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DJ 통일 드라마의 연출가 임동원 국정원장

  • 김당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입력2006-09-13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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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17일(토) BH(Blue House;청와대) 여야 영수회담 배석 ▲6월19일(월) BH 언론사 사장단 초청 만찬 브리핑 ▲6월20일(화) BH 국무회의 배석 ▲6월21일(수) BH 주례 업무보고 ▲6월22일(목) 국회 정보위 출석 ▲6월23일(금) BH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초청 오찬 배석 및 1급 부서장 인사안 결재 보고….

    언뜻 보면 청와대 비서실장 일정표 같다. 물론 아니다. 비서실장이 국회 정보위에 출석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바로 ‘대통령특별보좌역’으로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6월13~15일)을 성공리에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한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의 동선(動線)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측근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느라 국정원 1급 부서장 인사도 6월23일에야 단행되었다.

    국정원의 정기 인사는 6월과 12월 두 번이다. 공무원 인사규정에 따라 6월과 12월에 퇴임하는 직원들이 생겨 그때 인사 요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원래의 규정대로라면 6월1일 정기인사를 했어야 한다. 더구나 대공정책실장, 대공수사국장, 대북공작국장, 정보관리국장 등 무려 4명의 부서장이 승진, 퇴임, 신병을 이유로 길게는 몇 달째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임동원 국정원장은 이미 오래 전에 6월 정기인사를 정상회담 이후로 미뤄놓았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정상회담 자체가 전적으로 대북전략국을 중심으로 한 국정원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DJ가 삼고초려로 얻은 백만 원군



    99년 12월23일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설화(舌禍)’로 물러난 천용택 국정원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을 때 정치권은 매우 의아해 했다. 왜 하필 임동원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4월 총선이 넉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하필이면 현 정권하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을 가장 정치적인 자리(국정원장)에 임명한 DJ의 의중이 과연 뭔가 하는 물음이었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DJ)이 그를 발탁한 배경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그가 통일-외교-안보 세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전문가라는 점. 둘째는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점. 셋째는 정치적 야망이 없어 야당의 정치 개입 시비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그러나 정작 DJ가 임장관을 국정원장으로 중용한 것은 인간적 신뢰감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실 임원장은 DJ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빈틈없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정치적 야욕이 없다.

    그의 배경도 DJ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인이다. 역대 선거에서 DJ에 대해 뿌리깊은 적대감을 보여왔던 이북(평북 위원) 출신인데다 한때 DJ에 대한 공개적 ‘비토 세력’이었던 군(육사 13기) 출신이다.

    군 출신이지만 그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수학했으며, 나이지리아·호주 대사 등을 역임해 외교관으로서 국제적인 안목을 가졌다. 또,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통일부 차관을 거치면서 외교·안보·통일 3박자 감각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인물이다. 이 정도 출신과 배경이라면 으레 북한에 대한 극우적인 시각을 가질 만도 한데 그는 묘하게도 DJ와 같은 ‘비둘기과’였다.

    그런데 놀랄 만한 사실은 DJ와 임동원 국정원장의 관계는 5년 남짓밖에 안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임원장의 어떤 면모가 DJ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95년 1월 당시 DJ는 92년 대통령선거에서 실패한 뒤 떠났던 영국 유학생활에서 돌아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임원장 또한 93년 3월 김영삼(金泳三) 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원차관에서 물러나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하며 35년 남짓했던 공직 생활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다음은 임원장의 40년 지기인 박택규 교수(전 건국대 도서관장)가 들려준 DJ와 임동원의 첫 만남에 얽힌 일화다.

    “1월 어느 날 임원장은 당시 영국에서 돌아온 김이사장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DJ는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지만 임원장은 한사코 피했다. 그러다 결국 김이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DJ는 처음 만난 임원장에게 ‘재단 사무총장을 맡아 곁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임원장은 김이사장의 제의에 선뜻 응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자신이 뿌리깊은 DJ ‘비토세력’ 집단인 군과 실향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원장은 당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뒤에 DJ는 세 차례나 임원장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거듭할수록 임원장은 DJ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통일과 안보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DJ는 더 임원장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신감을 가진 DJ는 95년 1월 임동원 전 통일부차관이 아태재단 2대 사무총장에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표함으로써 그의 퇴로를 막아버렸다. 결국 고민 끝에 임원장은 아태재단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금이야 DJ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혁명적 결단’이었다.

    그 뒤로 임원장은 2월1일 아태재단 사무총장에 취임했고 봄에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임동원 사무총장-장행훈 기획조정실장 환영 리셉션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이사장은 임총장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책임감 강한 공무원’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인품의 소유자’ ‘남북통일문제 전문가’ 등으로 소개하며 ‘민족에게 통일 비전을 제시한 행동하는 양심’인 임차관(전 통일원차관)이 오심으로써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온 남북 통일문제에서 백만 원군(援軍)을 얻었다고 극찬을 했다.”

    군(軍)·이북 출신의 DJ 비토세력 설득

    군(軍)-이북 출신 집단에서는 당시 임원장이 DJ 캠프에 가담한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심지어 임원장 주변에는 DJ가 대통령이 되면 “이민 가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긴 DJ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 가슴에 맺혔기 때문인지 99년 1월 외환 위기 극복 후 신년사에서 “그런(이민 가겠다) 말 하신 분들이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임동원 사무총장의 존재는 군과 실향민 집단의 DJ에 대한 거부감을 상당히 완화해주었다. 역시 같은 실향민인 박택규 교수의 말이다.

    “97년 대선(大選) 직전에 이북 5도민회가 내는 ‘월간 동화’에서 대통령 후보를 소개하는 특집을 실었는데 당시 임동원 사무총장이 ‘김대중 후보는 이런 사람이다’는 글을 썼고 이회창 후보에 대해서는 박성범 의원이 썼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결판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공 보수주의자인 자신이 왜 DJ를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반공 보수세력의 거부감으로 DJ가 또 다시 선거에서 실패하면 그 사람들은 나중에 DJ에 대한 빚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쓴 글이었다. 그때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이북 출신 상당수의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역대 선거에서 DJ가 받은 실향민 표가 2%쯤이었다면 지난 대선에서는 20%쯤 얻었고, 거기에는 임동원이란 인물을 끌어들인 덕이 컸다.”

    실제로 임원장은 아태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나서 군 선후배와 실향민 단체들을 오가며 자신이 ‘DJ 편에 선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이들을 설득했다. 당시 임동원 사무총장이 ‘월간 동화’에 DJ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보자.

    임총장은 85년부터 10여년간 ‘뉴스위크’ 도쿄 특파원을 지낸 버나드 크리셔가 96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DJ와 YS(김영삼) 중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한국에 더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저는 김대중씨가 죽고 나면 그때 가서야 한국인들이 김대중씨에게 정말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를 위해 DJ를 활용하자”

    “김대중 총재는 지난날 5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 감옥생활, 10년 연금 및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민주통일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행동하는 양심’으로 헌신해왔다. 크리셔씨가 아쉬워하는 대목은 그가 죽은 후에 ‘큰 빚’을 졌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미 때가 늦으니, 살아 있을 때 그를 ‘활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국가를 위한 DJ 활용론’이었다. 임원장은 이어 당시 ‘신동아’(97년 7월호)가 여야 대선 후보에게 7개 분야별 정책현안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묻는 정책설문조사에서 사계 전문가들로부터 DJ가 최고학점(A학점)을 받은 사실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실시한 국정 수행능력 여론조사(97년 8월1일자)에서도 DJ가 경제-안보문제, 남북관계, 리더십 등에서 이회창 후보를 ‘더블 스코어’로 압도한 사실을 제시하고 실향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런 각종 여론조사 수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김대중 후보가 국정 운영능력이나 자질면에서 월등하다는 국민 여론을 반영한다. 그런데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항목에서는 약간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능력 있고 똑똑하고 경제를 살리고 평화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지도자가 틀림없는데도 표 찍기를 망설이거나 정계 은퇴 또는 사망한 후에야 큰 인물, 민주 지도자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아닐까.

    얼마 전 이북 고향 친구들 모임에 나갔더니 화제가 온통 대통령후보 TV토론회에 집중되었다. ‘김대중후보가 자질이나 능력이나 뭐로 보든지 다른 후보들에 비해 뛰어난 대통령감이더군.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야. 그런데 임장군, 그 사람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거요? 빨갱이 아니라는 보장만 있다면 한 번 생각해볼 만 하더군.’ 여러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모아졌다.”

    이어서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공산주의 비판’과 ‘대공 전략론’을 강의했고, 합동참모본부와 육군본부에서 국가 안보정책과 군사전략을 다뤄온 자신이 아태평화재단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김대중 이사장과 외교·안보·통일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토론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0여년간 DJ가 쓴 논문과 연설문, 국회 발언록 등을 샅샅이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고 전제하고 “DJ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합리적 보수주의자”라고 보증했다. 또 그가 내세운 것은 DJ야말로 북한을 다룰 줄 아는 지도자라는 점이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런 식으로 DJ의 집권을 도운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또 임동원 총장이 대표적인 DJ 비토 세력이었던 군과 실향민들로부터 표를 얼마나 가져왔는지는 계량할 수 없는 일이다. 두 집단에서 신망이 컸던 임동원 총장의 발언은 일정 부분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창군 이후 군의 양대 세력을 형성했던 서울-이북 출신과 영남 출신 가운데서 서울-이북 출신 장군들의 신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 임동원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사 교수부에 있을 때 쓴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이라는 저서다. 현역 시절 임원장은 그 책 덕분에 요즘 말로 하면 ‘스타덤’에 올랐다. 이 책이 군인이 쓴 ‘딱딱한’ 책, 그것도 공산주의 혁명전략에 대한 ‘재미없는’ 이론서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당시 1년 만에 3만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한 배경은 이렇다.

    육사 조교수 임동원 대위는 67년 10월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을 출간했다. 이 책은 북한이 대남 혁명전쟁에서 모택동 게릴라전법을 구사할 것으로 ‘예견’하고, 사상적 대비와 안보태세 그리고 경찰 교란작전에 대한 준비를 강조했다. 이 책이 나온 지 몇 달만인 이듬해 1·21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이 터졌다. 무명의 육군 대위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당시 치안국장(현 경찰청장)은 종로경찰서장이 순직한 1·21 사태를 계기로 이 책을 경찰 대공조직의 필독서로 선정했다.

    중앙정보부도 요원 교육용으로 쓰고, 모교인 육사에서도 교재로 사용하게 되었다. 언론에서도 이를 크게 보도해 매스컴을 타는 바람에 당시 임대위는 이 책으로 일약 대공전략 전문가가 되어 현역군인으로는 드물게 KBS 방송에도 출연하고 당시 ‘사상계’와 ‘신동아’에 글이 실리기도 했다.

    5·16 혁명정부에서 검찰부장을 한 박창암(朴蒼巖) 장군이 임동원을 대공전략의 최고 전문가로 꼽은 것도 그의 반(反)게릴라 대공전략 저술 때문이었다. 박장군은 당시 군 후배인 임동원더러 “당신은 반게릴라전의 이론가요, 나는 반게릴라전의 실천가니 두 사람이 합심해서 공산당을 때려잡자”고 했을 정도다. 그래서 임원장은 아태재단에 들어간 뒤에 자신의 처신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에게 이런 책을 쓴 자신을 ‘왕당 반공주의자’라고 표현하며 공산주의를 잘 알기 때문에 DJ의 햇볕정책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시 이북 출신이며 합참에 근무할 때 임원장의 직속상관으로서 율곡사업을 추진했던 이병형(李秉衡) 장군(전 성우회 부회장·통일원 고문)은 임원장에 대해 “내가 겪어본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또 역시 이북 출신으로 임원장이 육사 교수부에 근무할 때 육사 교장을 지낸 강영훈(姜英勳) 전 총리는 임원장의 장남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섰는데 그때 강총리는 외교안보연구원 강당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신랑의 아버지(임동원)를 “가장 존경하는 제자”라고 소개했다. 존경한다는 표현은 스승이 제자에게 스스럼없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DJ도 그에 대한 이런 신망을 높이 산 것이다.

    자수성가형에 혈혈단신

    임동원 원장은 34년 7월25일 평북 위원생(生)이다. 위원초등학교와 선천중·신성고를 졸업한 뒤 6·25가 나자 1·4 후퇴 때 단신 월남했다. 피란민들은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지만 피붙이 하나 없이 낯선 땅에 온 임원장에게는 더 혹독한 시련기였다. 먹고 살기 위해 국민방위군에 들어갔다가 국민방위군이 해산되는 바람에 미군 부대에 들어가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고 영어를 공부해 52년 가을 육사 시험에 합격해 53년 13기로 입교했다. DJ가 좋아하는 자수성가(自手成家) 형이다. 임원장이 막 국정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일부 언론에서 ‘2년간의 경력 공백기’를 문제삼으려 하자 국정원 한 간부는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다들 힘들었지만,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 미군 부대에서 일한 것이 떳떳하지 못한 과거는 아니지만 굳이 공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 나라 정보기관장의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해당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야당이건 언론이건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해 유감이다.”

    육사 동기들에 따르면 생도 시절 임동원 생도는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절대 자신을 과시하거나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떤 동기는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일은 절대 안하는 ‘무골호인’이었고 성적은 중상위권이었다고 회고했다. 임원장은 육사 졸업 후 전방에서 소대장 근무 2년을 마치고 육사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대 철학과(61년)·행정대학원(64년)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64~69년 육사 교수부에서 전임강사·조교수로 5년간 근무하게 된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박택규·송상용 교수(서울대) 등이 서울대 위탁장교 시절 만난 그의 40년지기 ‘민간인 친구’다.

    육사의 전통적인 교수 요원 충원정책은 모든 졸업생이 임관 후 2년 동안 전후방 임지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친 다음에 이들을 대상으로 교수요원과 일반대학 위탁교육 또는 외국 유학을 원하는 인원을 선발하는데 이 과정에 중요한 기준이 생도시절의 성적이다. 따라서 최종 선발되는 인원은 수석 졸업자를 비롯해 대부분 생도시절 상위권 성적을 기록한 사람들이다. 물론 유학 특전은 성적 최우수자들에게 주어졌다. 이를테면 박세직(12기)·박준병(12기) 전 의원이 각각 서울대 영문과와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김동진 전 국방장관(17기 수석졸업자)은 서울대 영문과를 거쳐 미 조지타운대에서 수학했으며 오명 동아일보 사장(18기)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거쳐 미 뉴욕주립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이런 인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수한 성적의 졸업자 가운데 학구열이 높은 초급장교들이 정책요원이나 교수요원을 지망했고 이들은 국내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이런 경력은 보직과 진급에서 동기생들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이나 뒤처지게 한다. 군에서는 전방에서 근무하는 야전군을 최고로 치면서 교수요원이나 정책요원 근무는 특혜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임원장 또한 교수부에 남지 않고 야전군인으로 변신해 중령 시절에는 특전사 초대 특전교육대장으로 특수전 훈련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임원장은 야전군에서 사단 작전참모를 거쳐 합참 전략기획과장(73~76년) 보병 연대장(76~77년) 육본 전략기획처장(77~80년) 등을 지내고 80년 10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합참전략기획과장 시절 율곡계획 입안

    군에서는 주로 군사전략과 안보정책 개발에 참여했다.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원장은 합참 과장(73~76년) 시절 한국군 현대화사업인 ‘율곡사업’ 철학의 기초를 닦은 함남 북청 출신의 이병형 장군(육사 4기) 밑에서 ‘율곡계획’을 입안하는 실무작업을 맡았다. 당시 국방대학원 안보문제연구소 부소장(72~80년) 시절에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율곡사업에 관여했던 김종휘 전 외교안보수석은 이때의 임동원 대령을 “치밀하고 전략·기획분야에서 능력이 탁월한 군인”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노태우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에 기용된 김종휘씨는 노대통령이 평소 능력을 높이 샀던 임동원 대사를 외교안보연구원장·통일원차관으로 천거해 6공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하는 북방 정책 및 남북관계 분야에서 호흡을 맞추게 된다.

    합참에서 전략-기획통으로 자질을 발휘하던 임원장은 76년 장군 진급을 위해 전방부대 연대장으로 자원해 나갔다. 지휘관 임동원은 자상하면서 엄격한 ‘합리적인 원칙주의자’였다. 다음은 그가 전방부대 연대장으로 있을 때 면회를 갔던 박택규-송상용 교수의 목격담이다.

    “경기도 연천 전곡을 지나 진중버스가 다니는 DMZ 인접 최전방 부대였는데 당시 임대령이 ‘(전쟁 나면) 나는 여기서 1주일만 버티면 된다’고 한 말이 인상에 남아 있다. 어느 겨울날 우리가 연대장 지프를 타고 가는데 완전무장한 호위병이 한 명 앞자리에 타니 빈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임대령은 진중버스를 놓치고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는 휴가병을 보더니 차를 세워 태워서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었다. 임대령은 좁은 지프 안에서 오늘 메뉴는 뭐였냐 물어 답하면 수첩을 꺼내 예정된 메뉴가 맞는지 확인하고 장병들에게 지급된 위문품 내용도 일일이 물어 확인했다. 그러고는 그 사병에게 ‘이번 위문품 중에 조금 더 좋은 것은 최전방 고지 근무병에게 올려 보냈다’며 ‘다음에는 좀더 좋은 것을 이쪽 부대에 지급할 테니 섭섭해 말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또 GOP(지상관측소)에 물이 없자 신부를 모시고 수맥 찾기 방법으로 지하수맥을 찾고 나중에는 본인이 직접 신부한테 수맥 찾는 방법을 배워 지하수를 발견해 사병들이 식수로도 쓰고 목욕도 하는 것을 보았다.”

    임대령은 전방 연대장 근무 1년을 마친 뒤 77년 준장으로 진급해 육본 전략기획처장을 맡아 다시 군전력 증강사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12·12 후인 80년 10월 육본 전략기획처장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당시는 군인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예편과 동시에 새로 출범한 전두환(全斗煥) 정부에서 외무부 대사로 임명되어 나이지리아 대사(81~84년) 호주 대사(84~87년)를 거쳤다. 이른바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경향이 줄어들었지만 그때는 예편한 장군들이 대사로 나가는 것은 ‘낙하산’ 축에도 안 드는 군사정권의 오랜 관행이었다. 대사 자리는 예편 장군들에게는 몇 년 ‘외국물’ 좀 먹다가 은퇴하는 마지막 공직이었다.

    하나회에 대립한 청죽회 멤버

    그가 외교관으로 지낸 제2의 인생은 전두환 대통령이 만들어준 것이지만 당시 군에서는 임장군이 ‘물 먹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함께 예편해 이란 대사로 나간 심기철 소장(13기·평북 구성) 등이 청년 장교시절부터 하나회와 대립했던 청죽회(靑竹會) 멤버였기 때문이다. 60~70년대 청년 장교시절 서울-이북 태생의 육사 교수부 출신이 주축이었던 청죽회 멤버들이 영남 출신들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에 대립했던 것은 군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따라서 당시 군에 남아 있던 청죽회 멤버들은 권력을 쥔 신군부 정치군인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는 얘기다.

    청죽회 구성원들은 대체로 운동보다는 토론과 연구를 즐기던 학구파였다는 점에서 하나회처럼 조직적이고 집요하지 못했다. 그런만큼 합리적인 분위기와 군의 임무에 대한 소신도 있었다. 5·16 당시에 쿠데타에 반대하여 육사 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거부하던 교수부 장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육사 16기의 청죽회 멤버였던 황종태씨는 몇 년 전에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청죽회의 당시 핵심 멤버들을 다음과 같이 거명한 바 있다.

    “하나회 지도부에 대항해 청죽회를 이끌었던 11기 핵심 멤버에는 당시 육사 전사과 교수였고 12·12때 신군부에 반대하다가 대령으로 예편한 서우인씨, 하나회의 본격적인 반격에 밀려 재일 사학자인 가형(家兄) 강재언씨가 조총련계라는 혐의로 전역해 현재는 동국대 교수로 재직중인 강재륜씨,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중이던 김광욱씨, 성남중고등학교 창시자인 김석원 장군의 아들이며 현재 단국대 교수로 재직중인 김영국씨,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 회장을 지내고 최고회의 의장실에 근무하던 이동남씨 등이 있었다…13기에는 80년 전후에 전역해 외교관으로 활동중인 심기철씨, 외교안보연구원장과 통일원차관을 지낸 임동원씨,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종하씨 등이 주요 멤버였다. 13기 청죽회 멤버 3인은 공교롭게도 동향(평북)이다.”

    하지만 임동원은 군 출신으로는 드물게 4년 남짓한 나이지리아 대사 생활을 계기로 보란 듯이 외교관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임대사는 호주 대사를 지내고 난 뒤에 노태우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외교안보연구원장(88~92년)과 통일원차관(92~93년)을 지낸다. 바로 이때가 남북관계·통일 분야에서 ‘비둘기파’로서 자신의 대북 협상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시절이다.

    당시 남북고위급회담(총리회담)은 강영훈-정원식 총리를 거치며 두 번 진행되었다. 그는 이때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참여하는 등 북한을 네 번이나 다녀왔고 공식 남북 접촉만도 70회 이상이나 된다. 당시 임동원 차관과 함께 실무협상을 맡은 이동복 총리특보(실제로는 안기부장특보)는 주로 비공식 접촉은 많았기에 공식 접촉횟수가 그보다 많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는 외교안보연구원장 시절에는 외무부 대표 자격으로 1차 총리회담(수석대표 강영훈)에 고위급회담 대표로 참석해 평양을 다녀왔으며, 통일부가 통일원으로 승격해 통일원차관을 할 때는 2차 총리회담(수석대표 정원식)에 역시 대표로 참석했다. 특히 그는 남북 고위급회담 때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을 합의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다 92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참석했을 때 이른바 ‘훈령조작’ 사건이 터진다. 또 나중에는 그가 고위급회담 대표로 북한에 갔을 때 누이동생을 만난 것도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이동복 전 의원과 임동원 원장 사이에는 아직도 그때의 앙금이 남아 있다. 훈령조작 사건은 당시 감사원과 안기부가 직무감찰에 나서는 등 진상을 조사했지만 아직도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당시 고위급회담 차석대표로 참여한 김종휘 외교안보수석도 훈령조작 사건에 대해 묻자 “그 건에 대해서는 관련 당사자들이 아직도 국가정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그는 “수석대표(총리)는 어차피 회담의 ‘얼굴마담‘이었고 실무협상은 임동원-이동복 두 대표에게 위임했는데 임동원 대표는 전향적으로 회담에 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표단의 이산가족 상봉 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대표단의 가족상봉건은, 그동안 역대 남북대화에서 북한이 써온 수법인데다 당시 고위급회담을 앞두고도 북한이 가족들을 데려올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래서 대표단이 평양에 가기 전에 청와대로 노태우대통령을 예방하러 갔을 때 노대통령이 ‘만나도 좋다’고 명시적으로 허가한 것이다. 당시 대표단 일부에서 ‘천만 이산가족들의 고통이 있는데 회담대표가 가족들을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자 노대통령이 이산가족 상봉은 인륜에 관계된 것이고 북한 가족들이 나타나는 것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럴(북에 있는 가족이 나올) 경우에는 만나라, 이런 지침을 평양 떠나기 전에 청와대에 인사하러온 대표단에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1차 총리회담 때는 강영훈 총리-홍성철 통일부장관이 재북가족을 만났고 2차 총리회담 때는 임동원 차관이 재북가족을 만났다.”

    훈령조작 사건은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비둘기파와 매파의 갈등이 빚어낸 상징적인 사건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그때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임동원 통일원차관이 주도한 유연한 대북 포용론이 대북정책으로 일관되게 집행되었더라면 남북관계는 훨씬 더 좋아졌을 것이다. 적어도 남북관계가 YS 시절처럼 뒷걸음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 일련의 북방정책과 남북 고위급회담같은 큰 밑그림을 그린 김종휘 수석이 한 말이다. 물론 이 말을 한 때는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기 전이다.

    DJ 정부 초기 NSC 멤버 좌장 구실

    93년 3월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원차관에서 물러난 임동원씨의 대북전략은 95년 DJ와 만나 빛을 보게 된다. 그는 아태재단 사무총장 시절 DJ의 3단계 통일론을 보완하여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체계화했다. 그리고 DJ 집권과 더불어 외교안보수석·통일부장관·국정원장 등 사실상 최고 정책결정권자로서 입안·집행한 대북 포용정책은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다.

    아태재단은 출범 당시 순수 학술재단이라고 내세웠지만 당시 김대중 이사장이 결심할 경우 언제든지 정치적 싱크탱크로 변신해야 할 운명에 있었다. 이 때문에 아태재단 사무총장은 정치적 감각과 학문적 소양을 겸비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던 그에게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임총장은 업무 추진력과 잘 무장된 이론을 무기로 재단을 단기간에 장악했다. 임총장은 김이사장에게 올라갈 모든 연구 논문이나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재검토했고 지휘계통을 밟도록 요구했다. 정치권에서는 관행인 ‘직거래’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연구원들의 반발도 많아 상당수 연구원들이 임총장과 불화를 빚고 재단을 떠나기도 했다. 임총장에 대해 “너무 독선적이다”는 얘기도 들렸지만 DJ는 끝까지 그를 신뢰했다.

    그러나 아태재단 사무총장 당시 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각이 엇갈린다. 하나는 임총장이 96년 4·11 총선 직후 이종찬·이강래씨 등 이른바 신주류 인사들과 함께 DJ 대통령 만들기의 전위조직인 ‘동북아 포럼’에 참여했으며 대선 직전에는 DJ 비토 세력인 군 및 이북 출신 인사들을 접촉하며 반DJ 정서 무마작업에 적극 나서는 등 집권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반면 일부에서는 임총장이 ‘동북아 포럼’에 참여는 했지만 소극적이었고 이는 DJ의 당선 가능성과도 함수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몸을 사렸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주로 집권 이후 정권 인수 과정에 소외된 측에서 나왔다.

    임원장 성격으로 보건대 보기에 따라서는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대권 도전 4수(修)만에 권력을 잡은 김대중 대통령은 임동원 사무총장을 외교안보수석으로 발탁했다. DJ는 64세의 ‘고령’인데도 차관급인 외교안보수석직을 흔쾌히 수락해준 임원장에 대해 고마워했다고 한다. 사실 말이 차관급이었지 그는 DJ 정권 초기 정부의 외교안보통일정책을 총괄하는 좌장 구실을 했다. 그것은 매주 목요일 열리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멤버에서도 드러났다.

    초기 외교·안보·통일팀을 구성한 천용택 국방장관과 이종찬 국정원장은 둘 다 육사 3년 후배들로 가깝게 지내던 사이다. 천장관과는 청년장교 시절 아랍과의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로 함께 시찰을 가 이스라엘 국방장관 앞에서 고공낙하 시범을 보였다. 또 이종찬 원장은 임수석을 DJ 진영에 합류하도록 주선했고 임수석은 천장관을 DJ 캠프에 합류하도록 권유했던 관계다. 이북 출신인 강인덕 통일부장관과는 오랜 친구다. 홍순영 외무장관은 임수석이 나이지리아 대사 시절 공사로 함께 근무했다. 북한의 온갖 ‘시험’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대북정책을 펴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시킨 데는 DJ 정부 초기 국정원과 통일부의 업무를 조율하면서 다진 NSC 멤버들의 팀워크도 크게 작용한 셈이다.

    일관된 목표는 ‘사실상의 통일상황’

    그러나 ‘차관급’인 그가 NSC에서 실질적인 좌장 구실을 수행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도 DJ의 외교·안보·통일관에 정통한 식견과 DJ가 실어준 무게 중심이었다. 대통령 비서관이 미국 월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한국측 대화 파트너 노릇을 한 것도 DJ가 힘을 실어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DJ 햇볕정책의 전도사’를 자임하던 이 시절에 그가 한 조찬토론회에 참석해 ‘국민의 정부 대북정책--그 1년의 성과와 향후 전망’을 주제로 한 연설을 보자.

    “우리의 대북정책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분단상황을 평화적으로 관리하자는 것이다.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전쟁은 안된다.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 평화공존해 나가야 한다. 절대로 전쟁에 의한 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흡수통일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이 개방하고 현대화할 수 있도록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주자. 북한이 안심하고 변할 수 있도록 끌어내자.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성원으로 끌어내자는 것이다. ‘끌어내자’는 말이 너무 지나친 말이라면 ‘모셔내자’고도 할 수 있다.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대북정책의 두 가지 목표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의 통일상황(de facto unification)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즉 법적인 통일(de jure unification)에 앞서 사실상 통일 상황부터 만들자는 것이다. 서로 오가며 돕고 나누는 상황이다.”

    임동원 수석은 98년 2월 중국에 가서 중국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들과 오찬 토론회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중국인들은 김대통령의 양광정책(陽光政策:햇볕정책의 중국식 표현)을 다음과 같이 16자로 요약해 설명했다.

    先易後難(선이후난:쉬운 것부터 먼저하고 어려운 것은 나중에 한다) 先經後政(선경후정:경제를 먼저하고 정치를 나중에 추진한다) 先民後官(선민후관:민간이 먼저 주도하도록 하고 뒤에 관이 따라간다) 先供後得(선공후득:먼저 베풀고 나중에 얻는다)

    중국인들이 한국의 대북 정책은 이 16자로 표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 데 깜짝 놀란 임수석은 그 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도 지지하는 이 표현을 원용해 햇볕정책을 전파하곤 했다. 그것은 청년 장교 시절 모택동의 게릴라전법을 연구한 그에게 모택동 유격전의 16자 전법을 연상케 했다. 대공 전략가다운 발상이다. 그는 이 16자를 인용하며 “중국인의 시각이 정확하다. 우리 정책이 그렇게 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회창 총재가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선공후득’에 대해 시비를 걸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임수석은 사실 이때 중요한 언급을 했다. 그가 한 연설 한 대목이다.

    “지난 1년 동안 대북정책에는 한두 가지 특징이 있다. 남쪽이 먼저 액션(action)을 취하고 북쪽이 반응(react)해왔다는 것이다. 남쪽이 주도하고 북한이 따라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거꾸로 되면 일이 잘 안 된다. 우리가 주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이나 외국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해주고 있고 그걸 배우고 싶어한다. 또 이런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이 대남 의존도를 조금씩 높이게 하는 출발점을 만들어 줬다.”

    그렇다면 문제는 북한이 응해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다. 그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명하다.

    “(해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북한이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되도록 하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 북한이 호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도 전쟁과 위기를 회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no war no nuclear threat’의 원칙하에 추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주인공은 코리언이다. 여기에는 7000만의 생명이 있다. 어떤 생명은 소중하고 어떤 생명은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다. 우리의 동의 없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합의가 돼 있다.”

    자주정신과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대북정책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네 가지 중요한 자세가 있다. 하나는 자신감(confidence)을 갖는 것이다. 2~3년 전만 해도 붕괴될 것이라고 봤던 북한에게 왜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 둘째는 강자 위치에서 인내심(patience)을 가져야 한다. 북한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 대단히 어렵다. 인내심을 갖지 못하면 갈팡질팡하는 정책이 된다. 세째는 일관성(consistency)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정책추진에 있어서는 신축성(flexibility)을 갖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지금은 성공한 것일까. 시작이 반이라면,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또 55년 만의 남북 정상회담 실현과 그 후속조처의 실천만으로도 ‘사실상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닐까?

    국정원장으로서 그에 대한 국정원 직원들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우선 그는 혈혈 단신으로 국정원에 입성해서 직원들에게 신선감을 안겨주었다. 임원장은 외교안보수석에서 통일부장관으로 갈 때도 사람(부하)을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고 국정원장으로 부임할 때도 단신으로 입성했다. 국정원 간부 L씨의 평이다.

    “말은 쉽지만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려운 훌륭한 점이다. 국정원장뿐만 아니라 장관들도 의전비서관은 업무상 원장(장관)이 공식-비공식으로 만나는 인물과 일정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대개 믿을 만한 자기 사람을 데려와 쓴다. 그런데 임원장은 단신으로 입성했다. 새로 임명한 의전비서관도 김00라고 본래 우리 직원인데 각 부서를 돌며 인사를 하기에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았다. 원장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데 원장이 인사기록카드를 보고 선정했다고 하더라.”

    국정원의 업무는 크게 국내보안, 해외정보, 대북으로 나뉜다. 그래서 지난 정권 때까지는 1·2·3차장제를 운영해왔다. 그러다 대북 3차장제를 폐지했고 최근 남북 정상회담 성공을 계기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3차장제를 부활했다. 그러나 이번 조직 개편에서는 과거와 달리 대북전략국과 북한정보실만을 3차장 계선조직으로 두었다. 공작과 전략을 분리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쨌건 임원장은 경력상으로 그 세 분야를 다 섭렵한 보기 드문 인물이다. 다음은 국정원 K차장의 말이다.

    “임원장은 알다시피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섭렵한 적임자다. 그런 사람이 국정원장으로 오기는 임원장이 처음이다. 사실 국정원에서 ‘국내통’이란 있을 수 없다. 국내분야는 사실 신문만 제대로 보면 다 아는 것인데 장세동·서동권·이후락 부장 같은 힘 있는 부장들이 오면 ‘국내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힘 있는 부장이 오면 국내파트 영향력이 강화되곤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이지 사실 역대 부장 대부분이 해외쪽은 문외한이었다. 또 당시에는 해외파트는 국내파트에 비해 비중도 작았다. 노신영 부장 같은 사람이 해외쪽을 조금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임원장은 국정원장으로서는 전무후무하게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두루 섭렵한 분이다. 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했기 때문에 청와대와 업무협조가 용이하다. 국정원장은 청와대 메커니즘을 알아야 일하기가 부드럽다. 그래서 내실 있고 조화 있는 국정원 운영이 기대된다.”

    국정원 간부들은 임동원 통일부장관이 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우선 무엇보다도 대북전략이 투명해질 거라고 전망했다. 당시 국정원 간부 K씨의 지적이다.

    “특히 역대 대통령들이 추진했던 정상회담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겉으로는 국민들에게 멸공을 주장하고 물밑으로는 화해 제스처를 보내는, 겉과 속이 다른 대북전략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공개할 수는 없겠지만 국민들에게 대북전략을 알리고 공감을 유도하는 대북정책이 예상된다. 통일부와의 업무협조도 잘 될 것이다.”

    임동원과 엄익준

    사실 훈령조작 사건만 해도 비둘기파와 매파의 갈등구조 이면에는 당시 통일원차관(임동원)이 대북전략을 독점했던 안기부장특보(이동복)한테 ‘눌린’ 측면이 있다. K씨의 말대로 그때만 해도 사실 안기부 국장들은 통일원차관을 우습게 봤다. 게다가 통일부는 ‘손발’이 없는 슬림한 조직이었고 조직 자체가 중앙정보부에서 떨어져나간 남북대화사무국을 모체로 출범했기 때문에 한 수 아래로 본 것이 사실이다. K씨는 “그러나 조직 수장으로 대북 전문가가 왔으니 통일부와 업무 협조도 잘 되고 대북협상 방식도 상당히 바뀔 것이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가 국정원장으로 부임할 때만 해도 그의 대북 온건 성향과 국정원 조직 이념이 마찰을 빚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실제로 대북 비둘기파였던 그는 92년 당시 훈령조작 사건에서 갈등을 빚은 이동복 전 의원과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때 그 사건에 관여했던 직원 중에는 국정원 간부가 되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난 5월초에 작고한 고 엄익준 차장이다. 엄차장은 훈령조작 사건 당시 평양 상황단장으로서 서울 상황실과 전문을 주고받는 통신수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임장관이 국정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임원장과 엄익준 차장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엄차장은 물밑에서 추진해온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4월7일 확정되어 이날 사표를 낼 때까지 자신의 병고를 숨기고 임원장을 깎듯이 보좌했다.임원장 또한 사직원을 낸 엄차장을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물밑에서 추진한 김보현 국장(현 3차장)-서영교 단장(현 대북전략국장)은 엄익준 차장이 대북전략국장 시절에 함께 그 밑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대북 전략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새정부 초기에만 해도 이들이 과연 DJ의 햇볕정책을 대북 전략과 정책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임원장은 통일부장관 시절부터 국정원의 김보현 대북전략국장 등과 함께 호흡을 맞추어 정상회담을 추진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한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이다. 일부에는 ‘무슨 얼어죽을 햇볕이냐’며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북 햇볕정책을 안 썼으면 IMF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다. 햇볕정책은 주변 4강이 유일하게 지지한 정책이었다. 또 남북 모두 군비경쟁을 지속할 수 없는 현실에 햇볕정책은 어쩌면 한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김대중-김정일 ‘두 김씨’가 가장 신임하는 국정원장

    어떤 조직이건 혈혈단신으로 들어가 단기간에 조직을 장악하고 나올 때도 혈혈단신으로 나오는 임원장의 스타일 자체가 조직 장악력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DJ한테는 큰 매력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스타일이 부하들에게는 대통령 1인에게만 ‘충성’하는 보스한테서 ‘그늘’을 기대할 수 없다는 불만 요인도 된다. 그래서 임원장이 국정원과, 특히 자신에 대한 언론 보도에 너무 민감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그 때문에 부하들, 특히 언론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정보맨들만 죽어난다는 하소연도 들린다. 따라서 임원장이 조직의 언론 관련 업무를 재조정하거나 적어도 대언론 관계에서 좀더 ‘대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것이 그 자신이나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정치권과의 관계도 그가 풀어야 할 숙제다. 임동원 원장은 현재까지 DJ 정부의 다른 어느 국정원장보다 야당과 관계가 좋다. 아니 관계가 좋다기보다는 그의 재임중 ‘햇볕정책’을 빼 놓고는 야당이 시비를 걸 만한 국정원의 정치적 개입이 전무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장이 야당과 관계가 좋다는 것은 조직 안정에는 절대적인 힘이 되지만 정권 재창출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여당에는 ‘불편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입지는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그가 국정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절대 선(정치적 개입)을 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를 잘 아는 친구들의 생각이자 ‘우려’다.

    “임원장은 정말 학자적인 풍모를 가진 위인이다.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솔직히 통일·외교분야 전문가로서 국가에 기여하길 바랐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한국 정치 현실에서 국정원장이라는 자리가 정치적인 바람을 탈 수밖에 없고 그 자리에 있으면 누구건 특히 야당의 정치적인 공격 목표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것은 그 양반이 국정원장으로 있으면서 절대 선을 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가 70여회나 북한측 인사들과 접촉했던 남북 고위급회담 관련 기념사진을 보면 회담 초기에는 김일성 주석 뒤에 멀리 떨어져 있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김주석 가까이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평양 순안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공식수행원 가운데 그의 위치는 중간쯤이었다. 그러나 점점 김대중대통령의 ‘측근’으로 이동하더니 두 정상이 6·15 공동선언문을 서명할 때는 우리측의 유일한 배석자였다. 남북 문제에서 그의 지론 자체가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 민간차원에서 정부레벨로, 경제교류에서 정치분야로 확대하는 ‘스탭 바이 스탭’이지만 역사적인 장면의 그림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스타일과도 일치한다. 한마디로 그는 선이후난(先易後難)의 전략가인 것이다.

    그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함에도 그가 현정권에서 ‘장수’할 것이라는 전망은 이래서 나온다. 과거의 남북관계 구조에서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이지만, 그는 이미 남북 두 정상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국정원장이 되었다. 판문점 남북 대화의 산 증인인 국정원 산하기관의 K연구위원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국정원이 한 일에 대해 묻자 이런 말을 했다. “6월15일 오찬장에서 국정원장이 건배에 답사한 그림(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느냐.” 그는 정상회담 마지막날 김정일 국장위원장을 설득해 북한 인민군을 대표하는 조명록 차수로 하여금 사복을 입고 김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김정일이 가장 신임하는 대한민국 국정원장? 그러면 남과 북 사이의 ‘게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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