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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동·서양 문명 첫 충돌 : 페르시아 전쟁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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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서구 열강이 ‘문명(civilization)’의 전파라는 명분을 내세워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했을 때 ‘문명’이라는 단어가 ‘야만’의 미성년을 벗어난 성년기 인류의 교화된 상태를 의미했다면, 식민 지배를 강요받은 이들에게 ‘문명’은 무엇보다도 총과 대포로 대표되는 무력과 그 가공할 만한 폭력을 생산해낸 과학기술을 가리켰다.

조선 말기 한반도를 휩쓸었던 ‘척화’와 ‘개화’의 대립과 갈등은 일본 강점을 거쳐 남북 분단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소위 ‘서양’에 대한 무분별한 선망과 근거 없는 멸시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문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그리고 이 문명의 미래는 무엇인가?

이제 서양이 ‘문명’이라는 말을 독점하는 시기는 지났고, 동양에도 ‘문명’이 엄연히 존재했다는 게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리하여 동양문명 대 서양문명이라는 대립 구도가 문명 담론의 기본 틀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세계사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그러한 단순 대립 구도에 잘 맞지 않는 경우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아랍의 국가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또 인도는?

‘동서’라는 단순 대립 구도를 탈피해서 여러 문명권으로 나누어놓고 보더라도 한 문명권 안에서 이질적인 여러 문명의 요소들을 만나게 되고, 그 문명의 요소들조차 자세히 보면 시대에 따라 변모해왔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문명사업단과 ‘신동아’가 공동으로 기획·연재하는 ‘문명의 교차로에서’ 시리즈는 세계사에서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현상에 주목해, 이질적인 ‘문명들’이 서로 어떻게 만나고 부딪쳤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지리 등 상이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인문학자들이 독자 여러분을 구체적인 문명의 교차 현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문명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문명의 교류와 충돌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은 특정 시대와 장소에 등장한 문명들의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명’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류 문명사에 대한 거시적 조망을 시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문명의 교차로들을 향해 출발하자!

- 송유례·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문명이 교류하고 충돌하는 극적인 양상은 전쟁이다. 전쟁은 세계관의 차이, 정치와 경제의 문제, 종교와 관습의 대립, 과학과 기술의 성과 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무대인 것이다. 집단이나 종족, 민족이나 국가는 자기(自己)의 서사로 전쟁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타자(他者)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전쟁은 여러 도시국가 사이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건이었다. 작은 도시국가들 모두 저마다 독립을 열망하고 각자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마치 운동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서로 경쟁하고 투쟁했다. 전쟁은 또한 서양문학을 탄생시킨 요람이었다. 서양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다. 이 작품은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지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다루면서 두 문명의 충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페르시아 전쟁

역사시대에서 동서양 문명이 첫 충돌한 사건이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년)이다. 페르시아 전쟁을 경험한 그리스인들도 자기 관점에서 그 전쟁을 바라봤으며, 페르시아인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과 역사가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4년)의 ‘역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페르시아 전쟁은 유럽 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처럼 작은 도시국가 시민이 거대 제국의 백성을 물리쳐 승리한 예상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진영이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유국가로 남지 못했을 것이고, 아테네에서 자라기 시작한 민주주의 싹도 개화하지 못하고 고전기 문명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제국이 성취한 업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초의 거대 제국으로 여러 민족을 분할해 통치하는 정책을 구현하며 평화와 질서를 보장함으로써 다인종·다문화·세계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가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하면서 그리스인 처지에서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서문은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의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을 보존하고 전쟁이 발발한 원인을 탐구하는 게 저술 목적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스인이 아닌 이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고, 비교적 객관적 시각과 합리적 서사로 전쟁을 기록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다리우스3세와 벌인 이수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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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서울대 강사·문학박사 kimky@snu.ac.kr
연재

신동아 ·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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