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을 밟고 가는 사람, ‘보허자’를 아는가. 그렇다. 전투란 늘 그런 것이다. 싸움은 근육이 하겠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바람 같은 것이다.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느껴지지만 만져지지 않는다. 전투는 사병이 하지만, 승패는 지휘관의 전술이 결정한다. 전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바람이며 보허자다.
로마군을 무너뜨린 한니발의 기병
한니발은 왜 알렉산드로스를 첫손가락으로 꼽았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알렉산드로스가 그 동안의 전투방식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전투는 보병은 보병끼리 기병은 기병끼리 싸우는 게 정석이었다. 자연히 전장도 양쪽이 진을 칠 수 있는 널찍한 평원이었다. 그러니 대부분 숫자가 많은 쪽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의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적의 보병에 맞서 기병을 투입하거나 보병을 적의 기병과 싸우게 했다. 그리고 발빠른 기병을 이용해 적의 배후를 치거나 옆구리를 공격했다. 매복과 기습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스물두 살 때 3만6000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15만~20만 군대와 두 번 싸워 이긴 것도 다 이런 이유다. 물론 기병이 강하다고 반드시 전투에 이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했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알렉산드로스의 강점이 있다.
한니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가 한니발에게 번번이 패한 것은 그의 예측불허한 작전 때문이었다. 보병과 기병의 톱니바퀴식 운용에 로마군은 번번이 나가떨어졌다. 로마의 주력은 언제나 중무장 보병인 데 비해 한니발은 기병을 중시했다. 한마디로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의 전술에서 키포인트는 기병, 즉 기동력에 있었다.
요즘 축구에서 4-4-2가 화제다. 4-4-2는 4-2-4의 변형이다. 4-2-4는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열일곱 살의 펠레를 앞세운 브라질이 들고 나와 우승한 포메이션이다. 수비가 4명, 공격이 4명이지만 가운데 허리 2명이 때로는 공격에 가담하고 위험할 때는 순식간에 수비에 가담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허리의 부담이 크다. 상대가 번개같이 역습을 가하면 순식간에 아군의 최후방이 최전선으로 돌변한다. 최전방의 공격수 4명은 적진에 고립돼 별로 쓸모 없게 된다. 또한 4-2-4에서는 ‘따로국밥’식 축구가 불가피하다. 공격수는 공격만, 수비수는 수비만 하는 경우가 많다. 최악의 경우엔 공격-허리-수비진이 따로 떨어져 보급로가 막힌다.
4-4-2는 4-2-4에서 공격수 4명 중 미드필더 2명은 그대로 놔두고 좌우 날개를 허리로 끌어내린 포메이션이다. 1966년 영국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이 포메이션으로 우승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윙백 2명이 순식간에 공격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수비를 강조하는 포메이션이었다. 요즘과 같은 공격적인 4-4-2가 완성된 것은 74년 서독월드컵이다. 토털 축구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팀이 그 주인공. 형식은 4-4-2지만 네덜란드 선수들은 자리나 포메이션에 구애받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원수비-전원공격이다. 또한 공격-허리-수비진의 틈새를 촘촘하게 구성해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이러한 토털 축구는 ‘한 팀에 세계적인 스타가 최소 6~7명은 돼야 한다’는 약점이 있다. 강한 체력, 번개 같은 스피드, 넓은 시야를 갖춘 스타들이 베스트 11명 중 50%는 넘어야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각팀들은 4-4-2를 자기 팀 실정에 맞게 조금씩 변형했다. 토털 축구는 어렵지만 부분적으로 일순간 압박을 가하거나 때로는 양 윙백이 기습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이탈리아는 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 빗장수비 중심의 4-4-2로 우승했다.
4-4-2체제의 최종 수비 4명은 일자로 나란히 서서 순식간에 상대를 오프사이드 함정에 빠뜨린다. 그리고 수비-미드필더-공격진의 거리가 짧아 보급로가 쉽게 끊기지 않는다. 그만큼 4-4-2는 ‘양날의 칼’이다. 수비를 하다가도 공격으로 전환하기가 쉽다. 수비수가 수비만 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공격수가 된다. 공격수도 공을 뺏기는 순간부터 수비수로 변신한다.
수비를 하다가 아군이 공을 잡을 때는 순식간에 좌우 미드필더나 최종수비 4명 중 좌우 윙백이 공격에 가세해 2-4-4를 만든다. 4-4-2는 공격과 수비를 유기적으로 만드는 데 유리한 포메이션이다.
4-4-2 시스템의 핵은 어디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좌우 날개 4명이다. 좌우 미드필더 2명과 윙백 2명이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 장군이 전술의 핵으로 삼았던 기병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우선 빨라야 한다. 수비를 하다가 바람처럼 적의 배후를 쳐야 한다. 그러다가도 아군이 공격을 받으면 수비로 전환해 현장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많이 뛰어야 하고 쉽게 지쳐서는 안 된다. 체격도 당당하고 커야 1 대 1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 그뿐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공격과 수비의 속도를 조절하고 전투 전체를 보는 눈이 정확해야 한다. 한마디로 머리가 좋아야 한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의 히딩크 감독은 어떤 전술을 짰을까? 자신이 승부처라고 생각한 4개의 포지션에 배치한 선수들을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왼쪽 백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누만, 오른쪽 백에 빈터 또는 레이치허를 배치했다. 벨기에 한국 등 체력을 앞세우는 팀을 만나면 빈터를 썼고,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개인기가 뛰어난 팀을 상대할 때는 개인기가 좋은 레이치허를 내세워 맞불을 놓았다. 또한 왼쪽 미드필드에는 오베르마르스를, 오른쪽엔 로날드 데부르를 기용하고 세도르프와 젠덴을 백업요원으로 활용했다.
한국대표팀의 히딩크 감독은 왼쪽 백에 김태영(송종국) 왼쪽 미드필더에 고종수를 쓰고, 오른쪽 백에 심재원 오른쪽 미드필더에 박성배 서정원을 번갈아 투입했다. 다시 말해서 누만 대 김태영(송종국), 고종수 대 오베르마르스, 심재원 대 레이치허(빈터), 박성배(서정원) 대 데부르(세도르프)가 대등한 싸움을 벌여야 히딩크가 꿈꾸는 4-4-2가 가능하다.
4-4-2의 취약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아군의 배후지역이다. 상대 기병들이 아군 최종수비진의 뒤로 돌아가도록 놓아두면 순식간에 배후가 빈다. 이것을 막으려면 양쪽 4명의 아군 기병이 강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양 사이드를 뚫지 못하도록 전 선수가 상대 공격수를 압박해 공을 경기장 가운데로 몰아 넣어야 한다. 상대가 공을 잡는 순간 전 선수가 양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상대를 압박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4-4-2에서 수비는 수비수 4명만 하는 게 아니다. 홍콩 칼스버그컵이나 두바이 4개국 친선대회에서 한국은 양쪽 사이드백이 번번이 뚫려 골을 쉽게 허용했다. 그만큼 4-4-2에 대한 적응이 서툴렀다는 얘기다.
또 있다. 4-4-2는 중앙이 두텁지 못하면 무너진다. 네덜란드의 98프랑스월드컵대표팀 중앙수비수는 주장 프랑크 데부르와 키 193cm의 초대형 수비수 스탐이다. 그 위 중앙 미드필드엔 네덜란드의 최고 스타인 다비즈와 용크가 조자룡과 관우처럼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4-4-2포메이션의 프랑스가 98프랑스월드컵과 유로2000에서 우승한 이면에는 마르셀 드사이-로랑 블랑이라는 뛰어난 센터백 콤비가 있었다. 브라질은 94미국월드컵에서 4-4-2를 들고 나와 무패로 우승했다. 대부분의 축구팬들은 호마리우-베베토 투톱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중앙 수비수였던 아우다이르-마르시우 산토스의 철벽수비가 없었다면 우승은 어려웠다.
19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 4-4-2로 우승한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준결승에서 지코 소크라테스 등 호화멤버의 브라질을 꺾은 데 이어 결승전에서 독일마저 누르고 우승한 데는 가에타노 시레아-풀비오 콜로바티의 빗장수비가 있었다. 그들이 뒷문을 꽁꽁 잠가줬기에 로시-알토벨리의 투톱이 번개같이 역습할 수 있었다.
한국대표팀 센터백엔 홍명보-이민성이 있고 미드필드 중앙엔 이영표-박지성(유상철)이 있다. 홍명보는 왼쪽 김태영의 자리와 오른쪽 이민성의 자리뿐만 아니라 앞쪽에 있는 이영표의 자리까지 오가며 1인 3역을 수행해야 한다. 이민성도 마찬가지다. 비록 홍명보가 아시아 최고 수비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계적인 수비수들과 비교하면 개인기나 협력수비 면에서 많이 떨어진다. 홍명보는 패싱은 뛰어나지만 순발력이 부족하다.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이 끝난 뒤 차범근 감독은 “홍명보는 94년에 비해 체력이 많이 달린다. 하지만 그를 대체할 선수가 어디 있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이민성은 스피드와 투지는 좋지만 패싱이 좋지 않다. 협력수비에도 문제가 많다. 이들은 이미 프랑스월드컵에서 그 능력이 검증된 바 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전에서 전반 38분에 허용한 첫 번째 골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은 홍명보를 비롯 최영일 이민성 등 5명의 수비수가 골문 앞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네덜란드의 코쿠 단 1명을 막는 데 실패했다. 후반 26분에 터진 베르캄프의 골도 마찬가지다. 골 에어리어 정면에서 볼을 잡은 베르캄프는 이민성을 따돌린 데 이어 김태영마저 가볍게 제치고 오른발로 강슛, 네트를 흔들었다. 다섯 번째 터진 로날드 데보어의 골도 비슷했다. 골에어리어 가운데로 전진패스된 공을 잡은 로날드 데보어는 성급하게 달려드는 이민성과 김도근을 차례로 제친 뒤 골문으로 가볍게 찔러 넣었다.
칸나에 전투와 4-4-2
한니발과 로마군이 싸웠던 그 유명한 ‘칸나에전투’를 통해 축구 4-4-2 포메이션의 강점을 살펴보자. 지금부터 2200여년 전이지만 당시의 전투대형은 오늘날 축구의 포메이션과 너무도 비슷하다. 이중에서도 칸나에 전투는 너무도 유명해서 세계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빼놓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 전투내용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서 발췌, 재구성했다.
기원전 216년 초여름 이탈리아의 칸나에 평원. 로마군 병력은 모두 8만7200명(보병 8만명, 기병 7200명). 카르타고의 한니발군은 총 5만명(보병 4만명, 기병 1만명).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로마가 11 대 1, 한니발이 4 대 1로 한니발이 상대적으로 우세했지만, 보병전력을 비교하면 로마 8만명 한니발 4만명으로 로마가 2배였다. 한니발은 당시 31세였다.
먼저 10㎞의 평야를 사이에 두고 대치가 시작됐다. 처음 두 달 동안은 작은 충돌이 계속됐다. 로마 진영에서 1000여 명을 내보내면 한니발 진영도 그 정도의 병력을 내보내는 식이었다. 여기에선 로마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그 동안 한니발에게 당하기만 하던 로마군은 잔뜩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자신감을 얻은 로마군은 진지를 한니발 진영 2㎞ 앞으로 전진 배치했다.
그때부터 한니발은 낙심했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로마가 싸움을 걸어도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소규모 병력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한니발의 책략이었다. 가뜩이나 경계심이 많은 로마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책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작전상 패배했던 병력도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아닌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 동맹군이었다. 한니발의 정예군은 손톱 하나 다치지 않고 건재했던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216년 8월2일. 동이 트자마자 로마군이 먼저 진을 쳤다. 로마군의 주력은 역시 중무장 보병. 로마군 총사령관 바로는 로마군의 강점인 이 중무장 보병을 이용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려 했다. 그래서 한가운데 경무장 보병을 앞세우고 그 뒤에 중무장 보병을 배치했다. 병력은 모두 7만명. 그리고 그 뒤에 1만명의 보병을 대기시켰다. 이것은 중앙 7만명의 경무장·중무장 보병이 한니발 진영의 중앙을 돌파하면, 대기병력 1만명을 투입해 승리를 확정짓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보병대의 진영은 세로가 긴 사각형, 즉 두꺼운 사각형이었다.
한편 기병은 오른쪽에 2400명 왼쪽에 4800명을 배치했다.
로마군이 진을 친 것을 본 한니발도 전군을 이끌고 나와 로마군 정면에 진을 쳤다. 한니발은 로마군 경무장·중무장 보병 7만명과 맞설 대응군으로 맨앞에 갈리아 용병 2만명을 중앙부가 불룩 나오게 활 모양으로 포진시켰다. 그리고 그 뒤에 자기의 정예 중무장 보병 2만명을 배치했다. 로마군 오른쪽 2400명 기병과 맞설 왼쪽 기병은 6000명을, 로마군 왼쪽 기병 4800명에 대응하기 위한 오른쪽 기병은 4000명을 배치했다.
첫번째 싸움은 로마군 경무장 보병과 활 모양으로 진을 치고 있던 한니발의 갈리아 용병 사이에서 벌어졌다. 당연히 수가 많은 로마군이 우세했다. 로마군은 중무장군까지 투입해 중앙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자 한니발의 전위부대인 갈리아 용병 2만명은 후퇴하며 포진을 가운데가 불룩한 활 모양에서 움푹 들어간 활 모양으로 바꾸었다. 한니발이 불룩한 활 모양으로 포진한 것은 로마보병대가 중앙을 돌파하는 데 되도록 많은 시간과 힘을 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좌우 양쪽에서는 기병전이 벌어졌다. 먼저 왼쪽 기병은 로마기병에 비해 숫자가 3배 가까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세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기병은 뒤로 밀리더니 결국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한니발 오른쪽 기병과 로마군 왼쪽 기병의 싸움은 처음 얼마 동안 대등했으나 승마술이 뛰어난 한니발 기병에 밀려 대부분 달아나 버렸다.
이러는 동안 보병들간의 싸움에서는 움푹 들어간 활 모양의 한니발 갈리아 용병들이 로마군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좌우로 쪼개졌다. 로마군은 여세를 몰아 물밀듯이 쫓아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눈앞에 느닷없이 한니발의 정예 중무장 보병이 나타났다. 이제 전투는 7만 로마군 보병과 2만 한니발 정예군 간에 벌어졌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가 많은 로마 쪽으로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니발이 노렸던 상황이었다.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점차 뒤로 밀리면서 로마군의 맹공을 견디는 동안 양쪽으로 갈라졌던 한니발의 갈리아 용병들이 로마군의 양쪽 옆구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로마군 뒤에서도 로마의 기병을 섬멸한 한니발의 1만 기병들이 로마군을 공격했다. 결국 로마군은 완전 포위되었다. 이때부터 전투는 한니발의 섬멸작전이었다. 로마의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 80명이 죽었다. 로마 희생자는 7만 명. 살아남은 로마 병사는 채 1만 명이 안되었다. 반면 한니발군의 전사자는 불과 5500명, 그것도 3분의 2는 갈리아 용병이었다.
결국 칸나에 전투는 ‘기병’이 우수한 한니발의 완승으로 끝났다. 기병이 우세한 한니발이 로마군을 갖고 놀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니발의 정예군이 중앙을 두텁게 막아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4-4-2에서 중앙 미드필더(갈리아 용병 2만명)와 중앙 수비진(정예 중무장 보병 2만명)이 로마군의 공격진, 즉 경·중무장 보병 7만명의 공격을 지연작전으로 막아주는 동안 한니발의 기병들은 적진을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한국팀을 한마디로 갖고 놀았다. 차감독은 경기전 “서정원 이상윤 등 발빠른 측면 공격수들이 기습 플레이를 펼친다면 의외의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슈팅수 12-27. 그러나 한국의 슈팅 12개 중에 슛다운 슛은 후반 교체해 들어간 이동국의 슛 등 서너 개에 불과했다. 코너킥 3-6, 오프사이드 1-5, 반칙 16-11, 경고 2-0 등 한마디로 완패였다. 패장인 차감독은 “오늘 보여준 네덜란드 축구는 너무 좋았다. 이런 경기를 계속 한다면 월드컵 우승도 가능하겠다”고 완패를 인정했다. 차감독은 “최선을 다했으나 실력차가 너무 커 어쩔 수 없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히딩크 감독은 훗날 “한국팀의 체력 스피드 정신력은 여느 팀 못지 않았다. 초반 한국팀의 강력한 프레싱과 빠른 움직임에 한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부분 전술에 문제가 있었다. 그 허점을 이용해 우리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한국의 기병 보병들은 빠르고 용감했지만 유기적인 활동에서는 빵점이었다는 얘기다. 1 대 1 전투에서는 힘이 넘쳤지만 치고 빠지는 전술에서는 미숙했다고 보면 된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반 막판까지 압박했다 풀어주기를 반복하면서 한국 선수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경기를 어떻게 보았을까. 국제축구협회(FIFA)보고서를 보면 한국이 왜 무참하게 당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은 몇 차례 기습으로 찬스를 만들었지만, 네덜란드의 선제득점(38분 코쿠)에 와르르 무너졌다(42분 오베르마르스, 71분 베르캄프, 80분 반 호에이동크, 83분 R. 데부르). 한마디로 이때부터 파상공세를 막기에 급급했다.
한국의 공격은 너무 단조로웠다. 미드필더(서정원 김도근 최성용 유상철 최성용)는 네덜란드의 오베르마르스, 용크, 다비즈, R. 데부르와 경쟁이 안 됐다. 한국은 3-5-2시스템을 구사했으나 양 윙백(유상철 최성용)이 수비만 하는 바람에 5-3-2로 바뀌었다. 윙백 유상철과 최성용은 상대의 배후를 기습 공격하기는커녕 미드필드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맨투맨 수비도 전술능력이 부족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공수전환은 거의 연결이 안 됐고 공격라인 구축도 템포가 너무 느렸다. 특히 슈팅과 드리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한국은 첫 경기인 멕시코전부터 양쪽 윙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선수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힘이 넘쳤으나 공격의 완급조절과 전술의 다양성이 부족했다. 한국의 기량은 모두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은 헤딩 정확성이 부족하고 수비수들이 자주 공을 빼앗겼다.”
한마디로 네덜란드의 빠른 기병들에게 당했다는 말이다. 네덜란드의 왼쪽 미드필더는 육상선수 출신의 오베르마르스다. 100m를 11초대에 뛸 정도로 빠르다. 한국의 왼쪽 미드필더인 서정원도 100m를 11초대에 달리지만 이날 경기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중앙미드필더인 다비즈는 또 어떤가. 체격은 169cm 68㎏이지만, 성격이 불 같아 ‘싸움닭’이란 별명을 얻었다. 볼을 빼앗기 위해 몸을 던지며 악착같이 달려든다. 히딩크 감독은 투지가 좋은 한국에 맞불을 놓기 위해 다비즈를 투입한 것이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한국전은 스피드가 승리의 열쇠다. 양날개인 오베르마르스와 R. 데부르(젠덴)는 한국의 양측면을 노리고 기선을 제압하라. 승부는 후반에 갈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히딩크 감독의 말대로 됐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
한국의 투톱 김도훈과 최용수는 거의 슛할 기회가 없었다. 적진에 고립돼 보급이 완전히 끊겼다. FIFA보고서의 지적과 같이 한국은 최종 수비수 최영일-홍명보-이민성에다 미드필더인 서정원-유상철-김도근-이상윤-최성용까지 모두 수비수가 되었다. 한마디로 보병만 있고, 기병은 없이 싸운 셈이었다. 결과론이지만 어차피 0-5로 질 바에야 한국도 유상철 최성용 등이 적극적으로 네덜란드의 배후를 노렸다면 그렇게 큰 점수차로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최상의 수비는 최선의 공격이다. 칸나에 전투에서 보듯이 수비는 숫자만 우세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기동성 때문이었다. 속도전에서 이겼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수백 배나 큰 세력을 지배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이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몽골인구는 고작 100만명. 이 중 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은 20만명. 칭기즈칸은 이들만 갖고 1억여 명을 지배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당시 유럽 기사단의 군장은 70㎏. 그러나 몽골기마군은 쇠가죽 갑옷에 칼 화살 망치가 무기의 전부였다. 그만큼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빠른 기병만 갖고 이기는 것은 아니다. 빠른 기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병과 보병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축구의 경우 공격수가 때로는 수비수가 되는가 하면, 오른쪽 백과 왼쪽 백이 순식간에 자리 이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최종 수비수와 최전방 공격수가 순간적으로 위치를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공수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토털축구를 하는 데는 4-4-2 포메이션이 가장 유리하다. 4-4-2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경기중 4-4-2는 3-5-2나 4-2-3-1 혹은 4-3-3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바뀔 때 얼마나 유기적으로, 균형을 맞춰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팔색조처럼 바뀌느냐가 중요하다. 역시 체력+스피드+전술이해력을 갖춘 선수가 절실한 셈이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선수들의 포지션을 자주 바꿔보는 것도 그 선수의 전술 소화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4-4-2는 기본 시스템일 따름이다. 고정된 것이 아니다. 왜 한국 축구팬이나 언론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를 일약 3위에 올려놓은 미로슬라프 블라제비치 감독(현 이란 감독)도 “현대축구에 4-4-2다 3-5-2다 하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수 간격을 30m로 유지하며 필드플레이어 전원이 톱니바퀴 돌아가듯 자유자재로 포지션을 소화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4-4-2는 전투대형의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4-4-2의 ‘자유정신’에 배치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그네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배를 잊듯이 4-4-2를 알고 나면 4-4-2를 잊어야 한다. 물처럼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어야 한다.
병력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다른 전투장면을 통해 알아보자. 이번 전투는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군에게 처절하게 패배했던 전투다. 왜 패했을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서 그 유명한 ‘자마전투’를 발췌, 재구성한다.
한니발의 기병도 패했다
기원전 202년 가을. 한니발의 나이 마흔다섯. 스물아홉 살 때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진격한 한니발은 그로부터 16년 동안 전투마다 승승장구하며 이탈리아 반도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적의 심장인 로마까지는 아직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마에는 한니발 못지않게 뛰어난 33세의 젊은 스키피오가 버티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칸나에전투에서 한니발에게 대패해 간신히 도망갔던 전력이 있다. 그러나 로마군은 달라져 있었다. 그 동안 한니발에게 수없이 깨지면서 ‘한니발의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적진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전술’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로마 주력군인 ‘중무장 보병 중심의 전술’도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장소는 북아프리카의 자마.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6000명에 기병 4000명. 그리고 코끼리 80마리. 그 누구보다 기병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한니발이지만 그가 끌어모을 수 있는 기병은 4000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보병 3만4000명에 기병 6000명. 총전력으로는 한니발이 우세하지만 기병만 보면 로마가 우세했다.
보병 대 기병의 비율로 봐도 한니발군이 11 대 1인 데 비해 로마군은 6 대 1. 기병이 부족한 한니발은 장기인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맨 앞에 코끼리 80마리를 배치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가장 전력이 약한 혼성용병 1만2000명, 바로 뒤에는 조금 강한 용병 1만9000명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 옆에 기병 2000명씩을 각각 배치했다. 그리고 후방 200m 떨어진 곳에 자신의 정예병력 1만5000명을 대기시켰다.
한니발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간단히 헤아려낸다. 즉 80마리의 코끼리를 로마군 중앙으로 돌진시켜 적진 보병대를 혼란에 빠뜨린 다음 2차 3차 용병을 투입한다는 것. 이 상황에서 양측 병력 수는 한니발 용병 3만1000명에 로마군 3만4000명. 비록 로마군이 우세한 전투가 진행되더라도 로마의 주력 중무장 보병은 적잖이 지칠 것이고 이때 한니발은 후방 200m 떨어진 곳에 대기하던 정예군 1만5000명을 전격 투입해 전투를 끝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적보다 숫자가 부족한 기병은 어떻게 운용하려 했을까. 한니발은 평소 기병을 활용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이날만은 로마 기병에 비해 숫자가 부족한 상황을 감안해 나아가 싸우기보다는 아군의 보병 옆에 바짝 붙어 버텨주기만을 바랐다. 결국 한니발은 용병을 미끼로 쓰고 기병은 현상유지를 해준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정예 보병으로 승리하겠다는 고육책을 쓴 것이다.
축구로 이야기하자면 한니발은 발빠른 양 날개를 접고 최종 수비진으로 적의 최전방을 기습 공격하겠다는 대담한 작전을 짠 것. 오늘날의 역사가들도 기병이 약한 한니발로서는 도박을 할 수밖에 없는 최선의 작전이었다고 평가한다.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는 어떤 전술을 썼을까. 물론 예전처럼 중앙에 소대(60∼120명)별로 이뤄진 중무장 보병을 3열종대로 배치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라진 게 있었다. 중무장 보병의 소대별 간격을 예전과 달리 밭고랑처럼 널찍하게 벌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평소 유격대로 사용하던 경무장 보병을 소대를 구성해 일사불란하게 나눠 메웠다. 먼 곳에서 보면 로마군 진영은 평소처럼 ‘촘촘한 일자형의 직사각형’처럼 보였다. 스키피오는 양쪽에 수적으로 우세한 기병 6000명을 반으로 나눠 배치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한니발 코끼리군의 진격과 동시에 로마군 기병들이 돌격했다. 먼저 코끼리군이 로마군에 다가오자 갑자기 로마군 사이사이에 코끼리가 지나갈수 있는 널찍한 길이 생겼다. 로마의 경무장 보병들이 갑자기 썰물처럼 중무장 보병 틈새로 들어가 버린 것. 코끼리는 전차와 달리 일단 돌진하기 시작하면 도중에 멈추기 어렵다. 한니발의 작전은 여기서부터 스키피오에게 완전히 허를 찔렸다.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는 로마군을 한참 지나 간신히 멈췄지만, 그때는 이미 로마군 경무장 보병들이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투창을 던져오고 있었다.
이어 중앙에서는 로마군 2만8000명과 한니발의 용병 3만1000명이 맞붙었다. 한니발군이 숫자는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용병에 불과했다. 역시 전투력은 로마군이 우세했다. 점차 한니발군이 밀렸다. 그리고 그때쯤 한니발의 보병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양쪽 날개의 기병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기병들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한니발군의 양옆구리가 완전히 비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프랑스월드컵 한국-네덜란드전에서 유상철-최성용의 양 윙백이 네덜란드의 양날개에 묶여 수비만 했던 것과 흡사하다.
이때 스키피오는 로마군 중무장 보병에게 정면과 적의 양옆구리 세 방면에서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한니발의 용병 3만1000명은 거의 죽거나 도망쳤다.
물론 아직 한니발의 정예군 1만5000여명이 남아 있다. 후방 200m쯤 대기하고 있던 한니발군이 로마군을 향해 진격하자 갑자기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은 지금까지 종대로 싸우고 있던 로마군에게 활처럼 움푹 팬 형태로 전투대형을 바꾸라고 명령했다.
축구로 말하자면 4-4-2 대형을 4-2-3-1 아니면 4-1(앵커맨)-3-2 포메이션 쯤으로 바꾸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을 포위, 섬멸할 때 써먹은 작전과 흡사하다. 스키피오는 수적으로 우세한 보병과 기병을 활용해 날개가 꺾인 적을 세 방향에서 포위해 섬멸하려고 한 것이다. 결국 한니발의 1만5000정예군도 전멸했다. 한니발 자신도 기병 몇 기만 거느린 채 도망쳤다. 로마군 전사자는 1500명. 스키피오의 완벽한 승리였다.
결국 전투 중에 병력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졌다. 물론 로마군은 기동력의 우세라는 강점을 갖고 있었다.
공격만이 희망이다
한국축구는 그 동안 월드컵 본선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5회 진출에 14전 4무10패. 로마는 16년 동안 한니발에게 처절하게 짓밟히면서도 결국 그의 전술을 벤치마킹해 그를 이길 수 있었다.
한국축구는 1952년 스위스월드컵 출전 이래 무참히 깨지는 동안 무엇을 벤치마킹했을까.
알렉산드로스는 전쟁터에서 항상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적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전투는 격동의 상태다. 전쟁터에서의 모든 행위는 격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을 정도다.
전투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수동적으로 대처하면 죽어도 이길 수 없다. 지더라도 주도권을 잡으려고 발버둥쳐야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 공격적이어야 이길 수 있다. 그 동안 한국축구는 너무나 수세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