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 사람들이 날더러 ‘단군주의자’라면서 아주 우호적으로 대해요. 민족주의자라는 뜻이지요. 내가 비록 다른 체제에서 온 사람이지만 자기들 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사실이다. 변사장은 단군민족일체화협의회장을 맡기도 했던 인물. 전국에 300여 개의 단군상을 세웠고, 회사에도 단군상을 모셔놓았다. 또한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단군릉을 찾아가 예를 갖춘다. 남한에서 단군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잇따르자 항의성명까지 냈던 북한이 그에게 매력을 느낄 만도 하다.
그러나 변사장에 대한 북한측의 두터운 신뢰는 이런 이유만으로 쌓인 것이 아니다. 그가 북한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그 역시 북한을 특별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에 처음 진출할 때부터 저임 노동력을 활용한 단순 임가공 사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하청 형태의 경협은 남에나 북에나 단기적, 제한적인 수익을 가져다 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저쪽에 근본적인 자생력을 길러주면서 이쪽도 실리를 챙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기술이전을 ‘통 크게’ 하면 시너지 효과도 커집니다. 내가 돈을 버는 데 유용하게 써먹었던 핵심기술과 설비를 아낌없이 넘겨주는 거예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면 어쩌냐구요? 당장에 조금씩 받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중에 크게 먹을 생각을 해야지요.”
적극적인 기술이전
단군민족일체화협의회장 시절, 변동호 사장은 단군사상을 매개로 북한과 교류하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곧 이것만으로는 뜻을 펴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남북교류, 나아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거점은 경제분야에서 찾는 게 더 현실적인 듯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전자회사를 꾸려오고 있는 자신이 그 적임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98년초, 변사장은 평양 대동강 구역에 합영공장을 열었다. 성남전자의 주력 생산제품은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 한국에서는 CD와 MD 등이 대중화하면서 카세트 테이프가 ‘한물 간’ 매체로 사양길에 든 듯 하지만, 저개발 국가에선 아직도 수요가 많다. 북한에서도 선전물 등의 용도로 카세트 테이프 수요가 많은 편인데, 경공업 수준이 워낙 낮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마침 본사에 최신 설비를 들여오면서 구식 설비를 동남아 국가에 처분하려던 차였는데,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여의치 않게 됐어요. 이걸 고스란히 평양으로 옮긴 겁니다. 어차피 폐기 처분할 설비라 손익계산도 꼼꼼히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지요. 계약은 월 100만 개 생산규모로 했는데, 우리가 가져간 설비는 300만 개 규모였어요. 그쪽에선 입이 딱 벌어지더군요.”
그런데 막상 테이프 생산설비를 들여놓고 보니 테이프 외형 생산설비가 노후해 공정을 제대로 돌릴 수가 없었다. 변사장은 본사에서 멀쩡히 돌아가고 있던 성형사출기 10대를 차출해 평양으로 급파했다. 북한 인사들의 눈이 또 휘둥그레졌다. 계약에도 없는 일인데다, 이 기계들이 20년쯤 된 구형이긴 해도 40∼50년 묵은 고물 기계밖에 없던 북한에서는 최첨단 장비였기 때문이다.
변사장이 특히 신경 쓴 부분은 기술이전. 수시로 본사 기술진을 북한에 보내 노하우를 가르쳤다. 북한에 머무르는 기술자들은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었다. 생산라인에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자다가도 공장으로 달려갔다.
“인프라는 엉망이에요. 전기가 모자라 설비 가동률이 아주 낮습니다. 더욱이 3년째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면서 저수율이 3%밖에 안 돼 공장에 줄 전기를 논밭에서 양수기 돌리는 데 끌어다 쓸 정도지요. 그래서 월 300만 개의 테이프를 만들 장비로 30만 개밖에 못 만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인력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나 동남아 근로자들에 비하면 탁월한 수준이지요. 무엇보다 우리와 말이 통하고 정서가 비슷해 기술이전 속도가 대단히 빨라요.”
산업 발전이 더딘 사회라 김일성대나 김책공대를 나온 고급 인력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경험은 부족해도 기술적 기반이 탄탄해 처음 접해보는 기술도 금방 원리를 깨닫고 흡수했다. 낡은 장비의 기판이 고장나 교체할 요량으로 뜯어내라고 했더니 “버리기 아깝다”며 자기들끼리 머리를 싸매고 며칠 뚝딱거리다가 멀쩡하게 고쳐놓기도 했다.
기술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이렇듯 ‘준비된 사람들’이다 보니 성과도 빨랐다. 북한에 진출한 지 겨우 몇 달만에 북한 최초의 고유 브랜드 카세트 테이프 ‘삼천리’가 탄생했다. 멋들어진 금강산 사진이 디자인된 ‘삼천리’가 라인을 타고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광경에 북측은 크게 고무됐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엔 국산 경공업 제품이 거의 전무한 실정. 평양의 백화점엘 가봐도 진열된 상품 대부분은 조악한 중국산이었다.
북한은 카세트 테이프 국산화를 통해 수입대체 효과를 얻은 것은 물론, 인도 등과 수출계약까지 하게 되자 변사장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북한의 경제분야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정운업 민족경제협력연합회장은 “변선생은 모델이 돼야 한다. 그러니 변선생이 우리 사업에서 손해 보면 절대로 안 된다.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얘기하라”며 격려했다.
성남전자는 현재 북한에 진출한 한국 기업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합영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북한의 합영법은 ‘공화국 영역 밖에 거주하는 조선 동포들도 합영법에 근거하여 투자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조선 동포’에 남한 기업인이 포함되느냐의 여부가 분명치 않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거의 다 임가공 형태로 북한에 진출해 있다.
따라서 성남전자는 제대로 된 최초의 합영사이자 북한의 내수기반 산업에 발을 붙인 최초의 남한 기업인 셈이다. 또한 낡은 설비긴 해도 값으로 따지면 400만 달러가 넘으니 투자규모도 만만치 않다. 변사장은 곧 250만 달러 상당의 추가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전력사정이 개선되고 북한 근로자들의 기술력이 궤도에 오르면 성남 본사에 있는 월 500만 개 규모의 테이프 생산설비를 죄다 평양 공장으로 옮길 것도 고려하고 있다.
전자산업 전망 밝다
2년 전 북한측과 합영사업 조건을 협의할 때 북측은 “우리 인력이 중국보다 우수하니 임금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변사장은 “그럴 바에야 중국으로 가겠다”고 버텼다. 임금을 많이 준다고 그게 다 북한 근로자들에게 전달될 리도 없고, 인건비가 합영조건의 기본틀이 될 경우 10명이 처리할 수 있는 공정에 20명을 앉혀놓을 수도 있기 때문. 그는 “대신 기술과 설비는 아낌없이 주겠다. 그러니 인건비에 신경쓰지 말고 기술 국산화에 힘을 쏟아라. 국산화가 빨리 이뤄져야 당신들도 자립할 것 아니냐. 사업이 잘 되면 수익은 철저하게 나눠줄테니 걱정말라”고 약속했다.
변사장은 “북한의 변화는 민주화에서 촉발되고, 민주화는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져야 가능하다. 그러니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남한 기업인들이 북한경제를 살리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전자산업은 북한이 가장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우리의 60년대 수준이지만, 기술력은 70년대 중반 수준까지 올라 있어 그 무렵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북한도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렇다고 밑지는 장사를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술과 설비를 줘가면서 북측 파트너와 함께 사업을 더 키우라는 뜻입니다. 규모를 늘리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성남전자도 북한 진출을 통해 상당한 소득을 얻었다. 국내의 대표적인 카세트 테이프 업체인 SKC는 설비를 중국으로 옮긴 지 오래이고, 새한미디어는 워크아웃에 들어간 상황. 이런 형편에 일본의 합작사가 공장 문을 닫게 되자 갑자기 주문량이 폭주했다. 모처럼 ‘대목’을 만난 성남전자는 남북 합영사업이 가능케 한 ‘규모의 경제’ 덕을 톡톡히 봤다.
또한 성남전자는 북한에 카세트 테이프 사업을 이전함으로써 앞으로는 CD와 배터리 팩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의 개발·생산에 주력할 수 있게 됐다. 북한은 합영사업이 순조롭게 열매를 맺자 절전형 형광등을 함께 생산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변사장은 시장조사 결과 양쪽이 힘을 합하면 이 분야도 사업성이 크다고 보고 세부 방안을 검토중이다.
잡아온 물고기의 손질이나 맡기고 그 대가로 생선 토막을 떼주는 게 아니라 아예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고 함께 그물을 들고 나섰기 때문에 서로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