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전 기아그룹 부회장 도재영

  • 입력2007-01-26 10:3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지난 99년 10월18일, 일본 NHK 방송의 위성채널인 BS1의 인물탐색 프로그램 ‘WHO’S WHO’가 찾아나선 주인공은 한국 사람이었다. 가로에 늘어선 은행나무 이파리가 누릇누릇 물들어가는 서울 도심 거리를 예순이 넘어뵈는 노신사가 옆구리에 가방 하나를 끼고 타박타박 걷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이윽고 주택가 골목 하나를 골라잡아 꺾어들더니 한 양옥집 대문 앞에 선다. 이어서 집 안의 얼굴 없는 안주인과 대문 밖에서 몇 마디 말이 오간다.

    “아주머니, 대문은 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가 아주 좋은 상품 하나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10분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딴 데 가보세요.”

    대화는 싱겁게 끝난다. 옆집도 그 옆집도 마찬가지다. 노신사가 이마의 땀을 씻고 나서 담장에 몸을 기댄 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장면이 바뀌어 서울의 한 호텔. 노신사가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카탈로그들을 꺼내 탁자에 놓더니 한참 동안 선전공세를 편다. 그러나 호텔 관리 책임자는 서비스업 종사자답게 시종 얼굴에 웃음을 띠며 상대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점이 주택가 골목의 여인들과 다른 점일 뿐, 노신사는 거기서도 팔고자 하는 무엇을 파는 데 실패하고 일어선다.



    카메라가 잠시 그를 떠나 서울역 광장 한켠의 무료급식소 앞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노숙자 행렬에 머물다가, 그 남루한 화면 위에 현대니 삼성이니 대우니 하는 재벌기업들의 사옥 전경을 오버랩시킨다. 이쯤되면 해설 멘트로 흘러나오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프로그램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도 남는다. IMF, 기업도산, 퇴출, 노숙자…. 그것들은 이미 1900년대 끝자락 2, 3년의 대한민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키워드가 되었다. 따라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를 빛내기 위해서는 그 노신사의 외판행상은 철저히 실패의 연속이어야 하고, 또한 그의 몰락을 더욱 처절한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가 화려했을수록 좋다.

    아닌 게 아니라 한 고층 빌딩 안, 지금은 칸막이마저 철거된 옛 자신의 근무처에 노신사가 섰다. 감회어린 얼굴로 빈 사무실 터를 둘러보던 그가 창 밖으로 눈길을 준다. 국회의사당 본관의 지붕이 지척에 보인다.

    우리가 만나볼 사람이 바로 이 노신사다. 도재영(都載榮). 62세. 전 기아그룹 부회장. 그리고 양옥집의 안주인이 만일 10분간의 한가(閑暇)를 쪼개주겠노라고 했더라면 그가 소개했을 ‘좋은 상품’은 정수기다. 정수기 외판을 했다는 얘기다. 지엽적인 사실이지만 미리 얘기해버리는게 좋겠는데,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아랫 동서다. 그는 99년 1월에 있었던 국회 ‘IMF 환란조사 특위’에 참고인으로 불려나가 기아그룹의 부실화 과정에 대한 증언을 한 바도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손아랫 동서

    또 한 가지, 앞서 소개한 정수기 외판행상 관련 부분을 읽고 ‘잘 나가던 사람이 어쩌다가 쯧쯧…’식의 측은지심에 사로잡힐지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미리 귀띔하자면, 그는 정수기 외판행상 따위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에는 걱정을 안 해도 될 만한 처지의 사람이다. 목구멍 공양을 위해 거리로 내몰린 게 아니라, 정수기 외판은 그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직업’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팔자 좋은 사람의 객기’ 정도로 성급하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를 만나서, 무슨 생각으로 정수기 외판행상에 뛰어들었는지, 그리고 요즘은 또 무얼 하고 지내는지, 국민기업이라던 ‘기아’는 왜 망했는지, 손윗 동서인 김영삼 전대통령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왔는지 따위의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한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요즘 공식 직함은 통신 서비스 업체인 ‘한초 인터내셔널’의 고문이다. 그 사이에 취급품목이 정수기에서 통신서비스 품목으로 바뀌었을 뿐, 판매 일선에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뛰기는 예전이나 마찬가지라 한다.

    ―기아그룹 부회장 시절보다 오히려 기아를 떠난 뒤의 생활이 세간에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야기의 실마리는 어차피 기아의 부도사태로부터 풀어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기아가 부도유예를 맞은 것이 97년이었지요?

    “97년 7월15일에 부도유예가 되니까 어려움이 많았지요. 은행에서는 대출이 끊기고, 협력공장들은 자금이 동결돼서 부품 생산을 못 하는 지경에 처하고…. 지금 확보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당시 기아판매주식회사 대표이사 부회장이었던 저는 정신없이 현장을 뛰면서 현금판매에 매달렸어요. 어떤 차종은 30% 할인판매까지 했고…참 긴박했어요.”

    ―기아자동차판매주식회사 고문으로 물러났다가 사표를 내신 걸로 아는데 30여년 동안 ‘기아맨’으로 살아오시다가, 그것도 회사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만두려고 했을 때 생각이 복잡했겠습니다.

    “그 심사를 어떻게 말로 표현합니까. 기아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이전인 11월 초에 진념 전 노동부장관이 와서 경영을 맡게 됐어요. 그분이 노동부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내가 기아서비스 대표이사로 있었는데, 전국 대기업 분야의 노사평화대상을 받은 적이 있어서 전부터 알고 있던 분입니다. 면담을 하면서 그랬지요. 여기 있어봤자 고문 월급만 축나고, 나같이 나이든 사람 있어봤자 걸림돌만 될 것 같으니 그만두겠다….”

    ―그래서 당장 그만두라던가요?

    “아닙니다. 그동안 판매분야에 노하우도 있고 하니 지방 다니면서 현황 파악도 좀 하고, 판매사원들 격려도 해주라더군요. 그런데 다녀보니까 예전 기아맨들이 아니에요. 벌써 얼굴에 열정이나 패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무엇보다 기(氣)가 빠진 모습들이에요. 몇 차례 다녀보니 효과도 없고 해서 사표를 냈지요. 사표 처리되고 나서도 31년 동안 열정을 바쳐온 회사를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아서 책상 정리를 못 했어요. 그래서 월급 없이 3개월을 이것저것 처리도 해주고 후배들 격려도 해주면서 나다녔어요.”

    기아는 이래서 망했다

    도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 달 뒤, 월급날이 됐는데도 월급이 안 나오는 상황을 참 받아들이기가 힘들더라 했다. 먹고 살 걱정 때문이 아니라, 월급이 안 나온다는 것이 모름지기 ‘생산활동으로부터 물러났음’의 백지 증명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씨는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맡았던 기아자동차판매주식회사는 부도가 나지 않았지만, 기아그룹 경영진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이야 면할 길이 있었겠느냐”고 했다.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나가셨을 때, 기아문제를 장기간 끌어온 배경에는 당시의 도 부회장께서 동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배경을 믿고 그렇게 한 것 아니냐는 의원들의 의혹 제기가 있었습니다만….

    “그런 질문 받았어요. 그러나 기아 같은 거대기업이 부도가 나게 되면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얘깁니다. 누구를 찾아가서 애걸복걸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맞지도 않아요. 기아 종업원이나 국가 경제를 위해서 청와대에 청탁이라도 해서 될 일 같으면 다부지게 한번 떼라도 써보았겠지만, 애당초 안 될 일이었기 때문에 엄두도 내본 일이 없습니다. 문민정권 출범하고 나서 김 전대통령하고는 의식적으로 정을 떼고 지냈어요.”

    ―이렇게 여쭤보겠습니다. 기아가 왜 망했습니까?

    “외국자본이 가한 영향력을 비롯해서 국내 자동차 업계의 과잉생산 등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습니다만, 노사문제를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했던 것도 한 원인입니다. 사실은 96년도부터 이익 안 나는 회사를 과감하게 팔아치우는 등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표적으로 강성이었던 노조와의 관계가 그런 작업을 쉽지 않게 했고, 뿐만 아니라 100만대 생산에 필요한 설비투자를 대대적으로 해놨는데 마무리 단계라서 이익을 회수할 여유가 없어서 부채비율도 높아졌고, 97년 가을에 무리하게 신차종 여섯 가지를 개발하느라 수천억씩 과잉투자를 했다가 타이밍을 못 맞춘 점 등을 들 수가 있겠지요.”

    고문 자리 마다하고 정수기 외판원으로

    도씨가 사표가 수리되고도 3개월여를 예전 직장으로 무임출근을 계속했던 것은 물론 30여 년 동안 몸바쳤던 회사에 끊기 어려운 정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3개월이 평생을 바치다시피해온 직장으로부터 떨려난 쇼크를 묽게 해주는 완충 기간이었다고 회고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자 부인 손태자(김 전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의 동생)씨는 “다른 사람들은 40대, 50대에 밀려나는데 당신은 환갑까지 일했으니 복받은 것 아니냐, 이제부터는 외국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쉬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니까 여기저기서 무슨 자문을 해달라,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식의 전화가 사방에서 걸려오는 눈치예요. 집사람이 받았는데, 날 안 바꿔줘요. 나쁜 사람들 꾐에 빠져서 그나마 퇴직금마저 털어먹고 집안 망신 시킬까 봐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지요. 그러다 집사람 없는 사이에 전화 한 통을 직접 받았는데…”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이 바로 정수기 판매 업체인 ‘청호테크’라는 회사였다.

    ―정수기 판매 회사 쪽에서 처음부터 판매 일선에 나서도록 권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만나자마자 회사의 고문을 좀 맡아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해요. 한 마디로 거절했지요. 내가 환갑 지나서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그걸 제2의 생으로 표현한다면, 과거를 완벽하게 잘라버리고 새출발을 시도해야 의미가 있잖겠는가. 난 가방 들고 정수기를 현장에서 판매하는 일을 하겠다, 그동안에 기아라는 큰 회사에서 생산한 큰 물건인 자동차를 팔았다지만 그건 내가 팔았던 게 아니고 아랫사람들이 팔았다, 관리하고 도장 찍고 회의하고 지시하고…나더러 또 그런 일을 하라는 말이냐.”

    도씨는 한사코 고문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판매 일선에 나서기를 원했다. 상식적으로 접근했던 정수기 회사 사장은 바로 그 상식을 뛰어넘는 도씨의 얘기에 어안이 벙벙했을 터. ‘기아 부사장 했다는 사람이 우리를 희롱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고문실에 앉아서 돋보기 들이대고 신문이나 넘기는 그런 거지 노릇 할 바엔 차라리 마누라 말대로 여행이나 다니면서 무위도식하겠다고 우겼지요. 난, 발로 뛰어서 내 힘으로 돈을 벌고, 그 돈을 내가 관계하고 있던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의 비용으로 쓰고 싶었어요.”

    도씨가 한참 동안 말을 끊은 채 창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고문직을 수락할 수 없다면서 정수기 사장에게 했던 얘기가 허위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표면적인 논리 이면에는 좀더 도덕적인 고민이 있었다는 토로다.

    “나름으로 기아맨으로 살아오는 동안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부도사태로 수많은 직원들이 한데로 쫓겨났어요.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세월이 얼마나 험했겠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경영일선에 있었던 내가 회사를 나와서 다른 회사의 고문입네, 자문위원입네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여전히 같잖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면 그 모습이 기아사태로 어려움 당한 후배직원들에게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도씨는 자신이 정수기 카탈로그를 들고 거리를 헤맸던 기간을, ‘열심히 일했던 죄밖에 없었음에도 한순간에 일터를 잃어야 했던 왕년의 기아 직원들에게 바치는, 조그만 속죄의 과정이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것말고도 현장을 뛰는 의미는 또 있다.

    “내가 8∼9개월 놀아보니까 느낀 게 많습니다. 첫째는 일거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다못해 월급 5만원이라도 고정수입이 얼마라도 있어야겠다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에 하등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 처량한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구, 복잡하게 깊이 들어가지 맙시다. 내가 회사 그만두고 나서 그래도 내 능력을 사겠다고 제의한 첫번째 회사가 그곳이었으니까 고맙게 여기고 말단 사원으로 자원을 한 거지요. 몸담았던 회사가 그 모양이 돼서 직원들과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쳤는데 무슨 주제로 대기업에 가서 고문 시켜주시오, 사외이사 시켜주시오 하고 찾아갈 체면이 되겠습니까. 정수기 외판은 그런 제 속죄의 마음에서 결심한, 그러나 아주 떳떳하고 당당한 제2의 직업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고 그는 현장에 투입된다. 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친구한테는 안 간다, 기아출신 사우들에게는 접근하지 않는다, 고향사람들에게는 가지 않는다.

    그러자니 정수기 외판에 나선 그의 발길은 고달팠다. 상품인 정수기가 200만~300만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다보니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팔 수 있는 상품은 또 아니었다. 다방이나 병원 등을 돌며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는 구매자를 찾아 발로 뛰는 그 사업이 자동차 파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고 그는 고백한다. 정말로 친구들에게는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내게, 더러 ‘틈새 친구들’한테 찾아가서 딱지맞는 경우가 더욱 힘들더라고 말한다.

    첫 매상을 올렸던 것이 입사한 지 열흘 만이었다. 취급했던 상품이 정수기만은 아니었고, 공기청정기에다 좌변기, 그리고 김치통까지 다양했다. 이후, 그가 정수기 외판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더러 자진해서 구매를 요청해오기도 했다. 그는 곧 5명의 에이전트(일선 판매원)를 거느린 팀장으로 승격했다. 월수입이 300여만 원. 그는 자신이 땀을 쏟아 번 수익금 중 상당액을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에 기부하여 평안남도 협동농장에 식량을 지정 기탁하기도 했다.

    팀장은 일명 부장이었는데, 팀장이 되자 그가 이상한 선언을 했다.

    “오늘부터 나는 오너부장이다. 휘하의 판매원을 내가 해고할 수도 있고, 새로 채용할 수도 있고, 그러니 팀 자체가 독립된 경영체가 아니냐.”

    이후 그의 별명 겸 직함이 ‘오너부장’이었다. 그는 판매팀의 부장이자 판매원에 대한 교육담당 강사이기도 했다. 그가 교육할 때 가장 강조했던 얘기는 정도(正道) 판매였다. “한때 판매원으로 회사 내에서 명성을 드날렸지….” 그는 지금도 정수기 외판 시절을 돌이키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정수기 자체가 고가상품인 탓에 판매원을 지망하고 찾아온 사람들 중엔 중소기업의 간부 출신이 많았다. 현역시절의 대인관계가 무시할 수 없는 판매 루트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왕년에 잘 나갔던 그들 대부분은 3, 4일 교육을 받는 중에 발길을 끊는 경우가 많았다. 정수기 파는 일이 들통날까 봐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거기 비하면 도씨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99년 설 연휴 때 모처럼 상도동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손윗 동서인 YS에게도 ‘요즘 정수기 외판원으로 일한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기아 임원 시절 ‘경실련’ 발기인 참여

    “사실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나갔을 당시에 저는 정수기 외판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이나 의원들이 요즘 뭣하느냐는 얘기는 안 묻더라구요. 물었더라면 당당하게 정수기 팔러다닌다고 얘기했겠지요. 증인으로 채택된 일부 인사들은 출두를 거부하는 등 말썽이 많았지만, 나는 제발 청문회에 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기아에 있을 때 청와대 쪽하고 무슨 커넥션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의혹을 벗을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지요.”

    ―경실련 발기인으로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기아그룹의 임원이었는데, 대기업의 간부가 경제정의를 실천하겠다고 나선 시민단체에 그것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는 건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었을 텐데요?

    “당시 제가 기아서비스 전무이사였습니다. 경실련 설립취지를 들어보니까 괜찮겠더라구요. 평소 서울 이코노믹스클럽 회원으로서 잘 알고 지내던 변형윤 교수 등 거기 참여한 면면들이 믿을 만한 분들이었구요. 게다가 나는 공과대학 나온 사람으로서 경제를 좀더 알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우리 회사 경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대기업 임원으로서는 유일한 발기인이었는데, 참여하는 데에 어떤 제약은 없었습니까?

    “당시 YS가 통일민주당의 총재였어요. 한번은 찾아가서 경실련에 가입했다고 했더니 대뜸 하는 얘기가 ‘거기 몹쓸 놈들 많다’ 이러더라고. 아마 좌경 성향 가진 일부 인사들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아요. 나야 본업이 경영인이니까, 한쪽 발만 살짝 담그고 거기서 얘기되는 부조리도 좀 파악하고 경영일선하고는 또 다른 사회도 좀 알고 싶어서 배우러 간 겁니다, 그러고 그냥 나왔지요. 만나면 원래 길게 말 안 하거든요.”

    ―당시 김선홍 회장은 별 말이 없었습니까?

    “사전에 얘기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나서 통고를 했지요. ‘잘 했어. 말썽나면 안 돼’, 그런 정도였어요.”

    ―노태우 정권 때인데, 권력 상층부로부터는 어떤 압력이 없었나요?

    “‘노통’한테 혼이 났지요. 그때가 한창 세대교체론이니 뭐니 하는 바람이 불 때였는데 김준엽씨, 김동길씨, 김우중씨 뭐 해가면서 차세대 주자들이 거론되는 등 시끄러운 일들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어느 잡지에 투고를 해서 ‘나이가 젊다고 모두 바람직한 차세대 일꾼인 것은 아니다’라는 내용의 주장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권력의 눈밖에 보인데다, 또 한 번은 도산 아카데미 주최로 힐튼호텔에서 세미나를 열었는데, 김우중 회장이 기업인의 영역을 벗어나서 통일론을 한바탕 연설하더라구. 연설 끝나고 내가 질문을 했지. ‘6·25 때 나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회장님은 경기중학교 1학년 이었는데, 회장님 자서전을 보니까 신문 가판을 했습디다. 그때 나는 신문을 몇 부 못 팔았는데, 회장님은 이재(理財)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는지 엄청 많이 팔았습디다. 요즘 세대교체니 뭐니 얘기가 많은데, 이재에 특별히 밝으신 회장님 같은 분은 경영인으로서 전문을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비꼬았지. 행사장에 기관원들도 많았어요.”

    다음날, 김선홍 회장이 그를 불러 “도 전무, 근래 무슨 일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대단한 압력을 받은 눈치였다. 그 길로 그는 계열사의 작은 회사 사장으로 좌천된다. 모기업의 상무급이 가는 회사에 기아서비스의 부사장이었던 그를 발령낸 것이다.

    야당 정치인 YS의 지근거리에 있었던 도씨는 ‘서당개 10년’의 감(感)으로 자신의 투고에 대한 정보기관의 간섭이 거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다니고 있던 대치동 성당에 가서 사무장에게 얘기한다. “정보기관에서 틀림없이 나를 조사하러 성당에 나올 것이다. 오거든 김수환 추기경한테 얘기해서 혼쭐을 낼 것이라고 야단쳐서 보내라.”

    일주일 후에 정말로 정보형사가 성당을 찾아왔고, 그는 오히려 성당 사무장으로부터 야단만 맞고 돌아간다. 도씨가 말하는 자신의 ‘필화사건’이었다. ‘반독재 활동을 해온 김영삼·김대중 등 2김을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내세워 도태시키려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서서 세대교체 운운하는 것이 경우에 어긋나 보여서’ 그런 투고와 발언을 했다는데…글쎄, 그는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가 YS의 동서라는 사실을 제쳐두고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가 말했다. “이 얘기는 처음 하는 겁니다. 여성지 기자들한테 이런 얘기 할 수 있나요. ‘신동아’니까 하는 거지.” 같은 값이면 ‘소설 쓰는 아무개니까 특별히 얘기해 준 것’이라고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걸.

    그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 요직이라는 그룹 계열사의 건설사로 가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이권에 휘말리는 게 싫기도 했고, 자신에게는 ‘판매’가 적성이라고 판단해서 (주)기산으로 돌아온다. 그는 한때 ‘정치 서비스를 판매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였다가 친인척 배제 방침에 따라 정계입문의 꿈을 접었다. 그는 문민정부 시절 OECD 가입이 시기상조라고 드러내놓고 비판했고, YS가 “재산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 고통을 주겠다”고 다소 덜 다듬어진 발언을 했을 때에도, 떳떳한 부자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청부론(淸富論)’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상도동에는 자주 가십니까?

    “주로 명절 때나 돼야 한 번씩 가지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만나기 때문에 인사 정도 나누고 오는 게 전부예요.”

    ―저는 외동딸과 결혼하는 바람에 동서가 없어서 아쉽습니다만, 동서지간이면 무시로 만나서 소주도 한 잔씩 하고 속엣얘기도 나누고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야 뭐…. 만난다고 해봐야 정치 문제는 그쪽이 전문이니까 조언을 하지도 않고, 또 시시한 조언을 해봐야 소신이 워낙 강한 분이 돼가지고 말 들을 사람도 아니어서 함부로 얘기를 안 하지요. 하지만 OECD 문제나 자동차 산업 증설문제에 대해서는 반대를 좀 했지요.”

    ―또 기아 얘긴데요, 기아가 어렵게 된 데에는 삼성 쪽의 표면적인 혹은 이면의 공세가 작용했던 것 아닌가요?

    “잘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혐의를 피할 수 없겠지요.”

    ―자동차 얘기 나온 김에, 삼성자동차 허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사실 노태우 정권 때 삼성이 대구지역에 상용차를 허가받았단 말예요. 그러나 상용차만 가지고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혹이 되는 거지요. 문민정권이 들어서자 거기에 대한 갈등이 있었을 거예요. 상용차를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승용차를 해주자니 과잉중복 투자 문제가 생기고. 사실 다른 후진국에서 자동차 생산을 여기저기 허가했다가 자동차 산업 자체를 죽인 경우가 많아요. 딴 건 둘째 치고 전통(전두환 대통령)이 자동차 허가를 안 해준 건 잘한 겁니다. 삼성자동차 허가 문제는 사실 김 전 대통령도 초기에는 반대했다, 나는 이렇게 봅니다. 삼성으로서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추진을 했고, 또 하필 김해의 갯벌 바닥을 부지로 삼았던 게 문제였는데, 당시 TK 정서가 나빠진 상황에서 부산까지 나빠지면 다 죽는다, 이렇게 됐을 겁니다. 정치 논리가 앞섰지요. 이건 그냥 하도 안타까워서 나 혼자 추리를 해보는 건데…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삼성차를 허가했는지를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하여튼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만약’이라는 가정이야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는 당시에 기아가 경영권 일부를 양보하고 삼성도 독식할 생각을 하지 않은 가운데, 노련하게 투자 합의를 해서 협력체제를 이뤄냈더라면 ‘윈-윈’의 성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최근 들어 부질없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했다.

    어릴 적 피란지 대구에서 김우중과 신문 가판 경쟁

    경북 칠곡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장사에 대단한 수완을 과시했다는데, 어린 시절 그의 ‘대포바퀴 손수레’ 이야기는 이미 그의 주변에서 꽤 유명해진 일화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전쟁이 터지자 모두 대구로 피란을 떠났다. 피란지 대구에서 그는 신문 가판을 했다.

    “석간신문을 지국에서 받아다가 돌아다니면서 팔았는데, 10부를 떼어다가 팔아봤더니 너끈하게 팔린단 말예요. 그래서 20부를 떼왔지. 그런데 밤늦도록 팔아봐야 열서너부 이상 안 팔려요. 지국에서는 10부 단위로만 신문을 내주거든요. 신문 가판이 내가 판매일선에 나섰던 첫 시도였는데, 난 경영에 실패를 한 거예요. 신문 판매는 타이밍이 중요하거든요. 시간 지나면 가치가 없어져버린단 말입니다. 자동차 모델도 유행 지나면 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런데 김우중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에 보면 김씨도 바로 그때 대구에서 똑같은 상품(신문)을 팔았는데, 그의 신문 판매 방식은 달랐다. 신문을 들고 주택가 부촌(富村)을 돌면서 집안으로 그냥 집어던지고 분필로 체크해 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전에 수금을 하러 다니는 방식이다. 구매자가 막연한 상태에서 ‘신문 사세요!’를 외치고 다니는 도재영의 판매방식이 막막하고 원시적이라면, (정도 판매라 할 수는 없으나) 수금이 될 만한 집을 골라 무조건 집어던진 다음에 이튿날 돈을 받아내는 김우중 방식은 애당초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씨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공개석상에서 도씨가 그를 일컬어 ‘이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그 대목을 두고 한 얘기다.

    “당신은 이재에 밝은 천상 장사꾼인데 정치는 무슨 정치냐, 이런 조롱의 뜻으로 그런 발언을 했던 겁니다.”

    도재영의 고향은 칠곡군에서도 사방에 돌덩이만 풍성한 깡촌, 석적면(石積面)이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그는 중학 입학자격 국가고사에 응시했는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친으로부터 ‘1년 쉬어라’라는 통고를 받는다.

    “장남인 형님이 대구사범에 진학을 하게 된 마당에 차남인 나마저 상급학교에 갈 형편은 못 됐던 거지요. 1년 동안 농사를 지으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어요. 경제적 형편이 문제라면 내 힘으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나섰지요.”

    도재영은 마을 야산에 버려져 있던 인민군의 대포에서 쇠바퀴를 떼낸 다음 소나무를 베어서 바퀴를 전깃줄로 동여매어 훌륭한 대포바퀴 손수레를 만들어냈다. 열네살 때였다. 부친으로부터 밑천을 얻은 그는 과일을 떼어다 팔기 시작했다. 대포바퀴를 동원한 손수레 과일행상은 성공적이었다. 신문 가판이 큰 경험이 됐다. 그는 당당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입학금을 마련해서 왜관에 있던 가톨릭 계열의 순심중학에 입학한 것이다.

    중학은 그렇게 마쳤는데 이번엔 고등학교 진학의 길이 막막했다. 그는 철도고등학교에 가기로 작정을 한다.

    “철도고등학교 가면 학비도 면제되고, 밥도 먹여주고, 기차를 언제든 공짜로 탈 수 있다는 얘기에 매력을 느꼈지요. 전쟁 바람에 너도나도 피폐했기 때문에 국비로 다닐 수 있는 철도고등학교의 입학경쟁이 대단히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학원서를 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학교에서도 못 구하고 아버지도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어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기차역으로 달려갔어요. 역장은 높은 사람이니까 못 만나고 조역(助役)이라고 불리던 역무원을 만났어요.”

    도재영이 말했다. “아저씨, 나는 왜관 순심중학교 3학년 B반 급장 도재영입니다. 다른 애들은 헌병이나 경찰서장이 되고 싶다지만 나는 아저씨같이 금테모자 쓴 철도 공무원을 최고로 존경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철도고등학교에 가야겠는데 입학원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66년 공채에서 ‘기아맨’으로 출발

    역무원은 그 기특한 꼬마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지 비상전화를 통해서 입학원서를 철도우편으로 급송하라고 했고, 그 덕분에 그는 철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원서 접수 역시 서울에 가지 않고 철도편으로 해결했다. 학교에서도 구하지 못한 원서를 거뜬히 구해서 접수까지 마쳐버렸으니 그의 수완에 마을 사람들과 학교 교사들도 혀를 내둘렀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되는 위기상황이지만, 오히려 위기였기 때문에 대포바퀴를 구해서 과일장사를 할 수 있었단 말입니다. 철도고등학교 입학원서를 구하는 일은 학교 선생도 포기를 했지만 다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그저 듣기 좋은 구호만은 아니에요.”

    도재영이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이른바 ‘사바사바’로 상징되는 부패가 판을 치던 세상이었다. 당연히 철도고등학교 졸업생 몫으로 주어져야 할 철도공무원 자리를 외부 사람들이 ‘빽을 써서’ 꿰차는 바람에 그는 취직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버지와 흥정했다. 1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을 테니 대학 입학금을 내놓으시오.

    1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재수 아닌 재수를 한 뒤에 들어간 곳이 한양공대 기계과였다. 도재영은 59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다가 입학 8년 만인 67년도에 졸업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도중에 휴학도 하고, 군대도 갔다 오고, 제대하고 서도 1년 동안 군대 문관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재학중이던 66년 11월에 기아산업 공채에 합격하면서 ‘기아맨’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도씨가 기아 그룹 부회장에서 퇴임한 후에 별 망설임 없이 정수기 외판에 나서겠다고 자원할 수 있었던 것은, 쉬운 일 같지만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소년시절부터 온갖 진창을 야무지게 굴러온 그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자동차 생산 기사로 입사했을 당시는 기아마스타라는 이름으로 나온 소형 삼륜화물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그러니까 그는 60년대의 삼륜차부터 최근의 엔터프라이즈까지를 생산 혹은 판매하는 데 간여해온, 기아 자동차의 산 역사인 셈이다.

    그는 생산부장을 하다가 엔지니어 출신으로서는 제1호로 점소장(店所長)으로 나가게 됨으로써 신문 가판과 과일행상으로 이어진 그의 적성을 찾아 ‘판매 인생’의 본류로 돌아온다. 이미 재직중에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과정을 이수했던 걸 보면 언젠가는 영업파트로 옮겨 앉을 준비를 꾸준히 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에서 기아에서의 30년은 전설로 남게 되었다.

    ‘네트워크 판매’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중

    ―사람들은 좀 잔인한 취미가 있어서 ‘기아 부회장 지낸 사람이자 전직 대통령의 동서가 정수기 외판원 하고 있다’는 화제의 한가운데에 오래 있어주기를 바라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1년만 하고 그만두셨는데요?

    “애당초 10개월만 하자고 계획을 하고 시작했던 일입니다. 정수기 판매를 했던 것이 신문 가십 기사거리 제공하려고 한 게 아니고, 내 판매 인생의 긴 과정 중에서 무뎌진 현장감각을 되찾자는 의도였습니다. 나는 충분히 목적을 달성했고, 이제는 이곳 ‘한초’에 와서 ‘네트워크 판매’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취급하는 상품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시외전화와 국제전화를 기존 통신업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연결시켜주는 통신서비스 공급회사라고 보면 됩니다. 판매 방법이 일종의 다단계 방식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판매 시스템을 곱게 보지 않는 문화가 뿌리 깊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다국적기업인 ‘암웨이’에게 다단계 판매시장을 점령당한 것 아닙니까. 이 회사는 정보통신부로부터 정보화 촉진기금 사업 대상자로 선정될 만큼 이 분야에 대단히 유망한 벤처기업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경영주(한의상 회장)의 의식이 건강해서, 이곳에서라면 내가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판매방식에 대한 실험을 해볼 만하겠다고 판단한 거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한, 정도 판매의 길로 나아가게 돼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다시 청부(淸富)를 얘기한다. 그는 이 회사에서 판매원들에 대한 교육을 주로 담당하지만, 그 스스로 가방을 메고 판매 일선에 나서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뭐든 팔고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이야기를 마치고 된장찌개를 파는 회사 인근의 식당에 함께 들렀는데, 보리차를 갖다주는 주인에게 그는 습관처럼 “이 식당에도 정수기 하나 있어야겠다”고 말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IMF라는 모진 상황을 맞아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누렸던 헛거품의 실속 없음을 저리게 체험했다. 도재영씨는 ‘내가 왕년에 누구였는데’라는 허세를 앞장서서 걷어내 보인,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데에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다’는 도전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준 환갑을 넘긴 젊은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