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나아지는 게 순리다. 그러나 설령 발전이 있다 해도 그 내용과 질을 살펴야 한다. 우선 효율적인 측면에서, 투자에 정비례해서 좋아지느냐 아니면 기하급수적으로 좋아지느냐 또는 정비례에도 못 미치느냐 아니면 되레 반비례로 나빠지느냐 등을 살펴야 할 것이고, 또 그것의 부작용 내지 역효과는 무엇인지도 따져야 한다.
말에는 모국어와 외국어가 있다. 물론 국가 이하의 개념을 염두에 둘 때 모어와 비모어라는 식의 대비도 가능하고, 꼭 그렇게 구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편의상 모국어와 외국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어쨌든 대부분 인간은 하나의 모국어를 갖는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렇다. 최근 들어 다소 변하고 있긴 하지만, 단일 민족의 비율이 세계 최고이니 언어 또한 단일할 것은 당연지사다.
모국어와 외국어의 습득 과정에는 차이가 있다. 태어나자마자 듣기 시작해 수없는 반복을 통해 각인되고 저절로 말의 법칙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 모국어라면 인위적으로 법칙을 따져가며 암기하여 습득하는 것은 외국어다. 물론 처음부터 두 언어에 노출되거나 비교적 어린 시절 외국어 환경에서 자란 경우 이중언어자가 되기도 한다. 아마 교포 2세나 1.5세들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말은 의사소통의 도구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말은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다. 제때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지능 발달에 심각한 문제를 겪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말로 생각하고 말로 개념을 정립한다는 원리 때문에 말은 곧 문화가 되고 정체성이 된다. 막연한 어휘로 막연한 개념을 표현하며 막연한 상태로 대충대충 소통하는 문화와 상호 정확한 개념을 정확한 어휘로 표현하는 문화는 질적으로 차이가 크다.
외래어는 분명 국어로 편입된 말이다. 그것이 엄정한 검증을 거쳤건 많은 사람이 쓰다 자연스럽게 정착됐건 대부분 분명한 의미를 공유하는 말이다. 그러나 외국어는 다르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외국어 단어의 경우 그 의미를 분명히 아는 사람도 있고 어렴풋이 알거나 틀리게 아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이럴 때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즉 한쪽이 전혀 반대의 뜻으로 받아들이고도 제대로 알아들은 줄 알고 머리를 끄덕여도, 상대방은 그것을 믿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부조리극은 바로 그런 상황을 연극화한 것이다.
물론 부조리극은 같은 나라 말 사이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소통 불능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 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 간에도 완벽한 소통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적 부조리를 지적하기 위한, 인간들의 자기 성찰을 촉구하기 위한 철학적 견지의 관찰이다. 더욱이 통상 모국어끼리만의 소통이 모국어와 외국어가 섞인 상태의 소통에 비해 그 명확도가 높을 것은 당연하다.
꽤 오래전이지만 10여 년 동안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대학원 학비를 벌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수입도 괜찮고 재미도 있어서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까지 집필했다. 그런데 이 일을 그만둘 즈음인 1990년대 초 두세 해 동안은 한국 배우들에게 화술도 가르쳤다. 정확하게는 화술 클리닉이라 하는데 어쨌든 낮에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셈이다.
언뜻 별개의 일로 보이는 이 둘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다. 사실 현재 연극학과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주 과목이 화술이 된 것도 이 공통점을 찾아낸 데 기인한다. 무엇보다도 외국인이나 배우 모두 말을 의식하며 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반대는 무의식이다. 즉 모국어는 수없는 반복에 의해 각인된, 거의 본능화한 말이기에 직관적 내지는 무의식적인 구사가 가능하지만, 외국인들과 우리 배우들은 말의 상당 부분을 의식해가며 발음과 억양과 휴지(休止)를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어릴 때에는 말을 직관으로 배운다. 그러나 성장한 후에는 의식하며 배운다. 즉 문법을 기억하고 단어를 암기하며 배운다. 한국에서 태어난 다섯 살짜리 외국 아이가 한국에서 10년간 생활한 그 부모보다 한국어를 잘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부모가 못 알아들은 질문에 아이가 직접 대답하거나 부모에게 설명해주는 정경은 참 재미있다. 이는 당연하다. 부모에겐 성장 후 인식하며 습득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이지만 아이에겐 직관으로 습득한 모어로서의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반복컨대 직관으로 배운다는 것은 수없는 반복에 의한 각인이요, 따라서 거의 본능과 같이 배어든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성장 후 언어 습득에는 한계가 있어 어릴 때부터 영어를 교육하면 그런 직관에 의한 습득 상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수없는 반복이란 지금 나오는 영어 몰입교육 정도가 아니라 생활환경 전체가 그렇게 돼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빌리지처럼 환경 전체를 외국어를 구사하게끔 꾸미면 일시적이나마 그 조건을 채울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 그럴 수는 없다. 거기에는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 그중 가장 큰 것으로 국어교육을 들 수 있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도 있지만 말로 생각과 개념을 정립해야 하는 시기에 두 가지 언어가 혼용되는 데서 오는 혼란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쨌든 국어교육이 제대로 안 돼 발생하는 문제와 손실은 영어교육을 잘해서 얻는 이익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전 국민을 이중언어자로 만들 것이 아니라면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발상은 지워야 한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국어자의 처지에서 보면 한심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한국에 와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장 심하게는 한국에서 서너 달 생활한 외국인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농담 한마디만 해도 모두 감탄한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친절의 일종이다. 혹시 영어를 잘한다는 자신도 그런 경우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외국인들을 가르치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생활에 별 어려움을 못 느끼는 상태는 서너 달이면 충분했고 1년 정도면 웬만한 농담도 다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도 우리 소설을 읽거나 연극을 관람하면 어려움을 느꼈다. 사전을 찾아 새까맣게 뜻을 적어놓은 소설책과, 조금 심각한 연극은 50% 이상 이해 못 한다는 고백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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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이 영어를 잘하는 것이 국익과 대단히 큰 관계가 있다는 건 커다란 착각이라는 지적을 하고 싶다. 사실 외교만 해도 모국어 수준의 전문 통역자가 있는 것이 유리하지, 어설픈 상태로 직접 협상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우스갯소리지만 한국어를 가르칠 때 마음만 먹으면 궤변으로라도 외국인 학생들을 능히 이길 수 있었다.
교육정책이건 언어정책이건 그것이 국가 규모의 일이라면 어설픈 선입관이나 비과학적 진단으로 결정될 수 없다. 다시 한 번 대입제도로부터 비롯된 비인간적인 우리 교육의 현실과 그 안에서 국어와 외국어를 망라한 언어 교육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내는 작업부터 시작할 것을 권한다.