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9년 초 국회에서 IMF관련 청문회가 논의되던 시점이었다. 청문회의 첫번째 증인으로 강경식 전부총리가 거론되던 중, 그의 비망록이 공개되는 바람에 화제가 됐다. 비망록에는 청문회 내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청문회를 자신의 소신을 떳떳이 밝혀 대중적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등 세세한 지침이 적혀 있었다.
그 지침은 5공비리 청문회 때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보여준 행동을 분석한 뒤에 나온 것이라는 후문이다. 한마디로 장세동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확실히 장세동은 노무현이나 장석화처럼 5공 청문회가 낳은 또다른 스타(?)였다.
당시 청문회에서 장세동은 진짜 사나이 중의 사나이, 서울시장감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청문회가 장세동을 잡는 곳이 아니라 장세동이라는 ‘의리의 남자’(?)를 온 국민에게 알리는 홍보성 이벤트가 된 셈이다. 현재 일반이 알고 있는 장세동의 긍정적 이미지는 대부분 이때 쌓인 것들이다.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고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대중적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부 식자층에서는 그의 의리 타령을 유치하기 짝이 없는 뒷골목 건달패식의 사고방식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5공 원죄론’을 이유로 그에 대한 어떤 긍정적 평가도 반대한다. 그러나 장세동이란 인물의 대중적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대단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98년 지식인층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일을 서슴지 않는 논객 강준만 교수가 장세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장세동의 의리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가끔 텔리비전에 비치는 그의 얼굴도 날이 갈수록 더욱 당당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전두환씨를 공격적으로 비호하는 것이 단지 의리 때문일까? 나는 그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심리만큼이나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장세동에게 환호하는 대중의 심리다.
탈주범 신창원을 보자. 신창원은 몇 년 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의적이라고까지 불렸지만, 신창원 사건을 사실 관계에만 주목한다면 내용은 싱거우리만큼 간단하다. 살인과 절도죄로 복역 중인 재소자가 감옥을 탈출하여 도피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는 신창원에 대한 이미지, 즉 그에 대한 인식은 좀 다르다. 그의 만만치 않은 싸움 실력이나, 자신의 여자를 보호하려는 남자다움, 강철 같은 의지 등이 부풀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환호를 보냈다. 신창원의 이미지가 실제 신창원을 압도한 경우다.
‘장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도, 장세동에 관한 ‘사실(fact)’과 장세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recognition)’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전유성 기사는 왜 늘 똑같은가?
기자들이 전유성을 인터뷰한 기사를 볼 때마다 생기는 궁금증이 있다. 그에 관한 인터뷰 기사는 모두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똑같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지구상에서 처음 듣는 얘기’가 되도록 끊임없이 애쓴다는 전유성의 노력은, 기자들이 쓰는 그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취재기자가 남자든 여자든, 학생기자든 권위있는 잡지의 중견기자든, 그 구성이나 내용은 서로 상대방의 논문을 베낀 대학원생들의 논문처럼 대동소이하다. 물론 전유성에 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필자의 글도 그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인터뷰 기사에서 반복되는 레퍼토리나 컨셉트는 대충 이런 것들이다. 개그맨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며, 가장 썰렁하게 웃기는 동시에 잘 웃지 않는 개그맨이다, 가수 진미령과 야외 결혼식을 올릴 때 썼다는 ‘비가 와도 강행합니다’라는 문구는 청첩장 역사상 최고의 명카피로 통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패러디한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유럽여행 견문록 제목은 청운 초등학교 동창생인 유홍준 교수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삼계탕집 오픈식의 특별 이벤트로 닭위령제를 지냈다, 그동안 펴낸 책이 아홉권이며 컴퓨터 관련 책 4권은 도합 100만권이 넘게 팔렸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8개의 TV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다가 하루 아침에 중단하고는 지리산에 혼자 들어가 두세달 살다 왔다, 올라올 때 지리산에서 서울까지 13일 동안 걸어왔다는 등 그의 엉뚱하고 기발한 행동들이 글의 재료다.
이런 인터뷰 기사에 곁들이는 사진들이란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나, 뒤돌아서서 바지춤을 내리고 소변을 보는 순간들이다. 결국 이런 기사들에서 그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새로움과 재미남’을 화두로 삼고 살아가는 ‘자유인’ 전유성이다.
신기한 것은 늘 비슷한 톤에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그의 인터뷰 기사는 계속 여성지, 시사지, 주간지, 스포츠신문, 교양지, 대학신문, 네티즌을 대상으로 하는 웹진에까지 두루두루 실린다는 것이다. 코미디언 이주일처럼 늦은 나이에 벼락처럼 데뷔를 한 까닭도 아닐 것이고, 남희석이나 유지태 같은 젊은 친구처럼 소위 뜬다는 연예인도 아니고, 한석규처럼 베일에 가려 늘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타도 아닌데, 전유성은 그렇게 자주 인터뷰에 등장한다. 그에게 대중이 원하는 상품성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이 그에게서 느끼는 매력의 핵심은 무엇일까?
정신분석가 중에 프릿츠 펄스(Fritz Pearls)라는 사람이 있다. 프로이트를 존경하던 동시대의 정신분석가였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했다는 이유로 프로이트 학파에서 쫓겨났고, 그로 인해 정신의학사에서도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는 A부터 Z까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는데, 그 이론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다. 성격발달에 대한 그의 기본 이론은 ‘환경 의존’으로부터 ‘자아 의존’으로의 변화다. 다시 말해 부모나 사회의 가치관에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그것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핵심 과제라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도덕적 체계, 지적 체계, 종교적 체계에 의존하지 말고 ‘나의 실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 자신이 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펄스의 성격발달 이론을 대입해본다면 장세동의 삶은 ‘환경에 의존’하는 것이고 전유성의 삶은 ‘자아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충성심과 지적인 느낌 주는 장세동
장세동은 자신이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건축학을 전공하는 대학교수가 되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장세동 교수’라는 직함이 별로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는 충분히 지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그 때문인지 ‘충성과 의리’의 이미지를 독과점하면서도 자칫 그런 경우에 동반되기 쉬운 ‘단순·무식·경박’ 등의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실상 충성심으로만 따지자면 전임 경호실장들이었던 박종규나 차지철 혹은 이후락 같은 이들도 장세동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광하지 않는다. 장세동처럼 충성스러우면서도 스마트하고 지적인 느낌을 함께 주지 못한 것이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자기 통제력이 뛰어나며 사전 준비가 놀라울 만큼 치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5공 청문회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그의 청문회 증언 등을 보면 무관답지않은(?) 어휘력으로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정치란 진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 통념을 선점하기 위한 선전 내지 선동이라고 봅니다. 이럴 때는 용어가 중요해요. 신문사 편집기자들의 제목 선택이 사회적 통념을 만드는 데 중요합니다.”
5공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많은 부분 언론에 책임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의 말이다. 논리의 타당성은 둘째로 하고 이쯤되면 완전히 5공의 율사 수준이다.
실제로 많은 군출신 인사들이 활동하던 80년대에 그를 자주 접했던 한 중견 기자는 그를 자신이 만나본 군인들 가운데서 가장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연대기에 의거하여 간단하게 장세동이란 인물의 삶을 살펴보자. 장세동은 1936년생이다. 전남 고흥군 도양면에서 3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서울로 이주한 후에 성동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육군사관학교 1960년 졸업앨범인 ‘북극성 4293’을 보면 장세동과 친하던 동기생들조차 그의 출생지를 서울로 알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해방되기까지 경찰공무원이던 그의 아버지는 6·25때 실종됐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원래 마음먹었던 서울대 건축과를 가지 못하고 1957년 육군사관학교에 16기로 입학한다. 이종찬, 천용택 국정원장과 고강재구 소령이 그의 육사 동기다. 1971년 35세라는 늦은 나이로 은행원이던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다.
1977년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12·12때의 경복궁 모임이 바로 30경비단장인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5공이 들어서면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장군으로 진급한 1981년 7월에 경호실장에 취임해 3년7개월간 재직했다. 재직 중인 84년 12월엔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 28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85년 2월 안기부장에 임명되어 87년 5월 박종철군 고문 은폐사건으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명실상부한 5공의 2인자 노릇을 했으며 한때는 전두환 후계자로까지 거론된 적이 있다.
88년 5공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이후부터는 ‘어른’을 위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89년 1월 일해재단 설립비용 모금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처음 구속된 그는 93년 3월에는 87년의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세칭 용팔이 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96년 12·12 및 5·18사건에서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각각 쇠고랑을 찼다. 2000년 7월 현재 그는 65세의 나이로 ‘어른’의 잦은 나들이에 동행하며 여전히 당당하게 살고 있다.
장세동이란 인물은 그가 ‘어른’으로 모시는 전두환 전대통령과 연결시켜 살펴보지 않으면 그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도령과 분리된 방자를 생각하기 어려운 것처럼 장세동은 전두환을 통해서만 의미가 생기는 사람이 돼버렸다. 부모 품을 떠나기가 두려워 시집도 안간 채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노처녀의 삶처럼 그의 삶은 종속적이고 불안정하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