는 등,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학급 동료에게 소개하는 기회도 갖게 된다. ‘강제수용소의 여성들’이라는 소주제로 폴란드 참관기를 발표한 15세 독일 여학생은 “이제 내 머리 속에 당시의 일들이 그림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찾아갔던 그곳, 만나본 사람들, 어떤 물감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요”라며 참관기를 마감하고 있다.

    역사교육 연구가들의 적극적인 활동도 눈에 띈다. 이들은 연구활동뿐만 아니라, 수업 참관이나 새로운 역사교육 프로젝트를 운영해, 전후 2세대를 위한 과거사 교육 내용과 방식 개편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1951년 ‘교원노조’의 단위 노조로 설립된 ‘서독 역사교사 협회’는 ‘우리시대 역사교육’이라는 연구팀을 자체 구성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독일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9년 설립된 역사교과서 연구기관 ‘게오르크 에케르트 연구소(www.gei.de)’는 국제적 공동 학술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1992년부터는 유네스코(UNESCO)와 협력, ‘국제 교과서 연구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국가의 경계를 넘어 국가간 선입관과 오해를 제거하는 연구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이 연구소가 주최한 2000년 학술대회에서는 매우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전후 1세대’에 기초한 역사교육이 교육대상이 전후 2세대로 교체되면서 그 내용과 방식에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과거사 교과과정에 대한 개혁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개진되었다. 이 학술대회가 던지는 일차적인 질문은, 이른바 ‘입체적인 홀로코스트 교육을 하고 있으나 급격하게 늘어나는 청소년층의 극우파 동조 경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이다.

    1998년부터 매년 진행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이 질문의 심각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홀로코스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조사대상 청소년(14~18세) 중 평균 59%가 ‘모른다’고 답하였다. 실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더욱 심각하여 ‘모른다’고 대답한 비율이 무려 87%에 이르고 있다. 14세 학생 중 90%가, 의무 교과과정인 ‘홀로코스트 교육’을 수업시간에 접해보지 못했다고 답해서 충격을 더했다.

    이에 대해 한 역사 교과서의 저자인 질버만씨는 “최근 몇 년 동안 독일 전역에서 법적 구속력을 가진 교과과정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무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대량 학살 이후 이제 반세기가 지났을 뿐인데, 성인인구의 70%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특히 구동독지역의 청소년들이 ‘무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의 지적처럼, 구동독지역 청소년의 교육은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관할 주정부 교육청에서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베를린 주정부 교육청의 경우, 2001년 초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대상으로 ‘극우’ 문제에 대한 ‘재교육’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 봄부터 1년 과정으로 진행되는 3개조 재교육 세미나는 참가 희망 교사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각 25명 정원 세미나에 평균 45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고 참가 이유를 묻는 지원서 질문 조항에, 많은 교사가 ‘역사교육과 극우에 대한 교과과정이 자신들의 능력을 초과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재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열기는 최근 발표된 베를린 주 교육청의 통계자료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01년 상반기에 발생한 극우성향 학생들의 사고는 총 24건으로 전년과 견주어 33%나 상승했다. 또한 24건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6건이 구동베를린 지역에서 발생했다. 칠판이나 벽에 낙서된 나치 문양과 ‘하일 히틀러’라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 유대인 여학생 책상에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그려놓은 경우 등이 사례로 보고되었다. 재교육을 통해 교사들은 극우파의 기초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논리를 발전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선호하는 록밴드, 구호, 유행하는 옷 그리고 즐겨 사용하는 상징에 대한 정보도 얻게 된다. 특히 참가 교사들이 사례발표 등을 통해 경험을 나눔으로써,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공동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 여교사의 경험담이다.

    “교실에 들어서니, 칠판에 나치 문양이 크게 그려져 있더군요. 너무 놀라고 화가 나서 전 비명을 질렀죠. 그러자 학생들이 제 비명 소리에 열광하듯 환호성을 질러대는 거예요.”

    ‘외국인이 독일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식의 극우 성향 낙서에 애써 무관심하게 대응하는 교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사는 일부 학생들의 극우적인 행동에 공포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베를린 외곽 한 인문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일이다. 노령의 강제 수용소 생존자가 수업시간에 초대되었다.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이 생존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한 달에 몇 번 성관계를 가졌어요? 그런데 가스실 문은 안으로 열리던가요, 밖으로 열리던가요?”

    이 질문에 당황한 담당 교사는 수업을 중단시켰다.

    물론 교사들이 밝히는 경험담에서 독일 역사교육의 현황을 일반화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교육 담당관인 로이버씨의 “고통을 묘사하고, 이를 통해 동정을 일으키는 식의 교육방식은 많은 학생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진단처럼, 지금의 과거사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최근 가장 큰 문제는, 극우파 대응 방법에 대한 교사 교육의 공백이다. 이들이 낭패를 겪은 후 가능하면 극우파 문제를 회피하려 하고 있다”며 교사의 재교육을 확대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베를린 주 교육청도 재교육을 역사 교사에서 단계적으로 전체 교사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제출하고 있으며, 과거사 교육을 초등학교부터 조기실시하기 위해 연구진을 구성하여 교과서 편찬 및 교육과정 개편을 위한 연구 작업에 착수했다. 또 다가오는 신학기부터는 베를린 초등학교에서는 매주 1시간의 ‘톨레랑스’ 시간이 도입된다. 타문화와 외국인의 문제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돕기 위해서다.

    ‘기억 = 죄의 고백’이란 등식이 쉽게 성립할 수 있었던 전후 1세대는 이미 학교를 떠난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전후 2세대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또는 증조부 시대의 나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들 전후 2세대에게 “너는 잊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네 죄를 잊지 말아라”는 ‘기억명령’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구서독지역을 살펴보면 쉽게 이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시의 경우 부모가 독일 국적을 갖지 않은 학생 비율이 평균 30%에 이른다. 이들에게 과거사의 책임을 직접 묻는 것은 무리다. 또 독일계 학생들이 동료 외국인계 학생들에게서 듣는 “당시에는 유대인, 지금은 터키인”이라는 식의 비난은 매우 수용하기 힘든 논리적 비약을 담고 있다.

    동독지역 새로운 역사교육 필요

    이러한 전후 2세대의 다양성과 갈등 양상은 현장 교사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과거, 순수 백인 국가였던 구동독지역, 특히 소도시 지역을 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의 부모가 20%에 육박하는 실업률에 고통을 받는 것을 눈으로 보며 이들은 자라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학급 동료나 친구로 가져본 적이 없다. 도시 전체 외국인 비율이 2∼3%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학교에 터키계 학생이 한 명 전학오면, 학교는 온통 난리가 난다. 교사도 학생들에게, ‘다른 문화’를 설명하기 힘들어한다. 최근 터키로 휴가를 가는 구동독지역 교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타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방학이 끝나면, 교사는 터키에서 가져온 옷이며 장신구를 교실에 전시하기도 하고, 터키 음식에 대한 경험담도 한창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방편이 “우리는 외국인을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이 지역 학생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저명한 역사학자 벨른트 바그너씨는 “통일 이후 지난 10년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다”며, 역사학계가 통일 이후 역사교육 통합 작업에 집중한 나머지 새로운 과거사 교육을 정립하는 데 소홀했음을 인정하며 안타까워했다. 구동독에서 나치 역사에 대한 기술은 서독의 그것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반파시즘 역사의 중심에는 히틀러에 대항했던 공산당의 저항이 놓여 있다. 이와 함께 ‘독일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농민국가’ 건설사가 역사교육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울브리히트와 호네커가 이야기했듯이 ‘승리의 역사’가 동독의 전후 1세대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이들의 자녀들은 통일 이후 서독에서 직수입된 교과서를 배우며 자라게 된다. 수입된 교과서가 45년의 간격을 메우지 못해 허덕이는 동안, 극우파의 논리는 구동독의 청소년들을 쉽게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일부이지만, 이들이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 “저 깜둥이와 유대인을 죽여버리자. 순결한 우리 조국을 위해” “유대인의 무덤에 오줌을 갈기자”는 가사의 극우주의 록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철저한 과거청산과 역사교육을 자랑하는 독일에서도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세대는 또 다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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