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전쟁의 역사는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
끈질긴 생명력 이어온 ‘법과 규범 기반’ 국제질서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경험 매우 짧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적은 미국 아니라 중국

4월 24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최상목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한미 2+2 통상협의 관련 합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하지만 미국 패권 붕괴에 대한 논의도 달러의 금환본위제인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하던 1970년대부터 지속된 논의다. 지금 논의되는 기술 패권에 대한 논쟁도 이미 1970년대와 1980년대 미일 경쟁에서 있었던 논쟁이고, 미·중 간의 신냉전이라는 테마도 이미 미소 간의 냉전이라는 유사 테마로 경험한 바 있다. 20세기 말 탈냉전이 가시화하면서 미국 일극 체제라는 국제질서의 성격에 대한 논의도 있었으며, 세계가 일극 체제에서 다극체제 혹은 양극체제로 변화한다는 논쟁도 1993년 유럽연합(EU)이 탄생하고, 20세기 말 중국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은 논쟁이다. 미·중 패권전쟁 혹은 세력전이(power transition)에 관한 논쟁도 미일 세력전이, 일·중 세력전이와 같이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 사안이었다. 미국의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나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 같은 학자는 이러한 패권전쟁의 역사는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생명력
이와 같은 기존 국제질서에 대한 논의는 냉전 논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중심으로 진행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충돌, 1990년대 이후 유럽연합과 중국의 부상, 그리고 다시 일본과 중국의 충돌, 미국과 중국의 충돌 등이 모두 자유주의 국제질서 안에서 생겨난 변화에 해당한다.하지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1945년 이후 국제 자본주의 시장을 규범과 제도로 규율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확산, 팽창해 왔고, 지금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브레튼우즈체제가 무너져도 미일 간에 대결과 경쟁이 있어도, 중국이 부상해도, 양극체제가 일극 체제가 되던 혹은 다극체제가 되던, 국제 자본주의 시장을 규범과 제도로 규율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법과 규범 기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는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양극, 다극이라는 ‘극’ 균형점의 변화 동력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계속 확대 팽창돼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25년의 지금 우리가 국제질서에 관해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현재 벌어지는 미·중 간의 격돌과 트럼프 행정부의 일련의 조치는 과거 국제질서 변화 논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현상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번에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생명력을 다할 것인가’ ‘지금 그 붕괴의 티핑포인트를 지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또한 한국은 ‘지금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어떻게 되는 것이 우리 국익에 가장 유리한 것일까’ ‘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6월 4일 새로 출범하는 새정부 외교의 큰 방향을 규정할 것이다.
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진단하면서 국제질서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과거 변수를 찾아내라고 하면 두말할 것 없이 ‘중국의 급부상’이다.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험이 매우 짧은 국가다. 수천 년을 전근대 농업 제국으로 살아왔고, 근대화를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로 이루려 했던 나라다. 아직도 국가 자체는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고,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중국이라는 제국의 핏속에 흐르기에는 그 시간과 경험이 매우 부족하다.
문제는 수천 년의 전근대 농업 제국이던 중국이, 약 30년간 사회주의 빈국이던 중국이, 1978년 시장경제를 도입해 개혁개방정책을 편 이후 2010년까지 거의 매년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을 해오면서 불과 30년 만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불과 30년 만에 갑자기 인구 13억의 새로운 세계 2위 경제대국이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개도국 수준의 경제에서 순식간에 벗어나 전 세계에 신발, 장난감, 옷 같은 값싼 상품뿐만 아니라 IT 전자제품,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AI(인공지능) 같은 고성능 하이테크 제품까지 제조하고 공급하는 세계의 공장이 됐다. 국제질서 전체의 주요 공급망에서 중국은 핵심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또한 미래 산업과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터넷 플랫폼까지 ‘알리바바’나 ‘바이두’ 같은 중국의 공룡 기업이 장악해서 글로벌 인터넷 플랫폼의 중국 독점 문제를 고민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급속도의 변화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밖에서부터 생겨난 변화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한 변화다. 그리고 너무나 빠른 속도의 변화여서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은 변화 추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값싼 물품이 대거 공급되고, 중국이라는 시장이 확대되니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중국의 값싼 상품과 거대 중국 시장이라는 기회에 국제사회는 중독되기 시작했다. 우리 대한민국도 중국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같이 성장했고, 어느 사이에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졌다.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이 탄생한 것은 국제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서 원칙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다. 국제사회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글로벌 파이가 커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이 성장하면서 국제질서를 구조적으로 왜곡시키고, 또 중국이라는 국가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책임 있는 핵심 일원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다른 문제다. 왜냐하면 과거 전근대 농업 제국과 사회주의 제국의 관성을 이어받아 정치적 목적으로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점적인 글로벌 공급망과 플랫폼, 풍부한 돈, 정보는 가공할 영향력과 무기로 전환될 수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참여하려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국가여야 한다. 북한이나 쿠바 같은 사회주의 국가는 자격도 주어지지 않을뿐더러, 이 질서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국가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시장이 질서로 정착한 ‘자본주의 시장 질서 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시장이 국가의 도구로 선택된, 이른바 ‘중상주의적 국가’다. 즉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본주의 시장을 도구로 활용하는 국가로, 국가가 시장의 위에 존재한다.
‘중국 급부상’이라는 충격
자본주의 시장이 질서로 정착하려면 시장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규율·규제하고 보조하는 제반의 법, 제도, 규범이 작동해야 한다. 국내의 법, 제도, 규범이 글로벌 무역·경제 협약이나 자유무역 협정에 맞춰지는 과정이 동반돼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일원이 된다. 국가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 국가냐, 권위주의 국가냐의 구별은 큰 상관이 없다. 싱가포르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도 자본주의 시장이 질서로 정착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주요 일원이 됐다. 반대로 어느 국가든 시장 질서 및 협약에 어긋나는 위중한 행동과 관행을 도입하면 그 국가는 국제 제재와 보복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위반이 용인돼 축적되면 결국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반면 자본주의 시장을 도구로 활용하는 중상주의적 국가, 사회주의 시장경제 국가는 법의 통치가 작동하기보다는 법을 이용한 통치(rule by law)가 작동한다. 시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되고, 갑자기 닫히기도 하고, 무기화되기도 하며, 개인 재산이 몰수될 수도 있고, 특정 산업이 무리하게 육성되기도 한다. 정치가 경제 우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시장경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국가의 질서로 정착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로 한 번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국가의 이념이나 목표로 천명한 적이 없다. 즉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정착시키려는 국가가 아니다. 국가의 최고 통치 기구인 공산당이 끊임없이 사회주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계획경제를 닮은 5개년 경제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산업과 대기업은 공산당이 소유한다. 토지와 은행, 자원 대부분이 국가 소유이며, 산업은 국가와 당이 직간접적으로 통제, 관여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생산수단을 당과 국가가 소유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밖으로 나가는 문은 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좀처럼 자유롭게 열지 않았다. 인터넷 플랫폼도 중국이 먼저 미국의 플랫폼을 제한하는 디커플링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정치적 목표로 육성된 전략 산업은 중복투자와 과잉생산의 부작용으로 재고가 쌓였고, 세계시장에 막대한 양의 과잉 생산품을 덤핑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소비시장이라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상품을 자체 생산하는 경제구조로 바꿔가면서, 럭셔리 제품 이외 수입 품목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많지 않다.
중국은 코로나 사태 때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시장을 언제든 닫을 수 있고, 글로벌 공급망 왜곡도 무시할 수 있다. 전략산업의 국산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가가 개입해 보조금과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외국의 기술을 탈취하기도 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중국은 타국과 상호 의존하면서 자국의 시장을 열어놓는 시장국가가 아니라, 자국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집중시키고, 타국에 의존을 줄이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제국이 돼가고 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시장을 국가의 도구로 활용하는 중상주의였다. 그러한 중상주의를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이 아직도 활용하고 있고, 시장과 경제보다 정치가 우위인 공산당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인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국제질서 내부에서부터 왜곡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잠재적 대국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글로벌 공급망을 무기화할 수 있고, 해외에 투자와 개발원조로 거점을 개척해 통상의 흐름을 막을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값싼 경공업 제품에서부터 하이테크 제품까지 전 산업을 석권하고 제품을 덤핑해 다른 국가의 산업을 붕괴시키고, 세계경제의 성장엔진 역할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완결적, 자급자족형 전근대 제국의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책임 있는 핵심 일원은커녕, 질서의 파괴자로 변모하고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 다시 강대국이 됐으니, 이제 각자 강대국(제국)의 영향권을 서로 인정하는 다극 질서를 만들자는 주장을 서슴없이 한다. ‘다극 질서’는 국제 자본주의 시장이 ‘강대국 영향권’이라는 몇 개의 닫힌 시장으로 분절된다는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이 주장을 내세운다. 중국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대해 중국은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국제시장이 왜곡되든 말든 우리의 방식을 지키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은 전혀 아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우리에게 자유롭고 열린 세계시장을 제공해 대한민국을 부국으로 만든 질서다. 그렇기에 이 질서의 왜곡과 파괴는 대한민국의 국익에 반한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빈약한 소프트파워로, 일방적 리더십으로 전 세계의 욕을 다 먹고 있다. 하지만 외교정책의 방향은 중국을 교정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왜곡으로부터 복원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국익을 앞장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 국익 실현의 방향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복원과 같은 방향이라면 우리는 미국에 협력하면서 중국을 책임 있는 대국으로 만드는 글로벌 협력에 동참해야 한다. 미국의 과도하고 무리한 요구가 있으면 방어해야 하지만, 큰 틀에서 우선순위가 있다면, 이는 중국의 불공정 관행과 구조를 국제사회와 함께 교정해 나가는 것이다.
中 불공정 관행과 구조, 교정해야
우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험한 발언과 리더십 때문에 헷갈리면 안 되는 것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적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화살이 중국이라는 과녁을 향하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 우선주의’를 너무 세게 말하면서 국제사회의 화살이 오히려 미국을 향하도록 만들어버렸다.지금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어디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됐다. 제대로 된 질문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살리기 위해서는 누구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미국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및 우방과 함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키고 이 질서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안정과 열린 글로벌 시장이 국익을 극대화하는 통로다. 그래서 국제사회와 같이 질서의 안정을 지키고, 국제사회와 같이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질서를 유지,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 그 원칙이 6월 4일 새로 출범하는 정부의 외교 원칙이 되기를 희망한다.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