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한경협으로 모이는 기업들, 다가오는 전경련의 ‘재림’

[재계 인사이드] 재건 1년여 한국경제인협회 ‘환골탈태’

  • 김형민 아시아경제 기자 khm193@asiae.co.kr

    입력2024-11-0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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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농단 사태 때 비리 온상으로 찍혀

    • 지난해 8월 한경협 새 간판 달고 갱생

    • 1년간 류진 회장 필두로 환골탈태

    • 네이버·카카오 가입, 4대 기업 활동 주목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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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시대’로 나아간다. 1961년 창설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해 8월 22일 류진 한경협 회장은 취임사 첫머리를 이렇게 썼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기관명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 한경협으로 변경한 후에 공식 석상에 올라 던진 메시지였다.

    한경협은 박근혜 정부 때 발생한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흔들렸다. 언제든지 좌초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배처럼도 보였다. 이런 가운데 류 회장은 정경유착의 과거를 버리고 새 이름과 새 옷으로 무장, 갱생(更生)하겠단 강한 의지를 보였다.

    초심으로 돌아간 ‘한국경제인협회’

    그러면서 조직이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을 ‘초심’에서 찾으려 했다. 초심이란,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내세웠던 기업인들의 본분이었다. 이 회장은 1961년 8월 한경협의 초대 수장이 되면서 “우리 기업인들이 자유시장경제를 창달하고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도 기관명은 한경협이었고, 7년 후인 1968년에 전경련으로 바꿔 지난해까지 썼다. 다시 간판을 한경협으로 바꾼 것은 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 통합한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그 내막에는 초심을 찾겠단 의지도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류 회장은 취임사 말미에선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잘못된 고리는 끊어내겠다”며 조직이 잠시 잊었던 본분을 다시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분주하게 1년이 지나갔다.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이 기간 동안 한경협은 옛 위상을 회복해 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2016년 말과 2017년 초 사이 차례로 탈퇴했던 4대 그룹(현대차, SK, LG, 삼성)이 적극적인 회원사 활동에 다시 나서겠다는 의미의 회비 납부를 결단하면서 위상 회복은 더욱 가시화하고 있다.

    현대차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현대차그룹은 7월 초 한경협 회비를 납부했다. 앞서 한경협은 올해 초 현대차그룹 등 회원사에 회비 35억 원을 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중에는 현대차·기아·현대건설·현대모비스·현대제철이 한경협 회원사로 등록돼 있는데, 회비 납부로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8월 말에는 SK그룹이 한경협에 회비를 냈다. SK그룹은 기존에 한경협에 회원사로 등록돼 있던 SK㈜,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네트웍스 중 SK네트웍스 대신 SK하이닉스를 합류시키기로 결정도 했다. LG그룹도 내부에서 한경협 회비 납부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납부가 연내에는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삼성은 8월 26일 삼성준법감시위원회(삼성준감위) 정기회의에서 삼성전자 등 4개 관계사의 한경협 회비 납부 건을 승인했지만, 조건을 달았다. 한경협이 정경유착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인적으로 쇄신돼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재계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을 거친 뒤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김병준 한경협 고문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했다.

    이찬희 삼성준감위 위원장은 “최고 권력자와 가깝다고 평가받고 있는 분이 경제인단체 회장 직무대행을 했다는 것도 경험칙상 이상할 뿐만 아니라 임기 후에도 계속 남아서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한경협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의지가 있는지 근본적으로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7년 걸린 정상화, 기업들 마음 돌린 1년

    4대 그룹의 회비 납부는 큰 변수가 없는 한 곧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한경협 회비 납부, 회원사 활동 재개에 대한) 공감대를 갖고 있다”며 “회비 납부는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삼성과 LG는 10월 국정감사 이후 회비를 납부할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린다.

    4대 그룹이 모두 회비를 내고 복귀하면 한경협은 약 7년 만에 정상화의 길을 걸을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에서 자타 공인 ‘맏형’의 지위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경협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가 표면에 떠오르고 수사 국면에 접어든 2016년 11월~2017년 3월 중 주요 기업들이 탈퇴하며 힘을 잃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5월~2022년 5월에는 국가 차원에서 열리는 중대사에 초대받지 못하는 이른바 ‘패싱’의 대상이 되면서 맏형의 지위를 내려놔야 했다. 그사이 대한상공회의소가 한경협을 대신해 맏형으로서 전면에 나서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1961년 설립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지난해 8월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꾸고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회장으로 추대하며 새출발을 알렸다. 1월 2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2024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새해 덕담을 하는 류진 한경협 회장. [뉴시스]

    1961년 설립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지난해 8월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꾸고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회장으로 추대하며 새출발을 알렸다. 1월 2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2024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새해 덕담을 하는 류진 한경협 회장. [뉴시스]

    ‌인고의 시간을 보낸 한경협은 근 1년간 환골탈태를 집중적으로 시도했다. 변화의 기류도 곳곳에서 감지됐다. 그런 과정에서 기업들도 마음을 돌린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류진 회장의 취임이 신호탄이 됐다는 이야기가 많다. 풍산그룹에서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류 회장은 지난해 8월부터 한경협을 이끌었다. 한경협 부회장단이 오랜 논의 끝에 그를 적임자라고 판단해 추대했다. 부회장들은 류 회장이 재계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영어와 일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등 경제 외교에서도 일가견이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오랜 기업 경영의 경험과 철학을 갖춘 면모도 높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다. 그는 ‘미국통’으로도 불릴 만큼 대외적으로 넓은 네트워크도 자랑하고 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일가와는 지금도 왕래하고 있을 만큼 친하다고 한다. 작금의 위기를 타개할 인물로 젊고 혈기 왕성한 기업인이 아니라 한경협의 역사를 잘 알고 경험을 갖춘 노장(老將)을 낙점한 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류 회장의 추대는 그가 비교적 연령대가 젊어진 우리 기업 총수들을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봐왔고, 그들의 경영 철학에 밑바탕이 된 부모 경영인들과도 교류해 온 만큼 지금 우리 재계를 아우를 수 있는 식견과 리더십을 갖춘 적임자란 기대를 내포한다.

    류진(오른쪽)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이 5월 23일 서울 영등포구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케빈 매카시 전 미국 하원의장 초청 간담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류진(오른쪽)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이 5월 23일 서울 영등포구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케빈 매카시 전 미국 하원의장 초청 간담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류 회장은 취임 첫해, 우리 기업들로 하여금 세계시장에 나가 새로운 기회를 도모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마련했다. 폴란드 크리니차 포럼에 참석해 우크라이나 관련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윤석열 대통령의 사우디·카타르 순방, 영국 국빈 방문 때는 경제사절단을 꾸려 기업들의 수주 계약을 이끌어내는 등 성과를 냈다. 올해 1월 일본 게이단렌과 ‘한일 재계회의’를 열었고, 5월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미국 상·하원의 지한파 의원들을 만나는 등 종횡무진 세계를 누볐다.

    지난해 10월에는 윤리위원회를 발족해 초대 위원장으로 목영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선임하며 내부통제 시스템을 강화했다. 국정농단 사태와 같은 사고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겠단 뜻을 외부에 알리는 행보로 주목받았다.

    한경협의 변화에 정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난 1월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취임 직후 류 회장을 예방하고 민관 파트너십을 논의한 것. 이에 일각에선 이전까지 정부의 부름이 없었던 상황과 대조하며 신임 장관들의 예방이 한경협의 위상 회복 가능성을 가늠하는 일정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기업들이 최근 국내외를 막론하고 터져 나오는 지정학적 리스크와 경기 침체, 경영활동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로 인해 힘들어진 사정이 한경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는 분석도 많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한경협은 오는 11월에 열리는 미국 대통령선거 동향을 분석해 기업들에 자료를 제공하는 등 우리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싱크탱크’ 역할도 자청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경협 회비 납부와 재가입은 각자 절차와 분위기가 좀 다르다. 삼성은 다소 복잡하다. 삼성이 한경협에 재가입하기 위해선 우선 삼성준감위의 승인이 필요하고, 승인하면 이를 바탕으로 계열사들이 이사회에 안건을 보고한 후 의결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 때 가장 크게 곤욕을 치른 삼성이 준법과 윤리경영을 위한 프로세스를 강화하면서 한경협 회비 납부도 몇 겹의 산을 넘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직 조심스러운 삼성

    이찬희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8월 18일 한국경제인협회 재가입 논의를 위한 임시회의가 열리는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본사 사옥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이찬희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8월 18일 한국경제인협회 재가입 논의를 위한 임시회의가 열리는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본사 사옥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첫 단추인 삼성준감위의 승인은 이뤄졌다. 8월 26일 정기회의에서 삼성준감위는 5시간의 긴 논의 끝에 “회원으로서 의무인 삼성 관계사의 회비 납부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다”며 “관계사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결정하도록 했다”고 공식적으로 알렸다. 현재 한경협에 합류한 삼성그룹 계열사는 삼성전자·삼성SDI·삼성생명·삼성화재 등 4곳이며, 회비 납부를 위한 내부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고 이병철 회장이 초대 회장을 지내는 등 한경협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삼성이 한경협 활동에 다시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우리 재계에는 시사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다. 우리 수출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며 경제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삼성이 합류하는 즉시 한경협이 대변하는 재계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이에 따라 정부와 국회, 각종 경제 관련 기관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란 기대가 가능하다.

    다만 아직도 변수는 있다. 삼성준감위가 회비 납부를 승인하면서 내건 조건 때문이다. 국정농단 때 불거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인적 쇄신을 이뤄야 한다는 것. 이 약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삼성은 계열사들이 언제든지 다시 탈퇴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는 현재 한경협에서 상근 고문직으로 있는 김병준 전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의 거취를 결단하라는 뜻으로 파악된다. 김 고문이 윤석열 대통령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으로 일한 만큼 최고 권력자와 누구보다 가까워, 언제든지 정경유착을 재현할 고리가 될 수 있다고 삼성은 우려하고 있다.

    김 고문에 대한 삼성의 압박은 앞으로도 몇 번 더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한경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두고 봐야 한다. 아직 어떻게 하겠다는 확답은 없다. 한경협 내부에선 김 고문이 실무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 사실상 명예직에 있기 때문에 전혀 우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대외적으로는 “기업과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형식적 입장만 일단 밝힌 상태다.

    외연 확장도 계속…하이브·네이버 주목

    한경협은 4대 그룹의 복귀를 기다리는 가운데서 외연도 지속적으로 확장해 왔다. 현재 회원사는 420여 개로 전해진다. 지난 2월에는 포스코홀딩스, 아모레퍼시픽, KG모빌리티, 에코프로, 매일유업 등이 신규 회원사로 가입했다. 회원사의 사업 분야도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더욱 다양한 기업에 문을 열어두는 것이다.

    K팝의 선두 주자 하이브, 한국을 대표하는 IT 기업 네이버와 카카오의 가입 여부가 특히 재계의 관심사로 올라 있다. 류 회장이 취임한 지난해 8월 한경협은 곧바로 세 기업에 회원 가입 요청 공문을 보냈다. “IT(정보기술)·엔터테인먼트 업종 등이 부상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말한 류 회장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경협의 가입 요청에 대해 세 기업은 아직 답변을 내놓고 있지 않다. 내부에서 이 사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만 전해진다. 재계에선 두 포털 기업 네이버와 카카오의 가입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다. 포털 규제 등 정치권과 소통해야 할 사안이 늘어난 네이버와 카카오로선 각종 사안을 스스로 대응하기 어려워졌고, 한경협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어 보여서다. 앞으로 더 많은 기업이 가입하면 임원진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한경협은 9월 9일 만찬 자리를 통해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김정수 삼양라운드스퀘어 부회장,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부회장 등 3명을 회장단에 새로 영입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경협 회장단은 기존 12명에서 15명으로 늘었다. 4대 그룹이 복귀한 이후엔 4대 그룹 총수 중에서 차기 한경협 회장이 나올 것이란 전망도 재계에서 조심스럽게 나온다. 4대 그룹 총수 중 한경협 수장이 된 이는 2003년 손길승 SK그룹 회장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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