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혁신’한 보수만이 정권 재창출 성공했다

[윤태곤의 정치읽기] 현대 정치사를 통해 본 보수 정권 재창출의 길 ①시대 조응 ②단단한 기획 ③과감한 간판 교체

  • 윤태곤 의제와 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입력2024-08-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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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S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

    • 한나라당 ‘상향식 공천 시스템’ 도입

    • 박근혜,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비대위원 발탁

    • 여소거야로 보수 혁신 ‘필요조건’ 형성

    • ‘혁신’한 보수만이 정권 재창출 성공

    윤석열 대통령이 1월 29일 당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창문 밖에 보이는 대통령실 주변 경관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개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1월 29일 당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창문 밖에 보이는 대통령실 주변 경관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개하고 있다. [대통령실]

    보수 진영 관점에서 차기 대선 승리는 정권 재창출과 같은 말이 된다. 지난 ‘신동아’ 8월 호에는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방정식, 협력과 갈등 사이의 좁은 길이라는 측면에서 정권 재창출의 길을 짚어봤다. 이번 호에는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대선은 보수든 진보든 중도든 혁신을 통해 국민에게 더 다가가는 쪽이 늘 승리해 왔다.

    보수 혁신 시발점 6·29 선언

    보수의 혁신 혹은 기획을 통한 변신 사례는 적지 않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권위주의 정권 시절인 1987년 6·29선언이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80년 5월 같은 유혈 사태를 다시 맞이하는 파국을 막기 위한 노태우의 구국의 결단이냐, 전두환의 고도의 기획이냐는 논란은 아직도 분분하다. 하지만 어쨌든 여당 리더가 민의를 수렴하는 결단을 내리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군인 출신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형식을 갖춘 것이다.

    6·29선언 이후 후속 조치도 정교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해 7월 24일 여야는 ‘8인 정치회담’ 구성에 합의하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선 이한동·윤길중·권익현·최영철이, 야당인 통일민주당에선 박용만·김동영·이중재·이용희가 참여해 7월 31일에 첫 회의를 연다. 불과 한 달 뒤인 8월 31일 8인 정치회담은 헌법개정에 대한 합의를 도출한다. 9월 18일 국회에서 헌법개정안이 발의되고, 10월 12일 국회 의결을 거쳐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78.2% 투표율, 93.1% 찬성률로 6공화국 헌법이 확정된다.

    핵심 쟁점인 대통령직선제 도입이 결정된 이후의 논의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3공화국, 유신 체제의 4공화국, 5공화국 동안 굳어진 권위주의 헌정 제도를 논의 시작 3개월 만에 뜯어고친 것이다.

    물론 제일 큰 공은 수십 년 동안 민주화를 위해 싸운 투사들의 피와 눈물, 한마음 한뜻으로 거리로 나선 국민에게 돌아가야겠지만, 당시 민정당의 판단력과 기획력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8인 정치회담’ 구성이 그렇다. 여야 동수로, 여당이 상당히 양보한 것 같지만 야당은 김영삼(YS)의 대리인 박용만, 김동영과 김대중(DJ)의 대리인 이중재, 이용희로 나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민정당의 계산 속에 있었다. 그에 비해 민정당 4인 중 군 출신은 권익현 한 사람밖에 없었다. 권익현조차 대령으로 일찍 예편해 12·12사태 직접 가담자가 아니었고, 윤길중은 혁신계 출신, 최영철은 목포에서 태어나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야당과 관계가 좋은 원내총무 출신 이한동이 팀장 격이었다.

    8인 회담에서 기존 헌법의 많은 독소 조항이 삭제됐지만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은 거의 살아남았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예컨대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라는 규정은 유신헌법 때 도입됐는데 1987년 헌법개정에서도 살아남았다. 부통령제도 부활되지 않았다. 애초 민정당에선 YS와 DJ가 대통령-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출마하는 카드를 가장 큰 위협으로 봤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 두 사람의 의중엔 자신이 부통령 후보가 될 경우의 수는 없었다. 즉 야당, 그것도 둘로 나뉜 야당조차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형태를 선호했기 때문에 민정당이 판을 이끌기가 쉬웠다는 이야기다.

    1962년 헌법 수준의 국회 권한 강화도 진행됐지만, 민정당 처지에서는 그조차 나쁘지 않았다. 제1 야당이자 YS와 DJ가 모두 참여하는 통일민주당을 동등한 파트너로 세우고 ‘유일한’ 파트너로 제한하면서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급진적 재야와 학생운동권의 입김을 차단할 수 있었다. 야당 처지에서도 내심 이를 반겼고, 직선제를 쟁취한 데 만족한 일반 국민 다수도 큰 반발을 하지 않았다. 즉 과감한 양보를 통해 새로운 장을 열었고, 그 장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성공해 재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민정당이 주도한 3당 합당

    두 번째 사례 역시 민정당이 주도한 3당 합당이다. 1987년 대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노태우의 득표율은 36.64%에 그쳤고, YS(28.03%)와 DJ(27.04%)의 득표율 합은 55%에 달했다. 이런 민의는 이듬해 총선에서 여소야대로 이어졌다. 3당 합당에 대해선 당시에도 군부 잔당과 민주화 세력의 야합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지금도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 실질적 의미는 상당하다.

    먼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야당의 거센 돌풍과 압박을 전두환 세력에게 돌려 5공 청산 작업을 진행해 여권 내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에 상당한 지분을 나눠주며 민자당을 창당한 것. 민정당이 사라지고 민자당이 창당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안정적 국정 운영의 기반을 확보함과 동시에 전두환의 후계자라는 색채를 희석시킬 수 있었다. 직전 대선에선 2위를 했지만 총선에서 3당으로 밀려난 김영삼 처지에서도 모험의 이유가 있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구축된 4당 체제가 유지된다면 1992년 대선에서 다시 김대중, 민정당 후보와 경쟁해야 했기에 그 같은 구도를 깨뜨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합당 후에 2대 주주인 본인이 대선 후보가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1대 주주인 민정계와 3대 주주인 공화계가 손을 잡는다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자신의 호언장담을 현실화했다. 제4당으로 정치적 영향력에 한계를 갖고 있었던 김종필 처지에서도 해볼 만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보수 진영의 이 기획은 홀로 야당으로 남게 된 평민당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호남 대 비호남 구도로 포위된 이후 김대중은 1987년 대선 국면에 소외된 재야인사들을 충원함으로써 진보색을 강화해 수도권에 영향력을 높였다. 이후 노무현, 김정길, 장석화 등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부산·경남(PK) 소장파들과도 손을 잡았다. 이를 통해 한국 정당정치에서 정책적, 이념적 차별성이 나타나는 양당 정치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3당 합당은 1992년 김영삼 집권의 토대였지만, 3당 합당을 통한 양당제 구축은 1997년 김대중 집권의 배경이기도 했다.

    1995년 김영삼의 신한국당 창당과 1997년 이회창의 한나라당 창당은 1997년 김대중의 집권, 즉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이자 보수 진영 최초의 정권 상실에 가려 높은 평가를 못 받는 것이 사실이다.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던 김영삼과 이회창 두 사람의 창당이 아니었다면 보수 진영이 지금과 같은 명분과 나름의 정통성을 갖추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나라당의 후신 새누리당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 2012년 연이은 집권에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舊) 권위주의 세력과 구 민주화 세력 일부의 결합, 즉 비호남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한 김영삼은 집권 후에는 스스로를 개혁 추진 세력으로 재규정했다. 하나회 척결로 상징되는 군부 내 사조직 제거, 공직자 재산 공개와 사정, 안기부법 개정, 금융실명제,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일련의 개혁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해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이런 개혁 드라이브는 집권 세력 내 합의가 아니라 김영삼 개인의 결단에 의해 진행됐기 때문에 반대급부가 뒤따랐다.

    대구·경북(TK)을 중심으로 한 옛 권위주의 세력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민자당 대표이던 김종필이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충청 기반을 표방했지만 박준규, 유수호 등 TK세력을 상당수 영입해 보수정당의 면모를 갖췄다. 이에 김영삼은 5·18 특별법 등 한층 더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해 맞섰다. 하지만 이는 민자당 내 보수세력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김영삼은 민자당의 간판을 내리고 신한국당으로 새판을 짰다. 신한국당은 1995년 12월부터 1997년 11월까지 존재했던 비운의 정당이다. TK에서 가장 외면받았던 보수정당이지만 보수정당 역사상 손꼽힐 만큼 개혁 정당이었다. 1996년 연말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부터 김영삼 대통령 차남 김현철 씨 구속과 IMF 외환위기로 이어진 국면 속에서 맥을 못 췄지만 신한국당의 정치적 의미는 상당하다.

    신한국당-새누리당 창당의 의미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긍정하고 그 공과를 모두 이어받아” 같은 개념이 신한국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한국-한나라-새누리로 당명이 이어졌고, 이명박·이재오·김문수·정의화·홍준표 등 당시 신진 세력이 이후 보수 재집권의 동량이 됐다.

    신한국당을 단명시킨 한나라당 창당도 혁신적 기획이었다.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의 견제 속에서도 대통령 후보직과 당권을 쟁취한 이회창은 지지율이 최악이던 김영삼을 밀어내고 조순의 통합민주당과 합당을 성사시켜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3김 청산의 기치에 동의한 김부겸, 이우재, 제정구 등도 당시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보수 진영 상당수는 이회창이 김영삼과 지나친 차별화를 감행하고 한나라당을 만드는 바람에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평가하지만, IMF 외환위기 국면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에 허덕이던 대통령과 명확히 선을 긋지 않았다면 표를 더 많이 받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나라당은 야당이 된 후 더 강해졌다. 이회창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당을 장악했고, 5공과 김영삼 정부에서 장외 신세이던 박근혜에게 정치 공간을 열어줬다. 또한 오세훈, 원희룡 등 신진 세력을 수혈해 오늘날 보수정당의 원형(原型)을 만들었다. 이후 혁신을 게을리해 집권도 못 하고 기득권 이미지만 강해진 이회창이 두 번 연속 대선에서 패배해 물러났지만 한나라당 창당 자체는 현직 대통령과 충돌을 불사한, 아니 현직 대통령을 꺾은 과감한 결단이었다. 김영삼이 훼손시킨 지지층 연합도 한나라당이 10년 동안 야당을 하며 상당히 복원해 낼 수 있었다.

    여당보다 더 강한 야당으로 평가받던 한나라당은 이회창의 두 번째 대선 실패 이후 리더십 공백의 위기를 맞았다. 최병렬이 당대표로 선출됐지만 차떼기 불법대선자금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궤멸적 위기를 맞았다. 그 나름의 돌파책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밀어붙였지만 더 큰 역풍을 맞았고, 최병렬은 당대표직 사퇴는 물론 정계 은퇴 요구를 받는 데 이르렀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나라당 혁신이 시작됐다. 최병렬이 고육책으로 지명한 공천관리위원장 김문수가 최병렬의 불출마를 요구하고 최병렬이 이를 받아들인 것. 운동권 출신으로 그 도덕성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던 김문수는 고인 물의 불출마를 연쇄적으로 이끌어냈다. 심지어 16대 국회 초선의원으로 인기가 최고에 달하던 오세훈조차 정치문화 타락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불출마 대열에 합류했다. 이 같은 환경에 박근혜가 당대표로 등장해 여의도 광장에 천막을 치고 재기를 위한 몸부림을 쳤다. 골수 운동권 김문수와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의외로 호흡이 잘 맞았다. 기소된 당원은 당원권을 정지하고 유죄 확정 시 영구 제명하는 등 지금은 상식이 된 내부 징계 시스템을 만들었다. 참신한 새 인물을 충원하기 위해 인재영입위원회를 구성하고 밀실 공천 등 공천 잡음을 줄이기 위해 중앙당의 공천 권한을 각 시도당에 이양하는 등 ‘상향식 공천 시스템’도 이때 도입했다.

    차떼기와 탄핵의 이중 역풍 속에서 “한나라당은 50석도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17대 총선이었지만 결국 121석을 얻어냈다. 이후로도 한나라당은 홍준표 혁신위를 구성해 당권 대권 분리 조항을 도입하는 등 혁신을 거듭해 이회창 체제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냈고, 17대 국회 중 실시된 지방선거와 수십 곳 보궐선거에서 연전연승했다. 2007년 대선에는 치열한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이 박근혜를 누르고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본선에서 민주당 정동영 후보를 520만 표 차이로 꺾었다.

    최근의 혁신인 새누리당 당명 채택은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1년 한나라당은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뜬금없는 서울시장 사퇴로 실시된 재·보궐선거 패배와 디도스(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 사건 등이 겹쳐 최악의 위기에 처했다. 당시 야당에는 문재인 체제가 구축되고 있었고, 장외 주자인 안철수도 몸을 풀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혁신이 시작됐다. 지도부 중 개혁파였던 남경필·유승민이 앞장서 홍준표 대표 체제를 붕괴시키고 박근혜를 간판으로 다시 세웠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당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이라는 문패를 내렸고 ‘빨간 점퍼’로 갈아입었다. 김종인·이상돈·이준석같이 한나라당과 무관한 인물들이 전면에 섰고, 과감한 중도화 정책을 채택했다. 그리고 그해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거뒀고, 대선에서도 승리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다.

    시대 변화에 대한 조응, 단단한 기획력

    1987년 6·29선언에서부터 2012년 새누리당 당명 채택까지 보수정당의 혁신사를 살펴보면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시대 변화에 대한 조응, 단단한 기획과 결단, 기존 간판의 과감한 교체 등이다.

    2022년 대선 전에도 새누리당을 해체하고 젊은 당대표를 선출하는 등 나름의 혁신 시도가 없진 않았다. 그 덕에 21대 대선에 신승을 거둬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치판 자체를 바꿔 새로운 지기기반을 만들었던 과거 혁신 사례에 비길 순 없다.

    보수 진영의 모든 혁신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나타났다. ‘여소거야’의 22대 총선 결과는 보수 진영의 위기로 혁신의 ‘필요조건’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6·29선언, 3당 합당, 신한국당-한나라당 창당, 천막 당사, 새누리당 창당에 이은 보수 진영 6번째 혁신을 이뤄낼 수 있을까. 혁신에 성공한 보수만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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