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진영에서는 진보진영이 겉으로는 민주를 가장하지만 실제는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인다. 진보진영도 보수진영 지식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때문에 진정한 이념논쟁을 위해서는 상호 신뢰가 간절한 상황이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은 완전히 이념적으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남한에 개인으로서의 사회주의자는 혹시 남아 있을지 몰라도 세력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극히 최근까지 우리 사회는 거의 멸균실 수준의 반공을 유지해왔다.
너무 일찍 끝난 논쟁 후유증
그리고 1997년 환란 위기의 와중에 우리 사회는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다시 3년 반이 흐른 오늘, 우리 사회는 ‘보수파들에 따르면’ 악령이 떠돌고 홍위병이 설치고 사회주의자들이 날뛰는 혼란에 빠져 있다. 과연 현재의 편가르기 논쟁을 좌우익 간의 이념논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좌우익 논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던가를 고찰해 보자.
좌우익 논쟁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흔히 알려진 좌우익 사이의 논쟁, 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논쟁으로 우리는 1922년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의 사회장 논쟁, 또는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이들 논쟁은 좌우익 간의 논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을 어떤 형태로 이루어갈 것인가를 놓고 벌인 사회주의자 내부의 논쟁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주간이었던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는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상해파는 조선의 상황은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들은 민중을 계몽하고 생산력을 향상시켜야 하며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맺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치노선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그 결과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좌우익 간의 논쟁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의 논쟁이 꼭 대립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때로 치열하게 싸웠으나, 일제 강점기 전체를 놓고 본다면 격렬하게 대립했던 시기보다는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민족의 독립과 광복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협동했던 시기가 더 많았다. 또 광복을 맞이하기 직전 독립운동 진영의 정치강령을 비교해 보면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이 광복 이후 세우려고 했던 국가의 기본성격이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광복 직전의 4대 독립운동 세력으로는 흔히 중경의 임시정부, 연안의 독립동맹,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으로 퇴각한 빨치산 세력 그리고 국내의 건국동맹 등을 들 수 있다.
임시정부는 토지혁명을 통해 ‘문란한 사유제도’ 대신 토지국유화를 실현하고, 대생산기관 역시 국유로 한다는 것을 ‘건국강령’을 통해 천명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1944)’은 파업의 자유를 ‘인민’의 자유와 권리의 하나로 보장하였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이념적으로 가장 오른편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이런 정책은 좌파가 주류를 이룬 독립동맹이나 빨치산 세력, 또는 건국동맹의 정강정책과 큰 차이가 없다.
오늘날 김대중 정권이 도입한 노사정위원회를 ‘사회주의적’이라고 몰아부치는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이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임시정부의 정강정책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시정부가 1950년대의 진보당, 1980년대의 민통련, 또 오늘날의 민주노동당 등도 감히 제기하지 못했던 급진적인 정책을 채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주요산업의 국유화나 토지국유화는 반드시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에 주요산업은 일제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토지의 상당 부분도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또는 친일지주 소유였기 때문이다. 광복 직전의 임시정부는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자 계열의 독립운동 진영과 아주 유사한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또 좌우익을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를 침략한 제국주의를 레닌의 규정에 따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 보았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익에서조차 반자본주의적이었다. 따라서 광복이 우리 민족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면, 새로운 정부의 수립과 관련하여 독립운동 진영의 좌우익 간에 심각한 이념논쟁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순수한 이념논쟁의 부재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민족의 광복에서 주도권을 행사한 쪽은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외세였고, 그 결과는 민족의 분단으로 나타났다. 외세의 개입과 분단으로 인해 광복 후의 정국은 극히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고, 좌우익 간의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광복 직후의 좌우익 대립과 관련하여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이 대립이 꼭 이념대립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좌익이나 우익이나 서로 상대방을 공격할 때 최대의 무기는 상대방을 ‘반민족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남북에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좌우익 간의 대결에서 민족문제는 순수한 이념문제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남북이 각각 상대방을 북괴로, 남조선괴뢰도당으로 매도한 것은 그 증거다.
광복 후 좌우익 간 논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에 벌어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다. 광복 직후의 열기 속에서 정치적 수세에 놓여 있던 우익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신탁통치 결사반대에서 갑자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 태도를 바꾼 좌익을 소련의 지령을 따르는 외세의 앞잡이로 몰아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탁통치 논쟁이 한창이던 1946년 1월 박헌영의 외신 기자회견을 둘러 싼 논란은 좌우익의 대결에서 이념보다 민족이 훨씬 더 중요한 변수였음을 잘 보여 준다. 당시 우익신문들은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자신은 소련 한 나라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장래에 조선이 소련 연방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박헌영은 이를 부인했고, 또 당시 기자회견에 참가했던 다른 미국기자들도 박헌영은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우익 진영은 매국적징치(賣國賊懲治) 각단체긴급협의회를 구성하고 박헌영의 발언은 “조선의 독립을 말살하고 영원히 조선 민족의 소련의 노예화를 유치하는 매국, 매족적 행위”라고 규탄했다. 당시 대중들은 신탁통치를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주장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소(反蘇)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반탁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로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꾸어 조선공산당에 대한 신뢰가 크게 손상된 마당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박헌영과 좌익은 큰 상처를 입었다.
신탁통치 논쟁 이후 좌우익 간에 다시 한 번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때는 1946년 여름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려 했을 때다. 이때 좌익과 우익은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여 좌익은 ‘5원칙’, 우익은 ‘8원칙’을 발표했다. 아마도 우리 현대사에서 좌익과 우익이 공개적으로 논쟁다운 논쟁을 벌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까 한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주먹보다 총알이 먼저 날아가는 와중에 좌우익 진영 내에서 그래도 합리적인 지도자로 평가되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이 차례로 정치적 암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백범 김구 선생 마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는 1949년 6월. 남로당 프락치사건으로 국회 내의 소장파들이 체포되고,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경찰의 습격을 받아 해산되던 그 뜨거운 여름의 일이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백범 선생마저 남북협상을 다녀오고 난 뒤에는 여순반란 사건의 배후에 있는 불순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다가 끝내 변을 당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극히 최근까지의 시기는 논쟁의 시기라기보다는 약간의 좌파적인 언사도 용납되지 못하던 필화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념 문제와 관련된 1950년대의 대표적인 필화 사건으로는 1957년 서울대 문리대 교지에 실린 ‘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라는 글 때문에 학생이 구속된 사건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글의 필자는 현재 ‘조선일보’에서 보수논객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근일 씨였다.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의 지배 하에 있던 우리 사회에서는 계급이란 말조차 사회과학에서 명백히 다른 개념인 계층이란 말로 대신해야 했다. 제헌 헌법 초안의 ‘인민’이란 용어가 인민은 빨갱이들의 말인데 헌법에 넣고자 하는 것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우익의 호통 때문에 ‘국민’으로 바뀌어야 했던 상황에서 이념논쟁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 대신 빨갱이 사냥과 사상검증만 있을 뿐이었다.
무력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가 결국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조봉암이 결성한 진보당의 좌절, 5·16 군사반란 이후 간첩의 자금을 받았다는 명목으로 처형된 ‘민족일보’의 청년 발행인 조용수 사장의 비극은 우리 사회가 사상의 자유를 기본가치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논쟁은 없고 필화만 1976년 손세일씨가 펴낸 다섯 권짜리 ‘한국논쟁사’에는 소설 ‘자유부인’을 둘러싼 시비 등 수십 건의 논쟁이 실려 있지만, 좌우익 간의 이념논쟁에 가까운 것은 한 편도 없다. 그만큼 휴전 이후의 한국사회는 이념논쟁의 불모지대였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처럼 ‘애비’가 지배하는 “묻지마 다쳐”의 사회에서, ‘4단7정 논쟁’ ‘예송 논쟁’, ‘호락(湖洛) 논쟁’ 등 논쟁으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끝난 조선시대의 사상사적인 전통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머나먼 꿈일 뿐이었다.
지역감정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념논쟁이란 있을 수 없었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객관적인 계급은 점차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 하에서 주관적인 계급의식의 발전은 극도로 제약되었다. 경상도의 노동자와 전라도의 노동자가 횡적인 연대를 하는 대신 지역으로 갈라지는 나라에서 건전한 이념논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념 논의의 주체가 정당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에서 이념은 주된 요소가 아니었다. 한국의 정당은 이념과 그에 따른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역에 기반을 둔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인물 본위의 집단이었다.
좌우익 간의 이념 논쟁이라면 마땅히 논쟁의 주체가 자신이 좌파 또는 우파임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이른바 이념논쟁의 한 가지 특징은 공격수는 상대방을 ‘친북’, ‘사회주의자’ 등으로 매도하고, 수비수는 펄쩍 뛰며 이를 부인하면서 자신은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8년 말 최장집 교수의 한국전쟁에 관한 논문에 ‘월간조선’이 시비를 건 사건이다.
이념논쟁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사회주의나 좌파 정당의 존재 가능성이 차단된 한국에는 서구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모습을 드러낸 재야가 바로 그것이다.
재야는 좌파였을까? 서구적인 이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재야는 결코 좌파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상황에서 재야는 좌파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지만, 좌파와는 체질적으로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천주교 사제나 기독교 목사, 불교 승려들이 재야 진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는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김수영, 이영희 등 실천과 이론으로 한국의 재야와 진보진영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 재야 지도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로 가보면 장준하는 극우민족단체 민족청년단 간부, 함석헌은 신의주반공의거의 배후이자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상가, 문익환은 미군 통역장교, 계훈제는 우익 반탁진영의 행동대장, 김수영은 의용군에 나갔다가 탈출하여 거제도에 수용된 뒤 남쪽을 택한 반공포로, 이영희는 국군 장교 등이었다.
재야의 뿌리는 보수파 이 정도 경력이라면 이들의 사상적 검증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 그들은 민족분단의 특수상황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보니 진보진영 지도자의 위치에까지 온 것이다.
또 1980년대 재야 진영의 통합기구인 민통련의 정강이나 정책을 보면 국가보안법의 제약 때문이라 하더라도 49여년 전의 임시정부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보수적인 강령을 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좌파로 지목되는 지식인들은 재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대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으며 대학을 다녔다. 이들은 4·19를 흠모하며 자랐지만,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만을 공유한 채 뿔뿔이 흩어져 버린 4·19 세대와는 달랐다. 1980년의 광주를 겪으며 성장한 이들은 이미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이르렀고, 대학을 비롯하여 시민사회에서 나름대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들이 이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건전한 이념논쟁이 결여된 결정적인 이유는 좌파 지식인들이 없었다는 것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익 지식인 역시 그들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진보주의의 부재는 자유주의의 빈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를 자임한 사람의 대부분은 반공주의에 입각해서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였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사상·도덕·가치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애착을 갖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나 진보진영의 도전 없이 보수주의가 건강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진 곳은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서야 했던 법정이었다. 1980년대에 학생운동 내에는 레닌주의를 넘어 스탈린의 견해까지 절대시하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이나 노동운동가들도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법정투쟁의 기록으로 출간된 책의 제목을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달았을 정도로 공공연히 자신이 사회주의자로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괜히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여 형량을 높일 필요가 없다는 것과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적으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의 기준을 적용시켜 본다면 이 땅의 재야세력이나 진보진영은 중도우파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는 논쟁에 익숙하지 않다. 하다못해 중국집에서 주문을 할 때도 자장면이면 자장면, 짬뽕이면 짬뽕으로 통일해야 하는 획일화된 사회에서 의견의 차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주먹과 수갑과 철창이었고, 날치기였다. 현재 우리는 과도기에 서 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정도는 대화와 토론과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지만, 더 이상 강압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아 버려도 될 만큼 후진적이지도 않다. 그런 상태에서 논쟁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하지만,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보수진영은 보수진영대로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보수진영에서는 진보진영이 겉으로는 ‘민주’를 가장하지만 실제는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인다. 진보진영은 또 보수진영의 지식인들을 존경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1980년까지 운동권의 의식화 교재 가운데 ‘사람됨의 뜻’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의 책이 있었다. 광주학살 직후 그 책의 저자가 학살 주범의 비서실장이 된 사실은 그 책으로 의식화 과정을 겪은 대학생들에게 황당함과 환멸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보수주의자들이 응당 지켜야 할 가치들이 군사정권에 의해 철저히 짓밟힐 때, 언론의 자유가 비명조차 지를 겨를 없이 유린당할 때, 자칭 보수파들이 철저히 침묵했던 사실, 심지어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사실을 동시대를 살았던 진보파들은 너무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은 상태에서 논쟁은 불가능하다.
진보진영이 모두 사회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보수진영도 모두 경멸해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서로간에 신뢰를 기르는 일이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요청되는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