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격차사회의 슬픔

  • 조동필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2007-01-26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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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속담에 백성들의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민의 가난은 나라가 구해 주어야 한다.

    옛날에는 잘살고 못사는 것은 팔자소관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숙명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셈이다. 그러나 현대 국가는 국민들에게 일터를 만들어 주고 마음 편히 잘살게 해 줘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의 품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옛날에는 왕조만 유지되고 지배층만 잘살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이제는 다르다. 많은 사람이 모두 다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는 왕조의 나라도 아니고 소수 지배층의 나라도 아니다. 국민의 나라이고 모두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시인이 요즘 정치인들은 국가나 국민을 “자가용처럼 써먹는다”고 비꼬았다. 자기네들의 필요에 따라 국가를 들먹이고 자기네들에게 도움이 될 때마다 국민을 들먹인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생각할 때에는 불쾌한 일이다.

    지난 12월초에 들어온 외신 기사를 보면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다. ‘한국은 아시아 위기 이후 경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있으나 빈곤 문제는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세계은행이 ‘2000년의 세계경제와 개발도상국의 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97년에 9%에 그쳤던 도시 빈민인구가 98년에는 그 배가 넘는 19%로 급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빈민인구란 하루 소득이 4달러가 안 되는 사람들이다. 또한 빈국 부국의 격차도 갈수록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역시 세계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아시아의 빈곤층은 점점 늘어만 간다는 것이다. 하루에 1달러 수입이 안 되는 빈곤층이 93년엔 13억이었는데 99년엔 15억이 예상되고 2015년에는 18억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한다면 지난번 오클랜드나 마닐라 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역내 빈곤 문제를 논의하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자체의 논리대로 진행한다면 ‘양극 현상의 역진행’은 뻔한 일이다. 풀어서 말한다면 부유와 빈곤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마련이다.



    관계당국의 말을 빌린다면 “불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커졌다가 경기가 회복되면서 해소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산층 비중도 97년의 68.5%에서 99년(1∼9월)에는 64.7%로 낮아지기는 했지만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당국의 말대로 그렇게 돼간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지 않고 양극현상이 역진행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경제가 IMF체제로 들어간 후 신부유층이 나타났다고 한다. 지난 12월7일자 일간지의 보도를 보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주가 차별화로 인해 개인투자자들이 무너지고 있다. 시장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대부분의 개인 투자자들은 재산 손실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제목이 눈을 끄는 것은 주가 양극화에 ‘개인은 왕따’라는 글자다. 또다른 일간지의 제목은 ‘주가가 1000포인트를 기웃거리지만 정보통신주만 강세이고 일반인이 선호하는 대중주는 대폭락’이라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이제까지 수수료로 10조원을 벌었다니 대단한 일이다. 5조원을 끌고 들어온 외국 투자자와 기관투자가 그리고 일부 투자자들만 돈벌이를 했다면 일반 사람들이 허탈감을 느낄 것은 뻔한 일이다.

    어느 증권사가 발표한 12월 결산상장법인들의 추정이익을 보면 지난해는 5조9000억원의 적자를 냈지만 99년엔 12조8000억원의 순이익을 올릴 것이라 한다. 서민들이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 여러 면에 반영돼 여러 가지 작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돈을 잘 버는 사람들 그리고 순이익을 많이 낸 기업들은 저 잘난 맛에 자기도취(Euphoria)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의 송년회는 흥청거리고 불우이웃을 돕는 성금은 썰렁한 모양이다. 어느 기업체는 직원 10명의 회식비에 1000만원을 지급했다고 한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들인 돈을 세금으로 낼 바에야 쓰고 본다는 것이란다. 어떻게 보면 천민자본주의의 사생아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졸부들의 소비양태는 황홀하다. 연말연시를 앞두고 특급호텔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고 한다. 또한 국내선 항공권도 거의 예약이 끝났다니 대단하다. 백화점은 문전성시고 매상액은 사상 초유라고 하니 가관이다.

    고급주택이나 대형차는 불티가 날 정도로 잘 팔리고 백화점에서도 100만원짜리 아이들 장난감이나 60만원짜리 화장품 같은 것은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시계도 400만~500만원짜리가 잘 팔리니 희한한 일이다. 이렇게 팔리니 하루에 1조원의 매상을 올리는 점포가 생기게 된다. 아파트도 점점 고급화해서 15억원이나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우리 사회는 지상 낙원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의 발밑은 그렇지 않으니 야단이다. 서민들이 찾는 시장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다. 농민들도 힘이 빠져 있다. 마늘 고추 깨 미꾸라지 뱀장어 개고기까지 외국에서 들어오고 심지어 배추까지 들어오니 농민들이 힘이 날 이유가 없다. 지난번 시애틀에서 열린 WTO의 뉴라운드 문제가 결렬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약소 농업국의 몸부림이다.

    정부 부채가 직접채무와 보증채무 합쳐 200조원을 넘고 금융권 부실채권이 136조원이나 넘는데, 그리고 또 가게 부문의 부채가 235조원이나 되는데 사회는 허세와 낭비에 들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행을 살리고 기업을 살린다고 해서 공적자금을 64조원이나 주입했다. 그러나 아직도 25조원을 더 주입해야 한다고 하니 걱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부담으로 귀착될 것인지 궁금한 일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는 이런 말을 했다. “허영심을 자제할 줄 모르는 자유방임에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작용하지 않는다.” 또 자본주의 경제학의 중시조격인 케인스는 이런 말을 했다. “모럴이 없는 이익 우선의 자본주의는 국민경제를 위태롭게 한다.”

    우리는 이제 머리를 식히고 이 두 석학의 말을 깊이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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